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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가족 나들이, ‘놀이터 천국’ 밀양으로 가 볼까!
여행을 하다 보면 ‘여기에 이런 게 있었어?’라며 으레 눈이 휘둥그레지는 곳이 있다. 경남 밀양시가 딱 그런 곳이다. 밀양의 명소 몇 곳을 찾았다가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대형 놀이터를 발견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역 대표 관광지에 놀이터가 있다니. 그것도 규모만 큰 게 아니라 시설 수준까지 높은 놀이터가 세 곳이나…. 아이를 둔 가족 단위 여행객이나 나들이객들에게 알음알음으로 알려지며 지역 명소가 된 놀이터 세 곳은 ‘밀양의 3대 놀이터’로 불린다. 아이들의 놀이와 체험만 할 수 있다면 아쉬울 수 있다. 놀이터 옆에는 밀양의 유명 유적지와 공원, 사찰이 있다. 놀이터를 찾았다가 역사 공부와 사찰 탐방을 하고, 산책과 물놀이까지 겸할 수 있어 밀양의 3대 놀이터가 더 유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도록 가족들과 넉넉한 정을 나눈 뒤 밀양으로 가족 여행이나 나들이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사명대사 유적지와 연꽃타워 놀이터
연꽃타워 놀이터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사명대사 유적지 안에 있다. 밀양을 얘기할 때 사명대사를 빼놓을 수 없다. 밀양 출신의 승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 작전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고, 국방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부국강병에 힘썼던 호국 불교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연꽃타워 놀이터 역시 그런 사명대사의 호국 정신과 애민 애족의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사명대사 유적지 입구로 들어가면 왼쪽에 연분홍 색깔의 연꽃 모양 원형 조합놀이대가 나타난다. 4층짜리 이 타워형 놀이 기구는 높이가 15m나 돼 가까이에서 보면 웅장하다. 마치 우주로 날아갈 준비를 한 로켓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못 아래에서 솟아난 연꽃처럼 주변 바닥이 움푹 패어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얽히고설킨 로프를 타고 층을 오르내리거나, 층마다 놓인 구불구불한 그물을 밟고 이동하며 놀 수도 있다. 그물 사다리와 11.7m, 8.7m 높이의 미끄럼틀도 설치돼 있어 스릴도 만끽할 수 있다.
놀이터 주변에는 정자와 벤치가 곳곳에 설치돼 있어 쉼도 배려했다. 사명대사 유적지 왼쪽으로는 중촌소류지라는 못이 있고, 못 주변으로 나무 덱길이 설치돼 있어 산책도 가능하다. 일부 나무 덱길 구간은 대나무 숲이 감싸고 있는데, ‘사명대사 수행의 길’이라 불린다. 사명대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명상을 할 수 있는 대나무 숲길이다. 중촌소류지 전망 덱에서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고요하고 아늑한 풍경 속의 주인공이 돼 사색에 잠겨 봐도 좋다. 전망 덱에는 기념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사명대사 조형물 포토존도 있다.
사명대사 기념관과 추모광장을 함께 둘러봐도 좋다. 사명대사 기념관(무료)에서는 그가 남긴 장삼(스님이 평소에 입는 웃옷)과 친필 글씨, 서책 등 유물과 사명대사의 어린 시절, 출가 과정, 승려 의병장으로서 업적, 뛰어난 외교 능력 등 그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추모광장과 상징광장에는 사명대사 동상과 일대기를 그린 부조벽화가 있다. 사명대사 유적지 입구로 다시 돌아 나오면 바로 옆에 사명대사 생가터와 사당도 있으니 들러보자. 풍전등화였던 나라를 구할 생각에만 몰두했던 사명대사의 절절한 마음이 잠시나마 전해온다.
■밀양아리랑대공원 어린이놀이터
밀양아리랑대공원 어린이놀이터는 밀양시 교동 밀양아리랑대공원 내에 있는 어린이놀이터다. 밀양아리랑대공원은 밀양의 대표적인 도심 속 공원으로 남녀노소 찾기 좋은 곳이다. 밀양아리랑 아트센터와 광장, 연못, 어린이 놀이터, 산책로, 월남참전비 등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어린이놀이터는 공원 입구 있는 광장을 지나면 나온다. 어린이놀이터에는 도토리타워라 불리는 대형 조합놀이대를 중심으로 원형 그네, 회전 놀이 기구, 코끼리 미끄럼틀 등 다양한 놀이 기구가 있다. 그물 사다리를 밟고 도토리타워 꼭대기로 올라가 그물을 밟고 이동하며 대형 미끄럼틀을 타고 다시 내려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으로 가득하다. 바로 옆에는 유아용 놀이 기구들이 모여 있는 유아 놀이터(만 2~5세)와 통나무와 모래 등 자연 재료로 만들어진 생태 놀이터도 있다. 아이들의 나이대나 취향도 배려했다. 특히 잔디로 된 사면에 줄을 잡고 올라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사면 미끄럼틀은 아이들에게 인기다.
밀양아리랑대공원은 커다란 연못인 교동구못을 가로지르는 수변 덱은 물론이고, 못 둘레에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산책을 하기에 그만인 곳이다. 교동구못은 운치가 있어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교동구못 옆 경사진 언덕에 널찍이 자리한 ‘쓰리랑 숲’도 빼놓을 수 없는 산책 코스다. 숲의 이름도 재밌지만, 숲의 조성 경위도 흥미롭다. ‘출향인의 숲: 고향이 그리운 출향인의 아리랑 숲’이라는 부제가 달린 쓰리랑 숲은 2017년 조성을 시작한 곳으로, 밀양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출향인들이 기증한 나무로 만든 정원이다. 매화나무와 층층나무, 잣나무, 편백나무, 산수유, 산사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정원을 싱그러운 녹음과 향기로 가득 메운다. 나무마다 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팻말에 담아 쓰리랑 숲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다. 숲 사이사이로 난 산책로도 걷기 좋다. 경사가 심하지 않아 아이들이나 고령자도 걷기에 큰 무리가 없다.
밀양아리랑대공원 주변에는 밀양시립박물관과 밀양아리랑아트센터, 밀양아리랑우주천문대, 국립밀양기상과학관 등 밀양을 대표하는 전시·공연·교육 공간이 몰려 있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 배울 거리가 다양한 만큼 함께 찾아본다면 하루가 금방 간다.
■표충사와 우리아이마음숲놀이터
표충사 계곡에 있어 ‘표충사 계곡 놀이터’로 불리기도 하는 우리아이마음숲놀이터는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 있다. 밀양 3대 놀이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더블돔 플레이, 스파이더 네트 타워, 스카이워크-우디, 나무집 놀이터, 개미 타워, 무지개 그네 등 6개 대형 놀이 기구가 있다. 더블돔 플레이와 스파이더 네트 타워는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그물망을 밟거나 몸을 비집고 들어가 정상까지 올라간 뒤 높고 기다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놀이 기구로 아이들에게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스카이워크-우디는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 긴 그물망 다리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기구다. 유아들은 나무집 놀이터에서 놀면 된다.
밀양은 가을에도 한낮엔 더위가 여전하다. 우리아이마음숲놀이터 곳곳엔 쿨링 포그가 설치돼 있어 한낮 더위와 놀이로 흘린 땀을 시원하게 식혀 준다. 놀이터 옆 계곡에 흐르는 청량한 물소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졸졸 흐른다. 2019년 문을 연 우리아이마음숲놀이터는 표충사 관광지와 연계한 자연 친화적 놀이터로 이듬해 행정안전부가 인증한 전국 우수 놀이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놀이터 주변에는 맑은 계곡과 시전마을 산책로, 표충사가 있어 함께 여행하기 좋다. 시전마을 산책로는 놀이터 도로 건너편에 입구가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로 표충사까지 2km 정도 이어진다. 길을 걷다 보면, 상사화 꽃길과 표충사에서 입적하신 스님의 장례를 치르는 표충사 다비장,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닮은 부부나무 등과 만날 수 있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주변의 빼어난 경치에 지루할 틈이 없다.
재약산 기슭에 있는 표충사는 놀이터에서 자동차로 2~3분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표충사는 통도사에 딸린 절로, 사명대사의 충훈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이 있는 절이다. 고즈넉한 사찰의 풍경에 가을 내음이 물씬 풍기고, 사찰 경내 뒤편으로는 영남 알프스 8봉에 속하는 웅장하고 험준한 재약산과 천황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수려한 산색을 뽐낸다. 가을 표충사는 단풍이 아름다운 단풍 명소다.
2023-09-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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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 갈맷길]⑧ 청량한 산길에서 치유를 선물받다
부산에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욜로 갈맷길’이다. 기존 갈맷길(9개 코스 23개 구간 278.8km) 중에 ‘부산 사람이라면, 부산에 오면 꼭 한 번 걸어 봐야 할 길’ 콘셉트로 10개 코스(총 100km)를 추리고 코스별 테마도 입혔다. 갈맷길의 축소판이다. 이번엔 8코스 ‘낙동정맥 끝자락 순례’를 소개한다. 8코스는 욜로 갈맷길 10개 코스 중 유일하게 등산길로만 구성된 코스다. 낙동정맥(강원 태백시 구봉산에서 부산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의 끝자락에 솟구친 구덕산, 그리고 구덕산과 마주하며 억새군락지와 철쭉 단지로 봄가을 특히 더 아름다움을 뽐내는 부산의 명산 승학산의 등산로를 걷는 길이다. 산길이지만 오르막이 비교적 완만한 데다 오르막보다는 내리막 구간이 길고 전체적으로 등산로도 잘 정비돼 있어 그리 어렵지 않은 산행이다. 걷다가 이따금씩 만나는 전망대와 쉼터에서 조망하는 풍경은 무미건조한 일상의 힐링 포인트다.
■완만한 오르막 임도 ‘시작이 반’
욜로 갈맷길 8코스는 서구 서대신동 구덕문화공원(꽃마을)에서 사하구 당리동 제석골 동원베네스트 아파트에 이르는 6.7km 구간이다. 구덕문화공원까지는 부산도시철도 1호선 서대신역에서 내려 4번 출구 앞에서 마을버스(서구 1번)를 타면 된다. 꽃마을에 도착하면 구덕문화공원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가 있고, 그 아래에는 욜로 갈맷길 8코스의 주요 경로를 표시한 안내판이 8코스의 시작을 알린다. 경사진 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구덕문화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구덕문화공원은 구덕산(565m) 자락에 자리한 공원이다. 전통문화체험관, 교육역사관, 민속생활관, 목석원예관, 숲속놀이터, 유아 숲체험원 등 전시관과 놀이·체험 공간을 비롯해 폭포, 연못, 산책길 등을 갖춘 자연생태문화공간이다. 여유가 있다면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한번 둘러봐도 좋다. 월요일은 휴관이니 참고하자. 공원 왼쪽으로는 ‘편백숲 명상의 길’이 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편백숲이다. 가슴을 열고 피톤치드 향을 한껏 들이마시며 산림욕을 하고 명상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구덕문화공원의 맨 위쪽에 있는 구덕산 유아숲 체험원에 다다르면, 2시 방향으로 폭이 꽤 넒은 임도가 보인다. 구덕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산지 관리와 산불 예방을 위해 만든 도로(일반 차량 출입 금지)이자, 등산객들의 등산로이기도 하다. 임도 왼쪽으로 쭉 이어진 시멘트 벽면은 이끼가 가득 꼈는데, 온통 재밌는 낙서들이다.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은 산길 치고는 많이 가파른 편은 아니다. 구덕산 중턱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저 멀리 사상공단과 낙동강, 낙동강 너머 강서구 일대가 보인다. 오르막을 계속 걷다 숨이 헉헉 찰 때쯤이면 재넘이마루터에 닿는다. 재넘이마루터에서는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깔딱고개를 거쳐 승학산 정상으로 가는 오르막길, 구덕산 기상레이더 관측소와 구덕산 정상으로 가는 오르막길, 승학문화마루터로 가는 내리막길이다. 이 중 유일한 내리막길인 승학문화마루로 가야 한다. 바리케이드가 턱 하니 길을 막고 있어 있는데,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한 용도이니 바리케이드를 둘러 걸어 내려가면 된다. 깔딱고개로 가도 다음 경유지인 승학마루전망대까지 닿긴 한다. 깔딱고개는 숨이 매우 찬다는 뜻의 ‘깔딱’이 붙은 가파른 고갯길이다. 구간이 길진 않지만 숨이 차는 길이다. 힘들이지 않고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욜로 갈맷길의 취지에 따라 깔딱고개 대신 내리막길로 걷는다. 구덕산 기상레이더 관측소와 구덕산 정상도 재넘이마루터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여유가 있으면 들러 봐도 좋다. 걸어 왔던 오르막 임도를 따라 계속 걸으면 두 곳에 차례로 이른다.
■봄 분홍 철쭉, 가을 은빛 억새 ‘장관’
재넘이마루터부터는 대부분 내리막길이다. 8코스는 서구 구덕산과 사하구 승학산, 두 산의 등성이를 타고 걷는 길이다. 내리막 임도를 따라가다 보면 서구와 사하구 경계를 지나 어느새 승학산 능선을 타고 있다. 내리막을 걷다 보면 나무 덱으로 된 아담한 낙조전망쉼터, 너럭바위전망대와 잇따라 만난다. 잠시 쉬어 가도 좋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겨도 좋다. 너럭바위전망대에 서면 구덕산과 시약산, 승학산 산줄기가 마치 파도처럼 차례로 밀려오는 듯하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승학산 정상 부근의 사면에 펼쳐진 억새평원이 보인다.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파도처럼 일렁일 곳이다.
승학문화마루에 다다른다. 승학문화마루에도 여러 갈래로 길이 나뉜다. ‘승학산 치유의 숲길’을 걸으며 구덕터널과 학장중학교 쪽으로 가는 길이 있고, 승학산 정상으로 가는 길, 제석골 쉼터로 가는 길, 억새밭·철쭉단지로 가는 길 등 대여섯 갈래나 된다. 헷갈릴 수 있지만 억새밭·철쭉단지 쪽으로 발길을 잡으면 된다. 이정표에는 ‘욜로 갈맷길 8코스’라는 친절한 설명도 붙어 있다. 승학문화마루를 지나고 얼마 안 돼 두 갈랫길이 나오는데, 보행매트가 깔린 오르막으로 걷는다. ‘욜로 갈맷길’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있으니 잘 살펴보고 걸음을 옮기면 된다. 폭신폭신한 보행 매트를 밟으며 승학산 철쭉단지와 억새군락지, 억새노을 전망대를 거친다. 승학산은 봄에는 분홍 철쭉이, 가을에는 은빛 억새군락이 장관을 연출한다. 철쭉과 억새가 만개하는 시기에 걷는다면 더 좋은 길이다. 억새군락은 완만한 능선 사면에 넓게 펼쳐져 있다. 울산 영남알프스 간월재, 경남 합천군 황매산, 강원 정선군 민둥산 등과 함께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억새 명소로 꼽힌다. 철쭉 단지는 2020년 조성됐다. 사하구청은 억새군락지 중 억새가 잘 자리지 못하는 환경이 된 곳에 철쭉을 심었다. 그렇게 자리 잡은 철쭉은 억새와 함께 승학산을 찾는 이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선물한다. 철쭉 단지와 억새군락지 사이로 난 등산로를 따라 억새노을전망대에 오르면 눈앞이 확 트인다. 발밑으로는 학이 날아오르는 듯 고운 능선의 승학산 자락과 억새평원이 내려다보인다. 시선을 올리면 산봉우리 사이사이로 높이 솟아오른 건물들, 더 멀리에는 감천항과 긴 물줄기를 굽이쳐 내려온 낙동강, 낙동강과 만나는 남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삼나무 숲길에선 피톤치드 ‘뿜뿜’
억새노을전망대에서 철쭉 단지와 억새군락지를 거쳐 다시 임도로 접어들면 지그재그 숲길이 이어진다.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하늘을 찌를 듯 위로 쭉 뻗은 삼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길 구간에 들어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폐부 깊숙이 청량함이 스며든다. 삼나무 숲길 안쪽에는 산책로와 너른 덱 쉼터도 조성돼 있다. 삼나무는 편백나무와 꼭 닮았는데, 뿜어내는 피톤치드도 편백나무 못지 않다. 삼나무 숲길은 8코스의 멋진 피날레를 장식해 준다.
구불구불 길을 걸어 내려오다 길 왼쪽으로 부산일과학고 건물이 보이고, 학교 인근 넓은 공터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전국 최초의 도심 숲속 치유의 숲인 ‘국립 부산 승학산 치유의 숲’으로, 지난해 7월 착공해 내년 초 개장할 예정이다. 전국에 13곳의 국립 치유의 숲이 있지만, 대도시권 도심에 위치한 치유의 숲은 처음이라고 한다. 산림치유센터, 숲속 산책길, 야외 족욕장, 유아숲놀이터, 숲속 쉼터 등이 들어서고, 승학산의 자랑인 삼나무와 억새군락 등의 산림 자원을 활용한 산림 치유 프로그램도 운영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치유의 숲 조성 부지를 지나면 임도 한쪽 옆에 나무 덱길이 이어진다. 덱길 아래엔 계곡이 흐르고 나무 다리가 놓여 있다. 제석골 산림공원이다. 이팝나무와 수국, 산수유나무, 대나무 등이 식재돼 있어 다양한 식물을 볼 수 있고, 계곡을 따라 산책로와 쉼터도 조성돼 있다. 잠시 내려가 물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덱길로 다시 돌아와 걸어 내려가면 8코스의 종착점인 동원베네스트 아파트에 도착한다. 동원베네스트 아파트 앞에서 마을버스(사하구 2번)를 타면 부산도시철도 1호선 당리역이나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갈 수 있다. 걷기 앱으로 측정한 8코스 완보 시간은 2시간 31분, 걸음 수는 1만 4037걸음, 거리는 9.55km였다.
2023-07-26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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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만 장 '푸른 기와' 아래서 무얼 섬겼을까…개방 1년 ‘청와대 탐방’
청와대가 국민 품으로 돌아온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5월 10일 전면 개방된 이래 지난달까지 360만 명이 발걸음을 했다. 70여 년간 대통령 집무·생활공간이었던 청와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와 조선시대까지 다다른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이란 상징은 내려놓았지만, ‘푸른 기와’에는 우리나라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서렸다.
■ 반짝이는 ‘청기와’
청와대를 관람하려면 먼저 홈페이지(‘청와대, 국민 품으로’)에서 날짜와 시간대를 예약하는 게 좋다. 입구는 ‘정문’과 춘추문을 통해 들어가는 헬기장 옆 ‘37문’ 두 곳이다. 청와대의 중심인 ‘본관’부터 만나고 싶다면 정문을 택하는 게 낫다. 평소 대통령과 각국 정상만 이용할 수 있었던 정문은 들어가는 느낌부터 남다르다. 입구에서 모바일 예약 바코드를 찍고 입장하면, 종합안내소 너머로 푸른 빛깔의 웅장한 팔작지붕이 관람객을 맞는다.
지붕은 작은 햇빛에도 반짝인다. 한 장 한 장 유약을 발라 도자기처럼 구워 낸 기와 덕분이다. 100년을 견딘다는 청기와는 본관 지붕에만 15만여 장이 얹혔다. 푸른 기와에 담긴 정성은 이곳에서 이뤄진 국정의 무게감을 짐작게 한다. 본관 앞 게양대는 2개인데, 하나에만 태극기가 나부낀다. 나머지 하나엔 대통령 존재를 알리는 ‘푸른 봉황기’가 걸렸지만, 대통령실 이전으로 함께 옮겨졌다.
본관 입구로 들어서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화려한 레드카펫이 펼쳐진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이 방문객과 함께 종종 기념사진을 촬영한 장소여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계단이다.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접견실이 온전히 남아 있다.
본관의 서쪽 별채 ‘세종실’과 동쪽 ‘인왕실’에선 청와대 개방 1주년 기념전시(‘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가 한창이다. 청와대를 거쳐간 대통령 12명의 소품을 전시 중이다. 연탄난로·조깅화·원예가위 등 대통령마다 대표 물건이 흥미롭다. 대통령에 앞서 한 개인으로서 생활상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청와대 하면 누구나 본관을 먼저 떠올리지만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신축하기 전까진 인근 수궁터에 옛 본관이 자리했다. 과거 청와대 일대는 1865년 경복궁 중건과 함께 후원 역할을 하며 ‘경무대’라 불렸다. 일제는 1939년 경무대에 본관 건물을 짓고 조선총독 관사로 썼다. 광복 이후엔 3년 동안 미군정 사령관 관저였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
본관 신축으로 쓰임을 다한 옛 본관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1993년 철거됐다. 반세기 만에 사라진 경무대 건물 자리엔 당시 기와 장식물인 ‘절병통’만 덩그러니 남아 옛 위치를 전한다.
관저는 아쉽게도 내부를 둘러볼 수 없다. 창문을 통해 실내 모습이 조금 들여다 보이는 정도다. 대신 춘추관 2층 브리핑룸에 전시 중인 청와대 식기·가구를 보며, 관저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경무대’의 기억
청와대란 이름은 윤보선 대통령의 작품이다. 그는 1960년 4·19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일제와 자유당 독재의 잔재를 씻는다는 취지로 기존 경무대 명칭을 ‘푸른 기와집’이란 의미의 청와대로 바꿨다.
개명 이후 60여 년이 흐른 현재에도 청와대 경내엔 몇몇 유적이 남아 옛 경복궁 후원이자 경무대 시절 이야기를 전한다. 관저 인근 ‘침류각’은 1900년 전후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통가옥 양식의 누각이다.1989년 관저를 신축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의 침류각은 경복궁 후원에서 연회를 베푸는 용도였다.
‘오운정’은 침류각과 함께 서울시 유형문화재이자 비슷한 연대에 건립된 정자다. 관저 입구에서 뒷산 방향으로 가파른 산책로를 10분 정도 오르면 이름대로 ‘5색 구름’처럼 반가운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관저 신축으로 옮겨온 자리다. 침류각과 달리 오운정은 현판이 남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청와대 경내 문화재 3개 중 으뜸은 오운정에서 3분 거리인 ‘불상’(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다. 멀리 경주에 있던 석불이 어떻게 청와대 뒷산에 위치하게 됐을까. 뜻하지 않은 여정엔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서려 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한 사찰에 자리를 잡은 이 불상은 1913년께 서울 남산 왜성대 조선총독 관저로 옮겨오게 된다. 이후 1939년 경무대 총독 관저 시절 다시 이사를 한 뒤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에 마지막 터를 잡았다.
불상의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다.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계승해 얼굴과 몸, 의복과 손 모양까지 닮았다. 특히 청와대 불상은 고대 석불 가운데 드물게 외양이 온전한 형태로 보전돼, 2018년 보물로 승격됐다.
통일신라시대 왕족과 귀족,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 해방 이후엔 대한민국 대통령들까지. 속세와 상관없이 두루 섬김을 받아 온 불상의 세월은 어떠했을까. 1000년이 훌쩍 넘는 질곡의 시간을 묵묵히 품었다고 생각하니 불상의 자태가 더욱 자비로워 보인다.
■ 자연 속을 거닐며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청와대는 주변 자연도 매력적이다. 경내에는 3개 정원이 있는데 그중 ‘녹지원’은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꼽힌다. 120여 종의 나무와 함께 역대 대통령의 기념식수가 자란다. 녹지원 한가운데 버티고 선 ‘반송’은 청와대 내 천연기념물 노거수 6그루 중에서도 으뜸이다. 이름처럼 둥근소반을 닮은 모습은 웅장미와 단아미를 동시에 지녔다.
1968년 1000평 부지에 잔디를 심으면서 조성된 녹지원은 어린이날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국민들에게도 익숙하다. 김영삼·문재인 대통령 때는 인근 주민들을 초청해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녹지원에서 본관으로 걷다 보면 ‘소정원’을 만난다. 이름처럼 아기자기한데, 본관쪽 정원 입구에 돌로 세운 ‘불로문’이 있다. 문을 지나면 무병장수한다는 속설이 있어 관람객들에게 인기다. 2014년엔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2017년엔 김정숙 여사가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와 함께 불로문을 지나며 소정원을 거닐기도 했다.
경내 곳곳엔 작은 개울과 연못도 있다.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은 물고기의 몸짓마저 평화롭게 만든다. 드문드문 야생화를 구경하다 보면 의외의 장소에서 대통령 기념수를 만나는 재미도 있다.
여유가 있다면 청와대 뒤편 백악정과 청와대 전망대에 올라 볼 만하다. ‘북악산 한양도성 탐방로’ 구간 중 하나로, 지난해 청와대를 개방하면서 ‘청와대~북악산’ 구간도 함께 열렸다. 등산로 출입구 3곳 중 춘추관 쪽에서 출발해, 백악정을 지나 청와대 전망대를 찍고 반대편 칠궁 뒷길 쪽으로 내려오는 데 1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청와대 경계 성벽을 따라 이어진 등산로 곁에는 삼엄한 철조망과 함께 간간이 초소·진지도 눈에 띈다. 청와대가 최근까지 국가보안시설이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다.
‘청와대 전망대’에 오르면 가까이 본관 청기와 지붕부터 멀리 광화문광장과 남산, 관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궂은 날씨에도 왼쪽으로 롯데월드타워, 오른쪽에는 여의도 63빌딩까지 두루 내다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국민을 굽어살피기 알맞은 장소다. 74년 동안 청와대를 거쳐 간 대통령은 모두 12명. 이들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 무엇을 생각했을까.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2023-06-29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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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 갈맷길] ⑦ 다대포 선셋 피크닉-태양의 종점 향해 낙동강 하구를 걷다
부산에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바로 ‘욜로 갈맷길’이다. 기존 갈맷길(9개 코스 23개 구간 278.8km) 중에 ‘부산 사람이라면, 부산에 오면 꼭 한 번 걸어 봐야 할 길’ 콘셉트로 10개 코스(총 100km)를 추리고 코스별 테마도 입혔다. 갈맷길의 축소판이다. 이번엔 7코스 ‘다대포 선셋 피크닉’을 걸었다. 낙동강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를 걸으면, 매립 위기를 딛고 서부산을 대표하는 시민 친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다대포해변공원과 뭇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고우니생태길에 이른다. 낙동강 하구의 자연, 아름다운 풍광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드넓은 다대포해수욕장 백사장을 마주하면, 동부산 해수욕장에서 느낄 수 없었던 한갓짐과 색다른 매력에 빠져든다. 낙동강 하구와 다대포해수욕장에서 볼 수 있는 붉게 타오르는 낙조는 7코스의 절정이다.
■강변길 걷다 ‘부네치아’와 조우
욜로 갈맷길 7코스는 사하구 신평동교차로에서 다대포해수욕장까지 7km 구간이다. 낙동강 하구를 따라 평탄하게 뻗은 산책로를 걷는 길이어서 걷기에 부담 없는 코스다. 출발점인 신평동교차로 강변덱까지는 부산도시철도 1호선 신평역에서 내려 9번 출구로 나와 강변 쪽으로 6~7분 정도 걸으면 된다.
강변덱에서 강물이 바닷물을 만나러 가는 방향을 따라 걷는다. 제방 사면에 조성된 산책로는 다대포 방면으로 쭉 뻗어 있다. 깔끔하게 조성돼 걷기 좋다. 이 길은 ‘노을나루길’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다. 사상구 엄궁동에서 다대포해수욕장까지 12km의 산책로로, 해 질 무렵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어 붙은 이름이다. 산책로를 느긋하게 걷다 보면 을숙도대교의 웅장한 골격에 금세 다가선다. 을숙도대교 램프 아래 구간을 지나다 보면, 길(강변대로) 건너편에 작은 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조경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건널목을 건넌다. 을숙도대교 램프 구간 하부 일대에 조성된 ‘66호 광장’이라는 도시숲이다. 사하구청이 도심 속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조성했다. 공원 내에 산책로가 이어져 있고 정자도 보인다. 무궁화와 곰솔, 단풍나무, 이팝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왕벚나무, 가시나무 등이 무리 지어 자란다. 공원 가장자리에는 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들이 늘어서 있다. 공장 지대와 대로변의 삭막한 공간에 조성돼 우거진 녹음이 더욱 청초하게 느껴진다.
낙동강변 쪽으로 건널목을 다시 건너지 말고 그길로 쭉 걸어 내려간다. 강변환경공원 파크골프장을 지나면, 장림포구가 나온다. 장림포구는 ‘장림포구 명소화 사업’을 통해 관광 명소로 탈바꿈 중이다. 어항이 정비됐고, 해양보호구역 홍보관, 문화촌, 놀이촌, 맛술촌, 도시숲 등이 들어섰다. 물 위에 떠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배들과 예쁜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형형색색 점포들(한지·도기 공방, 드론 촬영, 카페 등)의 풍경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무라노섬과 닮았다고 해서 ‘부네치아’(부산의 베네치아)로 불린다. 문화촌 공간에는 물결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조각배 조형물 등이 반긴다. 한쪽에서는 공사가 진행 중인데, ‘레인보우 브릿지’라는 이름의 다리를 놓는 공사다. 장림포구는 U자 형태로,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포구 첫머리나 끝으로 가야 한다. 관광객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포구 가운데에 20m 높이의 아치형 보행교를 놓고 있다. 무지개 색상으로 꾸며지며, 야간에도 무지개 경관 조명을 밝힌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장림포구를 돌아 나오며 마지막 지점에 있는 부네치아 선셋 전망대에 잠시 들른다. 3층 옥상전망대까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계단을 오르면 된다. 전망대에 오르면 ‘BUNEZIA’ 일곱 글자에 무지개 일곱 빛깔을 입힌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낙동강 쪽을 조망하면 낙동강 하구 모래톱 중 하나인 맹금머리등이 눈에 들어온다.
부네치아 선셋 전망대에서 내려온 뒤에는 가장 먼저 만나는 건널목에서 낙동강변 쪽으로 건너야 한다. 다음 경유지인 고니나루쉼터로 가기 위해서다. 건널목이 드문드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니나루쉼터에는 낙동강 하구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도록 넓은 나무 덱이 설치돼 있고, 조경이 잘 가꾸어져 있다. 겨울철새 큰고니 두 마리가 마주 보며 하트 모양을 하고 있는 조형물은 고니나루쉼터가 자랑하는 포토존이다. 큰고니는 같은 오리과에 속한 고니와 함께 흔히 백조로 불린다. 부부의 연을 맺으면 평생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고 한다.
■‘게 구멍 숭숭’ 생명 살아 숨 쉬는 갯벌
고니나루쉼터에서 낙동강 하구를 바라보면 섬처럼 보이는 모래톱들이 가까이 보인다. 쉼터를 지나 다대포해수욕장 쪽에 가까워질수록 모래톱들이 더 가까이 보인다. 낙동강 하구에는 일곱 개의 모래톱이 있다. 진우도, 대마도, 장자도, 신자도와 백합등, 도요등, 맹금머리등이다. 지적도에 등재되면 ‘도’, 안 되면 ‘등’인데, 등은 수위에 따라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이들 모래톱의 지형은 낙동강으로부터 유입된 퇴적물이 바다의 밀물, 썰물과 만나 이동하고 쌓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지금도 살아 움직이듯 변화하고 있다. 7코스를 걸으면, 가까이에는 맹금머리등과 백합등이, 시정이 좋을 땐 도요등과 장자도, 신자도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모래톱 위에는 많은 철새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 모래톱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섞이는 기수 지역에 있어 생물 다양성이 풍부해 철새들의 훌륭한 보금자리다.
고니나루쉼터를 지나 강변길을 걷다가 지칠 만한 순간, 길(다대로) 건너 언덕에 낙동강 하구 아미산전망대가 보인다. 아미산전망대까지는 아주 가파른 덱 계단을 올라야 한다. 아미산전망대는 7코스의 경유 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전망대에 오르면 낙동강 하구의 모래톱들을 모두 조망할 수 있어 욕심을 내 덱 계단을 오른다. 아미산전망대에 오르면 3층 실내 전망대에서, 또는 건물 옥상에서 낙동강 하구를 확 트인 시야로 조망할 수 있다. 낙동강 하구의 광활한 모래톱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낙조를 보기 위해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미산전망대에서 내려와 다대포해수욕장 쪽으로 걸으면 노을정휴게소가 나온다. 노을정은 고우니생태길 끄트머리에 설치된 작은 정자다. 노을정휴게소를 지나면 바로 고우니생태길이다. 사하구의 마스코트인 ‘고니’에서 따온 이름이다. 넓은 갯벌과 갈대숲 사이에 나무 덱이 설치돼 있고, 덱 곳곳에 전망대와 쉼터가 있다. 덱 아래를 내려다보면, 갯벌이 살아 숨 쉰다. 작은 구멍에서 기어 나온 게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집게 다리를 모았다 펼쳤다를 반복하는 모습이 단체로 춤을 추듯 우스꽝스럽지만 깜찍하다. 바닷물이 고인 곳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떼 지어 다닌다.
고우니생태길과 다대포해변공원은 서로 연결돼 있으며, 다대포해수욕장의 넓은 백사장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다. 다대포해변공원은 소나무가 많아 사계절 푸름을 잃지 않는다. 많은 시민들이 소나무 아래에서 돗자리를 깔아 놓고 소풍을 즐기고 있다. 공원 가운데로는 해수천이 흐른다. 공원 한편엔 ‘다대포 매립 백지화 기념비’가 굳건히 서 있다. ‘개발의 미명하에 훼손될 다대포 매립을 주민들이 저지했다’ 기념비 건립 취지가 쓰여 있다. 다대포 매립이 진행됐다면 고우니생태길과 갯벌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 같아 기념비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다대포해변공원에는 세계 최대 바닥 분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다대포 꿈의 낙조 분수’가 있다. 공원 입구 광장에 있는 음악분수대는 밤이면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음악과 함께 장관을 연출한다.
낙동강 하구와 고우니생태길을 배경으로 한 낙조는 예술 작품 같다. 일몰 시간대에 맞춰 걸으면 좋은 이유다. 걷기 앱으로 측정한 7코스 완보 시간은 2시간 17분, 걸음 수는 1만 6129걸음, 거리는 11.29km였다. 아미산전망대에 들르고, 고우니생태길과 다대포해변공원을 두루 걸었더니 거리와 시간이 꽤 늘었다.
2023-06-28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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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도 인정한 ‘한국의 서원’, 어떤 가르침이 스몄을까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치기 전인 2019년 여름, 우리나라엔 큰 경사가 있었다. ‘한국의 서원’이 국내 14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 유림들이 세운 교육기관 정도로만 알았던 서원이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 받은 순간이다.
서원 하면 대개 도산서원을 먼저 떠올리지만, 맏이는 건립연대가 가장 빠른 경북 영주 ‘소수서원’(1543)이다. 이와 함께 경남 함양 ‘남계서원’(1552), 경북 경주 ‘옥산서원’(1572), 경북 안동 ‘도산서원’(1574)과 ‘병산서원’(1613), 전남 장성 ‘필암서원’(1590), 대구 달성 ‘도동서원’(1605), 전북 정읍 ‘무성서원’(1615), 충남 논산 ‘돈암서원’(1634) 등 9곳이 세계유산목록에 올랐다.
4년이 흘러 코로나 빗장이 풀린 지금, 뒤늦게나마 서원의 가치를 찾아나섰다. 건립연대 순으로 소수·남계·옥산·도산서원을 방문했다. 하나같이 자연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이들 서원은 오랜 역사만큼 넓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 영주 소수서원
소수서원이 있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일대는 선비문화를 알리는 각종 시설이 들어서 있다. 매표소부터 소수서원 입구까지 100여m는 울창한 솔밭이다. 때마침 정문(지도문) 안 강학당에서 경전을 읽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강학당 처마에 내걸린 현판엔 소수서원의 옛 이름 ‘白雲洞(백운동)’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사당과 함께 백운동서원(1543)을 건립한 것이 시초다. 이어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청원으로 1550년 명종이 소수서원이란 친필 현판을 하사하며 최초 ‘사액서원’이 됐다. 요즘으로 치면 첫 국가공인 사립대학인 셈이다.
무릇 공부란 글을 통한 배움이 다가 아니듯, 서원의 궁극적인 목적도 성인(聖人)을 길러 내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서원의 내부도 학문을 닦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신위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제향 공간’, 유생들이 휴식하며 교류하는 ‘유식 공간’으로 나뉜다.
소수서원 역시 공간적 구분은 있지만, 유생들의 기숙사나 장서각(도서관) 등 주요 건물의 배치는 자유롭다. 마당 곳곳에 놓인 정료대(조명시설), 관세대(대야 받침대), 일영대(해시계) 등의 유물을 통해 당시 유생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유식 공간인 경렴정과 취한대는 담장 밖에 있다. 이들 정자는 죽계천을 사이로 서로에게 그림이 되어 준다.
인근 소수박물관에선 안향 초상을 비롯해 여러 유물을 만나 볼 수 있는데, 리모델링 공사로 아쉽게도 연말까지 휴관이다. 대신 별관에서 ‘현판’을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 함양 남계서원
조선시대 세 번째(남한에선 두 번째)로 건립된 남계서원은 이름처럼 경남 함양군 수동면을 따라 흐르는 ‘남계(남강의 옛 이름)’ 곁에 들어섰다. 홍살문을 지나면 대문격인 2층 누각(풍영루)이 웅장한 모습으로 맞이한다. 누각 위에 오르면 앞쪽으로 탁 트인 들판과 지리산자락, 뒤편으로 서원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계서원은 강학·제향·유식 공간이란 한국 서원의 기본 구조를 정착시켰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강당(명성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유생들이 생활하며 공부하는 동재·서재, 뒤편에는 사당이 자리한다.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인데, 이후 건립된 서원은 대부분 같은 형식을 따랐다.
예부터 함양은 ‘좌안동 우함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 특히 조선조 5현 가운데 하나인 일두 정여창은 ‘우함양’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선생을 모신 사당은 명성당 뒤쪽 한참 높은 경사지에 위치한다. 가파른 층층계단 수십 개를 올라야 비로소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만날 수 있다.
사당 입구 내삼문에서 굽어보는 풍광은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들판과 남강 너머로 겹겹이 포개진 봉우리의 자태는 자연의 이치와 호연지기를 일깨운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1605년 정여창 선생의 생가 주변에 복원됐고, 1612년 옛터인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선생의 기운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면 인근 하동 정씨 집성촌인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고택’에 들러보길 권한다.
■ 경주 옥산서원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주차장에서 정문(역락문)까지 오솔길로 이어지는데, 길 바로 옆을 따라 흐르는 자계 물소리에 걷는 동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정문으로 들어서기 전 자계천 한가운데 있는 너럭바위와 주변 풍경이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머물던 이언적은 이 바위를 ‘세심대(洗心臺)’라 이름 붙였다. 바위에 새긴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고 한다.
물길은 서원 내부로도 이어진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도랑이 발 앞을 가로지른다. 한두 걸음이면 족한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2층 누각(무변루)이 맞이한다.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에선 세심대를 타고 흐르는 폭포 소리가 유난히 가깝게 들린다.
마당을 가로질러 서원의 중심엔 ‘옥산서원’ 현판이 걸린 구인당이 자리한다. 그 옛날 유생들은 구인당에서 열띤 강의와 토론을 벌인 뒤, 맞은편 무변루로 자리를 옮겨 자연을 벗삼았으리라. 무변루·구인당 현판은 한석봉,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옥산서원은 내부를 둘러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주차장 인근 유물관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발걸음을 돌리기 아쉽다면 700m쯤 떨어진 이언적의 별장 ‘독락당’에도 가 볼 만하다. 서원 북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10분쯤 오솔길을 걸으면 자계천 맞은편으로 고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옥산정사로도 불리는 독락당은 특히, 나무 살창을 내어 계곡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한 담장이 인상적이다.
■ 안동 도산서원
한국 서원의 역사에서 퇴계 이황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16세기 중후반 서원 건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소수서원이 배출한 퇴계의 문인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서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자리한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지은 도산서당에서 출발했고,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도산서원은 주변 풍광부터 남다르다. 드넓은 낙동강 물줄기를 마주하고, 수백 년 된 왕버들·느티나무가 서원 입구를 지킨다. 강 건너엔 ‘시사단’이 버티고 섰다. 1792년 정조는 퇴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 앞 지금의 시사단 자리에서 특별 과거시험(별시)을 열어 영남지역 인재를 선발했다. 이를 기념한 시사단은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수위가 높아지자 10m 높이의 석축을 쌓아 그 위로 옮겼다.
도산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도산서당이 나온다. 퇴계는 1561년 서당을 지어 머물면서 만년에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들이 늘어나자 서당 마루를 확장했는데, 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바로 앞 네모반듯한 작은 연못(정우당)엔 군자를 닮은 연꽃이 자란다.
서당 뒤편으로는 퇴계 사후 건립한 전교당(강당)과 동재·서재, 광명실(서재) 등 서원의 주요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서원 왼쪽 유물전시관(옥진각)에는 퇴계 선생의 일대기와 함께 벼루·빗자루·지팡이·방석 등 다양한 유품을 살펴볼 수 있다.
느린 걸음으로 만난 한국의 서원, 사람됨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2023-06-15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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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 갈맷길]⑥‘피란 수도 부산’ 발자취 따라 걷는 원도심 해안길
부산에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바로 ‘욜로 갈맷길’이다. 기존 갈맷길(9개 코스 23개 구간 278.8km) 중에 ‘부산 사람이라면, 부산에 오면 꼭 한 번 걸어 봐야 할 길’ 콘셉트로 10개 코스(총 100km)를 추리고 코스별 테마도 입혔다. 갈맷길의 축소판이다. 6코스 ‘영도 흰여울 한 바퀴’를 소개하는 차례다. 6코스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문화가 공존한다. 영도대교와 흰여울 문화마을에서는 한국전쟁과 피란 시절의 애잔한 역사와 문화를, 깡깡이 예술마을에서는 우리나라 조선업과 수리조선업의 발상지로서 그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다. 중리로 가는 해안길은 자갈을 밟으며, 때론 철제·나무덱 계단을 오르내리며 아름다운 바다 풍광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다. 아미르공원과 국립해양박물관이 있는 동삼혁신도시 일대에서는 해양 수도 부산의 진면목과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깡깡’ 수리조선 1번지를 걷다
욜로 갈맷길 6코스는 영도구 대교동 영도대교에서 동삼동 아미르공원·국립해양박물관까지 10.9km 구간이다. 욜로 갈맷길 10개 코스 중 2코스(16km)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출발점인 영도대교까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거나, 부산도시철도 1호선 남포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와 잠깐 걸으면 된다. 영도대교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완공된 연륙교로, 다리 상판 일부를 들어 올려 배가 다닐 수 있도록 한 국내 최초의 도개교다. 6·25전쟁 시기에는 피란민들이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만남의 장소로 이용됐던 곳으로 아픈 역사와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영도대교 끝자락엔 가수 현인의 동상과 노래비가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등 주옥같은 곡들을 남긴 현인은 영도가 고향이다. 영도경찰서를 지나 오른쪽으로 길모퉁이를 돌아가면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작은 물양장이 나온다. 물양장 일대는 ‘대풍포 매축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매축권을 얻어 포구를 메워 시가지로 만든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영도는 조선업, 도기산업, 제염업 등 근대 산업의 중심지였다. 또 부산에서 가장 매출 규모가 컸던 목도시장이 있었고 전차가 다니고 극장이 있었으며, 유곽이 성업했던 상업의 중심지였다.
물양장 주변으로는 선박 수리·부품업체들이 가득하다. 200여 곳에 달한다고 한다. 수리조선소 10여 곳도 여전히 운영 중이다. 근대 조선산업 발상지, 수리조선 1번지로서 명성을 실감한다. 이 일대는 ‘깡깡이 예술마을’로도 불린다. 수리조선소에서 녹슨 배의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며 벗겨 낼 때 ‘깡깡’ 소리가 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문화예술마을로 거듭났다. 마을 곳곳에 페인팅 아트, 키네틱 아트, 라이트 프로젝트 등 예술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깡깡이마을 거리박물관에서 삼화조선, 현광산업, 선진조선, 마스텍중공업을 잇따라 지난다. 대동아파트와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부산지사를 거쳐 물양장을 돌아 부산항국제선용품유통센터 쪽으로 걷는다. 센터 앞 횡단보도를 건넌 뒤 대평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어간다. 아파트와 빌라, 식당이 모여 있는 곳 사이사이로 난 길로 걷다 영도고가대교 횡단보도를 건너 반도보라아파트에 다다른다. 반도보라아파트를 오른쪽으로 끼고 해안산책로 방향 이정표를 따라 아랫길로 조금만 걸으면 절영해안산책로가 있고, 윗길로 부산보건고등학교를 지나 절영로를 따라 잠시 걸으면 흰여울 문화마을과 만난다. 마을 초입의 하얀색 건물이 마을 안내센터다.
흰여울 문화마을을 본격적으로 걷기 전, 흰여울 문화마을과 절영해안산책로를 멀리서 함께 사진으로 담는다. 절영해안산책로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방파제와 호안 위로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오르면 흰여울 문화마을과 절영해안산책로를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담을 수 있다.
■바다 맞닿은 피란촌에 꽃핀 문화예술
가파른 해안 절벽 위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흰여울 문화마을. 피란민들의 애잔한 삶이 녹아나 있는 곳이다. ‘흰여울’이라는 이름은 영도구 봉래산 기슭에서 굽이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마치 흰 눈이 내리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졌다. 낡은 집을 리모델링하고 골목과 담벼락 곳곳에 문화와 예술을 입혀 독창적인 문화예술 마을로 거듭났다. 골목골목에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 독립서점, 아이스크림 가게 등이 자리한다. 느릿느릿 걷는 골목마다 파스텔 계통의 은은한 색상을 입은 건물, 벽화들과 마주한다. 골목 사이 푸른빛 바다가 배경이 되면 장관을 이룬다. 바다를 직접 조망할 수 있는 카페나 집 주변에는 예쁜 꽃들도 피어 화사함을 더한다. 지나치기엔 아쉬운 포토존도 많다. 꼬막 계단, 영화 변호인 촬영지, 이송도전망대 등이 손꼽히지만, 걷다가 찍는 사진 하나하나가 예술이다.
마을 아래엔 산책로가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다. 절영해안산책로다. 마을과 산책로를 잇는 계단은 모두 4개다. 맏머리 계단, 꼬막 계단, 무지개 계단, 피아노 계단이다. 마을 속에 들어가 골목길을 누비다, 바다와 더 가까이 맞닿은 곳을 걷고 싶다면 산책로로 내려가 걸어도 좋다. 계단이 매우 가팔라 오를 땐 숨이 차지만, 마을의 골목길과 해안산책로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보람이 크다. 절영해안산책로는 마을 아래에서 시작해 중리 해변까지 이어진다. 3km 거리다. 마을과 벼랑 아래 맞닿은 산책로는 흰여울 해안터널 앞까지 약 900m 정도다. 파도 소리를 벗 삼아 평탄하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시선은 어느새 바다에 머문다. 부산항을 오가는 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머무르는, 영도에서만 볼 수 있는 묘박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 꼬막 계단~무지개 계단 구간 산책로는 재포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해당 구간은 걸을 수 없어 꼬막 계단을 이용해 마을로 올라가야 한다. 마을 끝 지점 이송도전망대에서 피아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흰여울 해안터널 앞이다. 흰여울 해안터널은 마을 아래 산책로를 중리 해변까지 이어주기 위해 암벽을 뚫어 2018년 개통했다.
■파도 소리 벗 삼아 걷는 해안길
흰여울 해안터널을 지나면 자갈이 깔린 해안길이 이어진다. 바닷물과 먼 쪽 돌일수록 뾰족뽀족해 걷기가 편안하진 않다. 하지만 자연과 더욱 가까워지는 길이다. 해녀촌을 지나면 나무덱으로 된 365계단이 나온다. 365계단을 오르면 차가 다니는 절영로가 나오기 때문에 오르지 말고 해안을 따라 계속 걸으면 된다. 365계단 앞을 지나면 시멘트길, 돌계단 등 포장된 산책로가 이어진다. 걷다 보면 하늘전망대와 75광장, 85광장 이정표가 차례로 나온다. 계단을 오르면 절영로에 다다르는 곳들이다. 절영로를 따라 걸어도 되지만, 해안산책로의 참맛을 계속 느끼고 싶다면 해안길 걷기를 추천한다. 하늘전망대와 75광장 이정표 사이 해안길에선 대마도 전망대와 빨간색 출렁다리를 만난다. 대마도 전망대에서는 날씨가 좋거나 미세 먼지가 적은 날 대마도를 볼 수 있다.
75광장 이정표 이후로는 산책로의 난도가 높아진다. 가파른 철제 계단과 나무덱 계단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복한다. 발을 헛디딜까 조바심이 날 정도로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숨도 많이 찬다. 85광장 이정표를 지나 잠깐 걸으면 중리 해변이다. 중리노을전망대를 지나면 중리선착장이 나온다. 중리선착장에서 절영로를 따라 걸으며 조양비취맨션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 걷는다. 롯데캐슬블루오션 아파트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 동삼교회 앞 삼거리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한국해양대와 하리 방면으로 쭉 걸어 내려간다. 해양대삼거리에서 동삼동패총전시관과 한국해양대 입구를 거쳐 해양로를 따라 6코스 종착점인 아미르공원과 국립해양박물관 쪽으로 걷는다. 국립부산해사고와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을 지나면 아미르공원 표지석이 보인다. 공원 벤치에 앉아 우거진 녹음을 바라보고 있으면, 긴 여정으로 생긴 피로가 싹 가신다. 공원 옆 국립해양박물관으로 향한다. 6코스 종착점이다.
걷기 앱으로 측정한 6코스 완보 시간은 3시간 9분, 걸음 수는 2만 521걸음, 거리는 13.96km였다. 역사와 문화·예술의 향기를 따라 마을 골목골목을 꼼꼼히 둘러보다 보니 거리가 꽤 늘었다.
2023-05-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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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품으로 돌아온 ‘담장 너머 그 집’…부산·경남 관사 여행
지난해 말 방영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요 촬영지가 옛 부산시장 관사인 ‘열린행사장’으로 알려지면서, 옛 부산시장 관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부산시장 관사는 현재 야외 공간만 시민들에게 개방돼 있다. 전국의 숱한 관사들이 민선 단체장 시대를 맞아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 잔재라는 지적 속에 문화 공간, 어린이 도서관, 역사자료관, 어린이집 등으로 시민 품으로 돌아갔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부산시도 본관 건물의 리모델링을 거쳐 옛 부산시장 관사를 복합문화공간으로 완전 개방하겠다고 밝혀 기대감이 크다. 경남도는 앞서 도지사 공관을 개방한 데 이어 지난해 9월 관사까지 개방하며 시민 환원 작업을 마무리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경남도지사 관사와 변신을 준비하는 부산시장 관사를 찾아 떠났다.
■경남도지사 관사, 복합문화공간 변신 성공
경남도지사 공관이었던 ‘경남도민의집’과 지난해 9월 개방된 경남도지사 관사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와 카페·맛집으로 유명한 창원 용호동 가로수길의 중심부에 있다. 경남도민의집에는 입구 앞쪽에 주차 공간이 있지만 주차 면수가 많지는 않다. 자가용을 이용해 방문하려면 인근 용지어울림동산 주차장, 용지동 행정복지센터 주차장, 용남초등학교 옆 공영주차장 등을 이용하면 된다.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부산에서 경남 창원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이듬해 4월부터 경남도지사가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접견, 회의 주재 등 도지사의 집무실로 사용됐던 공관은 2009년 ‘경남도민의집’으로 개방됐다. 경남도민의집 본관 건물은 경남도의 과거와 현재를 알리는 도정 역사실·도정 홍보실 등으로 쓰이다, 최근에는 추가 개방된 도지사 관사와 함께 각종 공연·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남도민의집 입구에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면 왼쪽엔 정원과 산책로가 있고, 오른쪽엔 2층 건물인 경남도민의집 본관이 자리한다. 정원엔 역대 도지사들의 기념식수들이 있다. 본관 입구 현수막은 오는 7월 22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본관 앞뜰에서 ‘관사 음악회’가 열린다고 안내한다. 본관 로비 작은 탁자 위에는 ‘듣고 싶은 곡을 적어 주세요’라고 적힌 노트가 올려져 있고, 노트엔 방문객들의 신청곡들이 적혀 있다. 이달 말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8시 작은 음악회가 진행 중이다.
본관 로비와 앞뜰이 음악으로 물들고 있다면, 내부는 미술 작품들로 채워졌다. 경남도는 도지사 관사를 개방한 뒤 약 5만 명이 방문했다며 이를 기념해 ‘경남도 소장 미술품 특별전-고향의 봄’을 이달 말까지 진행 중이다. 경남도민의집 본관과 경남도지사 관사 내부에는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작품들과 미공개 작품, 아마추어 작가 입상 작품이 전시돼 있다. 1960년대부터 지난해 작품까지 서양화, 동양화, 서예, 사진 등 86점이다. 연회장이었던 본관 1층 환주당에는 특별전의 주제 작품인 김창락 작가의 ‘고향의 봄’을 비롯해 저명 작가의 작품들(9개)이 전시돼 있다.
홍미옥 전시해설사는 “작품 ‘고향의 봄’은 홍난파가 작곡하고, 이원수 작가가 가사를 쓴 국민 동요 ‘고향의 봄’의 노랫말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으로, 1985년 경남도청을 건립한 금강개발이 경남도에 기증한 작품”이라며 “경남도지사 공관에 걸려 있다가 2013년부터 경남도립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본관 1층 도지사 집무실과 회의실에는 역대 도지사들이 사용했던 책상·의자 등 집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벽면엔 특별전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다. 집무실에는 도지사가 사용했던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1·2층 집무실과 회의실, 접견실을 잇는 복도 벽면과 2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의 한쪽 벽면에도 미술 작품들이 가득하다.
경남도민의집 본관을 나서 비탈진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청량한 대나무 숲과 대나무를 겹겹이 이어 붙인 대나무 쪽문에 다다른다. 쪽문 안쪽에 도지사가 거주했던 관사가 있다. 관사는 2층짜리 단독 주택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일반 가정집에 온 느낌이다. 도지사가 머물렀을 당시의 가구와 집기가 그대로 남아 있고, 곳곳에 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다.
경남도민의집 본관과 도지사 관사는 다양한 전시회와 공연, 교육 프로그램으로 끊임없이 채워지는 중이다. 토·일요일에는 프리마켓이 열린다. 오는 7월 8일까지 매주 토요일 ‘주말 예술 소풍’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예술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단순히 휴식과 산책을 위한 공간에 머물지 않고,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경남도민의집과 도지사 관사 개방 시간은 실내는 오전 9시~오후 8시, 야외는 오전 9시~오후 9시다. 월요일은 쉰다. 공연·전시, 교육 프로그램 일정을 미리 확인하고 방문한다면 더욱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부산시장 관사, 내년 초 완전한 시민 환원
부산 수영구 남천동에 있는 부산시장 관사는 현재 ‘열린행사장’이라는 이름으로 야외 공간만 개방돼 있다. 얼마 전 부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5명이 관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했고, 7명은 관사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나이가 지긋한 시민 중에는 직접 가본 경험은 없더라도 ‘KBS 뒤쪽 전두환 별장’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꽤 있다.
열린행사장으로 가려면, 부산도시철도 2호선 남천역에서 내려 KBS부산방송총국 입구에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뒤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 열린행사장 방문자를 위한 별도의 주차 공간은 없다. 열린행사장 안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에 작은 주차 공간이 있는데, 도서관을 이용하는 경우에만 주차가 가능하다.
열린행사장 입구에 닿으면 하늘색 철문에 눈길이 머문다. 단절의 이미지가 강하고, 위엄이 느껴진다. 열린행사장은 관사 본관과 관리동, 산책로, 잔디정원, 전망덱, 쉼터, 연못 등으로 이뤄져 있다.
둘러보기 전, 열린행사장의 어제를 미리 알아보고 간다면 공간에 대한 이해가 쉽다. 열린행사장은 부산시장 관사로 쓰였던 곳이고, 그전에는 대통령 숙소였다. 1985년 전두환 전 대통령 지시로 대통령 별장 용도로 지어졌다. 20세기 우리나라 현대 건축을 대표한 고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했다. 입구의 하늘색 철문은 물론이고, 아직 남아 있는 주변의 높은 담장, 철책만 봐도 보안이 얼마나 철저하고 엄격했을지 짐작이 간다. 1988년부터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2020년 5월 사퇴하기 전까지 역대 시장들이 거주했다. 이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형준 현 시장이 시민 환원을 약속하며 빈집으로 남아 있다. 전국 시·도지사 관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수목과 초본 식물 수만 본이 잘 관리되고 있어 조경도 뛰어나다.
열린행사장 입구로 들어서면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가면 어린이 도서관인 ‘숲속체험도서관’이 있고, 오른쪽은 본관 건물로 가는 오르막 산책로다. 2~3분 정도만 걸어가면 빨간 벽돌로 된 2층짜리 본관 건물이 나온다. 본관 앞으로는 널찍한 잔디정원이 펼쳐져 있다. 돗자리 사용과 음식물 섭취는 금지돼 있다. 잔디정원의 가장자리로는 역대 부산시장들의 기념식수들이 자라고 있다. 잔디정원 양쪽 끝에는 전망덱과 연못이 있다. 하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전망덱에 올라서면, 해운대 일대 마천루들과 광안대교 일부가 눈에 들어온다. 지대가 높은 편이 아니어서 시야가 시원한 편은 아니다. 연못은 돌담과 수수한 조경으로 운치가 있다.
부산시는 내년 초 본관 내부도 시민들에게 개방한다. 열린행사장이 다양한 전시·공연과 문화·예술 프로그램으로 채워지며 부산을 대표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열린행사장 야외 공간은 동절기(11~5월) 오전 9시~오후 5시, 하절기(6~10월) 오전 9시~오후 6시 개방한다. 평일만 개방하고 토·일요일, 공휴일엔 문을 닫는다.
2023-05-25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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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 갈맷길]⑤이기대 해안가 숲길 걸으면 산과 바다 매력 동시에
부산에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바로 ‘욜로 갈맷길’이다. 기존 갈맷길(9개 코스 23개 구간 278.8km) 중에 ‘부산 사람이라면, 부산에 오면 꼭 한 번 걸어 봐야 할 길’ 콘셉트로 10개 코스(총 100km)를 추리고 코스별 테마도 입혔다. 갈맷길의 축소판이다. 이번엔 5코스 ‘오륙도 품은 이기대’를 소개한다. 5코스는 동부산에 있는 욜로 갈맷길 1~5코스의 마지막 코스로, 동부산의 매력이 응집돼 있다. 해안가 산자락에 난 산책로를 걸으면, 산과 바다의 매력과 절경을 동시에 느끼고 즐길 수 있다. 부산의 정체성이 녹아나 있는 코스다. 아울러, 부산의 미래인 부산항 북항을 비롯해 원도심 곳곳을 조망을 할 수 있어 원도심과 서부산 욜로 갈맷길의 묘미를 미리 맛볼 수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동해-남해 분기점에 서다
욜로 갈맷길 5코스는 남구 용호동 오륙도 선착장 앞에서 동생말 전망대까지 4.5km 구간이다. 출발점인 오륙도 선착장까지는 도시철도 노선이 닿지 않는 만큼, 시내버스를 타고 오륙도 스카이워크 정류장에서 내려 2~3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오륙도 선착장 앞은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오륙도는 오륙도 선착장 남남동쪽으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바위섬들이다. 조석 간만의 차 또는 바라보는 위치·방향에 따라 어떨 땐 5개, 어떨 땐 6개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륙도 선착장 앞에는 ‘코리아 둘레길 시작 지점’ 안내판이 서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해파랑길(오륙도 앞~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 50개 코스 770km), 왼쪽으로 가면 남파랑길(오륙도 앞~전남 해남 땅끝마을 90개 코스 1470km)이다. 코리아 둘레길 안내판이 서 있는 지점, 즉 오륙도 앞이 동해와 남해를 나누는 기준이다.
오륙도 선착장에서 오륙도 스카이워크로 가려면,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다시 걸어 올라가 오륙도 스카이워크 표지석이 있는 입구 쪽으로 가든지, 오륙도 선착장에서 오륙도 스카이워크로 바로 갈 수 있는 덱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된다. 오륙도 스카이워크는 35m 해안 절벽 위에 설치된 다리로 바닥이 투명 유리다. 마치 공중 산책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시정이 좋은 날엔 대마도를 볼 수 있다. 오륙도 스카이워크가 동해와 남해를 나누는 지점에 있는 만큼, 바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장자산 가파른 산비탈에 울창한 숲과 아찔한 절벽이 어우러진 이기대 일대와 저 멀리 해운대와 마천루들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돌리면 영도와 부산항 북항, 선선대 부두 등이 눈에 들어온다. 오륙도 스카이워크 입구 쪽 해파랑 카페 건물 옥상에 있는 오륙도 전망대에 올라가면, 더 높은 지대에서 아름다운 풍광들을 즐길 수 있다.
욜로 갈맷길 5코스는 오륙도 선착장~오륙도 해맞이공원 구간 200m 정도만 제외하면, 이기대 해안산책로 4.3km(오륙도 해맞이공원~농바위~어울마당~동생말)와 일치한다. 본격적으로 걷기 전, 언덕에 있는 오륙도 해맞이공원과 이기대 자연마당에 잠시 머물며 여유를 즐겨 본다. 해맞이공원과 자연마당에는 자줏빛 산철쭉꽃과 노란 유채꽃, 수선화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자연마당에는 커다란 연못과 생태 습지가 있다. 연못에는 분수가 시원스럽게 물을 내뿜는다. 해맞이공원과 자연마당 언덕에서 굽어본 오륙도 스카이워크와 오륙도 주변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산길과 해안길 동시에 걷는 즐거움
잠깐의 여유를 뒤로 하고,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해안가 쪽으로 난 나무 덱 계단으로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걷는다. 산책로는 가파른 산비탈에 둘쑥날쑥한 해안을 따라 나 있다. 산과 바다를 면하고 있어 산길(숲길)이기도 하고 해안길이기도 하다.
농바위까지 가는 길엔 이정표가 몇 나온다. 이기대 해안산책로는 이기대 순환로, 장자산 등산로와 곳곳에서 서로 맞물린다. 길을 잘못 들 수 있기 때문에, 이기대 해안산책로와 농바위 방향의 이정표를 따라 걸어야 한다.
이기대 해안산책로의 가파른 오르막이나 내리막에는 덱 계단이 설치돼 있다. 돌이나 흙이 깔린 길은 평탄하지 않고 대체로 울퉁불퉁하다. 어린이나 노약자, 무릎이 불편한 사람이 걷기엔 쉽지 않다. 대신 인공적인 포장이 덜 된 숲길이어서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이 든다. 산책로는 대부분 폭이 좁아 교행이 쉽지 않다. 반대편 끝 지점인 동생말에서 출발한 갈맷길 여행객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은데, 교행하려면 한쪽에서 멈춰 길을 내어 줘야 한다.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에 마주 오는 여행객들이 불편하기 보다는 반갑다. 외국인들도 종종 보인다.
산책로를 걸으면 산속을 걷고 있고, 바닷가를 걷고 있다. 봄바람이 나뭇가지와 잎을 스치는 소리와 파도가 갯바위와 해안 절벽에 부딪쳐 철썩이는 소리가 합주를 한다. 울창한 수풀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바다 전망에 맘이 설렌다. 걷기 여행객들이 부산을 대표하는 명품길로 손꼽을 만하다.
농바위 전망대에 다다르면, 농바위 구경을 놓칠 수 없다. 농바위는 장롱을 포개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안 절벽 위에 여러 개 바위가 포개져 솟아 있다. 뭔가를 머리에 이고 먼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 모양 같다. 농바위는 과거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연락을 하는 기준이 되는 바위로도 쓰였고,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으로 지나가는 어선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돌부처상 바위로 불리기도 했다.
농바위 전망대를 지나면 해안 절벽을 끼고 덱으로 된 산책로가 이어진다. 바다 쪽으로 울창했던 수풀은 어느새 걷히고 탁 트인 시야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해안 절벽을 따라 걷다 보면 해운대 일대의 마천루들이 점점 가까워진다. 가끔 만나는 덱 쉼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옥색 바다와 깎아지른 해안 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소중한 지질 유산과 천혜의 절경
이기대 어울마당까지 0.75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이는 곳에서 해안 절벽을 끼고 이어지던 덱길은 끝나고 숲길이 시작된다. 해송들이 모여 있는 솔밭마당과 솔밭마당 앞 덱 쉼터인 솔밭쉼터에서는 잠시 숨을 돌리기 좋다. 솔밭마당과 솔밭쉼터를 지나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곧 이기대 어울마당이다. 스탠드 앞 넓은 공터에 자갈이 깔렸다. 어울마당에 서면, 광안대교와 동백섬, 해운대 일대 마천루들이 한눈에 담긴다. 영화 ‘해운대’의 촬영지였다는 안내판도 있다. 영화의 주 무대가 해운대 미포였지만, 어울마당에서도 탁 트인 경관을 배경으로 영화의 한 장면이 촬영됐다고 한다. 어울마당 안쪽에는 과거 일대가 폐광산이었음을 알려 주는 안내판이 있다. 구리를 캤다고 한다.
어울마당을 지나면 기기괴괴한 갯바위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구멍이 둥글게 송송 뚫린 널찍한 갯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안내판에 따르면, 갯바위의 틈에 있던 자갈이나 모래가 파도에 의해 회전하면서 오랜 시간 바위의 표면을 깎아 만들어진 ‘돌개구멍’이다. 이기대 일대에는 약 800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암반과 지층이 남아 있다. 이들 암반과 지층은 파도의 침식을 받아 해식애, 파식 대지, 해식동굴, 돌개구멍 등 천혜의 절경을 만들어냈다. 이기대는 이러한 지질 유산으로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동생말 전망대로 가는 길에는 골짜기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를 만난다. 출렁다리다. 구름다리는 모두 5개다. 모두 길지 않아 출렁거리는 느낌은 많지 않다. 코스의 종착점인 동생말 전망대에서는 광안대교와 마린시티, 해운대가 가장 가까이 보인다. 동생말 전망대에서 대중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분포고등학교 앞 마을버스 정류장이다.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옆엔 용호별빛공원이 있다. 국가 부두였던 용호부두가 공원으로 개발돼 2021년 7월 개방된 친수공원이다. 용호별빛공원에서 바라보는 광안대교와 해운대 일대 전망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걷기 앱을 이용해 측정한 순수한 5코스 완보 시간은 1시간 36분, 걸음 수는 1만 26걸음, 거리는 6.82km였다.
2023-05-03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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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책, 쉼 한곳에…다시 열린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 보수동 책방골목, 임시수도기념관 등에 이르는 부산 원도심 주요 명소의 중심에는 부산,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오롯이 품은 공간이 있다. 그런 질곡의 역사가 깃든 부산 중구 대청동 옛 부산근대역사관이 리모델링을 거쳐 최근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수탈의 본거지에서 해방 후 미국이 점유하는 부산 미국문화원으로 쓰이는 등 부산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공간인 이곳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역사관이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시민들이 부담 없이 들러 책을 읽고 편히 쉴 수 있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추구한다. 새 단장한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으로 부산 근현대사와 휴식을 찾아 떠나 본다.
■근현대사 질곡 품은 역사 현장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을 수탈하는 데 앞장섰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 모태로, 1929년 건립됐다. 해방 이후엔 부산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됐으며, 1999년 부산시로 귀속됐다. 2003년부터 2021년까지는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쓰이며 부산과 우리나라의 아픈 근현대사를 알리는 교육 공간으로 역할을 해왔다.
부산 미국문화원은 전시, 영어 교육, 문학 강좌 등을 통해 현대적 지식과 미국 문화를 보급하던 거점 시설이었다. 그러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이 신군부의 유혈 진압을 묵인·방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미 운동의 표적이 돼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비롯해, 1986년 5월과 1991년 2월 반미 점거 농성 등이 발생했다.
부산시는 옛 부산근대역사관 건물의 새로운 활용 방안을 찾던 중 바로 옆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과 함께 리모델링해 부산 근현대사를 품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옛 부산근대역사관은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으로 지난달 1일 먼저 개관했고,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는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으로 오는 12월 중순께 문을 열 예정이다.
별관은 도서 열람과 휴식의 공간으로, 본관(5개 층)은 최초 개항지 부산의 역사성과 해양 수도 부산의 정체성을 담은 전시 공간으로 특화한다. 피란 수도 부산, 산업화 시기의 부산, 민주화의 중심지 부산 등을 주제로 다양한 전시 공간으로 꾸며진다.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과 카페·휴식·문화 공간도 마련된다.
■책 1만여 권 소장한 ‘작은 도서관’
별관은 최초 건립 당시 외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별관은 3개 층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었을 당시엔 2개 층만 있었고, 부산 미국문화원 건물로 사용되면서 리모델링을 거쳐 3개 층으로 바뀌었다. 부산시는 건축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건물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1층과 2층을 나누는 슬래브(콘크리트 바닥 또는 천장)를 절반가량만 덜어내 개방감을 줬다. 슬래브를 걷어낸 공간에는 하얀색 둥근 기둥이 보이는데, 건립 당시 건물의 내진성 확보를 위해 철골철근콘크리트 공법이 사용됐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슬래브가 아직 남아 있는 공간에는 하얀색 철골 기둥이 있다. 이 기둥은 부산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될 당시 1개 층을 증축하면서 설치된 기둥이다. 부산근현대역사관 허미연 학예연구사는 “별관은 철골콘크리트 구조, 철골 구조,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세 가지 건축 방식이 복합적으로 사용됐는데 그런 예는 매우 드물어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며 “특히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는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 이후 당시 흔했던 철근콘트리트 건축물의 부족한 내진성을 보완하기 위해 일본이 발전시킨 공법”이라고 설명했다. 별관 건물이 건립된 때는 서구 양식이 한창 도입되던 시기였다. 건물 곳곳에 난 아치형 창호, 외벽의 넝쿨형 부조, 연꽃 모양 부조 모두 그러한 예다.
슬래브를 들어낸 공간은 개방감이 느껴지면서 아늑하다. 깔끔한 호텔 로비를 찾은 듯하다. 편안한 의자들이 놓여 있고, 별관 개관을 기념해 책들을 탑 모양으로 쌓은 ‘시민의 책탑’도 자리한다.
슬래브가 남아 있는 1층 공간의 이름은 ‘대청 서가’다.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차분한 색감으로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꾸몄다. ‘부산 서가’ 공간에는 부산 근현대사 관련 도서를 비롯한 1만여 권의 도서가 들어차 있다. 문화 예술, 역사, 경제, 종교 등 주제가 다양하다. 한쪽에는 컴퓨터들이 놓여 있는데, 부산근현대역사관이 축적한 아카이브(책·사진·기록 등을 디지털화한 자료)를 검색해 볼 수 있다.
‘특별 서가’ 공간에는 ‘부산의 책-시대의 감정, 지역의 얼굴’ 주제의 북 큐레이션 전시가 진행 중이다. 북 큐레이션은 특정 주제에 맞는 책들을 선별해 독자들에게 제안하는 도서 전시 형태다. 오는 6월 15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1955년까지 부산에서 출판됐거나, 부산이라는 지역을 다룬 단행본, 잡지 등 40여 권이 전시돼 있다. 희귀한 자료들로 당시의 시대상과 부산의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다.
종군 작가들이 참여한 <전선문학> 잡지에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담겼다. 황순원의 단편 소설집 <곡예사>에는 피란민이었던 작가가 부산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원주민들의 비정함과 배타성이 담겼다. 곽하신의 소설 <시장삽화>에 나온 구절도 눈에 띈다. ‘사는 사람보다 팔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중략)국제시장에는 모두가 물건을 팔아야만 되는 사람들이었다’ 전쟁 중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발버둥 치며 시장에 나와 무엇이든 팔아 보려던 피란민의 모습을 그렸다.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는 당시 피란민이었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느낀 막막함과 시대 의식을 담고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하은지 전시 담당자는 “전시된 자료는 대부분 가치가 높은 초판본이나 창간호”라며 “피란 수도 부산에서는 전쟁 중 다양한 예술가 직군들이 몰려들었는데, 전쟁으로 단절될 위기에 처했던 창작과 교육, 문화 활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 주고 재생시켜 준 부산의 역할과 위상도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아치형 휴식 공간 등 ‘쉼’ 있는 역사관
별관 2층인 ‘대청 마루’로 올라가는 계단은 부산 미국문화원 당시 1개 층을 증축할 때 만들어진 계단으로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2층은 전체적으로 밝고 환한 색감으로 꾸며 휴식에 방점을 찍었다.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치형 공간들과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쉴 수 있는 휴식 공간, 건물 신축 당시의 아치형 창문을 모티브로 한 포토존 등이 있다. ‘작은 서가’에는 여행, 유적 답사 등을 주제로 한 책들이 꽂혀 있다. 별관 건물의 건축 공법과 변천사 등을 보여 주는 공간은 2층 한편에 최소화했다.
2층 천장에는 관동 대지진 이후 일제가 내진성을 강화하기 위해 적용한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별관 건물의 건축사적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 구조 내부를 과감히 노출했다. 증축 당시 보강된 기둥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시민들에게 다시 돌아온 별관은 앞으로 더욱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부산근현대사역사관에 따르면, 지금까지 내방객의 약 25%가 청소년이나 가족 단위 관람객이었다. 또 부산 원도심에 여행을 왔다가 들러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시는 인문학 프로그램 운영을 비롯해 주변 원도심 주요 명소 등과 연계한 활용 방안도 고민 중이다.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이 개관하면, 전시에 특화되는 본관과 도서 열람과 휴식이 주가 되는 별관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원도심의 핵심 관광 명소와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별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무일이다. 연휴에 월요일이 포함돼 있으면, 연휴 마지막 휴일 다음 날 휴관한다. 관람료는 없다. 책은 관내에서만 읽을 수 있으며 대출은 안 된다. 부산시 공공 와이파이도 사용 가능하다.
2023-04-1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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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 갈맷길] ④ 센텀 무비 투나잇 - 걷다 보면 청춘 스며든다
부산에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바로 ‘욜로 갈맷길’이다. 기존 갈맷길(9개 코스 23개 구간 278.8km) 중에 ‘부산 사람이라면, 부산에 오면 꼭 한 번 걸어 봐야 할 길’ 콘셉트로 10개 코스(총 100km)를 추리고 코스별 테마도 입혔다. 갈맷길의 축소판이다. 욜로 갈맷길 1~3코스에 이어 4코스 ‘센텀 무비 투나잇’을 소개한다. 4코스는 마천루들과 광안대교 등 부산의 상징이자 오늘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마천루 숲을 걸으며 탄성을 지르다, 곧 ‘영화의 도시 부산’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젊음과 싱그러움이 용솟음치는 민락수변공원을 지나 광안리해수욕장에 닿으면 가슴 속으로 청춘이 스며든다.
■마린시티에 ‘영화 도시 부산’ 있다
욜로 갈맷길 4코스는 해운대구 우동 마린시티~수영구 민락동 광안해변공원 간 5km 구간이다. 출발점인 마린시티까지는 부산도시철도 2호선 동백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걷거나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본격적으로 걷기 전, 마린시티와 마주하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더베이101’에 잠시 들르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다. 멋진 마린시티 전경을 사진으로 담는 핫 스폿이어서다. 마린시티의 밤과 낮은 180도 다르다. 한밤의 마린시티는 으리으리한 초고층 건물이 뿜어내는 형형색색 찬란한 불빛으로 황홀하다. 불빛이 잠자는 낮에는 마천루들의 웅장한 민낯에 깜짝 놀란다.
마린시티는 현대카멜리아 아파트나 부산해양경찰서 동백출장소에서 시작해 가장자리를 따라 난 인도를 따라 쭉 걸으면 된다. 해운대더샵아델리스 앞에서는 ‘해운대 영화의 거리’라고 적힌 슬레이트를 치는 사람 조형물과 만난다. 영화의 거리인 해운대더샵아델리스~파크햐얏트부산호텔 해안 구간은 △천만 관객 영화존 △애니메이션존 △해운대 배경 영화존 △산토리니 광장으로 꾸며져 있다. 우리나라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천만 관객 영화들을 비롯해 우리나라 대표 애니메이션, 해운대에서 촬영한 영화들이 방파제 안쪽 벽면에 영화 포스터 등의 형태로 소개돼 있다. 산토리니 광장은 하얀 벽체와 파스텔톤 색감으로 꾸며진 공간으로 그리스 산토리니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를 찍는 제작진과 배우를 표현한 조형물과 스파이더맨 피규어가 설치돼 있고, 벽면에는 유명 배우와 감독의 핸드프린팅 동판들이 전시돼 있다. 영화의 거리를 걸으며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광안대교는 민락동 일대 고층 아파트와 건물들을 감싸며 바다를 가로질러 시원하게 쭉 뻗어 있다.
마린시티 끄트머리에서 수영만 요트경기장으로 접어든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게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을 치른 곳이다. 중구 남포동에서 태동한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해운대로 무대를 넓히면서 개·폐막식이 열리고, 영화제 사무국이 둥지를 튼 적도 있는 곳이다. 요트경기장 본관동 중앙 현관을 지나 계류장 쪽으로 걸어가면 널따란 광장이 펼쳐진다. 요트 계류장 쪽으로 다가서면, 잔잔한 물결 위에 계류 중인 하얀색 요트들이 바다를 한가득 메우고 있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린시티 초고층 건물의 커튼월 유리창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빛을 발한다. 푸른 바다, 하얀 요트까지 한데 어우러지니 청명하기 그지없다.
요트경기장을 걷다 보면 부산시요트협회 건물이 있는 곳에서 길이 막혀 있다.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 건물이 보이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요트경기장 밖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요트경기장 주차요금소를 지나 찻길 쪽으로 나간 뒤 해운대해변로 인도를 따라 걸으면 된다. 따스한 햇살과 살랑살랑 봄바람을 맞으며 걷는 중에 왼쪽으로 넓은 공터와 포구가 눈에 들어온다. 우동항이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마린시티와 센텀시티 사이에 아직 고기잡이를 하는 어항이 남아 있다니 이색적이다.
■광안해변공원에는 초록빛 청보리 물결
우동항을 지나 수영2호교(민락교)를 건넌다. 수영2호교는 수영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수영만 입구에 자리하며, 해운대구 우동과 수영구 민락동을 연결한다. 길이는 500m 정도다. 수영2호교를 걸으면 동부산의 중심축인 센텀시티와 마린시티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광안대교가 바다 쪽으로 뻗어 나가고, 마린시티의 마천루들이 하늘로 솟아 있다. 민락동 해안을 따라선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센텀시티의 고층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영2호교를 지나 민락수변공원으로 가려면 수영2호교 민락동 쪽 끝지점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덱 계단을 걸어 내려가 수영강변을 따라 설치된 나무 덱길로 접어들면 된다. 수영2호교와 민락수변공원 간 보행로가 단절돼 갈맷길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따라, 지난해 엘리베이터와 덱 계단 등을 설치하는 보행 환경 개선 사업이 완료됐다.
수영강변(민락동 해안)을 따라 설치된 덱길로 들어서면, 화사한 벚꽃들이 손을 내밀어 반긴다. 덱길은 민락수변로의 차도와 인도보다 높은 곳에 설치돼 있다. 민락수변로의 가로수들은 벚나무인데, 덱길 난간 너머로 가지를 내밀고 있다. 난간 쪽으로 다가서면 벚꽃이 손에 닿는다. 벚꽃이 지기 전에 걸어 보면 더 좋을 듯하다.
덱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민락수변공원이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바닷물과 맞닿은 수변 공간은 육지에서 광안대교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젊은이들 사이에 ‘핫 플레이스’이다. 수변 공간에는 커다란 갯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태풍 때 바다에서 밀려 올라온 바위다. 민락수변공원에는 초강력 태풍이 부산을 지날 때마다 커다란 갯바위들이 밀려 올라온다. 수영구청은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밀려온 바위를 그대로 두고 있다고 한다.
수변 공간 한편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기어 올라오는 거북이 조형물과 공연 무대로 꾸며진 어선 조형물 등이 있다. 수변 공간을 걷다 보면 폭이 4~5m가량 되는 수로가 나타나는데, 왜가리 한 마리가 매서운 눈초리로 바닥을 주시하고 있다. 인근 횟집에서 흘러 나오는 해수에 섞인 생선 찌꺼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다. 갈매기들도 먹잇감을 찾아 오는 곳이다.
민락수변공원을 빠져 나와 부산시수협 민락어촌계 건물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민락 매립지 둘레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가 광안리 해수욕장까지 쭉 이어진다. 민락 매립지 일대에는 상업 시설과 아파트, 오피스텔 등이 들어서 상전벽해다. 광안리 해수욕장 끝자락에는 청보리밭이 바닷바람에 물결친다. 수영구청은 광안해변공원에 ‘청보리, 바다가 되다’라는 주제로 청보리밭을 조성했다. 청보리들이 무럭무럭 자라 성인 허리 정도까지 키가 컸다. 바람에 출렁이는 청보리의 초록 물결을 보니 싱그럽다. 청보리밭은 이달 16일까지 볼 수 있다.
걷기 앱을 이용해 측정한 순수한 4코스 완보 시간은 1시간 41분, 걸음 수는 1만 338걸음, 거리는 6.83km다.
2023-04-0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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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기 무덤서 깨어나는 '대가야'의 숨결…경북 고령 가야사 여행
부산·울산·경남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나라에 가닿을까. 대개 신라를 떠올리겠지만, 역사적 뿌리는 가야와 더 가깝다. 최근 <부산일보>는 ‘깨어나는 가야사’ 대기획을 통해 가야사를 집중 조명했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에 가려 잊힌 왕국 가야. 특히 후기 가야연맹을 이끈 대가야는 철기 제조술과 우륵의 가야금 등 뛰어난 문화를 지닌 고대국가로 여겨진다. 깨어나는 봄을 맞아 가야연맹의 최전성기를 깨운 대가야의 고장, 경북 고령을 찾았다.
■500년 찬란한 역사를 한눈에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에 위치한 ‘지산동 고분군’은 5~6세기 대가야의 번성기를 오롯이 보여주는 역사유적이다.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싼 주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왕족 등 지배층 묘역 700여 기가 분포한다.
지산동 고분군을 둘러보려면 나름의 순서가 있다. 고분군 기슭에 자리한 대가야박물관의 대가야역사관·대가야왕릉전시관을 먼저 방문하면, 고분군의 역사적 배경과 대가야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가야역사관은 대가야를 비롯해 고령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2층 상설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엔 서기 42년 대가야의 건국부터 562년 멸망, 이후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령지역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연표로 정리돼 있다.
전시실엔 대가야의 찬란한 문화가 빚은 2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 중이다. 특히 지산동 705호분에서 나온 ‘흙방울’은 1500년 전 타임캡슐로 불린다. 지름 5.3cm의 작은 방울에 새긴 6가지 그림이 가야의 건국신화를 연상시키며 신비함을 자아낸다. 갑옷과 무기류, 말갖춤(말을 제어하는 각종 도구) 등 다양한 철기 유물은 ‘철의 왕국’ 대가야의 위용을 짐작케 한다.
지산동 ‘73호분’(2007년 발굴) 내부를 재현한 전시도 인상적이다. 73호분은 서기 400년 전후 대가야 왕릉 출현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대가야 ‘최초 왕릉’이다.
역사관을 나와 오른쪽(서쪽) 샛길로 몇 걸음만 옮기면 고분을 닮은 돔 지붕의 대가야왕릉전시관이 나타난다. 이름처럼 지산동 왕릉 중 44호분(1977년 발굴) 내부를 원래 모습 그대로 재현한 전시관인데, 가야의 순장 문화를 잘 보여준다.
순장은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주변 사람과 동물을 함께 묻는 장례풍습이다. 44호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순장 무덤인데, 순장자가 40여 명에 이르러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 중 최대 규모다. 순장된 이들은 10~60대 남자 여자로, 저승에서 왕의 생활을 도울 시녀·호위무사·창고지기·마부 등 직책도 다양하다. 전시관 바닥엔 왕과 함께 순장된 이들의 모형이 실제처럼 안치돼 있다. 생생함을 더하는 동시에 순장 문화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고분군의 숨결과 우륵의 음악
대가야왕릉전시관을 나오면 앞뒤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지산동 고분군이 자리한다. 44호분 등 주요 고분은 전시관 뒤편에 위치한다. 고분군으로 향하는 산책로로 접어들자마자 작은 봉분들이 여기저기 시야에 들어온다. 적당한 크기, 완만한 높이의 무덤들이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자연의 일부인 듯 조화롭다.
5분쯤 올랐을까. 뒤를 돌아보니 멀리 도로 건너 남쪽 고분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을 따라 점점이 이어진 무덤들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형상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봉분 하나하나마다 대가야인의 숨결을 내뿜는 듯하다.
산책로는 경사가 꽤 있는 편이다. 금동관·갑옷·투구 등이 출토된 32~35호분을 지나 44호분에 이르면 숨돌릴 만한 평지가 나타난다. 더 위쪽 45호분과 5호분까지 가려면 좀 더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등산이나 다름없는 코스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고분군의 전경을 더 한눈에 내려다보며 담을 수 있다. 중간중간 소나무 그늘과 벤치도 있어, 어르신이나 아이들도 쉬엄쉬엄 거닐 만하다.
왕릉전시관 쪽에서 올라왔으니 내려가는 길은 역사관 쪽으로 잡는다. 발길을 거꾸로 되돌려 44호분까지 내려온 뒤 32~35호분을 앞둔 갈림길에서 왼쪽(동쪽) 내리막길로 방향을 틀면 능선을 따라 대가야박물관 입구까지 이어진다. 산책길의 끝자락에서 최초 왕릉인 73호분도 만날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주변 풍광을 카메라에 담으며 느긋하게 걸어도 한 바퀴 전체를 둘러보는 데 채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대가야의 대표 유적이 지산동 고분군이라면, 대표 인물은 가야금 창시자인 우륵이다. 대가야박물관에서 차량으로 5분 남짓 달리면 우륵과 가야금을 주제로 한 ‘우륵박물관’이 있다. 지붕부터 가야금 모양을 본딴 듯 개성 있는 테마박물관이다. 대가야와 우륵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 가야금의 변천사와 우리나라 전통 악기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해를 돕도록 거문고·아쟁·해금 등 악기별 음색을 비교하는 시설도 흥미롭다.
대가야 백성들의 생활상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대가야생활촌’을 들러볼 만하다. 주제별로 조성해 놓은 마을을 돌며 대가야인이 살던 움집과 고상가옥, 의복·대장간·토기·교역품 등 의식주 전반을 살펴볼 수 있다. 아이와 함께라면 ‘철의 원정대’ 미션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대가야인의 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다. 대가야생활촌 바로 옆엔 승마체험 시설도 있어 대가야의 기마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기 좋다.
■대가야 여행팁과 대표 맛집
대가야박물관과 지산동 고분군, 우륵박물관, 대가야생활촌,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등 고령지역의 대가야 관련 관광문화시설은 대부분 대가야읍에 오밀조밀 모여 있다. 자동차로 10분 이내여서 동선을 잘 짜면 당일 혹은 1박 2일 만에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다.
일정 중간 여유가 있다면 ‘고아리 벽화고분 모형관’도 방문할 만하다. 고아리 벽화고분은 석실 구조에 벽화도 있어, 대가야 후기에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벽화고분은 안전상 이유로 영구폐쇄됐고 인근에 모형관을 만들어 석실을 재현했는데, 환상적인 미디어 아트도 체험해볼 수 있다.
대가야박물관은 입장권 1장으로 대가야역사관, 대가야왕릉전시관, 우륵박물관까지 3곳 모두 관람 가능하다.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은 무료 입장이다.
한편, 오는 31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사흘간 대가야읍 일대에선 ‘2023 고령 대가야 축제’가 열린다. 지산동 고분군 야간투어, 대가야 별빛쇼(불꽃놀이), 가야금연주단 특별공연, 대가야박물관 기획특별전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대가야 여행 도중 출출하다면, 현지인이 추천하는 오래된 가게를 들러보길 권한다. 대가야읍내 중앙네거리 인근 ‘진미당제과’ 찹쌀떡은 5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너무 달지 않고 쫀득한 식감이 어른 아이 모두 좋아할 맛이다. 매일 준비된 양만 판매해 일찍 동나기 때문에, 가능하면 오전에 들르는 게 좋다.
개진감자로 만든 ‘개진고로케’도 대표 맛집이다. 최근 확장 이전을 했는데, 여느 고로케와 달리 기름지지 않으면서 촉촉한 속이 특징이다. 옥수수·새우·계란·모찌·크림치즈·모짜렐라 등 고로케 종류도 다양해 골라 먹는 재미도 있다. 카페도 함께 운영하는데, 특히 고령딸기로 만든 상큼한 딸기주스가 고로케와 잘 어울린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2023-03-0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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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 갈맷길] ③ 낭만 뚜벅이족, 해변열차와 나란히 걷다
부산에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바로 ‘욜로 갈맷길’이다. 기존 갈맷길(9개 코스 23개 구간 278.8km) 중에 ‘부산 사람이라면, 부산에 오면 꼭 한 번 걸어 봐야 할 길’ 콘셉트로 10개 코스(총 100km)를 추리고 코스별 테마도 입혔다. 갈맷길의 축소판이다. 욜로 갈맷길 1, 2코스에 이어 3코스 ‘블루라인 푸른 모래’를 소개한다. 3코스는 욜로 갈맷길 10개 코스 중 가장 걷기 편한 코스다. 길이가 짧고, 대부분 평지에다 나무 덱길이다. 동해남부선 폐선 철로 위를 달리는 해변열차를 보며 걸으면 기차 여행의 낭만이 전해진다. 드문드문 난 샛길로 들어서면 고즈넉하고 그윽한 송정해수욕장과 구덕포, 청사포 등이 반긴다. 밋밋한 덱길만 걷는 단조로움과 싱거움은 금세 사라진다.
■역사(驛舍)가 역사(歷史) 된 옛 송정역
욜로 갈맷길 3코스는 옛 송정역~블루라인파크 미포정거장 간 5.8km 구간이다. 출발점인 옛 송정역까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거나 동해선을 타고 송정역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된다. 동해선 송정역에서 해운대로를 따라 송정해수욕장 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블루라인파크 송정정거장’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의 화살표 방향으로 따라가면 폐선 철로가 늘어서 있고, 왼쪽으로 조그맣고 하얀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옛 송정역이다. 철로 사이에 서 있는 안내판은 옛 송정역이 ‘국가등록문화재 제302호’라고 설명한다. 옛 송정역은 1940년 12월에 만들어진 목조 단층 기와지붕 건물로, 예스럽고 아담한 정취가 느껴진다. 역사와 노천대합실은 물론 역사 주변 철로와 승강장 150m 구간까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는 사실은 새롭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철로와 승강장 역시 개발로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 폐선 철로를 조금이나마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옛 송정역사를 지나면 곧 블루라인파크 해변열차 시종착점인 송정정거장이 나온다. 블루라인파크는 폐선된 동해남부선 송정~청사포~미포 4.8km 구간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한 곳이다. 해안 절경을 즐길 수 있는 해변열차와 스카이캡슐을 운행하고 있다. 해변열차는 송정~구덕포~다릿돌전망대~청사포~달맞이터널~미포 6개 정거장을 오가고, 공중 궤도를 달리는 스카이캡슐은 미포~청사포 구간을 오간다. 욜로 갈맷길 3코스는 블루라인파크 철로 구간 옆으로 쭉 이어진 나무 덱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5.8km 중 덱길 구간이 4.8km로 대부분이다. 이 덱길은 그린레일웨이로 불린다. 동해남부선 폐선 철로와 부지를 도심 산책로로 개발한 것으로, 해운대구 올림픽교차로부터 송정까지 9.8km 구간이다. 안전하게 걷기 좋은 길로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안심 관광지에도 이름을 올렸다.
해변열차 송정정거장에서부터는 철로 위를 걷는 것이 불가능(건널목이 있는 일부 구간 제외)하다. 해변열차가 달리기 때문이다. 송정정거장 좌우로 난 철로 옆길로 150~200m 정도 걸으면 철도 건널목이 있고, 이 지점에서 그린레일웨이 덱길이 시작된다. 덱길 왼쪽으로 송정해수욕장이 가까이 보인다. 눈을 돌리면 해변이 펼쳐지고, 백사장 한쪽에는 서핑 보드들이 늘어서 있다. 송정해수욕장은 서핑의 명소로 이름나 있다. 밀려오는 파도와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몸을 싣고 윈드서핑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유쾌해진다.
■청사포 전망대 오르면 수려한 바다 풍광
덱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송정해수욕장 끝자락에 있는 구덕포의 아름다운 바다 경치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덱길에서 구덕포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가니, 기이하게 생긴 갯바위들이 넓게 펼쳐지며 장관을 이룬다. 구덕포는 원래 양식업과 멸치 조업을 주로 하던 어촌 포구였지만, 지금은 어촌 기능이 대부분 사라지고 카페와 음식점이 자리를 잡았다. 구덕포 안쪽 길은 막다른 길이기 때문에 다시 덱길로 돌아간다.
블루라인파크 구덕포정거장을 지나자마자 철로 뒤쪽에 야트막한 산을 오르는 나무 덱 계단이 보인다. 계단 옆엔 갈맷길 표지판이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면 갈맷길 2-1코스라고 안내한다. 갈맷길 2-1코스와 욜로 갈맷길은 일부 구간이 겹치지만 다르다. 욜로 갈맷길 3코스는 블루라인파크 철로 옆 평평한 덱길이다. 갈맷길 2-1코스에 사진 찍기 명소인 ‘청사포 전망대’가 있어,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워 계단을 오른다. 청사포 전망대는 산길을 5분 정도 걸으면 나온다. 전망대에 다다르니 잠시 옆길로 잘 샜다 싶다. 전망대 덱과 옆 바위에 올라 청사포 앞바다를 굽어보니 해안 경관이 훌륭하다. 청사포의 명물 ‘다릿돌전망대’도 내려다 보인다.
왔던 길로 돌아가 덱길을 다시 걷는다. 300여m 정도 걸으면 다릿돌전망대가 나온다. 청사포 전망대에서 내려다봤던 그 다릿돌전망대다. 다릿돌전망대는 해수면으로부터 20m 높이에 72.5m의 길이로 바다 쪽으로 뻗어 있다. 명소답게 사람들로 붐빈다. 반달 모양의 투명 바닥이 설치돼 있어 내려다보면 스릴이 넘친다.
다릿돌전망대를 지나 블루라인파크 청사포정거장에 이른다. 청사포정거장은 스카이캡슐의 시종착점이기도 해 규모가 꽤 크다. 청사포정거장 2층에서 고가 궤도가 뻗어져 나오고, 장난감 같은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스카이캡슐이 궤도를 따라 천천히 오간다. 청사포정거장을 지나 만나는 철길 건널목에서 바닷가 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청사포다. 청사포는 원래 ‘푸른 뱀이 나타난 포구’라는 뜻으로 ‘청사포(靑蛇浦)’라 불렸지만, 지명에 ‘뱀 사(蛇)’가 들어가면 좋지 않다고 여겨 ‘모래 사(沙)’로 바뀌었다고 한다. 푸른 뱀이 푸른 모래가 됐다. 욜로 갈맷길 3코스의 이름은 블루라인파크에서 ‘블루라인’, 청사포에서 ‘푸른 모래’를 따왔다.
청사포에는 청사포 표지석 맞은편에 이곳 지명의 유래와 관련 있는 ‘청사포 당산 망부송’이 있다. 고기잡이를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아내가 소나무에 앉아 밤낮없이 기다렸다. 어느 날 아내 앞에 푸른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용궁으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망부송’이라고 불렀다. 아내 앞에 나타난 푸른 뱀은 청사포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청사포 몽돌해변에선 ‘차르르 차르르’
청사포 당산 망부송에 들렀다가 다시 덱길로 돌아와 미포 쪽으로 걷는다. 차르르 차르르~. 파도에 밀려 몽돌이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청사포 몽돌해변에서 나는 소리다. 덱길에서 몽돌해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약 200m 길이의 몽돌해변에 수박 만한 몽돌부터 구슬 정도 크기의 몽돌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미포 쪽으로 걷다가 덱길 옆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등 장승 무리들과 휴식 공간인 ‘바다소리 갤러리’를 잇따라 만난다. 바다소리 갤러리는 해안 경계용 옛 군 막사가 시민들의 문화 쉼터로 탈바꿈된 곳이다. 하얀 안내판이 ‘햇살과 파도 소리에 몸을 맡기고 잠시 쉬어 가라’며 발길을 이끈다.
달맞이터널은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동해남부선의 터널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알록달록한 아치형 기둥을 배경 삼아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어 포토존으로 인기가 있다. 달맞이터널과 청사포 몽돌해변은 1985년 북한 간첩선이 침투했던 곳으로, 30여 년간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됐다. 달맞이터널을 지나 욜로 갈맷길 3코스의 종착점인 미포정거장에 닿는다.
걷기 앱을 이용해 측정한 순수한 완보 시간은 2시간 5분, 걸음 수는 1만 3702걸음, 거리는 9.32km다. 청사포 전망대까지 갔다 돌아온 거리와 시간도 포함됐다.
2023-03-0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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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에 실려 온 매향 가득…원동매화축제, 다시 열린다
때마침 ‘봄의 전령’ 매화를 보며 봄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 코로나19 확산으로 2020년부터 3년간 열리지 못했던 경남 양산 원동매화축제가 올해 재개된다.
경남 양산시와 원동매화축제추진위원회는 오는 11~12일 원동면 원동마을 일원과 쌍포매실다목적광장에서 원동매화축제를 개최한다. 매화 군락지로 유명한 원동역과 주변 주말장터 일대가 볼거리와 체험 거리로 가득 채워진다. 상춘객들은 원동역~주말장터, 주말장터~둑방길, 쌍포매실다목적광장 일대에서 원동 매화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원동 매실과 미나리, 딸기 등 먹거리도 풍성하다. 낙동강변 철길을 따라 자리 잡은 매화나무는 원동역을 중심으로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만발한 매화 옆으로 달리는 기차는 매우 운치가 있고 수려해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원동역과 가까운 매화 명소인 순매원도 1일부터 25일까지 개방한다. 개방 시간은 오전 8시~오후 6시 30분. 순매원은 매실 관광농원으로 사유지다. 순매원 역시 코로나19로 2020년부터 개방하지 않았다.
원동매화축제 기간 중에는 주차가 쉽지 않다. 원동역까지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인 양산 통도사에도 매화가 피었다. ‘자장매’라 불리는 홍매화가 유명한데,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지계 정신을 기린 이름이다. 1643년에 심었다 하니 수령이 350년을 훌쩍 넘겼다. 통도사 경내 극락전, 휴게소 등 주변에도 매화나무가 여럿 있다.
2023-03-02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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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전령’ 매화 활짝…봄이 오는 소리 보이나요?
아직 추위가 완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엄동설한을 이겨 내고 채 가시지 않은 추위에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이 있으니, 바로 매화다. 매화가 남녘에서부터 하나둘 만개하면 봄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다. 매화를 ‘봄의 전령’이라 부르는 이유다. 매화는 겨우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사이에서 홀로 꽃을 피워 고결한 자태와 기품이 더욱 깊다. 이런 매화이기에 난초(蘭), 국화(菊), 대나무(竹)와 함께 사군자라고 하여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했다. 은은한 매향이 퍼져 나가면, 봄이 오는 발걸음은 더욱 빨라진다. 매화는 초봄까지 꽃을 피우며 봄의 향연을 준비하는 벚꽃과 유채꽃, 개나리꽃 등에 봄 기운의 바통을 넘긴다. 매화가 아른거려 부산에 온 봄 소식을 찾아 길을 나섰다.
■햐얀 눈꽃 내리는 ‘충렬사’
충렬사(부산 동래구 충렬대로 347)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선열을 모신 사당이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돼 있다. 사찰(절)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충렬사 곳곳에는 매화나무가 있다. 도착하자마자 매화가 눈에 들어온다. 충렬사 입구에 있는 충렬탑 뒤쪽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백매를 환하게 피웠다. 입구로 들어가 안내소를 지나면 정면에 본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고, 계단 끝에 본전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인 충렬문이 있다. 충렬문과 이어진 담장의 오른쪽과 왼쪽 앞에 둥그스름한 매화나무 세 그루가 하얀 꽃을 가득 피웠다. 종이컵에 가득한 팝콘 같다.
충렬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기념관 뒤쪽 문으로 나가면 충렬사 매화의 진수가 고고하게 서 있다. 매화나무 다섯 그루가 백매를 환히 피우고 있는데,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는 듯 야릇하다. 추켜든 사진기 앵글 안에 백매가 한가득 담긴다.
매화는 벚꽃과 헷갈리기 쉽다. 피는 시기가 조금 다르지만, 꽃의 크기와 생김새, 색깔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차이를 살펴보면, 매화는 꽃이 가지에 붙어 피고, 벚꽃은 가지에서 나온 꽃자루의 끝에 핀다. 매화는 향이 진하고, 벚꽃은 향이 거의 없다. 매화나무에는 매실이, 벚나무엔 버찌가 열린다.
■삼색 매화 만나는 ‘범어사’
부산을 대표하는 고찰인 범어사(부산 금정구 범어사로 250)는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이다. 범어사 내에서는 여러 곳에서 매화를 만날 수 있는데, 특히 홍매와 청매, 백매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더욱 설렌다. 매화는 색에 따라 백매, 홍매, 청매, 분홍매, 흑매 등으로 부른다. 이 중 백매와 청매는 모두 꽃잎 색이 하얗지만, 백매는 꽃받침이 자주색, 청매는 연두색을 띤다. 홍매의 경우 붉음이 옅으면 분홍매, 짙으면 흑매로 구분하기도 한다.
범어사 입구를 지나 조금만 걷다 보면 ‘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 지정 보호구역이라는 문화재 보호 안내문이 보이고, 대웅전과 설법전 방향 두 갈래 길로 나뉘는 부근에 홍매가 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라보니 붉음이 더욱 진하고 선명해 매혹적이다.
설법전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 올라가다 담장 위로 매화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에 걸음을 재촉했다. 꽃잎만 보고 백매인 줄 알았건만, 꽃밫침이 연둣빛을 띠는 청매다. 못다 핀 꽃망울들이 제법 남았지만, 이미 핀 청매들로도 충분히 상큼하고 발랄하다.
경내를 걷다 보면 백매를 여럿 만난다. 화엄전 앞에 매화나무 다섯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백매가 드문드문 피었다. 대웅전에서 다시 돌아 내려오는 길 천왕문 부근 담장 너머에서도 매화나무들이 만개했다.
■‘유엔기념공원’과 ‘대연수목전시원’
유엔기념공원(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93)과 대연수목전시원은 부산에서 매화가 가장 먼저 피는 곳이다. 보통 매년 2월 초중순 꽃을 피운다.
유엔기념공원은 한국전쟁 때 전사한 유엔군이 잠들어 있는 세계 유일의 유엔 묘지다. 유엔기념공원은 연중 오전 9시부터 동절기(10~4월)는 오후 5시까지, 하절기(5~9월)는 오후 6시까지 개방한다. 묘지 아래쪽에 있는 조경 공간에 홍매 한 그루가 초록 잔디와 조경수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잔디를 밟고 들어가 홍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지만, 올해는 그러지 못하도록 줄을 쳐 놨다. 아쉽지만 먼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 봄 기운이 전해진다. 공원 산책로를 걷다 보면 홍매 20여 그루를 식재해 놓은 곳이 눈에 들어오는데, 방문객들은 출입할 수 없는 곳에 있어 멀리서만 볼 수 있다.
대연수목전시원은 유엔기념공원을 50m 폭으로 감싸 안으며 자리한 녹지 공간이다. 뒤편으로 평화공원과도 연결된다. 대연수목전시원에는 분홍매 두 그루와 백매 한 그루가 있다. 수목원 내 가지가 휑한 다른 수목들 사이에서 봄의 전령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백매 바로 옆에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가 있어 다가섰다. 산수유꽃이 하나둘 피어 만개할 채비를 하고 있다.
■꿋꿋한 기개와 충혼 서린 ‘수영사적공원’
수영사적공원(부산 수영구 수영성로 43)은 부산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 시대 남해안의 4군영을 관할했던 수군총괄군영인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자리다. 현재 성은 없고 성지 관련 유적만 남아 있다. 안용복 장군 충혼사당과 충혼탑, 25의용단 등 유형문화재와 비지정 문화재가 있다. 수영사적공원의 매화는 25의용단 내에 있다. 25의용단은 임진왜란 때 수영성에서 일본군에 저항하다 죽은 25명의 수군과 성민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개방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25의용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가는 외삼문에 들어서면 내삼문 오른쪽 담장 앞에 백매 두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산에는 이 밖에도 해운대구 장산 대천공원과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 등지에서도 매화를 만날 수 있다. 매화 명소들을 정리하다 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다. 고결한 마음·결백·기품·인내. 매화의 꽃말처럼 전몰 호국 영령들의 충의가 서린 곳들이라는 점이다. 매화를 보며 봄을 반기되, 잠시 앞서간 이들을 생각하는 경건한 마음도 잊지 말자.
2023-03-0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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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양 건물 ‘아테네 학당’, 내부엔 더 놀라운 볼거리
재개발과 디지털 시대의 격랑으로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에 모처럼 생기가 돌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책을 매개로 한 문화 골목이자, 부산 문화의 상징이다.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와 대구 헌책방 골목 등 전국의 유서 깊은 책방 골목들은 재개발과 온라인 서점, 디지털 북의 등장에 맥을 못 추고 스러져 가고 있지만, 부산의 책방골목은 개발과 보존의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됐다. 동행의 마중물이 된 건 다음 달 문을 여는 복합문화공간 ‘아테네 학당’(부산 중구 대청로 63)이다. 오피스텔 건립을 위해 헐릴 예정이었던 보수동 책방골목의 한 건물이 책방골목의 보존 가치에 크게 공감한 한 건설사 대표의 용단에 책방골목의 부흥을 이끌 랜드마크로 탈바꿈했다. 거대한 책 5권이 책장에 꽂혀 있는 건물 외관은 이미 큰 화제가 됐고, 건설사 대표가 깊은 애정을 쏟은 내부 인테리어도 최근 마무리됐다. 아테네 학당은 다음 달 4일 문을 연다. 어떤 내부 모습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에 활력을 불어넣게 될까. 아테네 학당의 속을 미리 들여다 봤다.
■명화 속 철학자들, 복합문화공간에 되살아났다
오피스텔 건립 대신 복합문화공간 리모델링을 결정한 김대권 아테네 학당 대표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부산 미래유산’(2019년 선정)이 된 보수동 책방골목과 조화롭고, 그 가치와 상징성에 걸맞은 리모델링 방향을 찾는 일이었다. 건물 외관은 물론 내부도 마찬가지. ‘헌책이 가진 허름하지만 푸근함…’ 그는 평소 좋아했던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을 떠올렸다. 그림 정중앙에 있는 두 인물, 고대 그리스 철학을 대표하는 플라톤과 리스토텔레스는 각각 자신들의 저서인 ‘티마이오스(Timaeus)’와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을 들고 있다. 김 대표는 이 책 2권을 건물 외관에 그려 넣었다. 건물 외관에 있는 책 5권 중 3권에 표제가 있다. 한가운데 책에는 ‘Scuola di Atene-Raffaello Sanzio’(1511년)를 그려 넣어 새롭게 탄생할 복합문화공간의 이름과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를 연결 지었다. 김 대표는 “명화의 숨은 의미를 강조하고, 산만함을 없애기 위해 나머지 2권은 표제를 달지 않았다”며 “책을 쌓은 디자인도 생각해 봤지만 꽂은 디자인으로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김 대표는 아테네 학당 4층 천장에 ‘아테네 학당’을 그려 넣었다. 건물 외관에 가져다 썼던 ‘아테네 학당’을 내부로도 들여왔다. 천장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건물 2~4층의 한가운데 공간을 과감하게 뚫었다. 2층과 3층을 잇는 계단을 오르며 천장을 보면 명화가 눈에 들어온다. 철학과 미술을 좋아한다는 그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 3대 거장이다. ‘아테네 학당’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인, 학자들이 학당에 모여 인간의 학문과 이성의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3층에는 라파엘로의 또 다른 그림 ‘자화상’이 벽에 걸렸다. 김 대표는 “라파엘로는 당대 최고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수없이 모사하며 나름의 화풍을 만들어냈다”며 “‘아테네 학당’ 그림에 등장하는 고대 철학자들의 얼굴은 자신이 평소 존경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동시대 예술가나 저명 인사들의 초상을 대신 그려 넣었다. 재밌는 발상 아니냐”며 웃음 지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헤라클레이데스, 유클리드, 에피쿠로스…. ‘아테네 학당’에는 모두 54명의 고대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김 대표는 복합문화공간 아테네 학당으로 끄집어낼 인물로 이 중 5명(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히타피아)을 엄선했고, 흉상으로 제작해 4층에 전시했다. 히타피아에 대해선 특별히 첨언했다. 그는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기도 했던 철학자 히타피아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아 흉상으로 만들어 알리는 것도 의미 있고 재밌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아테나 학당’ 그림에는 벽기둥 양쪽에 두 석상이 있다. 왼쪽은 아폴론 신, 오른쪽은 아테나 여신이다. 건물 1층 로비에는 아폴론 전신상이, 4층에는 아테나 전신상이 있다. 김 대표는 정크 아트(폐품·잡동사니를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의 대가 김후철 작가에게 전신상 제작을 의뢰했다. 처음엔 석고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지만, 헌책을 다시 본다는 의미를 담기 위해 정크 아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평소 로봇을 주로 제작했던 김후철 작가도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전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잠시 놀랐지만, 이내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아테테 학당을 ‘아테네 학당’ 자체로 꾸몄다. 그는 “전신상과 흉상, 그림에는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친절한 설명도 보탤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화 행사의 허브로… 책방골목 활력 ‘기대’
아테네 학당 내부 벽면은 헌책의 해짐을 콘셉트로 했다. 낡고 오래된 듯하지만 고전적이면서도 중후한 느낌이 든다. 전문 아트페인팅 업체에 맡겼는데, 여러 차례 붓질을 해 그런 느낌을 내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한다. 김 대표는 3층은 고전적이고 오래된 느낌이, 4층은 산뜻하면서도 단순한 느낌이 나도록 테이블, 의자 등을 골라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노란 조명과 곳곳에 달린 샹들리에는 마치 유럽의 한 건물에 와 있는 느낌을 준다.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도 고풍스럽다.
아테네 학당 1층은 서점, 2~4층은 카페를 기본으로 하고, 문화 공간으로도 활용한다. 1층에는 기존 있던 우리글방, 충남서점, 국제서점 등 3개 서점이 그대로 영업 중이다. 2층에는 커피와 음료, 빵을 주문하는 공간과 독립 공간으로 꾸몄다. 독립 공간은 서재처럼 꾸미고 빔 프로젝터도 설치된다. 독서 모임, 세미나, 스터디 등이 가능하다. 행사 주제나 규모에 따라 2~4층 전체나 일부 층을 대관한다는 김 대표의 구상이다.
카페에서 판매할 시그니처 커피와 빵도 컨설팅을 받아 완성했다. 고심이 깊었던 시그니처 커피 이름은 <부산일보> 박종호 수석논설위원의 추천을 받아 ‘밀다원’으로 정했다. 밀다원은 피란 시절 광복동에 있었던 다방이다. 김동리, 황순원, 김말봉, 이중섭, 김환기 등 문인과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밀다원은 에스프레소 투샷에 물은 조금 적게 부어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의 중간 맛이다. 각설탕까지 기호에 따라 넣을 수 있도록 제공하는 커피라고 김 대표는 귀띔했다. 예전 문인들이 밀다원에서 즐겨 마셨던 커피 스타일이라고 한다.
시그니처 빵 이름은 ‘보수동 책빵’으로 정했다. 책을 펼친 모양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착안한 이름이 기발한데, 그 모양도 자꾸만 눈길이 간다. 김 대표는 시그니처 빵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아테네 학당이 등장을 준비하는 동안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벌써 긍정적인 기운이 꿈틀댄다. 김 대표는 “인근 상가가 2년 넘게 비어 있었는데, 임차인이 나타나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라며 “아테네 학당이 책방골목 활성화의 마중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책방골목 서점들은 재개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하지만 아테네 학당이 책방골목 부활의 신호탄이 됐으면 하고 기대한다. 아테네 학당 1층에 있는 충남서점 남명섭 대표도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는 50년 가까이 한자리를 지킨 책방골목의 산증인이자 터줏대감이다. 남 대표는 “아테네 학당이 언론과 SNS 등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주말에는 확실히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조금씩 책방골목이 활성화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2023-02-23 [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