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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시장님, 생활임금은 복지입니다”
부산시가 시의회 주도로 의결한 ‘부산시 생활임금조례’ 개정안이 무효라면서 대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최근에 전해진 이 흥미로운 소식은 생각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생활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거의 비정규직이다. 대개 나와 무관한 일이거나, 먹고살기에 바빠 이런 소식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민선 8기 시의회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절대다수다. 같은 당 소속 박형준 시장이 왜 쉬운 방법(?)을 놔두고 단심제 소송을 제기해 이런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이번 개정 조례안의 취지는 시장이 생활임금 적용 대상이 되는 전 직원의 호봉을 다시 산정하고 반영해 생활임금 도입 효과가 고르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부산시는 조례안이 시장의 고유 권한인 예산안 편성권과 인사권을 침해하며 조례로 정할 수 있는 사항을 초과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시의회의 손을 들어줬다. 생활임금 지급에 관한 조례가 지방자치단체장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지 않고, 상위 법령도 위반하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은 것이다. 생활임금은 2015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부산시 2018년 등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에 도입되었다. 광역지자체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구시만 빠졌는데, 이번 판결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부산시 생활임금은 ‘최저임금 이상으로서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적, 문화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물가상승률, 노동자의 평균 가계지출 수준 등 경제·노동환경, 최저임금 등을 고려하여 결정된 임금’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번 개정안에 따르면 생활임금 적용 범위에는 시 소속 근로자뿐 아니라 공공기관과 그 자회사 소속 근로자, 시로부터 사무를 위탁받은 기관·단체·업체 근로자까지 포함됐다. 다만 실제 적용 대상은 시장이 생활임금위원회 심의를 거쳐 결정하도록 했다.
생활임금제는 1994년 미국 볼티모어시에서 시작되어 세계 각국에서 시행 중이다. 그중 민간 사업장에서도 널리 채택되고 있는 영국의 사례가 인상적이다. 영국에선 9000개 이상의 사업장이 자발적으로 생활임금에 참여해 3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임금 상승의 혜택을 받고 있다. 런던시는 2005년부터 생활임금을 시행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시장 선거에서 제안하자 노동당 후보 켄 리빙스턴이 받아들여 당선된 덕분이다. 그런데 2008년 당선된 보수당 출신 런던 시장이 생활임금제를 더 강화하고 영국 전역에서 채택하도록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바로 그 시장이 후일 영국 총리가 되는 보리스 존슨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후원업체 계약을 맺은 1000개 이상 기업에 런던시의 생활임금을 적용하도록 했다. 올림픽 개최로 생기는 모든 새로운 일자리에 생활임금을 지급해 근로 빈곤층에게도 혜택을 주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높은 고부가가치 산업이 없는 부산은 저임금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부산상공회의소가 ‘부산 MZ세대 구직자와 기업의 일자리 인식 조사’를 한 결과 또한 그랬다. 부산의 MZ세대 대부분은 부산에 살고 싶어 했지만, 임금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 임금과 부산 기업이 지급하는 임금의 격차는 월급 33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부산에 사는 기성세대로서 참으로 미안한 대목이었다. 내년도 최저 임금이 올해보다 2.5% 인상했는데 올해 소비자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3.5%로 상향 조정됐다. 내년은 실질임금이 줄어드는 첫해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다. 특히 하위 계층의 실질소득이 떨어지고 있다. 소득 양극화,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 정치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어 걱정이다.
대법원의 판결문을 읽다 정신이 번쩍했다.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사무는 그 주민이 되는 근로자가 시에서의 기본적인 생활여건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주민복지에 관한 사업이다’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생활임금은 복지 사업이었다. 생활임금은 적용 대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뿐만 아니라 파급 효과가 커지면 저임금 노동자 전반의 임금 수준을 높인다. 생활임금은 지역 주민의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공공자금에 의해 어떤 유형의 일자리가 창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역사회의 가치를 보여 준다. 공공부문 내에서 생활임금의 적용 대상을 확대해 나가면서, 민간 영역으로 확대해야 할 때다. 미국은 시의 재정 지원을 받거나 시 소유의 택지나 건물에 입주하려는 민간업체로까지 생활임금의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2030부산월드엑스포가 유치되고 관련 계약을 맺는 모든 기업에 부산시가 생활임금을 적용하겠다고 선언하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
박종호 수석 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8-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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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공존의 바다
“와우 여름이다!/이게 뭐야 이 여름에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안 되겠어 우리 그냥 이쯤에서 헤어져 버려….” 여름 하면 생각나는 노래가 그룹 쿨(COOL)의 ‘해변의 여인’이다. 일단 그룹 이름부터 시원하고, 다소 협박성 가사가 서늘한 기분까지 선사한다. 본격적인 휴가철로 접어들었지만 긴 장마와 전국적인 물난리 탓에 여름특수가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소식만 들려온다. 푸른 하늘이 반가운 요즈음이다.
국내 대표적인 피서지 부산에서 해운대해수욕장은 지난해 방문객 881만 명으로 전국 1위, 광안리해수욕장은 420만 명으로 3위를 차지했다. 올해는 개장 초이지만 광안리에 해운대보다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는 흥미로운 소식이다. 이달 초 〈부산일보〉에 실린 관련 기사에서 한 관광객은 “물놀이를 하기에는 해운대가 더 좋지만 숙소 가격이 비싸 친구들과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광안리는 좀 더 저렴한 느낌이다. 물에 들어갈 게 아니라면 광안리 카페나 술집에서 바다를 보며 즐기는 게 더 좋은 것 같다”라고 그 이유를 잘 설명했다. 초고층빌딩 엘시티와 특급호텔로 둘러싸인 해운대는 청년들이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이처럼 광안리해수욕장은 잘나가지만 인접한 민락수변공원 일대 상인들은 요즘 죽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이미 올해 초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결정 이후부터 횟집마다 손님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3년을 숨죽여 참았던 코로나 시절보다 장사가 더 안되어 걱정이란다. 일본 정부가 오염수 방출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지경이다. 일본이 예상대로 다음 달부터 오염수 방류를 시작하고, 설마 하던 후쿠시마산 수산물까지 수입이 재개되면 그야말로 지옥문이 열리는 셈이다.
민락수변공원 금주구역 지정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오후 6시부터 오전 1시까지 수변공원 안으로 술을 반입했다 걸리면 과태료 5만 원을 부과하는 조치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변공원을 찾던 인파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수변공원은 금주지도원들만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아까운 빈터가 되었다. 생수나 음료수병에 술을 넣어서 마시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전국에서 몰려오던 청년들은 예전 모습을 아쉬워하면서도 냉정하게 발길을 돌렸다.
특히 인접한 밀레니엄회센터 일대는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가장 바빠야 할 저녁 시간에도 너무 한산해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횟집 상인들은 팔지 못해 매일 죽어 나가는 고기를 보며 한탄했다. 포장마차, 편의점, 노래방, 해장국집까지 손님이 끊겼다고 한다. 한 해 90만 명이 찾는 ‘핫플’이 하루아침에 유령 광장이 된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금주’라는 취지에는 공감하더라도, 이번 금주구역 실시 타이밍은 너무 좋지 않았다.
반면에 서울을 비롯한 타 지자체는 금주구역 시행을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다. 서울시의회는 최근 한강공원을 포함한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제한하는 ‘한강 금주’ 조례안 심사를 보류했다. 한강공원을 금주구역으로 지정하는 법적 근거 마련에 시민들의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다. 서울시는 음주를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맥주 한 캔 정도도 즐기지 못하느냐는 목소리도 있어서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 다음에 논의한다는 입장이다.
수영구는 이달 말부터 금요일마다 수변공원 야외무대에서 재즈밴드, 마술쇼, 스트리트 댄스와 인디밴드 등의 상설 공연을 연다고 한다. 금요일에는 그렇다고 치고, 나머지 요일에는 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수변공원 상인들은 여름에 잠깐 벌어서 겨울을 견디고 사는 처지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수변공원도 여름 한철이었다. 부산상회 이미숙 대표가 “시간을 정해서 음주를 허용하고, 그 시간이 끝나면 상인들이 나와서 쓰레기를 치우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던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구청과 상인, 그리고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면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다. 매사에 TPO(Time, Place, Occasion)가 중요한 법이다.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때와 장소, 경우에 따른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인한 수산물 소비 위축이 너무나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위기의 수산물 소비 활성화라는 더 큰 명분을 걸고 수변공원 금주구역 지정 조치를 일시적으로 보류하면 좋겠다. 전통시장에도 소비 촉진을 명분으로 점심시간에는 주차단속을 유예하지 않는가. 수변공원을 부산의 명물로 살리고, 주민과 상인들도 같이 사는 길을 찾기 바란다. 우리에게 ‘공존의 바다’가 절실하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7-2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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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수변공원 금주령’ 최선이었을까
사회봉사 80시간, 제재금 500만 원, 소속팀 1군 명단 제외. 국가대표팀에서 10년 넘게 뛴,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 김광현이 이 같은 망신을 당한 이유는 술 때문이었다. 지난 3월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대회 기간 유흥업소를 찾아 심야 음주를 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다. 음주 파문이 어디 이번에 야구 종목뿐이랴. 2007년 아시안컵축구대회 기간에 2002한일월드컵 4강의 영웅 이운재를 비롯해 이동국 등의 음주 사실이 밝혀졌다. 이운재는 울면서 사과 기자회견을 했지만 국가대표 자격 정지 1년 징계를 받았다. 술은 폭행, 강도, 살인 등 강력 사건을 일으키는 만악의 근원. 그놈의 술을 아예 못 마시게 하면 어떨까.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금주령을 내려 술을 금지했지만 실패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의 술 문화를 들여다본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에는 음주로 인해서 생긴 구체적인 사건들이 빼곡하게 등장한다. 무엄하게도 옥좌에 올라간 관리, 어명을 깜빡해 경을 친 내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죽은 재상 등 사연이 기가 막힌다. 정인지는 임금을 '너'라고 불러서, 무신 어유소는 궁녀를 희롱하면서 술을 따르라고 해서 난리가 났다. 이게 다 술 때문이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수시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힘 있는 자들은 법을 무시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단속되는 상황이 줄곧 지속되었다.
부산의 민락수변공원이 2주 뒤인 7월부터 금주 구역으로 바뀐다고 한다. 오죽하면 ‘술변공원’이나 ‘술판공원’이라는 오명으로 불릴까. 수변공원은 여름철마다 쓰레기 투기, 취객의 고성방가 등 무질서로 몸살을 앓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면서, 근사한 광안대교 야경을 보면서, 인근 회센터에서 저렴하게 회를 사서 먹고 마실 수 있어 전국의 젊은이들이 너무 몰려든 탓이었다. 그 결과 강성태 수영구청장이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수변공원 금주 구역 추진 의사를 밝히고, 수영구의회가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수변공원에서 음주 적발 시 과태료 5만 원 부과 조치는 특히나 주민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수변공원은 한 해 90만 명이 찾는 소위 ‘핫플’이다. 임박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로 안 그래도 횟집마다 손님이 격감했는데, 내달부터 수변공원에서 술을 못 마시게 하면 민락회센터에 피해가 막심하지 않을까. 뿌리내린 음주 문화가 바뀌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금주 정책이 과연 큰 마찰 없이 안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야심한 수변공원에서 이루어지는 음주를 어떻게 단속하겠다는 말인지.
사람들이 지금처럼 술병을 보이도록 꺼내 놓고 마시지는 않을 것 같다. 생수나 음료수병에 술을 넣어서 마시는 경우엔 어떻게 하나. 단속 공무원이 “제가 직접 마셔 보겠습니다” 혹은 음주측정기를 대고 “더 세게 불어 보세요”라고 할까. 혹시 그 옛날 학창 시절처럼 소지품 검사? 단속 공무원은 힘들고, 관광객은 짜증 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불 보듯 하다. 밀어붙이기식 금주령보다는 토론회와 공청회를 통한 공론화 작업을 거치고, 각 분야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서 나온 결론에 맡기면 좋지 않았을까.
수용 한계를 초과해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오는 ‘오버투어리즘’ 때문에 생긴 수변공원의 문제는 일일 입장객 수를 조절하면 해결할 수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등 유명 관광지도 일일 입장 관광객 수 초과 시에는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관광 전문가인 왕병구 전 부산관광공사 경영전략실장은 “ICT 기술을 활용한 바코드 인식으로 사전 예약을 받아 입장객 숫자를 적절하게 관리하면 된다. 사전에 이용 방침에 동의하고도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는 페널티를 주는 식으로 하면 수변공원의 과잉 관광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라며 아쉬워했다.
수변공원에서 음주 좀 못하게 해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년 이상 세대들은 별 타격이 없다. 하지만 돈 없는 청춘들은 다르다. 술 먹지 마세요,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시끄럽게 떠들지 마세요, 다음 달부터 웬만하면 오지 마세요…. 청년들은 원룸에만 틀어박혀 있으란 뜻인지.
문제를 줄여 나가면 되는 것이지, 조선 시대에도 실패한 금주령을 내리는 방식은 꼰대스러워 보인다. 물론 상인들도 달라져야 한다. 대만의 컨딩야시장에서는 구매한 곳과 무관하게 음식 쓰레기를 어느 가게에서나 다 받아 준다고 한다.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만 뭐라고 할 게 아니다. 어디서도 받아 주지 않으니 버리고 간다. 이해 당사자인 상인들이 먼저 발 벗고 나서서 수변공원 쓰레기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했다. 부산에서의 경험에 따라 부산 관광의 미래, 부산의 미래가 달라진다. 뭐든 없애기는 쉽지만, 새로 만들기는 어렵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6-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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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균형발전 싫으면 떠나라
얼마 전에 부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교수를 했던 분이 대학 시절 부산에 왔다 가면 친구들이 “시골 잘 다녀왔냐”고 말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은 부산을 한 번도 시골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서울 친구들은 서울이 아닌 지방은 죄다 시골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지방 출신들은 다 비슷한 경험을 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서울 사람들 인식도 변하지 않았을까. 부산을 대놓고 시골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서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서울 출신으로 서울대까지 나와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된 두 사람의 연이은 발언이 매우 실망스럽다. 첫 번째가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고영선 부원장이다. 고 부원장은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간담회에 발제자로 나와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을 높이려면 지역균형발전과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정책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심지어 “불필요한 수도권 규제를 완화해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각 부문 이해 집단들이 국익을 위해 양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방은 모든 분야에서 서울에 종속된 내부 식민지라는 평가가 10년 전부터 나왔는데, 그것도 모자라 더 내놓으라니.
또 한 사람은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이다. 당 정책을 심의·입안하는 정책위의장이 되지 않았다면, 2010년 부산시장에 출마해 “부산을 바꿔 서울을 능가하는 경쟁력 있는 도시로 만들겠다”라고 약속하지 않았으면 또 모르겠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어떻게 산업은행 부산 이전 철회 운동을 여전히 주도할 수가 있는가. 내년 총선을 겨냥해 부산 발전 방안으로 내놓은 사직야구장을 돔 구장으로 건설하자는 제안도 그렇다. 지난달 말 부산시는 ‘개방형(하늘이 뚫려 있는 형태의 구장)’으로 사직야구장 재건축 방향을 확정했다. 부산에 관심이 없어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던져 보는 거니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
당신들은 작금의 수도권 전세사기와 ‘지옥철’로 불리는 김포골드라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전세사기는 수도권이 진원지로 발생 건수도 압도적으로 많다. 주택 1139채를 소유하고 170억 원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빌라왕’ 사건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발생했다. 주택 2700채를 보유하고 전세보증금 266억 원을 가로챈 ‘건축왕’은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에서 활동했다. 경기도~김포공항역을 잇는 김포도시철도에는 출근길 압사 사고까지 우려되지만, 버스를 증편해도 해결이 안 된다. 지하철 연장이나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신설이 현실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그 결과 더 많은 역세권 아파트가 들어서고, 더 많은 신규 인구가 유입되어, 다시 지옥철 문제가 불거져도 괜찮은가.
벚꽃이 졌다. 부경대·해양대·창원대 등 학생 수 감소로 존폐 기로에 처한 비수도권 13개 국립대학은 교명 앞에 ‘국립’을 붙이는 개명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대와 같은 국립대라고 강조해 신입생 충원에서 인지도를 높여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생존 투쟁이다. 상당수 사립대는 이미 자체 발전 기반을 잃은 상태다. 외국인 유학생마저 약 60%가 수도권에 있을 정도로 수도권 쏠림 현상은 이미 심해졌다. 학교 간판을 바꿔 달고 장학금을 두둑하게 주면 ‘인서울’이란 수도권 집중화 현상을 막을 수 있을까.
“수도를 절대 허용하지 말고 정부를 각 도시에 번갈아 자리 잡게 하라. 영토에 골고루 사람들이 살게 하고, 어디서나 똑같은 권리를 누리도록 하며, 도처에 풍요의 활기를 나눠 주라. 그렇게 하면 국가는 최대한 강력하고 가장 잘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도시 성벽은 오직 시골집들의 잔해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심하라. 수도에 궁궐이 세워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라 전체가 오두막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듯하다.” 1762년에 출판되어 프랑스 혁명의 밑받침이 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뜻밖에도 이처럼 ‘지방분권’ 문제가 나온다. 루소가 살던 당시의 프랑스도 철저하게 수도인 파리 중심 국가였다. 프랑스에서는 미테랑 대통령 시절인 1982년에 지방분권법이 제정되었고, 시라크 대통령 시절인 2003년 지방분권 개헌이 이루어져 마침내 루소의 소망이 실현되었다.
25일 ‘법의 날’을 보내며 이전 정부에서 추진하다 무산된 지방분권 개헌이 떠오른다. 그때 지방분권형 개헌이 이뤄졌다면 지방의 형편이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아무튼 윤석열 정부의 국정 목표 역시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다. 지역균형발전이 싫다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23-04-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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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수도권만 살 수 있을까
지난주에는 빅이슈가 많았다. 12년 만의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최근 WBC 야구 한·일전의 결과가 외교에서도 이어진 느낌이다. 그 직전인 14일에는 가덕신공항의 2029년 12월 개항이 확정됐다. 부산시민이 염원해 온 2030부산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이전 가덕신공항 개항이 마침내 가능해진 것이다. 15일에는 경기도 용인에 세계 최대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 전국 15개 국가첨단산업단지 지정 계획이 나왔다. 이 계획에 유독 부산만 빠져 의아했다. 부산시가 땅이 없어서 신청을 안 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부산은 가덕신공항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으니 좀 빠져 있으라는 의미로 읽혀 찜찜했다.
중앙지가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이율배반적이었다. 중앙지란 서울에 본사가 있는 신문사가 전국에 보급하는 신문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들에게 지방은 안중에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돌연 공기 6년 단축한다는 가덕도 공항, 믿거나 말거나인가’라는 사설 제목으로 “내년 총선 부산 경남 표를 얻으려고 이런 믿거나 말거나 발표를 한다”라고 몰아갔다. 동아일보 사설 제목은 ‘가덕도 신공항 工期 절반으로 줄이겠다… 이래도 되나’였다. 한겨레신문도 ‘가덕도 신공항 5년 단축, 안전 경시 무리수 아닌가’라며 동조했다. 서울신문은 “도로 물려도 시원찮을 국책사업에 안전성 시비까지 얹어져서는 말이 안 된다. 총선이 다가오니 부산·경남 표밭을 의식한 포퓰리즘이 또 도지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든다”라고 비난을 쏟아부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은 ‘추앙했다’. 조선일보는 ‘수도권에 세계 최대 삼성 반도체 결단, 한국에 마지막 기회’라는 사설 제목으로 찬양했다. 다른 중앙지도 비슷한 태도로 속도전을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정부는 반도체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제때 공급할 수 있도록 수도권 대학 정원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한 발 더 나아갔다. 중앙일보는 “지방 분권에 역행하고 수도권 집중을 강화한다는 비판 역시 극복해야 한다. 충분한 전문인력 양성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지지율이 하락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라며 돌격대 역할을 자임했다. 한국일보만이 “추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균형발전 저해와 특혜 논란 등을 보완할 실질적인 대책에도 신경을 쏟길 바란다”며 비교적 균형 잡힌 자세를 보였다.
2002년 중국 민항기의 경남 김해시 돗대산 충돌 사고로 출발한 가덕신공항 건설과 관련한 논란이 일단락되는 데 20여 년이 걸렸다. 공법을 바꾸고 공기를 단축해 엑스포 전에 안전한 국제공항을 개항하겠다는 계획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으려면 엄청난 부지가 필요해 ‘수도권 공장 총량 규제’가 완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벌써부터 수도권 대학 정원을 풀라고 성화다. 속도전은 왜 수도권에만 유효한가.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 문을 닫는다’는 말이 씨가 되면서, 벚꽃을 보는 심사가 편치 않다. 지방을 쥐어짜서 서울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일 게다.
서울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사실이 있다. 전국의 출산율이 낮아서 걱정이지만 특히 서울은 지난해 17개 시도 중에서 가장 적은 0.59명이란 충격적인 출산율 수치가 나왔다. 두 명이 0.5명을 낳으니 서울은 이미 멸종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인구학자 서울대 조영태 교수가 얼마 전 아침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이렇게 떨어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너무나 엄청난 집중 때문이다. 경쟁이 굉장히 심해 모든 인생이 다 경쟁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새롭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진행자가 “저출산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핵심 원인을 수도권 집중에서 보는 이런 시각은 지금 처음 듣는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라고 감탄해서 오히려 놀랐다. 서울이라는 고지에 서면 지방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은 ‘전기 먹는 하마’라고 불린다. 용인에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우리나라 연간 산업용 전력 판매량의 무려 20%가 소비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력 자급률이 서울은 8.9%, 경기는 60.1%에 불과하다. 막대한 전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어디서 끌어오느라 얼마나 비용이 들지 생각은 한 것일까. 원전을 떠안은 부산의 전력자급률은 200%가 넘는다. 항만, 공항, 대학에 전력까지 풍부한 부산 주변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은 왜 고려의 대상조차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부가 아무리 저출생 대책을 세우면 뭐 하나 싶다. 그 몇 배, 몇십 배의 수도권 초집중 정책이 쏟아지니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이래저래 맘 편하게 벚꽃을 즐기기조차 힘든 봄이다.
2023-03-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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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김장하 보유 도시
지방에는 아직도 사람 냄새가 느껴진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보고 새삼 깨달은 것이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경남MBC가 만든 이 다큐는 지난해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 2부작으로 경남 지역에만 방송이 되었다. 방영과 동시에 SNS에서 추천 열풍이 불었고, MBC는 이례적으로 지난 설 연휴 전국 방송으로 다시 내보냈다. 그 뒤 전국에서 난리가 났다. 이 다큐가 던진 감동에 여러 방송뿐만 아니라 중앙지와 지방지를 막론하고 신문 기사나 칼럼으로 다루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김장하라는 한 개인은 대체 경남 진주에서 그토록 많은 선행을 수십 년간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해 왔을까. 그의 도움으로 수많은 학생이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쳤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한 쉼터가 만들어졌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극단이 안정적인 공연장을 갖게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제작했고, 〈진주신문〉은 10년 동안 발행할 수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존경스럽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장학금 덕분에 공부를 계속한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감사 인사를 하러 가자 “사회에 받은 걸 주었을 뿐이니 혹 갚아야 할 게 있다면 사회에 갚아라”고 했다.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는 이에게는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라고 위로했다. 장학금을 받고도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했다고 미안해할 때는 “그것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길이다”라고 존중했다.
뜻밖의 인간적인 면모는 재미를 더했다. 그는 야구 구경을 좋아하고 최동원 선수를 참말로 좋아했다고 털어놓는다. “스트라이크 던져서 맞으면 또 그 자리에 한 번 더 던지거든. 쳐 봐라 이거지. 나는 그런 배포가 좋아.” PD가 어디 팬이냐고 묻자 “옛날에는 롯데였고, NC로 갈아탔지”라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다큐가 방영된 뒤 배주현 창원시 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는 “이런 분이 NC 팬인 것이 코리안시리즈 우승보다 더 뿌듯하다”, 진주 사람들은 “김장하를 가진 진주에 산다”고 자랑한다.
롯데 자이언츠는 의문의 1패를 당했다. 롯데는 1988년에 선수회를 만들려고 했던 최동원을 삼성으로 트레이드했다. 최동원에 관한 다큐 영화를 만든 감독을 만나 제작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롯데로부터 딱 한 번 전화가 왔는데 “NC의 지원을 받았느냐? 선수협 이야기가 나오느냐?”라는 두 가지만 묻고 끊더라고 했다. 롯데가 지금처럼 애증의 대상이 아니라, 지역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팀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큐에는 김장하의 발자취를 집요하게 쫓는 사실상 또 한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영화는 평생을 지역 언론에 몸담은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가 퇴직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람을 어떻게 취재할지 고민하고, 백팩을 메고 김장하를 아는 100여 명의 취재원을 버스나 기차를 타고 찾아가 인터뷰하는 모습이 로드무비처럼 느껴졌다. 김 기자는 30년 전에도 선생의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2016년에는 그의 이야기를 한 대목으로 다룬 〈별난 사람 별난 인생〉을 출간했다. 김 기자는 2015년 〈풍운아 채현국〉을 출간한 뒤 여러 사람들로부터 김장하 선생의 기록을 꼭 남겨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서 7년간 주변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고 한다. 종이 매체와 지역방송과의 협업도 눈여겨볼 대목이었다. 김현지 MBC경남 PD는 2년 전 선생의 승낙을 얻지 못해 그때는 포기했지만 이번에는 김 기자와 협업으로 성공했다. 김 PD는 전국 방송에 출연해 “새로운 이야기는 늘 변방에 있다. 그 이야기는 심마니처럼 훑고 다니는 우리가 제일 잘한다. 지역이 지역 스스로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줬으면 좋겠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평생 인터뷰를 거절해 온 선생이 이번에는 왜 취재에 응한 것일까. 선생이 “제일 문제점이 뭐냐면 사회가 겁을 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겁나는 데가 없이 설치면 사회가 몰락하거든”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내 나름의 답을 얻었다. 지난해 허구연 KBO 총재는 프로야구의 위기가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초창기 프로야구의 성공적인 안착 원인을 군사정권의 일 처리 방식에서 찾은 박영길 전 롯데 감독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대기업들이 서로 하고 싶은 대로 서울로 몰려든 게 아니라 지역별로 나누어 맡아서 균형을 이루었고, 그래서 전 국민이 자기 고향 출신 선수들이 뛰는 팀을 응원하면서 프로야구에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 훌륭한 출발이었다. 지금은 수도권 구단이 5개로 절반을 차지한다. 위기에 빠진 프로야구 판을 보면서, 지방소멸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2023-02-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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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너의 길을 만들어라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800km)에는 새로운 순례객들의 발자국이 날마다 생긴다고 한다. 연간 30만 명이 완주 증서를 받아 간다니 말 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이 길을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곳’으로 꼽는다. 산티아고길 순례자 중에는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도 있었다. 일찍이 코엘료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음반 회사의 지사장으로 잘나갔는데 갑작스러운 해고로 시련을 겪는다. 39세의 코엘료는 1986년에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떠났고 이게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길을 걷고 나서 원래의 꿈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어 대표작인 〈연금술사〉와 〈순례자〉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7년 천직이라고 여기던 기자 생활을 때려치우고 50세의 나이에 산티아고길을 걸으러 떠난 한국 여성이 있었다. 그런데 막바지 여정에서 만난 영국인 길동무의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너는 너의 나라로 돌아가서 너의 길을 만들어라. 나는 나의 길을 만들 테니”라는 말은 그녀를 감전시켰다. 고향 제주도로 돌아온 그녀는 올레길을 만드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이야기다. 올레길(437㎞)은 제주도 여행의 판 자체를 흔들었다. 유명 관광지에만 몰리던 사람들이 올레길을 따라 제주도의 구석구석을 찾았다. 심지어 제주도에 청년 인구의 유입까지 늘게 만들었으니, 길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다. 올레길의 성공을 목격한 지자체들도 저마다 둘레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이 된 제주 올레길과 1200년 역사를 지닌 산티아고길은 지난 7월 우정의 길 협약을 맺고 공동완주제를 도입했다. 모든 길이 통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스페인과 제주의 길 이야기를 늘어놓은 까닭은 내년에 전 구간이 완성되는 ‘코리아 둘레길’(4500km)의 의미를 부각하고 싶어서다. 그동안 시범 개방되던 ‘DMZ 평화의 길’이 내년 4월 개통된다.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아픔이 서린 비무장지대와 접경 지역을 평화와 공존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강화, 김포, 고양,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 등 11개 코스가 있다.
코리아 둘레길 가운데 해파랑, 남파랑, 서해랑길은 이미 탐방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열린 750km의 해파랑길이 가장 먼저였다. 2020년에는 역시 오륙도에서 전남 해남군 땅끝까지 이어지는 1463㎞의 남파랑길이 열렸다. 해남 땅끝에서 인천 강화를 연결하는 1800㎞의 서해랑길은 지난 6월 개통했다. 2010년 문화체육부가 둘레길 조성에 나선 지 13년 만이다. 한국관광공사가 만든 위치정보기반서비스 두루누비 앱을 열면 선택한 코스를 편하게 따라 걸을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코리아 둘레길을 산티아고길처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걸어 본 사람들은 단조로운 산티아고길보다 바다가 보이는 해파랑길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K컬처가 세계인들의 각광을 받는 모습을 보면 코리아 둘레길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해파랑과 남파랑의 시작이 오륙도이니 부산시도 내년 코리아 둘레길의 완성을 2030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활동에 활용해도 좋겠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곳이 DMZ이라고 한다. ‘평화의 길’도 잘 운용하면 세계적인 명소는 물론이고 남북 긴장 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남북 관계에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지고 있지만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는 없다. 부산에서 베를린까지 가는 가상 열차표 가격이 61만 5000원으로 나와 관심을 끈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만주-시베리아를 거쳐 베를린에 도착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코리아 둘레길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까지 10년 이상을 이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23년에 대해선 기대보다 우려가 큰 게 사실이다. 골드만삭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짐 오닐은 1997년과 같은 아시아 외환위기를 경고했고,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을 특히 취약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힘들 때일수록 걷기가 필요하다. ‘동지에 일양(一陽)이 시생(始生)’이라는 말이 있다. 밤이 깊고 혹한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천지의 기운은 이미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볼 작정이다.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까지 이어지는 진정한 코리아 둘레길이 완성되는 그날을 기다린다.
2022-12-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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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늑대가 못 나타났어요
음악도 모르는 내가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를 찾아 들은 이유는 행정안전부가 미는 노래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어서였다. 덕분에 그의 묘한 매력에 빠져 “동시에 죽어버리자”고 선동하는 ‘환란의 세대’까지 다 듣고 말았다. 지난달 16일 부산에서 열린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늑대가 못 나타나면서 일어난 이번 사건은 사회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부마항쟁기념재단은 이랑에게 이 노래를 꼭 불러 달라고 했지만 공연을 3주 앞두고 대신 ‘상록수’를 불러주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했다. 재단에 예산 지원을 하는 행정안전부가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검토해 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부마항쟁기념재단이라는 이름을 상록재단 등으로 바꿀 생각이 아니었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국민들은 이태원 참사에 책임이 있는 행안부 장관의 말에 절망하고 있다. 행안부 입에서 지금 ‘밝고 희망찬’이란 소리가 나오는가.
정치를 보며 버린 눈과 귀를 요즘은 월드컵에서 정화하는 중이다. 지상파 3사의 시청률 경쟁도 뜨거워지고 있는데 우리 집에서는 일찌감치 MBC로 채널을 고정했다. 축구 중계라도 편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그동안 MBC 보도가 항상 공정했던 것도 아니고 청와대 출입기자가 감정을 실은 질문과 말싸움을 하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하지만 MBC가 밉다고 동남아시아 순방 직전에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막는 조치는 너무 졸렬했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있으면 힘내라고 격려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월드컵 중계 시청률이 MBC가 단연 1등이고, MBC 뉴스도 11월 들어 시청률 1등 자리에 올랐다니 사람들 마음이 다들 비슷한가 보다.
풍자는 예부터 사회의 불합리성과 불평등을 비판해 사회적 약자의 박탈감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 왔다. 풍자(諷刺)의 자(刺)는 刀(칼 도)와 朿(가시 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찌른다는 의미이니, 당하는 권력자 입장에서는 아플 수밖에 없다. 언론 자유가 낮거나 독재국가에서는 풍자 때문에 탄압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대통령을 소재로 한 유머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지금도 YS라는 별명으로 사랑을 받는 김영삼 대통령은 ‘이제는 대통령을 놀리거나 욕해도 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YS를 소재로 한 유머 책 〈YS는 못 말려〉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새삼 풍자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최근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제동을 거는 조치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2022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윤석열차’라는 제목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고등학생 작품이 경기도지사상 금상을 받고 전시된 것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엄중 경고를 하면서 불거진 논란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 뒤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는 윤석열 정부와 영부인 김건희 전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풍자한 만화가 전시에서 유일하게 제외되었다고 한다. 사실 ‘윤석열차’ 논란은 조용히 넘어갔을 일인데 문체부가 개입하면서 사태를 전국 뉴스를 넘어 외신까지 소개되도록 키웠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공개적으로 알려진 정보를 억압하려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그 정보를 접하도록 역효과를 낳는 현상을 ‘스트라이샌드 효과(Streisand effect)’라고 부른다. 저질 만평이나 싣던 프랑스 3류 언론사 〈샤를리 엡도〉가 이슬람 과격단체에게 테러를 당하면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은 사례를 윤석열 정부는 새길 필요가 있다.
요즘엔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이기호의 소설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그의 소설 〈차남들의 세계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묘사한 부분에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아서 일부를 소개한다. “전두환은 수사를 하다가 대통령에 취임한, 세계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사관이었다. 자신의 직속상관들까지도 모조리 체포하고도 성이 다 차지 않았던지 그냥 자신이 피해자의 신분을 대신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수사하다가 계속 수사와 체포로 한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국정목표가 수사였고, 국정 지표가 체포였던 것이다.” 정치는 사라지고 수사만 난무하는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김영삼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은 그의 7주기 추모 현장에서 “지금은 모두 거산(巨山)의 큰 정치 바른 정치를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라는 방명록을 남겼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는 임금이 자신의 약점이던 귀를 마음 편히 내놓고 백성의 소리를 들어 훗날 위대한 성군 중 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민심에 귀를 기울여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2022-11-2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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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얼마나 달라졌을까
“수억 번을 동시에 찔린 것 같았다.” 이태원 참사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참담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 ‘자식 잃은 부모’라고는 차마 못 부르겠다. 그래서 참혹할 참(慘)에 슬플 척(慽)을 써서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지난 주말 학업이나 취업 때문에 서울로 간 자식을 둔 부모들은 애간장이 탔다. 전화를 받지 않아 밤새 전화를 건 경우도 있었다. 지인은 아침이 되어서야 아들이 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그저 고마웠다고 했다. 부울경에 연고가 있는 사망자도 모두 8명이나 되었다.
이태원 참사는 이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부산 시민위안잔치를 새롭게 소환했다. 1959년 7월 17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이날 3만여 명의 시민이 갑자기 내린 소나기를 피하려 좁은 출입구로 몰리면서 67명이 깔려 숨졌다. 당시 〈부산일보〉 7월 18일 자는 ‘시민위안의 밤서 대참사’라는 제목 아래 사고 소식을 전했다. ‘사고를 방지하고자 미리 동원되었던 70~80명의 경찰관은 소란이 일어나자 군중들의 동요를 제지하려고 약 50발의 공포를 쏘았으나 때마침 억수같이 퍼붓는 비바람 속에 사방의 아우성을 멈추지는 못했다. 이와 같은 공포의 한 시간이 끝난 뒤에는 어린것들의 시체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으며 많은 신발이 낙엽처럼 뒹굴었다. 이러한 사고는 재작년 10월 제38회 전국체육대회 때에도 일어난 바 있으며, 작년도 시민위안의 밤에도 대혼잡을 이루어 부상자를 내었던 것이다.’ 사고 모습도 그렇고 참사의 조짐까지 너무 비슷해서 놀랄 정도다. 1959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6년밖에 되지 않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81달러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이 가 보고 싶어 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데도 기차역, 공연장, 학교, 거리 등 곳곳에서 압사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왜 후진국형 사고를 반복하는 것일까. 지난 29일 이태원에는 13만 명이 몰렸는데 경찰 병력은 고작 137명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전날인 28일에도 여성들이 인파에 떠밀려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경찰과 용산구청은 CCTV로 이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우기니 억장이 무너진다.
외국에서 들어 온 이상한 축제에 가서 그렇게 된 거 아니냐고 비난하는 일도 제발 삼가자. 그건 외국인 희생자들에게 왜 이상한 나라 한국에 가서 사고를 당했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 키우는 부모들은 핼러윈데이가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 줄 다 안다. 기성세대가 보신각 타종을 들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것처럼 핼러윈도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세상이 빨리 변하니, 내가 이해 못 할 일도 있기 마련이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BTS 공연장을 인원이 적게 들어가는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으로 변경한 것은 참 잘한 결정이었다. 5만 5000명이 몰린 이날 행사에는 보안요원, 자원봉사자, 지자체 공무원, 소방, 민간단체 등 2700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부산경찰청도 공연장 외부 질서 유지와 교통혼잡을 막기 위해 교통경찰 600명, 기동대 8개 중대 400명, 일선 경찰서 경찰관 240명, 경찰특공대 등 1300명을 배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아미(ARMY)가 있었다.
부산불꽃축제의 무기 연기도 아쉽기는 하지만 당연한 결정이다. 언젠가 부산불꽃축제에 참가했다 좁은 골목에서 인파에 떠밀려 이태원 참사와 유사한 체험을 한 뒤로는 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주변에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부산불꽃축제에서 여태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산불꽃축제 재개에 앞서 철저한 안전 대책이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 뒤 국민들은 오로지 안전한 대한민국을 바랐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 믿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는 이 같은 사건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기는커녕 공직자의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행안부 장관은 당장 사퇴하는 것이 옳다. 부산에서 압사 사고가 난 1959년은 가난에 허덕이던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을 시도, 서울 인구 집중이 심화되기 시작하는 무렵이다. 서울 초집중이 심해지다 보니 좁은 면적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몰려도 사회가 무덤덤해지고 말았다. 학업과 취업으로 인해 힘든 서울살이를 하던 지방 출신 희생자들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미안하다.
2022-11-01 [1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