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성원 칼럼] 문화도시 부산의 꿈
‘문화’ ‘미학’이라는 말만큼 낯선 단어도 좀체 만나기 어려운 듯하다. 뭔가 그럴 듯하지만 문화나 미학이라는 단언의 쓰임새는 매우 폭력적이다. 이런저런 문화가 있지만 ‘화장실 문화’까지 진도가 나가고, ‘절망의 미학’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문화나 미학이 그렇게 고급한 게 아니라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로 오랫동안 통했다. 다음 달 개막하는 국제영화제로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거듭나면서 문화불모지라는 항간의 불온한 소문을 일축했지만 ‘문명은 있지만 문화는 없다’는 말이 회자한 것도 사실이다. 박래품의 도시이지만 대구·경북사람들은 부산을 ‘하도’(下道)라고 평가절하하기 일쑤였는데 여기에는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책임 또한 크다는 지적이 있었다.
1983년 뿌리깊은나무에서 발간한 〈한국의 발견-부산〉 편에는 조갑제의 ‘부산의 주민 성품과 민족과 종교-해양성 기질, 해양성 문화’라는 글이 있다. 부산의 문화인 중에는 이 고장의 민중과 동떨어진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저 중앙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일부로서 예술 활동을 해 온 그들은 서울에 진출할 것을 꿈꾸며 부산을 즐겨 낮춰 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만 작가 김정한과 이주홍을 비롯한 몇몇 문학 예술가들이 민중을 찾아 이야기함으로써 그 뿌리를 다져 평판을 얻었다”고 말했다.
‘문화불모지 부산’이라는 말은 사실 지독한 중앙 혹은 서울 콤플렉스였던 셈이다. 부산에 관한 자긍심이 없다 보니 부산의 문화를 얕잡아 본 것이다. 부산 발전의 모멘텀으로 기대를 모으는 엑스포 유치에 적극 뛰어들면서 최근 들어 ‘부산 이니셔티브’에 문화도 당당히 자리 잡아야 한다는 각성이 일고 있다. 2030 엑스포 유치를 결정할 11월 28일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엑스포의 핵심 단어는 문화라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를테면 “2030세계박람회는 부산의 문화적 경쟁력과 가치를 키우는 기회로, 문화의 수요와 공급을 같이 끌어올려 지역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엑스포를 통한 부산의 문예 진흥을 생각한다면 지역이 낳은 이주홍 김정한 유치환(문학), 한형석(음악·연극), 임응식 김종식(미술), 문장원(연희), 현인 금수현 이상근(음악) 등 부산을 대표하는 예술인들을 오늘에 소환할 필요가 있다. 부산 문화의 한 경지를 이룬 대표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문화불모지 부산이라는 오래된 오해도 이제는 멈춰야 한다.
부산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 입어 2030 엑스포 유치 전망이 한층 밝아지면서 부산 문화에 관한 자부심이 새록새록 돋아난 것은 망외의 소득이다. 부산이 경관이 아름다운 세계적인 워터프론트(친수공간)에다 K컬처를 장착한 고품격 도시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착공한 북항 1단계 재개발 사업이 올해 준공되면서 시민들에게 수변공원을 선사했고, 오페라하우스 등도 속속 들어설 예정이다.
이제 부산은 문화의 자부심이 필요하다. ‘부산 이니셔티브’로 세계에 부산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정부와 부산시의 협업도 돈독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를 무대로 부산 엑스포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고 박형준 부산시장도 엑스포에 시정을 올인하고 있다. 그만큼 부산은 재도약의 모멘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산 문화는 화통의 미로 정리할 수 있다. 부산의 해양성이 자연미 예술미 인간미 도시미 생활미 등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고 봤을 때 바다로 통하는 항구도시 부산 사람들의 그 감성적 기질의 파토스는 화통으로 집약된다. ‘화끈하다’ ‘박력 있다’ ‘진취적이다’ ‘개방적이다’ ‘직선적이다’ ‘선이 굵다’ ‘ 구질구질하지 않다’ ‘흑백이 분명하다’ 등 다양한 감성적 기질로 드러난다.
화통의 부산미는 부산의 미적 특징인 ‘혼종성’ ‘역동성’ ‘저항성’ ‘단발성’으로 이어진다. 혼종성은 부산의 오랜 잡것들의 문화에서 비롯하여 한솥밥 정신을 길렀고, 역동성은 우리가 남이가를 거쳐 다이내믹 부산으로 분출했다. 저항성은 야도의 뿌리가 되었고 단발성은 마침내 소멸하고 마는 슬픈 정조의 바탕이 되었다. 화하고 통하는 부산의 미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곧 열린다. 영화의전당을 비롯한 4개 극장 25개 스크린에서 69개국 209편의 초청작이 들어와 부산은 또 한 번 영화의 바다가 된다. 내홍 사태를 겪은 부산영화제의 재도약이 기대된다. 특히 부산 출신의 올해의 게스트 송강호 배우에 대한 기대가 크다. 김동호 초대 집행위원장의 부산행도 기대를 모은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하여 부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산 사람이다. 문화도시 부산의 꿈이 그렇게 무르익고 있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09-14 [18:12]
-
[임성원 칼럼] 막장 대치 정국, 힘 실리는 총선 물갈이
9월 1일 정기국회 개막을 맞는 거대 양당의 서슬이 시퍼렇다. 막장에 들어선 비장감에다 정치생명을 건 건곤일척의 전의가 불타오르는 모양새다. 21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리는 100일간은 내년 22대 총선에서 현역 의원들이 공천장을 거머쥘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시간이다. 정기국회 성적표와 코앞의 당무감사 등이 ‘현역 컷오프’의 요긴한 자료로 쓰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의원 연찬회와 워크숍에서 비장한 언사로 소속 의원들을 막장 대혈투의 장으로 내몰았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당의 존립이 위태로운 더불어민주당이 국정운영 동력을 마비시키고 현안마다 적반하장, 발목잡기, 내로남불을 반복할 것”이라 했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민생 경제, 외교 안보, 국민 안전 등 모든 부분에서 나라가 퇴보하고 국민의 삶이 바람 앞의 촛불 같다”고 맞받았다.
협치가 사라지고 양당을 중재할 세력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막장 비장감은 그 수위를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협치 협치 하는데 엉뚱한 생각을 하고, 날아가는 방향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우리는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뒤로 가겠다고 하면 그건 안 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정의당·기본소득당·시대전환·진보당이 거대 양당의 밀실 협상을 경계하며 비교섭단체까지 참여하는 선거제도 개편 논의를 촉구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쳤다.
정황으로 볼 때 선거제도 개편을 통한 정치 개혁은 사실상 물 건너갔고, 거대 양당의 공천을 통한 ‘물갈이’만이 정치판을 바꾸는 마지막 비상구로 남았다. 소위 ‘4류 정치’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지만 현재의 정당 체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개선할 도리가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50% 넘는 총선 물갈이론이 계속하여 나오는 것은 공천 물갈이가 그나마 유권자의 정치적 숨통을 틔워 주는 역할을 해 온 까닭이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이라는 보수 본색의 영남에서 물갈이론이 득세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중 대구·경북(TK) 물갈이론은 압도적인 데가 있다. 현재 TK 25석(대구 12석, 경북 13석)을 국민의힘이 석권하고 있는데, 21대 총선의 현역 교체율은 64%에 달했다. 20대 총선 때는 교체율이 대구 75%, 경북 46%였다. 22대 총선을 앞두고는 홍준표 대구시장이 ‘물갈이 전도사’로 나서면서 TK 정가가 벌써 들썩이고 있다.
부산은 현역 18명 가운데 15명이 국민의힘, 3명이 민주당 소속이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3대 총선 이후 9차례 선거 결과를 보면 부산의 국회의원 교체율은 50.1%로 집계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부산 의원 절반은 교체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11월 28일 부산 엑스포 유치 성공 여부, 산업은행 부산 이전 같은 핵폭탄급 변수가 도사리고 있어 부산 총선에서 여야 희비가 크게 엇갈릴 것으로 전망된다.
9월 정기국회에 임하는 윤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비장하고 결연한 자세를 보면 내년 총선에서 부산의 물갈이 폭은 ‘역대급’일 것으로 예상된다. 신당 창당에 버금가는 물갈이를 통해 여소야대 정국과 기존 정치판을 확 바꾸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읽힌다. 게다가 부산의 일부 현역 의원들은 중앙 정치무대에서 존재감이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영남의 물갈이 폭이 마침내는 70~90%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마저 나온다.
내년 총선 풍향계가 물갈이론을 가리킨다면 거대 양당은 4류 정치와 작별을 고할 참신한 인물을 골라 승부수를 띄울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지역의 대표성을 갖는 신인의 발굴이 무엇보다 요망된다. 지역에서나 알아주는 ‘동네 의원’이 아니라 중앙 무대에서 당당하게 부산을 대표하여 민의를 전달할 식견과 품격을 갖춘 인물이라야 한다. 나랏일 한다고 뽑아 준 부산은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 자치와 분권 정신이 뼛속까지 오롯한 선량이라야 자격이 있다.
나아가 30~40대 청년 정치인들이 국회에 입성해야 부산에 미래가 있다. AI 등 기술문명은 나날이 발전하는 데 이를 바로바로 따라잡지 못한다면 부산은 물론 국가 장래마저 어두울 수밖에 없다. 5일 부산시청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부산·경남’을 주제로 문민정부 3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리는데, PK 정치의 대부 격인 YS도 만 25세 때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않았는가.
31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무너지는 민주주의 다시 세우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 투쟁에 돌입하는 등 22대 총선을 7개월 앞두고 여야 대치가 본격화하고 있다. 여기에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내부 권력 잡기에 골몰하면서 파워 게임은 한층 증폭되는 인상이다. 거대 양당 체제를 전제로 한 물갈이 정국이 회오리치며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 인물이 누구인지에 따라 내년 4·10 총선의 승패가 갈릴 전망이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08-31 [18:08]
-
[임성원 칼럼] 엑스포 막판 스퍼트, 결승선이 저기다
“부산엑스포 유치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국회 최다 의석 정당 원내대변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입’이 부산 시민의 분노를 유발했다. 분노 유발자는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다. 그는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원래도 우리보다 더 가능성 높은 나라가 있는 상황에서 이런 (잼버리) 참사가 있었는데 어떤 나라의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에 표를 주겠느냐”고 반문했다. 애초부터 글러 먹었는데, 이젠 더는 기대할 것 없다는 식이다.
잼버리 파행을 기다렸다는 듯 부산엑스포도 물 건너갔다고 공중파를 통해 단언하는 그 순발력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대변인을 둔 정당은 평소 부산엑스포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에 앞장서서 초를 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엑스포 망언도 주저하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부산은 이제 민주당에 ‘우리가 남이가?’가 아니라 ‘우리는 남이다!’로 전락하고 만 것인가.
명색이 국회 최다 의석의 공당이고 제1 야당이라면 나아가고 물러서는 진퇴가 명확해야 하는 법이다. 사고는 중앙당에서 쳐 놓고 수습은 민주당 부산시당의 “김 대변인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논평쯤으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말의 전쟁터인 정치는 그 말의 책임을 분명히 물어 매듭지을 것은 짓고 풀 것은 풀어 나가야 한다. 공당으로서 책임 있는 사과와 걸맞은 문책이 뒤따라야 마땅하다.
적과 아군이 누구인지 헛갈리는 자해성 발언에도 부산엑스포호는 달리고 달려 저만치 결승선만을 남겨두고 있다. 되돌아보면 험한 길을 잘도 넘어왔다. 2014년 부산시장 선거 때 서병수 캠프의 공약으로 부산엑스포가 처음 등장한 이래 시정과 국정이 차례로 바뀌면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대선 기간 “나라의 명운을 걸고 유치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단연 활기를 띠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산엑스포를 결정짓는 운명의 시간은 이제 3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오는 11월 2030 엑스포 개최지 결정을 위한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가 프랑스 파리 현지에서 열린다. 1차 투표에서 어느 나라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 2차 결선투표로 간다. 이제 남은 시간은 석 달 남짓이지만 10년 가까이 부산 시민이 쏟아 온 열정이 소중한 열매를 거둘 것인지 하루하루가 천금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국가적으로도 한국이 엑스포에 등장한 지 130년 만에 중규모 전문박람회인 인정엑스포가 아니라 공인된 대규모 종합박람회인 등록엑스포 개최를 확정 짓는 영예를 차지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조선은 1893년 미국에서 열린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참가하면서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1993년 대전에서 첫 번째 인정엑스포, 2012년 여수에서 두 번째 인정엑스포를 각각 개최했다.
등록엑스포를 향한 부산의 열정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부산엑스포가 물 건너간 것이 아니라 물 건너가는 것은 엑스포 유치 전진기지인 태스크포스(TF)다. 정부와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는 오는 28일 BIE 사무국이 있는 파리에 TF를 설치해 최종 투표에 대비한 총력전에 들어간다. 운명의 여신도 서서히 부산을 향해 웃고 있다. 부산 70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70표, 이탈리아 로마 23표라는 중간 판세 분석은 고무적이기만 하다. 이쯤 되면 막판 역전극이 충분히 가능하다.
부산엑스포의 역전극은 곧 부산의 역전극이다. 한때 400만을 넘봤던 부산의 인구는 지난해 330만 명 선마저 내준 것으로 집계돼 제2의 도시라는 위상마저 흔들리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청년이 떠나는 무기력한 도시 부산은 다시 일어설 모멘텀이 필요하다. 부산 사람들이 엑스포라는 한 방향으로 함께 눈길을 돌리는 이유다. 마침 윤 정부가 엑스포 유치를 계기로 부산을 수도권에 맞서는 강력한 성장축으로 키우겠다니 반갑기만 하다.
엑스포가 좌절되면 부산 르네상스의 모멘텀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산 사람들은 또한 잘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가덕신공항 특별법 통과로 불가역성을 확보했지만 신공항으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하다. 가덕신공항건설공단 설립이나 북항 재개발 계획도 석 달 후 부산엑스포가 어떤 결말이 날지 저울질하느라 좀체 추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부산엑스포 유치, 총력전으로도 모자란다고 보는 이유는 그래서다. 엑스포가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정부 차원의 승부수가 나와야 할 때다. 부산, 부울경, 나아가 영호남을 아우르는 남부권이 수도권과 상생의 경쟁을 펼치는 축으로 떠올라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 여기에 여와 야, 영남과 호남, 지방과 수도권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08-17 [18:15]
-
[임성원 칼럼] 태풍에도 끄떡없는 한일 민간 교류
기차도 탈선시킬 수 있는 강한 위력의 제6호 태풍 ‘카눈’이 10일 오전 경남 남해안에 상륙해 한반도를 관통한다고 한다. 카눈은 오키나와 인근에서 중국으로 갈지, 일본으로 향할지, 한반도를 관통할지 갈지자걸음을 계속했는데 기어코 최대 500mm가 넘는 물 폭탄을 전국에 쏟아부을 기세다. 집중호우와 폭염에 시달리다 이번에는 태풍이라니, ‘극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이상 기후 앞에 심신도 극한으로 내몰리는 나날이다.
태풍 카눈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8월 5~6일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는 한일 교류의 이정표에 남을 행사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복원된 조선통신사선이 부산항을 출항해 대마도에 입항했고, 부산문화재단을 비롯한 100여 명의 한국 방문단이 이즈하라항 축제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등 교류를 확대했다. 통신사선은 1811년 12차 사행 이후 212년 만에 ‘13차 항해’에 나선 셈이고, 방문 교류는 엔데믹을 넘어 4년 만에 이뤄졌다. 출항에 앞서 영가대에서 지낸 해신제 덕분인지 태풍의 위력이 실린 집채만 한 파도에도 무사히 대한해협을 오갈 수 있었다.
기자는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교류가 닻을 올린 2003년부터 현장을 두루 지켜봤다. 그해 9월 부산에서 개최된 한국의 조선통신사문화사업추진위원회와 일본의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의 민간 교류 총회에 이어 11월 일본 오카야마현 우시마도에서 열린 ‘에게해 축제’의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했다. 이듬해인 2004년 8월 대마도 ‘아리랑 축제’의 조선통신사 행렬 현장도 찾았는데, 이번에 실로 20년 만에 대마도 교류 현장을 다시 방문한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통신사를 향한 일본 현지의 반응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부산과 대마도가 중심이 되어 2003년부터 본격화한 조선통신사 민간 교류 사업 이전부터 조선통신사를 고리로 부산과 한국을 일본에 널리 알려 온 문화사절단이 있다. 최은희 전 경성대 교수가 이끄는 부산의 춤패 배김새다. 부산시립무용단의 바통을 이어받아 배김새가 1993년부터 이즈하라항 축제에 참여해 왔으니, 햇수로만 올해로 30년 세월이다. 8월 첫째 주에 열리는 축제를 위해 해마다 초여름부터 연습에 들어갔고 ‘부채춤’ ‘삼고무’ ‘장고춤’ ‘소고춤’ ‘물맞이굿’ 등 레퍼토리만 30개에 달한다.
올해 대마도를 찾은 춤패 배김새는 부산 고유의 춤사위인 배김새를 떠올리듯 부산무용협회 춤꾼들의 참여를 통해 지역성을 강화했다. 1.8km에 이르는 조선통신사 행렬에서는 남산놀이마당의 풍물 소리에 맞춰 흥겨운 춤사위를 선보여 연도를 메운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축제가 절정에 달한 오후 7시 30분 이즈하라항 특설무대에 오른 배김새는 40분에 걸쳐 차례로 ‘오방신장무’ ‘산조춤’ ‘입춤’ ‘태평무’ ‘북놀이’ ‘지전춤’ ‘배김허튼춤’을 공연해 큰 박수를 받았다.
객석의 뜨거운 열기는 거리로도 이어져 시내를 걷다 만난 시민들은 따뜻한 환대의 인사를 건넸고, 조선통신사 행렬을 준비한 주최 측은 “부산과 쓰시마 교류의 핵심이자 꽃은 배김새”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0년에 걸쳐 16차례나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하고, 또한 주 무대 공연을 장식한 춤패 배김새가 쌓아 올린 ‘성신교린’(誠信交隣·성실과 믿음으로 사귄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부산과 대마도가 한일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운명적이랄 수 있다. 부산은 일본으로 가는 국경의 ‘관문 도시’이고, 대마도는 현해탄과 대한해협을 건너 양국을 잇는 ‘국경의 섬’이기 때문이다. 500여 명의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 오면 800여 명의 쓰시마 사람들이 함께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동행했고, 부산의 왜관에는 600여 명의 쓰시마 사람들이 거주했다. 한때 쓰시마번(藩)은 조선과의 무역으로 ‘서쪽 지방 최고의 부자’로 불릴 정도로 윤택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은 조선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문화·경제 교류의 전통을 쌓아 왔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반목과 질시의 흑역사를 거듭하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선만 하더라도 원래 2019년 8월 대마도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경제 보복에 따른 지난 정부와 부산시정의 ‘대일 교류 전면 재검토’ 정책에 따라 무산돼 올해로 4년이나 늦춰지는 파란을 겪었다.
정권의 향배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민간 교류의 핵심은 문화·경제 교류의 강화에 있다. 조선통신사와 왜관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린 문화예술·축제 교류, 부산-후쿠오카 포럼, 부울경-규슈 경제공동체 등을 끊임없이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한일 평화와 연대의 새 시대는 정치적 이상 기후에 끄떡없는 튼실한 민간 교류의 가교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2023-08-08 [18:26]
-
[임성원 칼럼] 불로장생의 꿈, 부산에서 꽃피우자
뱀과 까치가 싸우는 전래동화 같은 장면을 부산의 도심 하천을 걷다 목격한 적이 있다. 애완견을 꼭 껴안은 산책객들이 무리 지어 서 있기에 다가가 보니 까치와 뱀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까치는 날아가고, 뱀은 길을 비켜 줄 생각이 없다는 듯 한참을 똬리를 틀고 일광욕을 즐기기에 할 수 없이 강둑에 바짝 붙어 지나간 적이 있다. 학장천에서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온천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가 많은 물고기 떼에다 빠르기는 또 얼마나 쏜살같은지 감탄을 자아내는 학장천이다. 생태계가 오롯이 되살아난 데다 걷다 보면 그림 감상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한국화는 물론이고 르네상스에서 후기 인상주의에 이르는 명화가 ‘강변갤러리’에 내걸려 있다.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한 그림을 복제품이지만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즐기는 뜻밖의 호사를 누린다.
비가 와도 극단적으로 많이 온다는 이 ‘극한 호우 시대’에 그래도 학장천이 TV 9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부산 사상구 주례~학장~엄궁동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학장천에서 지난 11일 30분 만에 수위가 1m 높이에 이를 정도로 물이 불어나면서 3명이 떠내려가 그중 1명이 실종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사상공단을 가로지르는 오염 하천을 생태하천으로, 나아가 예술을 만나는 문화공간으로 가꾸어 온 그동안 애쓴 보람도 함께 떠내려가고 말았다.
부산시는 지난 5월 ‘인명 피해 제로’를 목표로 여름철 재난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강우량, 하천 수위, 침수 예상도, 도로 통제 정보, 재난감시 CCTV 등의 정보를 실시간 확인하는 ‘도시침수 통합정보시스템’을 가동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학장천 참변은 도심 하천의 출입 통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음을 드러냈다. 사고가 일어난 지 20분 뒤에야 산책로 출입 통제가 이뤄지는, 시스템의 부재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도시는 안전을 향한 부단한 노력의 결정체다.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 공동체를 이루면서 촘촘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의 안전과 편의를 보장해 왔다. 최근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같은 전염병 대유행에서 보듯 도시라는 문명 체계도 예기치 못한 재난과 질병에는 취약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도시든 국가든 국제사회든 안전과 편의를 향한 공동체의 노력에는 중단 없는 전진만 있을 뿐이다.
재난과 재앙을 소멸하고 질병을 치료해 수명을 연장하는 약사 신앙의 역사는 오래됐다. 삼국 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에 걸쳐 약사불을 모시는 신앙이 유행했고 민간 신앙에까지 파고들었다. 약사경의 핵심은 12대원이다. 열두 가지 대원은 죄다 자기가 아니라 남을 향한 소망을 담고 있다. 남이 잘되면 나도 잘된다는 것이다. 남 잘되기를 기도하는 게 재난과 질병을 극복하고 불로장생을 누리는 첩경임을 경전은 가르친다.
불로장생은 동양인의 오랜 염원이다. 불자들은 약사불이 다스리는 동방 정유리국에 닿으려 노력했고, 도교 등 이른바 도를 닦는 사람들은 장생불사의 신선이 되기를 희망했다. 불로초를 구하려 한 진시황 이야기는 동아시아에서 널리 회자한다. 부산에도 신선 사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영도다. 봉래산 영선산 영주산 등 산 이름과 봉래동 영선동 신선동 청학동 등 동네 이름에서 쉽게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불로장생의 꿈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언제든 부산에서 꽃피울 수 있다. 만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30%를 넘는, 이른바 ‘초초고령동’이 전체의 4분의 1 수준에 가까운 부산은 ‘노인과 바다의 도시’가 아니라 불로장생의 노다지다. 희한하게도 초초고령동이 가장 많은 구가 영도(7곳)와 영도를 마주한 동구(7곳)다. 부산의 원도심에 신선에 가까운 노인이 많이 사는 셈이다. 영도와 노인을 고리로 부산의 활력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활동적 나이 들기)이라는 말이 최근 부산의 화두로 떠올랐다. 부산시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나이 들기’(Happy Aging , Healthy Aging)라는 말에서 따온 HAHA센터를 ‘15분 도시’와 연계해 올해 시범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천덕꾸러기 신세로 내몰리던 노인과 원도심을 진정으로 위하는 대원만 있다면 부산의 원도심은 ‘불로장생 특구’로 거듭날 수 있다.
전국에서 노인이 가장 많다는 ‘장수 도시’ 부산, 그중에서도 노인이 더 많은 곳이 영도를 비롯한 원도심이다. 이곳에 불로장생 연구소를 세우고 장생불사에 효험 있는 음식과 프로그램, 시설 등을 갖춰 나가면 부산의 약점이 도시의 활력을 이끄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남을 위하는 마음만 꺾이지 않는다면 재해도 질병도 노화도 극복 가능한 불로장생의 낙원을 부산에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임성원 논설실장 forest@busan.com
2023-07-20 [18:18]
-
[임성원 칼럼] 연대와 줄탁동시의 지방시대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인가. 최근 들른 전남 순천시 정원박람회 현장은 살짝 흥분이 묻어나는 수군거림으로 들썩였다. 정원해설사는 “좀 있으면 500만 명을 돌파할 것 같다”고 비밀스레 귀띔했고, 현장에서 관계자와 마주칠 때마다 속닥이며 관련 정보를 주고받기에 바빴다. 4월 1일 막 오른 박람회가 개장 84일 만에 2013년 정원박람회 최종 관람객 수 440만 명 기록을 경신한 데다 10월까지 목표 관람객 800만 명의 62.5%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른바 대박이 났다.
박람회 현장에서 전해지는 흥분은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 순천에 대한 자랑스러움, 자부심, 무한한 애향심 같은 것이었다. ‘봐라, 전국에서 우리 순천을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시민의 참여, 공무원의 헌신, 단체장의 철학이 삼위일체가 되어 일군, 지방소멸 시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로컬의 성공 신화가 그곳 ‘생태도시’ 순천에 펄펄 살아 있었다.
노관규 순천시장은 “재주는 곰이 부리는데 돈은 비단 장사 왕서방이 번다”는 우스갯소리로 대박 난 정원박람회에 흥겨운 추임새를 넣었다. 엑스포로 호텔 등 숙박시설이 뛰어난 여수시에 박람회 관람객이 몰리면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근 광양시는 박람회장과 광양 여행지를 연결하는 시티투어를 마련했고, 보성군은 박람회장과 보성 녹차밭, 태백산맥 문학관 등을 잇는 셔틀버스를 운행해 재미를 보는 중이다. 남해안 관광벨트가 그 중간쯤인 순천을 중심으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순천은 ‘글로벌 남해안 관광 시대’의 견인차라 할 만하다. 부산과 경남, 전남도는 지난해 12월 ‘남해안 글로벌 해양관광벨트 구축을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지난 5일 창원에서 박형준 부산시장, 박완수 경남도지사, 김영록 전남도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남해안 미래비전 포럼’을 개최했다. 순천의 선한 영향력은 남해안 관광벨트의 상생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벌써 기대를 모은다.
남해안 시대는 사실 어제오늘에 나온 말이 아니다. 특히 고질적인 영호남 갈등을 잠재울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매력 있는 카드로 여겨졌다. 남부권 경제공동체, 영호남 남부 광역 연합 등의 모색은 나아가 공룡같이 비대해진 수도권에 맞서는, 지방소멸 시대의 새로운 돌파구로까지 부상했다. 최근에는 부산포해전의 부산에서 명량대첩의 전남 진도 울돌목에 이르는 남해를 ‘이순신해’로 부르자는 특별법까지 국회에 발의돼 지역성에다 역사성까지 입혀 ‘남해안 시대’를 추동하고 있다.
본격적인 지방시대를 열어 가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이 꿈틀거려야 한다. 광역 연합이든 메가시티든 지방 간 연대야말로 강고한 수도권 독점체제를 깨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전국의 지자체에서 너도나도 순천을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데 지역 간 협업과 상생으로 나아가야 서로의 지역에서 우뚝 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민선 8기 첫 한 해를 보낸 박형준 부산시장은 최근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산 전체의 조경을 바꾸는 정책을 2년 차부터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운영 10년이 넘은 부산시민공원과 인근의 어린이 대공원, 부산수목원 등 부산의 주요 공원들을 새롭게 손보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했는데, 순천시와의 협업을 고려해 볼 만하다. 순천만의 생태적 성공은 낙동강 하구 살리기에도 힌트를 줄 것이다.
때맞춰 오는 10일 대통령 소속 지방시대위원회가 출범한다. 자치분권위원회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통합한 지방시대위원회는 윤석열 정부의 지방 정책 컨트롤타워로 기대를 모은다. 하지만 지방시대위원회를 이끌 우동기 현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이 “2차 공공기관 이전 계획은 내년 총선 이후에 나올 것”이라고 말한 것은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으로서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발언이다. 수도권 표심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식시키려면 공공기관 이전의 청사진을 분명하게 내놓아야 한다.
“중앙정부는 ‘작은 정부’, 지방정부는 ‘큰 정부’를 지향한다”는 지방시대위원회의 방향은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방의 ‘자치’는 키우고 중앙의 권한은 이양을 통해 ‘분권’을 강화하는, 알 속의 병아리는 껍질 안에서 쪼고 어미 닭은 밖에서 쪼는 자치와 분권의 줄탁동시가 있어야 지방시대라 부를 수 있다.
지방시대는 겉만 번지르르한 구호가 아니라 생태적 건강함으로 속을 꽉꽉 채워 나가야 소망스러운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가 더는 구두선에 그쳐서는 안 되며 지방 간 연대와 지방·중앙의 협업으로 로컬에 건강하게 뿌리 내리기를 기대한다.
2023-07-06 [18:09]
-
[임성원 칼럼]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청춘
꽃의 나라에서 5월의 여왕이 장미라면 6월의 여왕에는 이제 수국이 등극한 듯하다. 꽃보다 녹음이게 마련인 6월이지만 부산 곳곳에는 형형색색의 수국이 때맞춰 물결을 이룬다. 영도 태종사에서 열리는 수국 축제를 부러 찾아가야 알현할 수 있었던 수국이 어느새 부산 전역을 점령했다. 거기다 ‘눈으로 보세요, 주인 있습니다’ ‘수국 뽑아 가지 마세요, CCTV 지켜봅니다’라는 팻말까지 경비병으로 거느려 수국의 시대, 수국의 나라가 치세를 누린다.
수국의 매력은 아무래도 그 다채로운 빛깔에 있다. 색색이 빛나는 태깔이 보석 못지않다. 시간을 따라 하얀색에서 파랑을 거쳐 보라색으로 변하고 토양이 산성이면 파란색, 알칼리성이면 빨간색에 가까워진다. 그 파스텔톤의 변화무쌍함이 오죽했으면 제주 사람들은 수국을 일러 ‘도채비고장’(도깨비 꽃)이라 했을까. 옛말에 ‘도깨비도 수풀이 있어야 모인다’고 했다. 수국의 천변만화하는 색깔을 뒷받침하는 것은 꽃을 떠받든 잎과 줄기의 그 싱싱한 푸르름에 있다.
수국의 계절 6월은 신록의 계절이다. 푸르디푸른 6월의 신록은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멍에의 흔적이기도 했다. ‘6·25’라는 전쟁의 상흔이 유월을 삼켜 베이비 부머 세대(1955~1963년생)에게는 반공 혹은 승공, 이데올로기, 전쟁 따위를 떠올리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계절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의 반공 웅변대회,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는 교련, 그리고 대학에서의 병영 훈련과 전방 입소 등을 통과의례처럼 거친 뒤 군에 들어가야만 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대학 다닐 때 ‘늙은 투사의 노래’라는 운동가요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강원도 전방부대에 입대하니 그 부대에서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곡이어서 황당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부대에서 전역을 앞둔 선임하사를 위해 작곡가가 막걸리 얻어먹고 지은 노래였기 때문이다.
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의 ‘늙은 군인의 노래’는 청춘을 군에 바친 한 늙은 선임하사를 위한 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되었고,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음지로 파고들어 시위 현장마다 군인 대신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의 노래로 변주됐다. 그러다 2018년 현충일 추념식에서는 추모곡으로 불렸고, 2020년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는 국군 전사자 유해 귀환 배경음악으로 가수 윤도현이 부르기도 했다.
‘늙은 군인의 노래’가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정치 세력을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갔듯 ‘빽 있고 돈 있는’ 사람은 안 간다는 군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지만 그나마 나라를 지킨 이는 주변의 장삼이사들이었다. 모든 사람이 군에 가는 징병제 혹은 국민개병제의 나라에서 당당한 호국의 주역이었다. 군에 간 아들이 입고 간 옷가지를 받아 들고 눈물짓던 이 땅의 어머니야말로 역경에 굴하지 않는 호국의 여전사에 다름 아니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 마냥 푸르름을 유지하려면 정권의 향방에 따라 시류를 타지 않는 보훈의 원칙이 정립돼야 한다. 보훈의 일상화, 저변화를 통해 호국보훈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최근 청년 제대군인들을 만나 병역의무 이행에 따른 불이익을 막겠다고 나선 것은 높이 살 만하다. 대학 복학생이 예비군 훈련에 갔다가 수업에 빠지는 바람에 결석 처리돼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6월 5일 국가보훈부가 출범했다. 1961년 군사원호청으로 출발한 지 62년 만에 보훈처가 마침내 부로 승격한 것이다.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나라’라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가 열매를 맺은 데 따른 것이다. 세계 유일의 유엔군 추모시설인 부산 유엔기념공원은 추모 공간이자 공연·전시 등 문화 인프라와 접근성을 갖춘 부산의 ‘핫플’로 거듭날 예정이라고 한다.
1968년부터 ‘장한 용사’ ‘장한 배우자’ 등을 시상하는 부일보훈대상을 운영하고 있는 〈부산일보〉와 만난 박 장관은 “보훈이 현충일과 같은 특정 기념일에만 찾는 ‘일회성 보훈’이 아니라 ‘일상 속 보훈’ ‘문화로서의 보훈’으로 늘 우리 생활 속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수국처럼 때와 곳에 따라 저마다의 빛깔로 나라를 위해 활짝 꽃을 피운 청춘들을 차별하지 않고 국가가 기억하는 보훈이 요긴하게 다가오는 이즈음이다.
2023-06-22 [18:17]
-
[임성원 칼럼] 후쿠시마 괴담 정치, 괴담 정국
페이스북을 보고 놀랐다. ‘멍게 절대 먹지 말라, 물 건너 왔으니’. 믿을 만한(?) ‘페친’인 관계로, 그 뒤로 멍게를 볼 때마다 불편하다. 언론도 안 통한다는 이 ‘SNS 호시절’에 더는 할 말 없다. ‘생선회 도사에게 들었다. 거의가 헐값에 물 건너 왔으니 멍게 절대 먹지 말라고. 우짠지 요즘 찌께다시로 만히 나오더라. 부산의 3대 먹거리는 돼지국빱 밀맨 회 한사라인데 이제 회집들 우짜노’.
‘믿을 만한 페친’인 데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요새 부산의 횟집에 사람들이 진짜 없다고 하는 말이 들린다. 자갈치에도, 광안리에도 횟집은 손님이 텅텅 비어 간다고 하는데, 마치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부산 거리에는 ‘우리 바다 안전 지키겠습니다 후쿠시마 괴담정치 OUT’ ‘국제 기준 처리 안 된 오염수 방류 절대 반대’라는 정부·여당 국민의힘 현수막이 부산 곳곳에 즐비하다. 이 정부·여당은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요새 자갈치나 광안리 횟집이 장사가 예전보다는 잘 안 된다는 얘기가 들린다. 앞으로가 더 문제라는 말도 많다. 도대체 광안리나 자갈치가 무슨 잘못을 했나. 가만히 있는데 부산과 가까운 일본에 낭패를 당하는 게 부산의 운명이다. 여름철 단대목을 앞둔 부산이 이렇게 당해야 하나. 야당은 놔 두고 정권을 맡긴 윤석열 정부, 특히 절대 다수인 부산의 국회의원을 점하고 있는 국민의힘이 책임져야 한다.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을 맞아 부산의 환경단체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낙동강 녹조 등 5가지 환경 의제를 선정해 발표했다. 부산환경회의·낙동강네트워크 등 부산의 환경단체들이 한데 뜻을 모았다는 게 가장 중요하고, 다음으로는 부산의 환경 문제는 역시 ‘물 문제’라는 점이다. 수돗물을 대한 불신만큼이나 바닷물에 관한 불신이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낙동강 오염수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또한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오염수를 알프스(ALPS·다핵종제거설비)로 처리한 처리수인데 왜 오염수냐고 한국 언론에 항변하지만 낙동강 하류를 살아가는 부산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정수 처리해도 ‘낙똥강물’일 뿐이다. 사실 집에 나오는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부산 시민이 얼마인지는 미지수다. 그 낙동강 불신이 이번에는 바닷물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산 시민과 국민의 안전이 걸린 문제인데 국민이 뽑은 권력은 한심하기만 하다. 한·미 동맹을 근간으로 하는 기조가 아무리 중요하지만 한·미·일 관계는 예사롭게 넘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정부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대단히 예민한 문제여서 윤석열 대통령이나 현 정부의 방침이 바뀌었다고 해서 결코 달라질 부분은 아니다.
왜 우리는 사회적 공론화가 없는 것일까. 수산물을 비롯하여 해양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등 부산 시민을 비롯한 국민의 불신을 씻을 과학적 근거와 안전 장치를 정부가 앞장 서서 제시할 수는 없을까. ‘해양수산 수도’를 자처하는 부산에 언제까지 괴담을 실은 현수막이 내걸려야 하나. 현수막 정쟁보다는 과학적인 논의가 앞서야 부산 시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다.
여름 휴가철을 맞은 부산은 벌써부터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부산의 해수욕장은 안전하고, 부산의 횟집은 안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산시와 정부가 나서 주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과학적인 토대가 필요하다. 일본에서 물차를 타고 생선회가 바로 들어온다는 시민의 불신에 부산시와 해양수산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해소 해야 한다.
일본 교도통신은 후쿠시마 원전 앞에서 잡은 우럭에서 기준치의 180배를 넘는 세슘이 검출됐다고 보도했다. 이걸 여당의 검증위원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것이 흘러 우리 바다에 올 가능성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도대체 여당인 국민의힘 ‘우리 바다 지키기 검증TF’는 일본해를 지키는 태스크포스인지 국민을 헛갈리게 해서는 안 된다. 야당이 괴담을 퍼뜨리고 있다고 마냥 주장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야당이나 언론에서 아무리 위험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일정 부분 공익을 위한 대목이 있다는 게 일반의 정서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부산시는 시민의 생명을 제일 먼저 책임져야 한다. 부산시가 나서 후쿠시마 처리수가 다음 달 방류해도 안전하다고 시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부산의 횟집이 살고, 해수욕장이 산다. 지금은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다. 부산 사람들의 운명이 걸린 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다. 횟집, 해수욕장과 함께한다는 결단이 지금의 부산에 필요하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부산으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박형준 부산시장의 예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2023-06-08 [18:43]
-
[임성원 칼럼] 빗장 연 산사와 금정산의 품격
27일 부처님오신날을 다시 맞이한다. 불기 2567년이다. ‘뭇 생명이 모두 존귀하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며 태어난 부처님은 마지막 가르침으로 ‘자기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아라’는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을 제자들에게 남기고 떠났다. 해마다 돌아오는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스스로와 중생을 비추는 등 하나 환히 밝히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한 생애였다 하겠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을 비추는 등불이 더 환해진 것은 그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한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비로소 놓여난 데 따른 것만은 아니다. 산사를 가로지른 빗장을 풀어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산문을 활짝 연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에 따라 거두기 시작한 절집의 문화재관람료가 61년 만에 5월 4일부터 면제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산사와 일반인 사이를 가로막던 완강한 담장 하나가 마침내 허물어진 것이다.
조계종 종정 성파 큰스님이 주석 중인 경남 양산의 불보사찰 통도사를 비롯하여 〈삼국유사〉에 ‘절과 절은 뭇별처럼 늘어서 맞닿아 있고, 탑과 탑은 기러기처럼 날아갈 듯 솟아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는 경주의 불국사, 석굴암, 분황사, 기림사도 입장료 부담 없이 들락날락할 수 있게 됐다.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한 전국 65개 사찰이 무료입장으로 돌아서게 된 것은 관람료를 감면하면 그 비용을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면서다.
문화재관람료 면제 이후 찾은 경주는 축제 분위기가 완연했다. 천마총을 비롯하여 고분 23기가 모인 대릉원의 입장료도 때맞춰 없어졌다. 고분 야경을 뽐낼 ‘대릉원 미디어 아트’가 개막 중인 데다 인근 경주박물관에서는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기념하는 ‘천마, 다시 만나다’ 특별전시까지 마련돼 신라의 황금시대를 웅변한다. 대릉원 인근 황리단길은 젊은이와 외국인으로 북적여 경주 관광의 중심으로 우뚝 선 지 오래다.
‘핫’하기는 통도사도 마찬가지다. 적멸보궁 참배 불자와 영남알프스를 찾는 산꾼들로 늘 문전성시를 이루는 통도사는 평산책방까지 가세해 이래저래 핫플로 떠올랐다. 통도사 정문에서는 ‘이런 날도 오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무료입장이 새삼스러웠고, 후문 쪽으로 가면 ‘평산책방 가는 길’이라는 낯선 이정표가 등장해 눈길을 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평산마을 지나 지산마을 쪽 통도사 후문도 활짝 열려 있어 생경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산의 절집 사정은 어떤가. 이번에 문화재관람료를 면제하는 65개 사찰 가운데 부산에서는 범어사가 유일하게 해당한다. 하지만 범어사는 이미 2008년부터 부산시와 협의해 문화재관람료를 폐지했다. 부산시 지원금의 적정성을 둘러싸고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산시민을 위해 대승적인 합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교도시 부산’다운 면목이라 하겠다.
입장료 문턱을 일찌감치 없앤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선찰대본산 금정총림 범어사이지만 문호 개방과 관련하여 지역사회의 묵은 염원을 떠안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금정산 국립공원화가 바로 그것이다. 금정산 국립공원 추진이 늦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전체 면적의 82%를 차지하는 사유지 관련 협의가 지지부진한 탓이다. 사유지 중에서도 범어사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데, ‘국립공원 금정총림’이라는 위의를 갖출 상생의 논의가 필요하다.
마침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대구 동화사와 제10교구 본사인 경북 은해사가 터 잡은 TK불교의 중심 팔공산이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지난 23일 마침내 23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금정산보다 2년 늦게 국립공원화 추진에 나섰지만 결실은 먼저 본 셈이다. 팔공산도 사유지 비율이 52.9%에 달하는 등 난관이 많았지만 60차례에 걸친 간담회와 공청회를 통해 반대대책위원회를 상생발전위원회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국립공원화는 가장 불교적인 정책이랄 수 있다. 국가가 모든 비용을 들여 산에 사는 뭇 생명을 책임지고 보존하도록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TK언론은 경주~주왕산~팔공산을 잇는 국립공원 3축으로 관광 그랜드플랜을 짜자며 ‘팔공산국립공원 만세’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소중한 자연은 자연대로 지자체의 돈 한 푼 안 들이고 지키면서 침체한 지역경제를 살리는 활로가 거기에 있는 까닭이다.
부산과 경남 양산에 걸쳐 있는 PK불교의 중심 금정산도 팔공산에 이어 국립공원화에 속도를 낼 일이다. 범어사와 부산시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문화재관람료를 없애 산사의 문을 활짝 열었듯 금정산 국립공원도 머리를 맞대면 상생의 길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 금정산이 저마다의 생명이 모두 존귀한 대접을 받으며 스스로의 빛을 환하게 발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국립공원화가 추진되길 기원한다.
2023-05-25 [18:52]
-
[임성원 칼럼] 협치 없이 '지방시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로 취임 1주년을 맞았다.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사는 국민의 나라’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라는 국정 비전과 국정 목표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는지 되돌아봐야 할 때다. 임기 5년 가운데 벌써 20%를 넘겼기 때문이다. 특히 ‘새 빗자루가 잘 쓸린다’는 서양 격언도 있는 만큼 아무래도 국정의 성과는 출범 초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국민 정서로 볼 때 윤 대통령 취임은 청와대 개방과 함께 시작됐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권력의 오랜 심부였던 청와대가 2022년 5월 10일 시민에게 개방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청와대는 ‘용산 대통령실’이라는 낯선 이름에 권력을 이양했다. 지난 1년간 누적 관람객 수가 350만 명에 가까울 정도로 청와대는 관광 핫스폿이 되었다. 밖으로는 한·미·일 동맹 강화와 북·중·러 거리 두기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부산은 지난 1년간 착실하게 재도약의 발판을 닦아 왔다. 윤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2030월드엑스포에 부산이 성큼 다가섰다. 비록 부울경 메가시티는 좌초했지만 엑스포는 ‘국가 성장축 부산’의 확실한 모멘텀으로 기대를 모은다. 국토교통부는 ‘가덕도신공항 조기개항 로드맵’을 발표해 엑스포에 힘을 실었고, 내처 KDB산업은행을 ‘지방이전 대상 공공기관’에 지정해 산은 부산 이전을 가시화했다.
하지만 부산으로선 아직 갈 길이 멀다. 6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의 4차 프레젠테이션(PT)을 거쳐 11월 최종 개최지 투표에 이르기까지 숨 가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엑스포는 국회가 ‘유치 결의문’을 발표할 정도로 여야가 따로 없지만 산은 이전으로 가면 정치권이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본사 위치를 서울로 규정한 한국산업은행법을 고쳐야 매듭을 짓지만 거대 야당의 반대로 난항 중이다.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도 국회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이 국무회의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된 채 처리가 미뤄지고 있는 상태다. 교육자유특구 조항을 둘러싼 쟁점이 걸림돌이 되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균형발전, 지방분권은 물론이고 컨트롤타워인 지방시대위원회조차 위기에 놓였다.
윤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은 국정의 난맥상은 정치에서 유독 돋을새김 된다. 0.73%포인트(P) 차이로 정권을 넘긴 168석의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여당이 사사건건 마찰음을 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1년을 맞아 거대 야당의 발목잡기를 비판했고, 이재명 대표는 “대통령은 1년 내내 전임 정부 탓, 야당 탓만 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협치 부재, 정치 실종이 이 나라의 앞날을 완강하게 가로막는 현실을 국민이 목도하고 있다.
문제는 갈수록 태산이라는 점이다. 입법 강행-거부권 행사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대립이 첨예화하는 가운데 1년도 채 남지 않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진영 갈등도 증폭되는 양상이다. 그 중심에 5월 10일 취임한 윤 대통령과 그날 퇴임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전·후임 대통령이 구심점을 이룬 정치 분열과 갈등은 국론 분열과 정쟁 격화로 곧장 직행하게 마련이다.
특히 5월 10일을 즈음해 정치 페달을 가속하는 문 전 대통령의 행보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평산책방을 열어 ‘책방 정치’를 본격화한 가운데 10일 다큐 영화 ‘문재인입니다’ 개봉, 17일 ‘5·18’을 앞둔 광주 방문 등 보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 송영길 전 대표의 ‘돈 봉투 살포’에 이은 김남국 의원의 ‘코인 사태’로 도덕성 위기에 내몰린 거대 야당이 평산마을을 긴급 피난처로 삼고 있는 모양새다.
퇴임 직전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 45%를 기록한 문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40%를 넘는 콘크리트 지지율을 유지했다. 이런 두 전·현직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운 갈등과 분열은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여야 영수 회담보다는 되레 두 대통령의 대화가 더 필요한 게 지금의 상황인지도 모른다.
국정의 난맥을 죄다 전 정권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국민 보기에 떳떳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올드보이의 귀환을 재촉할 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뉴보이의 정책은 새것 그 자체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행정부와 국회가 따로 논다면 천금 같은 5년의 임기 중 더 많은 시간을 허투루 보낼 뿐이다. 협치로 국정을 안정화하고 국민을 안심시켜야 내년 4·10 총선에서도 유리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이 진정 어디로 나 있는지 윤 대통령이 거듭 심사숙고해야 할 시간이다.
2023-05-11 [18:18]
-
[임성원 칼럼] 챗GPT와 지방소멸 시대의 윤리
“‘챗GPT와 저널리즘’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고 있지만 올 하반기만 되어도 오늘 PPT 강의 자료를 모두 없애야만 할 겁니다. AI 혁명의 속도가 그만큼 빠르다는 뜻입니다.” “챗GPT는 언제 거짓말할지 모르니 언론사마다 데스킹을 잘해야 하며, 패턴화된 기사는 AI에게 맡기더라도 의제 설정 기능은 강화해 솔루션 저널리즘을 지향해 나가야 합니다.”
챗GPT 열풍이 거세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큰 반향을 부르고 있는 가운데 특히 교육 현장과 뉴스 현장의 위기의식은 남다른 데가 있다. <부산일보>가 최근 사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연속특강 ‘챗GPT가 몰고 온 AI 혁명과 미디어의 미래’는 새로운 기술이 언론을 어디로 데려갈지를 전망하는 흥미진진한 자리였다. ‘기사 만들기’ ‘다른 논조 합치기’ 같은 듣도 보도 못한 글쓰기의 새로운 무공(?)을 ‘시전’할 때는 밥그릇의 위협을 느낄 정도다.
언론과 학문 영역은 요즘 챗GPT의 직격탄을 맞은 듯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2022년 11월 30일 오픈AI(OpenAI)가 공개한 챗GPT는 언어모델과 딥러닝 기술을 적용한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로, 인간 수준의 텍스트 생성 능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짜깁기의 끝판왕’이랄 수 있는데, 글쓰기를 바탕으로 세워진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아성에 위기를 알리는 적신호가 들어온 셈이다.
되돌아보면 우리 언론 환경은 1990년대 들어와 급변하기 시작했다. 문선공이 뽑은 납 활자로 조판하는 등 활자 시대의 마지막 세대로 언론사에 들어온 기자는 원고 작성 등 모든 과정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시대를 거쳐 1995년 인터넷 혁명, 2010년 모바일 혁명, 2023년 AI 혁명을 차례로 경험하는 중이다. 미디어는 언제나 변화에 활짝 열려 있었던 셈이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언론학자 마셜 매클루언의 지적이 있었지만 이번의 챗GPT는 기존의 매체혁명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기술의 진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글쓰기의 주체인 기자의 아이덴티티를 단도직입으로 위협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 가짜 콘텐츠의 확산 우려가 벌써 현실화하고 있어서다. 교육 현장에서의 연구 윤리와 함께 뉴스 현장의 보도 윤리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언론, 특히 지방언론이 맞고 있는 위기는 중층적이다. 디지털 환경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지방소멸이라는 내부적 환경 변화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한국기자협회가 전 세계 50개국 언론인들을 초청하여 24~29일 개최하고 있는 ‘2023년 세계 기자대회’의 키워드가 ‘디지털’과 ‘로컬’인 것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디지털 전환과 미국 지역신문의 붕괴 현상인 ‘뉴스의 사막화’에서 보듯 로컬 저널리즘이 새로운 위기에 노출되어 있어서다.
디지털은 물론이고 지방소멸 역시 윤리 문제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 국토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고, 각종 특혜도 쏠려 있는 것은 사람에게나 국토에나 대단히 비윤리적이다. 수도권 주민은 일등 국민이고 비수도권인 지방 주민은 2등 국민이라는 차별과 배제가 오롯하다.
지방 홀대는 정치권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대단히 문제적이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수도권 승리에 올인한다는 방침을 서슴지 않고 밝히고 있다. 금태섭 전 의원이 추진하는 신당도 수도권 30석을 목표로 한다니 할 말이 없다. 지방 주민은 아예 유권자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아가 이들 정치인은 사표를 방치함으로써 표의 등가성에 심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현 소선거구제를 고치는 데도 부정적이다. 186가지에 달하는 특권과 특혜를 누린다는 국회의원이 유권자의 개혁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이다.
진선미(眞善美)는 인류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가치다. 철학을 비롯한 학문 세계에서도 중심을 이뤄 왔다. 지성(인식능력) 의지(실천능력) 감성(심미능력)에 각각 대응하는 진선미의 완전성은 논리학, 윤리학, 미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조명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기술의 진보와 함께 도덕적인 가치판단과 규범을 따지는 윤리가 갈수록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온라인 콘텐츠 대부분이 인공지능이 생산한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 공공연하다. 이런 가운데 잘못된 내용을 그럴듯하게 얘기해 혼란을 야기하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환각 환영 환청)은 사회 혼란을 부채질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가짜 뉴스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온 소셜미디어(SNS)에 대한 규제에 이미 착수했다고 외신은 전한다. 팩트를 추구하는 저널리즘 정신, 기자 정신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다시 오고 있는 것인가.
2023-04-27 [18:19]
-
[임성원 칼럼] 인간의 얼굴을 한 '수평 엑스포'
2030부산엑스포를 향한 여정이 순탄하게 이어지고 있다. 기상도는 쾌청이다. 지난 2~7일 6일간 국제박람회기구(BIE)의 한국 실사로 부산엑스포의 안개가 한층 걷힌 인상이다. BIE를 ‘Busan Is Expo’로 여기는 듯한 시민의 뜨거운 환대에 파트릭 슈페히트 실사단장은 “부산은 정말 모든 걸 갖추고 있다”고 화답했다. 성공적인 실사는 부산과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어 ‘부산에 유치해’를 함께 외친 데서 이미 확인됐다.
이제는 현지 실사가 남긴 과제를 점검하고 다음 전략을 짜야 할 때다. BIE 실사단은 14개 분야, 61개 항목에 걸친 한국 실사 평가를 담은 보고서를 내달까지 작성한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6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BIE 총회에서 171개 회원국에 배포된다. 이때 후보 도시들의 프레젠테이션(PT)도 함께 진행되는데, 보고서를 보완할 비전 제시가 지금의 부산으로선 발등의 불이다.
부산 실사로 분명해진 몇몇 지점이 있다. 2025년 일본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개최로 부산의 2030엑스포 유치가 불리할 것이라는 항간의 소문은 결국 기우에 불과했다. 대륙별 안배에 대해 실사단은 “BIE에는 그런 원칙이 없다”고 잘라 말하고 아시아에서 월드엑스포가 연달아 열린 사례도 소개했다. 따지고 보면 부산과 경쟁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도 아시아 지역인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 도시별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또한 확인됐다.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지 않듯이 절대로 도시끼리 비교하지 않는다는 게 BIE의 원칙”이라는 디미트리 케르켄테즈 사무총장은 “동일한 엑스포이지만 개념도 장소도 사람도 다 다르기 때문에 각 후보도시가 제안한 계획, 주제, 장점을 중심으로 타당성을 평가하고 보고서를 제출한다”고 말했다. 네거티브 유치전은 금물이라는 뜻이다.
무분별한 엑스포 개최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928년 설립된 국제박람회기구인 만큼 공정한 유치전을 보장하고, 선택은 철저히 회원국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륙별 안배든 경쟁도시 비교든 최종 판단은 회원국의 표심에 달린 셈이다. 결국은 부산이 제안한 계획, 주제, 장점을 통해 경쟁도시보다 비교우위를 확보하는 게 유치전 승리의 관건이다.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 부산이 내세운 2030엑스포 주제다.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지만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그동안 적지 않게 제기되어 왔다. △자연과의 지속 가능한 삶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 등 세부 비전이 뒤따르지만 주제의 막연한 인상은 채 가시지 않는다. 있어 보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주제를 알찬 내용으로 꽉 채우는 게 앞으로 부산이 해야 할 일이다.
이번 현지 실사에서 어느 정도 미션이 구체화됐다. ‘돌봄과 나눔의 장’이라는 부산 이니셔티브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가 있었지만 ‘자연과의 지속 가능한 삶’은 더 개선할 것을 분명하게 주문받았다. 케르켄테즈 사무총장은 “기후변화 위기 대응에 대한 해법을 더욱 전면에 내세워야 할 필요가 있고, 부산 유치가 확정된다면 더 깊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확장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되돌아보면 실사단의 부산 첫 방문지를 애초에 없었던 을숙도생태공원으로 결정한 것은 대단히 모험적인 시도였다. 부산시는 “과거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여 인간의 버림을 받은 자연 생태가 시의 노력으로 복원됐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지만 을숙도의 환경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철새의 낙원’ 을숙도에는 분뇨이송관과 침출수 이송관로가 여전히 묻혀 있고, 남단 탐조대와 탐방체험장 위로는 을숙도대교가 지나가며,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의 길목이기도 하다.
실사단이 떠나자 문화재청이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 19㎢의 문화재보호구역 해제를 요청한 강서구청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보도가 나왔다. 원자력 발전을 통해 산업계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탄소중립 기본계획을 정부가 내놓았지만 독일은 15일부터 현재 가동 중인 원전 3곳을 최종적으로 멈춰 세우고 원자력 발전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는 소식이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인 부산에 날아들었다.
부산은 개발과 보존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자연과의 지속 가능한 삶’의 최전선이다. 부산이 보여 주려는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는 어쩌면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신산스러운 근현대를 딛고 오늘의 번영을 이룬 부산은 환경 갈등과 분쟁의 조정을 통해서도 못지않은 부산 이니셔티브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 세우는 획일적인 수직도시에 맞서는, 희로애락의 다양한 인간의 얼굴을 한 민주적 수평도시. 2030엑스포를 향한 부산의 진보는 거침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2023-04-13 [18:08]
-
[임성원 칼럼] 자기정치의 부재, 낯부끄러운 현수막
벚꽃 절정이다. 지금 부산의 산은 벚꽃 동산이요, 거리는 벚꽃 천지다. 낮에는 꽃 무더기가 바람에 흔들리며 봄의 교향악을 울리고, 밤에는 꽃등을 환히 밝혀 봄밤의 달콤한 세계로 이끈다. 주말 지나고 비라도 오면 속절없이, 그리고 가뭇없이 스러지고야 마는 게 제 운명인 것을 알기에 벚꽃은 더 아름답고 찬란하다. 다행히 봄꽃의 향연 속에 2030부산엑스포로 가는 관문인 국제박람회기구(BIE)의 현지 실사가 내일모레 막 오른다.
아침 출근길에 ‘엑스포가 세긴 세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낙화를 아직 준비하지 않은 꽃그늘 아래로 청명한 도시 미관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맑고 깨끗한 도시라니, 부산의 재발견이다. 실사단 맞이를 위해 정치 현수막을 일제히 걷어 내자 부산의 길거리 풍경이 사뭇 달려졌다. 이 적요한 아름다움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덕지덕지 나붙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욕설과 비방의 낯부끄러운 언어로 국민 정서에 막대한 피해를 부른 현수막은 부산은 물론이고 전국에 걸쳐 길거리 공해의 주범으로 꼽혔다. 당연히 수도권 비수도권을 가리지 않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문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현수막 공격의 화살이 고스란히 정치 혐오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곳은 정치권뿐이다.
현수막 정치에는 정치권 그들만의 특권이 작동하고 있다. 올해 들어 갑자기 정치 현수막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12월 국회가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다.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아 지정된 곳에만 걸 수 있었던 정당 현수막이 아무 곳에나 개수 제한도 없이 15일간 자유롭게 걸 수 있도록 했다. 형평성이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으며, 현수막 제작 비용도 국고보조금이나 정치후원금에서 나가니 이런 후안무치가 없다.
통제 불능 상황을 더 심화하는 것은 현수막을 단속해야 할 구청 공무원들이 정치인 눈치를 보며 절절매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다. 과태료 처분 외에 별다른 제재 방안도 없고, 금액도 건당 10~2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도 문제적이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특권의식이 나라의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서에까지 악영향을 끼쳐도 개선의 기미가 없다. 법을 뜯어고쳐야 하는데 가만 놔두면 국회의원들이 나서 잘도 법을 바꾸겠는가.
여의도식 정치문법이 활개 치는 현수막은 한국정치의 후진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를테면 부산 곳곳에 내걸린 정치 현수막을 보자. 국민의힘의 ‘이재명판 ‘더글로리’, 죄지었으면 벌받아야지’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순신 학폭·곽상도 50억, 검사 아빠 전성시대’ . 길거리정치에서도 완강한 양당 구도다. 다른 당은 제대로 명함도 못 내민다. 정치담론을 두 당이 장악한 인상이다.
더 문제는 똑같은 문구의 현수막이 국회의원 혹은 당협위원장의 사진과 이름만 바뀐 채 부산 곳곳에 내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현수막에서도 중앙정치에 볼모로 잡힌 지방정치의 현주소가 잘 드러난다. 정치 현수막에 지역 현안이 등장하는 것은 가물에 콩 나듯 한다. 특정 정당의 인기가 높은 곳은 그 당의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지역을 대변하는 정치인보다는 중앙정치를 잘 대변할 ‘막대기 정치인’이 있을 뿐이다.
중앙정치에 볼모 잡힌 게 어디 지역정치뿐이랴. 여의도 정가에서는 ‘자기정치한다’는 말이 잘못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수사로 사용된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소신에 찬 발언과 행동으로 정치적 야망을 펼치려 하면 사방팔방에서 주저앉히려는 세력과 맞서야 한다. 권력자의 뜻과 당의 방침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조리돌림을 당한다.
BIE 실사단이 4월 7일 떠나면 ‘벚꽃 엔딩’에 맞춰 길거리는 다시 ‘정치 공해’에 노출될 것이다. 지역정치 자기정치는 없고 서울에서 붕어빵처럼 찍어 낸 현수막이 국회의원 당협위원장의 이름과 사진만 달리 한 채 부산 곳곳에 나부낄 것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일 180일 전인 8월부터는 유권자의 1인 현수막 게시도 가능해져 현수막 난장판은 극을 달릴 참이다.
마침 국회가 30일부터 전원위원회를 열어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제안한 선거제도 개편안 논의에 들어간다. 국회의장을 제외한 현역 의원 299명이 모두 참석해 2주간 난상토론을 벌이는데, 전원위 자체가 2004년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을 다룬 후 처음으로 열리는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정치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만큼 양당 체제의 줄세우기식 정치풍토를 혁신할, 정치인을 위한 선거제가 아니라 유권자를 위한 진정한 선거제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2023-03-30 [18:18]
-
[임성원 칼럼] '관문의 섬' 가덕도, 비상하다
가덕도에 가려면 하단에서 환승해야 한다. 을숙도 지나 명지 녹산 건너 부산신항을 따라가면 그 섬에 닿는다. 낙동강 하구에 떠 있는 섬이지만 뭍과 가까운 대개의 섬이 그렇듯 개발 바람으로 이미 육지화된 지 오래다. 진해 용원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던 기억은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고, 가덕도는 부산신항과 거가대교가 들어서면서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가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이 되었다.
가덕도가 내려다보이면 ‘벌써 한국이구나’ 생각이 든다. 후쿠오카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다 대마도가 보이면 절반쯤은 왔고, 가덕도와 낙동강 하구의 섬들이 점점이 눈에 들어오면 부산이고 한국이다. 제주 가는 것보다 더 짧은 비행 거리에 일본이 있고 보면 부산과 일본, 특히 규슈는 만만치 않은 관계라는 사실을 대한해협의 하늘 위에서 실감하게 된다. 가덕도는 국경의 섬이자 경계의 섬인 것이다.
부산이라는 이름 앞에 여러 수식어가 붙지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관문 도시일 터이다. 관문(關門)은 국경이나 요새 따위에 드나들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길목을 뜻한다. 부산을 지켜 온 부산진성 앞 돌기둥에는 동쪽에 ‘남요인후’(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다), 서쪽에 ‘서문쇄약’(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이라는 글귀를 각각 새겼다. 관문도시 부산의 진면목이 거기에 있다.
그 부산진성의 전방에 다대포의 다대진성, 그 앞에 가덕도의 가덕진성과 천성진성이 있다. 특히 천성진성은 근래 부산의 유일무이한 이순신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부산시민의 날인 10월 5일은 부산포해전 승전일인데, 부산포해전 승리를 위해 이순신 장군이 천성진을 적극 활용했다는 게 부산시립박물관의 주장이다. 가덕도 연대봉 봉수대는 대마도 방면 왜구를 감시하던 곳이다. 가덕도는 부산의 최전방, 한국의 지오피(GOP)였던 셈이다.
가덕도는 왜구와 일본군의 수중에도 떨어질 정도로 경계를 오갔다. 눌차왜성을 비롯하여 임란 때는 왜군에 가장 오래 점령됐고, 수시로 왜구의 소굴로 전락했다. 개항 이후로는 일제가 러일전쟁에 대비해 1905년 외양포에 진해만요새사령부와 포병대대를 설치하는가 하면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한반도 상륙에 대비해 새바지항에 인공동굴 여러 개를 파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관문 노릇을 했다.
가덕도는 북단에 부산신항의 남컨테이너터미널이 자리 잡으면서 섬의 면모를 일신했고, 터미널은 진해만 쪽으로 계속 매립하여 확장되는 추세다. 남단에는 가덕신공항이 2024년 말 착공하여 2029년 12월 완공될 예정이다. 국토교통부가 14일 개최한 가덕신공항 기본계획 수립용역 중간 보고회에 따르면 육·해상 매립 방식으로 가덕신공항이 추진된다. 가덕도는 이제 남에는 가덕신공항, 북에는 부산신항, 가운데는 거가대교가 지나 육로와 해로에다 하늘길까지 갖춘 교통 요충지가 되었다.
공항 배치안을 보면 가덕도 남단에서 잘록한 모양으로 마주 보는 대항항과 새바지항은 건드리지 않고 그 아래 국수봉(265m)과 남산(188m)을 절취해 평지로 만들고 해상을 매립하는 방식으로 공항이 들어선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 발트함대의 남진을 방어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포진지를 비롯한 외양포 마을과 국수봉 쪽의 화약고·관측소·산악 보루 등 유적지는 사라지게 된다. 동백군락지와 산림도 훼손 위기를 맞는다.
부산 시민의 오랜 염원에 힘입어 착공과 개항 시기를 못 박은 가덕신공항의 정부 로드맵이 마침내 나왔다. 2030부산엑스포 유치 열기가 갈수록 고조되는 데다 4월 2일부터 시작되는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현지 실사를 앞두고 신공항의 개항 시기를 2029년 말로 조정한 것이다. 하지만 환경단체 등 다른 시민사회 쪽에서는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분명하고도 꾸준하게 내 온 것도 사실이다.
가덕신공항이 부산 재도약의 모멘텀이자 지역 균형발전의 상징으로 여론의 지지를 얻으면서 개발과 보존 사이에 타협점을 찾기 어려워진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지역사회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여야를 가리지 않는 정치권의 단합된 노력으로 가덕신공항 로드맵이 나온 만큼 신공항이 ‘24시간 안전한 남부권 관문공항’으로 자리 잡기를 소망할 뿐이다.
부산의 최남단 가덕도는 봄이 오는 길목이다.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낸 올봄 초입에 찾은 가덕도는 따뜻한 남쪽 나라였다. 봄꽃이 앞다퉈 피는 가운데 뭍의 바닷가처럼 섬의 경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대형 베이커리 카페가 들어서 상춘객을 유혹했다. 관문도시 부산의 관문인 가덕도가 이제 비상한 시절을 맞았다. 경계를 넘어 세계로 비상할 가덕도가 교통의 요충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시구처럼 세계와 소통하는 ‘그 섬’이었으면 한다.
2023-03-16 [19:33]
-
[임성원 칼럼] 다시, 동천의 기적
산이 많아 처음에는 부산(富山)으로 불렸던 부산(釜山)의 그 많고 많은 산 중에서 도시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백양산이 제격이다. 부산의 중심에 자리 잡아 동서남북은 물론이고 서면 도심과 그 너머 북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까닭이다. 선암사 극락전 앞마당에 서면 백양산에서 발원한 동천의 하구와 만난 바다가 햇살에 하얗게 부서지면서 유유한 강줄기로 이어져 절집 이름이 애초에 왜 견강사(見江寺)였는지 짐작게 한다.
바다와 강, 산을 두루 품어 부산을 삼포지향(三抱之鄕)이라 하지만 산을 자주 찾는 이라면 산과 강, 바다는 굳이 나눌 게 못 된다는 것을 안다. 산에서 강이 나오고 그 강이 바다를 이루기에 산은 물이요, 물은 곧 산이다. 산신과 바다의 신 용왕을 하늘 가까운 산에 있는 사찰의 삼성각에서 두루 만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부산은 백두대간의 낙동정맥에 터 잡고 낙동강, 보수천, 동천, 온천천을 비롯한 수영강 등을 젖줄로 삼는다.
독일에 라인강의 기적, 서울에 한강의 기적이 있다면 부산에는 ‘동천의 기적’이 있다. 라인강과 한강이 독일과 한국의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의 상징이라면 동천은 한국 산업화와 부산 도시화의 견인차다.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 LG그룹의 밑거름인 락희화학과 금성사를 비롯하여 조선방직, 동명목재, 성창기업, 국제그룹, 화승그룹, 넥센그룹, BN그룹, 동성화학, 송월타올 등 국내 유수한 기업의 터전이었다. 산업화 물결에 맞춰 도시화도 서면 번화가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진행됐다.
부산의 도심·부심 자리를 놓고 광복·남포동의 보수천 유역과 경합을 펼쳐 온 동천 유역은 ‘똥천’이라는 말에서 보듯 옛 영화를 뒤로하고 몰락의 길을 재촉해 왔다. 한때 부산의 관심은 되살아난 온천천을 비롯하여 센텀시티와 마린시티가 있는 수영강 유역으로 옮겨 가기도 했다. 악취와 오염의 대명사였던 동천은 백년하청이요, 강변의 문현금융단지도 더디기만 했다. 그렇게 지리멸렬을 거듭했고, 소생 불능의 판정을 받은 듯 시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최근 저녁 자리를 마치고 산책길에 나선, 부산시민회관에서 요즘 핫하다는 전포 카페거리에 이르는 동천변에는 봄밤의 달콤함이 묻어났다. 문현금융단지 앞 보행덱에는 제법 많은 시민이 오갔고, 가벼운 운동을 하며 담소를 즐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부산국제금융센터(BIFC), BNK 본점, 기술신용보증기금 본점, 뮤지컬 전용 극장 드림씨어터, 증권박물관 등의 네온사인이 낮과는 사뭇 다른 정취를 안겼다.
올 하반기 부산 이전이 확정된 국책은행 KDB산업은행 본점이 여기에 가세한다면 금융중심지 부산은 날개를 달게 되는 셈이다. 상반기에 행정 절차를 마무리하고 하반기 공공기관 2차 이전 때는 반드시 부산에 올 수 있도록 정부와 부산시, 산은 이전단을 중심으로 한 치의 차질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출입은행과 수협중앙회 등이 잇따라 부산에 오는 데 미리 탄탄대로를 닦는 계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2009년 서울 여의도와 함께 금융중심지로 지정된 부산 문현금융단지는 15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금융중심지라는 이름값부터 하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금융회사 167곳 중 98%(164곳)가 서울에 쏠린 극심한 지역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도록 국제 금융회사 유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 블록체인 특구 부산에 걸맞게 핀테크와 블록체인 기술, 금융을 융합한 디지털자산 거래 플랫폼 마련도 서둘러야 한다.
마침 부전천 복원사업도 다시 시동이 걸렸다. “생태하천 사업으로 보기 어렵다”며 2018년 환경부가 퇴짜를 놓았지만 지난해 말 환경부 공모에 선정돼 국비 확보의 길이 열렸다. ‘물관리 일원화’로 환경부가 생태 업무에다 치수 업무까지 맡으면서 사업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광무교~롯데백화점 750m와 영광도서~동해선 굴다리 550m의 복개도를 걷어 내고 하층부는 치수, 상층부는 친수 기능을 각각 맡는 이층식 하천으로 공원화된다. 윗물인 부전천이 맑으면 아랫물인 동천도 맑아지게 마련이다.
2032년 부전천 복원 사업 완공에 맞춰 동천 해수 도수 사업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2010년부터 바닷물을 끌어와 광무교, 범3·4호교, 성서교 등 6곳에 방류해 왔지만 목표치인 4등급 근처도 못 가는 최하위 5등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동안 헛돈 345억 원만 날린 셈이다. 오염된 바닷물로 동천을 씻어 내렸는데, 바닷물로 민물 수질을 개선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마뜩잖다.
백양산에서 발원한 동천이 생태적인 건강을 회복한 채 서면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면 부산의 미래이자 희망이 될 북항의 바다와 만나게 된다. 2030부산엑스포가 유치되면 동천 하구에 있는 미군 55보급창과 자성대부두는 엑스포의 주 무대로 단연 기대를 모은다. ‘다시, 동천의 기적’을 꿈꾸는 것은 그래서다.
2023-03-02 [18:21]
-
[임성원 칼럼] 북항의 봄, 엑스포 맞으러 가자
북항에도 봄이 왔다. 부산역과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을 잇는 공중보행교를 따라 걸으면 바다를 배경으로 거느린 북항재개발사업지가 한가득 눈에 들어온다. 보행덱, 보도교로 이어진 친수공원과 경관수로에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봄 햇살이 잘게 부서지고 있다. 랜드마크 부지 내 야생화단지는 벌써 푸른빛을 머금었고, 여차하면 유채꽃 꽃잔디 금계국의 꽃망울을 잇따라 터뜨릴 기세다.
점심시간이어서인지 테이크아웃 음료를 들고 삼삼오오 북항 친수공원을 걷는 직장인의 모습이 이곳저곳 눈에 띈다. 1876년 개항 이후 146년 만인 지난해 개방되기 시작한 북항은 그동안 야금야금 금단의 땅을 해제해 왔다. 이제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오페라하우스 앞까지 들여놓았고, 영도가 바로 코앞인 그곳 전망대에는 바닷물에 손과 발을 담글 수 있는 ‘친수공간’이 마침내 완성됐다.
올봄에 들어와 친수공원은 더 봄단장에 열중이다. 시민들이 편하게 북항의 바다를 즐기도록 각종 편의시설 마련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이쯤 되면 ‘부산 시민들이 슬리퍼 신고 와서 즐길 수 있는 북항’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어느 정도 현실화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보도교 위에서 내려다보면 해초까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맑은 물빛, 손과 발을 담그도록 유혹하는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는 한때 시민의 바다를 빼앗긴 북항에도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그런 북항이 어찌 부산 시민만의 것일 수 있겠는가. 부산역을 나와 부산항 하늘광장으로 이어지는 공중보행교를 따라 캐리어를 끌며 북항을 즐기는 외지인 관광객이 적지 않다. 게다가 국제여객터미널도 정상화됐다. 오사카, 후쿠오카, 시모노세키에 이어 오는 25일 대마도 항로까지 열리면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모든 뱃길이 복원되는 셈이다. 텅텅 비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던 터미널 야외주차장도 이제는 제법 차량으로 자리를 채우는 분위기다. 부산의 관문인 부산역과 국제여객터미널을 끼고 있는 북항은 이제 국내외 관광객들도 즐기는 친수공간이 되었다.
유채꽃이 만발할 4월이 오면 북항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단초를 마련할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개최 후보 도시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이 4월 2~7일 한국을 찾는데, 현지 실사의 주 무대가 바로 북항이다. 특히 유채꽃이 필 해양문화지구의 랜드마크 자리는 부산엑스포의 메인 광장 역할을 할 곳이어서 더욱 이목이 쏠리고 있다.
부산시는 BIE 실사단이 가는 곳마다 스토리텔링을 입혀 부산엑스포 개최의 당위성을 강조한다는 전략을 세워 놓았다. 이번 실사는 엑스포의 운명을 가르는 건곤일척의 승부수가 될 전망이다. 6월에 열리는 BIE 총회에서 실사 결과 보고서가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오는 11월 엑스포 개최지 선정 투표에 나서는 171개 BIE 회원국에 전달·공유된다.
2030엑스포의 시간표에서 본다면 11월 투표에 앞서 실사 보고서가 공개되는 6월이 아무래도 분수령이 될 듯하다. 그 6월의 승부를 사실상 결정짓는 게 현지 실사이고 보면 4월 부산 현지 실사에 엑스포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월 6~10일 진행되는 경쟁도시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의 현지 실사 분위기도 반드시 체크해야 할 사항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기에 그렇다. 양 도시 간의 초박빙 경쟁구도를 깰 절호의 기회가 바로 현지 실사다.
그렇다면 현지 실사 때까지 남은 한 달 보름은 천금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총력전 전면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걸 다 쏟아붓고 부산과 한국의 미래까지 온전히 걸어야만 하는 시간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엑스포특위를 앞세운 국회가 유치전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모습은 고무적이다.
연말에 결판이 나는 부산엑스포 유치 여부는 내년 총선의 결과를 미리 알리는 바로미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권자이기도 한 부산 시민, 부울경 주민들은 엑스포를 위해 누가 열과 성을 다해 뛰어왔는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엑스포 유치를 향한 대장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엑스포는 부산에 있어 ‘거의 모든 것’에 가깝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엑스포 유치에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걸어야 마땅하다.
북항에 봄이 오고 있다. 어느덧 슬세권(슬리퍼로 생활 가능한 세력권)으로 다가온 북항에 앞다퉈 달려가 엑스포를 맞이할 시간이다. 그곳에서 부산의 미래와 희망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부산이라 좋다’(Busan is Good)는 감탄사를 섞은 자긍심을 물려줄 채비를 할 때다. 마침내 그 소망이 이뤄진다면 2023년은 부산의 새 이정표를 세운 찬란한 한 해로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2023-02-16 [18:17]
-
[임성원 칼럼] 변덕스러운 날씨, 표변하는 민심
벌써 입춘이다. 최강 한파로 불리며 기세등등했던 동장군도 계절의 변화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게 자연의 이치인 듯하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터라 더 기다려 온 봄이다. 새봄의 문턱인 입춘을 넘으면 여름, 가을 지나 또다시 겨울은 찾아올 것이다. 돌고 도는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차면 기울고, 피었다가는 스러지는 게 세상살이의 섭리다.
부산은 이제 마냥 따뜻한 남쪽 나라만은 아니다. 한때 겨울이면 전국의 노숙자가 부산역으로 몰려온다는 풍문이 돌았지만 부산이라고 해서 이상 기후의 무풍지대일 수는 없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 가까운 한파라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만 내리면 설설 기는 부산의 눈사태(?)가 재현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외지인에게는 부산의 관문이랄 수 있는 부산역은 더는 추위로부터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막차를 놓친 70대 할머니를 최강 한파의 거리로 내쫓은 부산역 경찰의 비정과 몰인정은 시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세상살이가 팍팍해지면 맨 먼저 고통을 받는 게 어디 명함 내밀기조차 어려운 서민일 터이다. 기후 온난화로 변덕스러운 날씨는 갈수록 기승을 부릴 것이고 보면 사람 대접받는 사람 사는 세상이 더 간절해진다.
날씨만큼 변덕스러운 게 정치 기상도다. 흐렸다 개었다 널뛰기를 거듭한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水則載舟 水則覆舟)는 말처럼 정치는 민심의 바다 위에 뜬 일엽편주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을 때 변덕(變德)스러운 민심도 하나의 덕(德)이요, 나아가서는 표범의 무늬가 가을이 되면 아름다워진다는 표변(豹變)으로 민심은 진화한다. 변덕스럽고 표변하는 민심을 우습게 알다가는 낭패당하기 일쑤다.
봄이 오면서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도 찾아왔다. 오는 3월 8일 예정된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계기로 내년 4월 22대 총선을 향한 경주에 출발의 총성이 울린 인상이다. 특히 당내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나경원 불출마’가 부른 나비효과까지 겹쳐 민심 아닌 당심도 변덕과 표변을 거듭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천권을 둘러싼 여당발 총선 모드는 정치권 전체를 일찌감치 내년 4월로 시간 이동을 해놓았다.
온실 속 화초처럼 존재감 없는 의정활동으로 비판받아 온 부산·울산·경남(PK) 국회의원들을 향한 민심의 눈길도 곱지만은 않다. 폴리뉴스·뉴스더원·한길리서치가 지난해 11월 19~21일 실시한 여론조사(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조)에 따르면 PK 유권자 82.5%가 21대 국회의원들이 ‘의정활동을 잘 못한다’고 평가했고, 84.5%는 ‘절반 이상 교체’를 원했다. 22.2%는 ‘거의 대부분 교체’를 희망했다.
부산은 어떤가. 현역 의원 50% 이상은 교체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부산일보〉가 현행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3대 총선 이후 9차례의 선거 결과를 분석한 결과 현역 국회의원 교체율이 50.1%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공천에서 떨어지든 낙선하든 말이다. 절반은 물갈이된다는 전제 아래 내년 총선을 전망하는 게 보다 이성적인 태도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부산 국회의원을 향한 불만은 차고도 넘친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 따르면 부산 국회의원들의 공약 이행률은 25.83%로 4개 중 1개만 이행하는 데 그쳤다. 이는 전국 평균(26.95%)에 못 미치는 데다 인근 울산(42.61%)과 큰 차이를 보였다. 지난해 국회 본회의 안건 투표에서 부산 의원 18명 중 3분의 1인 6명은 단 1건의 반대투표조차 하지 않아 ‘묻지마 찬성’의 안건 거수기로 전락했다거나 국회 발언 수가 전년도의 20~50%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도 나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시민이 바라보는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국회의원들의 시선이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고리원전 안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과 관련해 먼 산만 쳐다보던 국회의원들이 한 당권주자가 “임시저장 시설 용납 불가”라고 하자 일제히 관련 특별법 저지에 나서겠다고 한다. 엑스포 유치전에서 중요 변수가 된 가덕신공항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관문공항’으로서의 위상을 지키면서 2029년 조기 개항에 힘을 모아야 하지만 마찰음만 요란하다. 이러니 부산 국회의원들이 무슨 존재감이 있겠나.
부산 민심은 단순하다. 시민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공감하는 정치다. 부산을 위해 할 말은 하는 국회의원, 정치적 이해타산에 굴하지 않고 지역을 떠받드는 대변자다. 내년 총선까지는 1년여 시간이 남았다. 적지 않은 시간이요, 돌이키기도 힘든 시간이다. 그 속에는 부산의 운명을 건 2030엑스포 유치전도 있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긴 듯하지만 하나도 빠트리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고 했다. 정치인의 옥석을 가리는 유권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23-02-02 [18:25]
-
[임성원 칼럼] '마음은 벌써 고향' 기부제
‘일상의 회복’ ‘명절의 회복’ 기미가 완연하다. 설 연휴를 앞둔 명절 기상도는 한마디로 쾌청이다. 덩달아 귀성길에 오르기도 전에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다.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일상이 돌아오면서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는 게 효도’라던 현대판 장승은 뿌리뽑힌 지 오래다. ‘이번 명절에는 안 와도 된데이’ ‘불효자는 ‘옵’니다’ 따위의 플래카드가 언제 나붙기나 했나 싶을 정도다.
실내 마스크 의무 해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코로나19 확진자 7일 격리와 더불어 일상을 옥죄던 마스크로부터 해방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방역 당국은 실내 마스크 해제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판단 아래 이달 말께 마스크 착용 여부를 자율에 맡길 참이다. 2020년 1월 20일 코로나19가 국내에 상륙한 지 3년 만에, 3000만 명에 가까운 확진자와 3만 30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찾아온 일상 회복이다.
고향 찾는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이번 설에 부산 시민 147만 5000명이 고향을 찾을 것으로 전망됐다. 부산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337만 명 가운데 43.79%에 달하는 시민이 귀성길에 오른다. 흥미로운 것은 목적지별 예상 인구인데, 경남·울산이 86만 명(58.3%), 경북·대구가 28만 명(19.1%), 서울·경기·인천 수도권이 16만 명(11.2%)으로 집계됐다.
부울경이 본디 하나라는 것을 입증하는 조사다. 가까운 고향을 찾는 시민의 발걸음이 가벼운데다 선물꾸러미까지 더해져 한결 풍성한 명절이 되었다. 새해부터 시행에 들어간 고향사랑기부제 덕분이다. 고향사랑기부제는 개인이 고향에 기부하고 지자체는 이를 모아서 주민 복리에 사용하는 제도로, 기부자에게는 세액공제와 기부한 고향의 답례품이 제공된다. 연간 500만 원 한도로 10만 원까지는 전액 세액공제, 10만 원 초과분은 16.5%를 공제받는다. 기부 금액 30% 이내에서 답례품도 준다.
설을 앞두고 고향(?) 사랑을 실천할 목적으로 ‘고향사랑e음’에 회원 가입을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누리집에서 밝힌 고향의 정의다. 기부자 본인의 주민등록등본상 거주지를 제외한 지역자치단체가 고향이란다. 고향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살고 있는 시민은 졸지에 타향을 고향으로 삼아야 할 판이다. 여기서 연대의 필요성이 엿보인다. 기부제 취지가 지방소멸을 방지할 목적이고, 아직 이 제도를 모르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하니 일단은 지역이 합심하여 제도부터 안착시키고 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부울경 메가시티가 좌초 위기를 맞은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부산 시민 가운데 고향 찾아 떠나는 귀성객의 60% 가까이가 경남과 울산이어서 부울경이 윈윈하는 상생 방안을 찾는다면 지역의 살림살이는 더욱 윤택해질 게 불을 보듯 자명했다. 김두겸 울산시장이 해오름동맹 도시인 경주·포항시 시장과 상호 교차 기부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부울경 메가시티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답례품을 둘러싸고 노심초사하는 지자체도 많다고 한다. 고향사랑e음에 들어가 보니 부울경에서는 부산 서구·부산진구, 울산 남구 3곳이 아직 답례품을 준비하지 못했다. 지자체마다 특산품이 사뭇 달라 기부의 ‘부익부 빈익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올 한 해 하고 그만둘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기부의 연속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특산물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역 특성에 맞는 눈길 끄는 답례품을 마련하는 것은 지자체의 몫이다. ‘불멍·별멍때리기’ ‘템플스테이’ ‘벌초 대행’ 등 이색적인 답례품도 이미 상당수다. 2008년부터 ‘후루사토(고향) 납세’를 시행하고 있는 일본으로 눈을 돌리면 지역 현안을 스토리텔링이나 크라우드펀딩과 연결하는 사례를 얼마든지 벤치마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의 기부만으로 지방소멸을 해결하려는 것은 책임 있는 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지자체 평균 재정자립도가 48.7%(2021년 기준)에 그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고, 243개 지자체의 절반 가까이가 지방세 수입으로는 공무원 인건비도 충당하지 못하고 있음을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재정분권이 문제 해결의 핵심으로, 8대 2 수준에 그치고 있는 국세와 지방세 비중을 7대 3, 6대 4로 좁혀 나가는 개혁이 절실하다.
고향사랑기부제 시행으로 귀성이 아니라도 마음은 벌써 고향에 닿는 길이 활짝 열렸다. 기부자의 마음을 늘 고향에 머물게 하려면 지자체마다 시민의 마음을 얻는 데 최우선인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답례품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고, 지역을 찾는 기부자를 환대하는 등 연속적인 기부가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2023년 계묘년이 지역 연대와 고향 사랑으로 지방소멸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원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3-01-19 [17:44]
-
[임성원 칼럼] 살기 좋은, 서로 다리가 되는, 진정한 부산
연말 도서관에서 빌린 대여섯 권의 책을 뒤적이다 연시를 맞았다. 문득 새해 경구로 삼아도 좋겠다는 글을 발견한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취모용료급수마(吹毛用了急須磨). ‘털 한 올을 불어 사용했어도 급히 갈아 두어야 하리’라는 뜻으로, 불교 임제종 시조인 임제의현의 임종게에 나오는 구절이다. 머리카락을 칼날에 갖다 대고 훅 불기만 해도 끊어질 정도로 예리한 취모검이라도 털 한 올을 불어 사용한 뒤에는 급히 갈아 둘 정도로 부지런히 수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유교의 사서 중 하나인 〈대학〉을 강의한 책에서 불교의 시퍼런 선기(禪氣)가 뚝뚝 묻어나는 시를 만나니 더 신선했다. 계묘년 독서 목록에 유불도 혹은 유불선을 넣은 것은 꾸준히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리는 회복탄력성 혹은 회복력(resilience)이라는 단어의 영향이 컸다. 회복력은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인데,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효율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 〈회복력 시대〉를 지난 11월 출간해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 있어 동양의 고전인 유불도가 발밑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란 기대에서 시작한 독서였다.
‘털 한 올’은 강조 어법에 많이 등장한 말이다. 털끝은 물론이고 호말(毫末), 일호(一毫), 호리(毫釐), 추호(秋毫) 등이 그렇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 한때 정치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신년 휘호(揮毫)는 붓글씨 문화가 쇠퇴하면서 털끝만큼도 찾기 어려운 세태가 되었다. 자리의 오른쪽에 놓인 쇠붙이에 새긴 글이라는 좌우명(座右銘)도 스마트폰의 캘린더 앱이 대체하는 시대다. 하지만 작심삼일일지라도 새해를 맞으면 마음속 결의 하나를 다지는 것은 장삼이사들의 변치 않는 통과의례일 터이다.
지역이라고 해서 새해 각오가 없을 수 없다. 부산은 무엇보다 올해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유치의 해를 맞았다. 4월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현지 실사, 6월 4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 11월 5차 경쟁 PT와 BIE 170개 회원국 최종 투표의 시간이 예정돼 있다. 투표 결과 엑스포 유치가 확정되면 부산은 대전환·재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다.
부산의 새로운 도시 슬로건도 기대를 더한다. 박형준 부산시정은 ‘다이내믹 부산’을 20년 만에 대체할 새로운 슬로건 선정 작업에 나섰고, 최종 후보 3개를 3일 공개했다. ‘Busan is Good’(부산이라 좋다), ‘Bridge for All, Busan’(모두를 연결하는, 부산) , ‘True Place, Busan’(진정한 도시, 부산). 새 슬로건은 10일까지 온오프라인 투표를 거친 뒤 13일 도시브랜드위원회에서 최종 선정된다.
일단은 ‘다이내믹 부산’만큼 자극적이지는 않다는 게 중평이지만 1만 3000여 명의 시민과 전문가 참여를 거쳐 결정된 만큼 집단지성의 힘을 믿어 볼 일이다. 따지고 보면 미국 뉴욕의 ‘I Love New York’이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I amsterdam’도 톡톡 튀는 슬로건은 아니다. 이번 후보작들이 부산에 관한 다양한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개방형이라는 데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는 하다.
국가적으로도 올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칠 전망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일 신년사에 이어 2일 신년 인사회, 3일 첫 국무회의에서 잇따라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여기다 중대선거구제까지 언급해 개혁 이슈를 대통령실이 선점한 인상이다. 선거가 없는 올해 국정에 성과를 내야 한다면서도 내년 4월 총선까지 겨냥한 셈이다.
노동·교육·연금 개혁은 우리 사회의 이해가 엇갈리는 난제 중의 난제로, 거론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폭발성이 크다. 더욱이 국가 소멸을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로 다가온 저출산·고령화와 겹쳐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곧 본격화할 정년 연장 논의를 비롯하여 세대와 진영 간의 이중삼중의 갈등이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며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균형발전이야말로 난마처럼 얽힌 국가적 현안을 해결할 주효한 카드다. 다가오는 인구 구조 변화에 맞서려면 탈수도권 집중, 균형발전이 특효약이다. 윤 대통령도 “고등 교육에 대한 권한을 지역으로 과감하게 넘기고, 그 지역의 산업과 연계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며 “교육 개혁 없이는 지역 균형발전을 이뤄 내기 어렵고, 또 지역 균형발전은 저출산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신년사에서 강조한 바 있다.
계묘년 새해에는 털 한 올을 불어 사용한 일까지도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수행자 같은 회복력의 자세가 요구된다. 이럴 때 부산은 혼종성 역동성 저항성 단발성에 기반한 화통의 부산미를 짱짱하게 회복할 수 있다. 부산의 새 도시 슬로건처럼 살기 좋은, 서로 다리가 되는, 진정한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소망해 본다.
2023-01-05 [18:22]
-
[임성원 칼럼] 부산 재도약의 '라스트 댄스'
성탄절과 세밑이 내일모레다. ‘범 내려온다’며 2022년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섰다. 가는 해를 보내는 회한과 새해를 앞둔 희망이 교차하는 시간의 건널목에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되돌아보며 세월의 매듭을 지을 때다. 어느 해가 그렇지 않으랴마는 목하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는 올해도 일상에 크고 작은 변화를 불러왔던 게 분명하다.
첫째는 지긋지긋했던 코로나19와 마침내 작별할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최근 당정협의회에서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조속한 시일 내에 해제하겠다는 방침을 확인하고, 그 시점을 내년 1월로 잡았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 각국에서는 이미 실내 마스크를 벗은 지 오래고, 국내 지방자치단체도 잇따라 마스크 해제를 정부에 공공연히 압박하고 있는 참이다.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의 일상 회복은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우리 삶에 스며들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어느덧 사라졌다. 지금은 그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스라하지만 ‘사적 모임 10인·영업 시간 밤 12시’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된 게 4월 15일이었고, 실외 어디에서든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어진 것도 9월 26일의 일이다. 2020년 5월 시작된 ‘거리 두기’의 족쇄에서 비로소 풀려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정치 지형의 변화다. 3·9 대선과 6·1 지방선거가 보수의 한판승으로 끝났다.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 사는 국민의 나라’를 기치로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고, 부울경에서는 7월부터 박형준 부산시정, 박완수 경남도정, 김두겸 울산시정이 막 올랐다. 진보에서 보수 일색으로, 드라마틱한 정치 지형의 변화이다 보니 곳곳에서 파열음이 멈추지 않는 상황이다.
부울경에서는 단체장과 함께 광역의회도 국민의힘이 장악하다 보니 지방정부와 지방의회 간의 마찰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소야대에다 0.73%포인트 차이의 대선 결과는 중앙정치를 정쟁의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협치와 소통은 사라지고 사사건건 대립이다. 여기에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나눠 진영 패싸움을 즐기는, 지나치게 정치 지향적인 민심도 정쟁에 기름을 부었다.
셋째는 기로에 놓인 지역 재도약의 꿈이다. 연초까지만 하더라도 부울경 도약과 비상의 길은 메가시티와 엑스포로 나 있었다. 부울경 메가시티는 급격히 추진 동력을 잃었고, 부산엑스포는 내년 4월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현지 실사와 11월 BIE 총회에서의 최종 투표라는 건곤일척의 일정을 남겨 둔 상태다. 메가시티가 좌절되면서 부산엑스포는 지역 재도약의 ‘마지막 비상구’(Last Exit)이자 ‘라스트 댄스’(Last Dance)가 되었다.
2022년은 ‘메가시티의 해’로 기록될 것이라는 전망은 허망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행정안전부가 4월 18일 ‘부산·울산·경남 특별연합 규약안’을 승인하고 부울경 3개 시도지사가 이를 고시함으로써 메가시티는 출범의 고고성을 울렸고, 2023년 1월 본격적인 사무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박완수 경남도지사와 김두겸 울산시장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결국 메가시티는 부울경 초광역경제동맹이라는 알맹이 없는 수사로 탈바꿈했다.
지방소멸 시대를 끝내고 지방 부활을 알리는 축포로 기대를 모았던 부울경 메가시티는 수도권 일극 체제에 맞설 유일한 대안이었다. 인구 800만 명의 부울경이 2040년이면 인구 1000만 명의 동북아 8대 메가시티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꿈이 산산이 조각날 판이다. 메가시티를 좌초시킨 장본인들은 부울경 역사와 주민 앞에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보수정당이 부울경 권력을 싹쓸이할 때마다 불거진 갈등과 분열의 고질병은 언제쯤 치유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30부산월드엑스포는 이제 부산이 재도약할 마지막 카드가 되었다. 카타르 월드컵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든, 아르헨티나에 우승컵을 안긴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의 라스트 댄스이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집중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부산의 도약과 비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모멘텀이 필요하다. 부산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고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끌어내기 위해서는 월드엑스포만 한 모멘텀을 현재로서는 찾기 힘들다. 부산을 다시 설계하고 건설하는 키가 엑스포에 있다. 2023년은 부산이 세계를 향해 웅비의 날갯짓을 본격화할 2030년을 향한 첫해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절박한 심정으로 2030 엑스포 유치에 전념할 일만 남았다.
2022-12-22 [18:21]
-
[임성원 칼럼] '돼지고기' '중꺾마' 그리고 2030엑스포
한국 축구 대표팀이 금의환향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국민과 함께 ‘16강 축제’를 펼친 태극 전사들의 자랑스러운 귀국이다. 열사의 땅 중동을 달군 이번 월드컵은 ‘돼지고기’로 막 올라 축약어 ‘중꺾마’로 마무리됐다. 밥심으로 뛰어야 하는 한국인에게 회교 율법에 따른 돼지고기 금식령은 악조건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결기로 12년 만이자 방문 월드컵 사상 두 번째로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뤄 냈다.
음식남녀. ‘음식과 남녀, 사람의 큰 욕망은 거기에 존재한다(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고 〈예기〉에서 말한 이는 중국의 성인 공자다. 대만 출신의 영화 거장 리안 감독이 만든 영화 ‘음식남녀’에서도 은퇴한 요리사인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음식남녀. 식욕과 색욕은 인간의 본능이지. 본능은 피할 수 없어. 평생 경험하는 거지.” 성인이든 거장이든 색욕에 앞서 식욕을 인간의 가장 큰 욕망으로 꼽은 셈이다.
미국 ESPN은 한국 축구의 16강 진출 비결을 조리팀에서 찾았다. “한국 선수단에서 누가 4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바로 김형채 조리장과 신동일 조리사다.” 2010년 남아공 대회부터 선수들의 입맛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은 이번에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을 포함한 돼지고기 요리가 금지되면서 식단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고 한다. 탁월한 요리 솜씨로 스포츠 과학과 영양학을 두루 만족시켰다는 것이다.
돼지 대가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회교권에서는 돼지를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로 취급한다. 이 또한 마땅히 존중해야 할 이슬람 문화다. 사실 어느 문화권에서든 금기시되는 음식은 있게 마련이다. 중국 고전 〈서유기〉에 나오는 ‘돼지 괴물’ 저팔계의 이름도 불가에서 금하는 5가지 음식과 도가에서 금하는 3가지 음식인 오훈삼염의 8가지를 멀리하라는 뜻에서 팔계(八戒)라 붙여졌다.
밥심을 얻은 태극 전사들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중꺾마’는 취업난 등 역경을 겪는 MZ세대, 나아가 코로나와 경제난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희망의 언어가 됐다. 대표팀이 들고 있던 태극기에 적힌 이 문구는 올해의 최고 명언으로 떠올랐다. 주장 손흥민은 귀국 인터뷰에서 “국민들도 인생에서 꺾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한국으로서는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사실상 이렇게 막을 내렸다. 월드컵, 올림픽, 엑스포 등 3대 국제 메가 이벤트의 다음 차례로 눈을 돌리면 2024년 파리 올림픽,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2026년 북중미(캐나다·미국·멕시코) 월드컵,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으로 이어진다. 공교롭게 2030년에 열리는 월드컵과 엑스포의 개최지는 빈칸으로 남아 있다.
2030 엑스포에 개최지 부산이라는 이름을 올리려면 지금부터 ‘중꺾마’ 정신을 견지해 나가야 한다. 마침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부산 현지 실사 일정도 잡혔다. 내년 4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간 BIE 실사단이 부산을 직접 방문해 지난 9월 우리가 제출한 유치계획서를 바탕으로 준비 상황 점검에 나선다. 이번 실사는 내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지를 투표로 가리는 BIE 총회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쟁도시 리야드와 돼지국밥을 소울 푸드로 내세우는 부산은 문화적으로 선의의 경쟁을 치러야 한다. 특히 부산은 회교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그동안 쌓은 관용과 포용의 문화를 통해 2030엑스포 개최지 부산의 너른 품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바다와 산과 강을 품은 삼포지향 부산은 역사적으로 한국의 팔도문화는 물론이고 동북아의 문화가 통섭하는 소통의 용광로였다.
특히 한데 섞어 우려 내는 국물 문화를 자랑하는 부산이 점차 ‘미식의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뉴욕타임스가 전포 카페거리를 꼭 가 봐야 할 세계명소로 꼽은 데 이어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는 ‘2023년 최고의 여행지 35’에 부산을 꼽은 뒤 “부산은 문화와 음식 등 관광자원이 잘 조화를 이뤘다”고 평했다. 부산은 늘 그랬듯 변화와 진보를 마다하지 않는 역사를 자랑한다.
2030월드엑스포 개최도시 결정의 날이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신세대는 ‘꺾이지 않는 마음’, 기성세대는 ‘불굴의 의지’로 서로를 다독이며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라는 부산 엑스포의 주제를 되새겨야 한다. 부산이 인류의 진보와 화합을 향한 플랫폼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시민의 노력에 달려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게 마련이다.
2022-12-08 [18:20]
-
[임성원 칼럼] 꿈이 이뤄지는 창업도시 부산
“부산을 대표하는 기업이 어디인가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부산의 모든 것을 궁금해한다. 최근에 만난 한 외교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산의 이모저모에 대해 질문을 쏟아붓다가 이윽고 경제 문제에 다다랐다. ‘부산 대표 기업’을 묻자 말문이 잠깐 막혔다. 언뜻 떠오르는 기업이 없었던 데다 단답형 질문에 굳이 특정 기업 몇을 꼽았다가는 되레 제2의 도시 부산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서였다.
르노코리아자동차, 부산은행, 에스엠상선, 에이치제이중공업, 창신아이엔씨, 서원유통, 하이투자증권, 성우하이텍, 대한제강, 디지비생명보험. 부산상공회의소가 한국평가데이터 신용평가사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의 자료를 활용해 2021년 결산 매출액 기준으로 지난 9월 발표한 부산의 10대 기업 순이다. 부산 사람은 물론이고 일반인의 귀와 눈에도 낯설 터인데 외국인에게는 더할 것이 분명하다.
부산 기업 가운데 전국 100대 기업에 드는 곳은 유감스럽게도 단 한 곳도 없다. 부산 1등인 르노코리아자동차의 전국 순위는 120위다. 그나마 1000대 기업에 들어간 부산 기업도 고작 27곳에 그쳤다. 2008년 55개 사와 비교하면 반토막 수준이다. 부산 경제는 목하 뒷전으로 계속하여 밀리고 있다.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751개 사가 몰려 있으니 수도권 공화국의 빛과 지방소멸의 그림자가 뚜렷이 교차하는 시대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2030월드엑스포 개최를 놓고 부산과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고 있는 리야드의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의 방한이 남긴 뒷맛도 씁쓸하기만 하다. 건설에만 670조 원이 들어간다는 ‘네옴시티’라는 제2의 중동 특수를 놓고 정부는 물론이고 대기업도 ‘오일머니’ 앞에 납작 엎드렸다. 국내 주요 그룹의 총수들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엑스포 유치전이 전개되고 있는 터라 부산으로서는 사실상 비상 상황을 맞은 것이나 진배없다. 이럴 때 부산과의 의리를 지키며 꿋꿋하게 부산엑스포 유치에 나설, 부산에 본사를 둔, 부산이 낳고 기른 대기업은 없나 하는 만시지탄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일 터이다.
부산과 특별한 연고도 없는 대기업이 나서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열심히 뛰어온 것만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부산 하면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가 떠올릴 수 있는 기업을 지금부터라도 시민의 힘으로 키워야 한다는 꿈을 갖게 된다. 기업이 당당히 민간 외교의 한 몫을 차지하는 게 현실이고, 따라서 부산이 낳고 기른 기업을 통해 부산의 위상을 한껏 드높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22~24일 벡스코에서 열린 아시아 창업 엑스포(FLY ASIA 2022)는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아시아 창업도시 부산’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돛을 올린 창업 엑스포는 가능성의 씨앗을 품은 ‘비주류’ ‘경계인’의 경제 축제이자 스타트업의 성장과 도약의 꿈을 공유하는 창업의 마켓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내년 3월로 예정된 부산창업청 설립에도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12월 12~13일 벡스코에서 열릴 예정인 ‘2022 지산학 엑스포’도 부산의 새로운 흐름이다. 부산형 지산학 협력 모델을 찾겠다는 취지를 내건 첫걸음이다. 지방자치단체(지)와 기업(산), 대학 및 연구소(학)가 협력해 지역산업을 육성함으로써 지역 상생 발전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역의 역량을 한껏 끌어올린 지산학은 새로운 창업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자 열쇠가 될 수 있기에 그렇다.
부산이 2030엑스포에 명운을 걸고 있는 이때에 창업 엑스포와 지산학 엑스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잇따라 열리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국제관광도시이기도 한 부산은 부산국제영화제, 지스타(G-STAR) 등을 통해 문화축제와 마이스(MICE)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특히 왜관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발판으로 한국 최고의 무역항으로 우뚝 선 부산은 한국거래소가 있는 거래의 도시로 성장했다. 박람회와 부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셈이다.
월드컵 시즌을 맞아 2002년 4강 신화를 이룩한 마법의 주문인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이 다시 회자하고 있다. 늘 그렇듯 미래와 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게 마련이다. 선비는 사흘 만에 만나도 눈을 비비고 대해야 할 정도로 성장한다는 뜻의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옛말이 있다. 심지어 〈장자〉에는 두 사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사이에 일체가 변한다는 교비비고(交臂非故)라는 말까지 있다. 모든 게 가능한 창업도시 부산도 시작이 반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2022-11-24 [18:40]
-
[임성원 칼럼] 동해, 그 빛과 그림자
지난 주말 한 전시장을 서둘러 찾았다. 11월 6일까지 예정된 전시라 더는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정금희 사진전 ‘동해선-역사(驛舍), 역사(歷史)’. 전시장 입구에서는 동해남부선 지도가 먼저 관람객을 맞았다. 부산진-범일-부전-거제-동래-해운대-송정-기장-일광-좌천-월내. 역사의 역사는 부산의 경계를 넘어 서생-남창-덕하-울산으로, 호계-모화-불국사-경주로, 나원-사방-안강-포항으로 이어졌다.
사진 속 동해로 가는(?) 동해선의 역사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빛의 예술’이라는 사진은 일출의 동해와 그 바다를 따라 뉘엿뉘엿 달리는 동해선, 그 기찻길을 점점이 잇는 역사의 불빛과 퍽 조화를 이루지 싶다. 동해선을 타고 가면 한반도에서 새해의 빛이 가장 먼저 닿는다는 이곳저곳의 사연을 만나게 되고, 역사에는 모였다 흩어지는 이런저런 삶의 편린들이 명멸하듯 흐른다.
동해는 빛의 바다이지만 그 빛을 잉태한 어둠의 바다이기도 하다. 금강산 관광 초창기인 1999년 초 유람선을 타고 공해를 경유해 남북을 오가며 만난 동해의 밤바다는 낮의 푸르름을 상상할 수 없는 칠흑의 바다였다. 그 어둠 속에서 분단의 명암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육지의 북쪽은 전깃불 하나 없는 암흑천지였고 남쪽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시게 환했다. 전력 사정에 따른 남북의 극단적인 명암은 비정상적인 분단 상황을 증명했다.
2022년 11월 동해는 목하 ‘전쟁의 바다’다. 북한이 동해로 미사일을 마구 쏘아 대고 있어서다. 지난 2일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동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우리 영해 근처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3발을 발사했는데, 이 중 1발은 동해 NLL 이남 26㎞에 떨어졌고, 나머지는 속초 동방 57㎞, 울릉도 서북방 167㎞에 각각 낙하했다. 북한은 이날 10시간 동안 4차례에 걸쳐 모두 25발의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고, 울릉도에서는 공습경보까지 발령됐다.
동해남부선을 이용하는 동남권 주민들을 더욱 놀라게 한 건 북한이 울산 앞바다에까지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발표를 하면서다.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2일 함경북도 지역에서 590.5㎞ 사거리로 남조선 지역 울산시 앞 80㎞ 부근 수역 공해상에 2발의 전략순항미사일로 보복 타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우리 군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지만, 전략순항미사일은 핵탄두 탑재까지 가능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동해에서 지난 2~5일 진행된 한·미 연합 공중 훈련 ‘비질런트 스톰(Vigilant Storm)’에 맞서 북한은 급기야 3일에는 ‘화성-17형’으로 추정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발사했다. 9일에도 동해상으로 SRBM 1발을 쏘았다. 이로써 북한은 올해 들어 38회에 걸쳐 미사일 도발에 나섰는데, 이는 2019년 13차례, 2020년 5차례, 2021년 7차례와 큰 차이를 보인다.
남북한과 일본에 둘러싸인 동해는 북한이 일본 넘어 태평양 건너 미국을 타깃으로 하는 군사 훈련장이 되었고, 한·미·일로서도 동북아의 공동 안보를 다지는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동해로 미사일이 날아간다는 것은 곧 미국 본토를 넘볼 수 있다는 함의를 갖게 됐다. 북한이 미국 중간선거에 즈음하여 잇따라 무력 도발을 하는 건 핵 무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한때 푸른 동해를 따라가는 동해선은 남북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었다. 부산-포항의 동해남부선, 포항-삼척의 동해중부선, 삼척-제진역의 동해북부선을 지나면 곧장 북으로 들어간다. 북한의 금강산청년선과 이어져 함경남도 안변역, 나선특별시 나진역을 지나 두만강역에서 러시아 철도로 뻗어나간다. 한반도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는 푸른 꿈이 동해선에 있었다.
그 동해선의 꿈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동북아의 전쟁과 평화는 이제 동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도 시시각각 강팔라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전쟁은 이미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러시아와 중국의 권력구조도 날로 강고해지는 분위기다. 이런 사정이라면 동해선 연결은 앞으로 더디게만 진행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부울경 메가시티조차 좌초 위기에 놓여 부산과 울산의 통합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가 아닌가.
‘동해선-역사(驛舍), 역사(歷史)’의 작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과거는 빛으로 기록된다”며 “이 세상 먼지 하나도 그저 그냥 존재로 머무는 것은 없다”고 팸플릿에 적어 놓았다. 부산을 떠나 동해로 길을 잡은 동해선 기차는 지금 어느 역사쯤에서 시간의 궤적이라는 빛을 깜박이며 제 운명을 부려 놓고 있을까. 동해에 빛보다 그림자가 유난히 짙게 깔리는 11월이다.
2022-11-10 [18:32]
-
[임성원 칼럼] 돈의 자유와 지방 살림살이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정치가 갑갑해질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한 이 말은 1997년 15대 대선 때부터 시작된 TV토론의 백미로 꼽힌다. 평소 정치인이 국민에게 늘 물어야 할 질문의 백미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이지 싶다. 사람과 돈이 죄다 수도권으로 몰리는 이 지방소멸의 시대에 지방을 살아가는 국민인 지방민에게 건네는 안부는 더 절절할 수밖에 없다. “지방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습니까?”
내년 나라 살림도 초장부터 파장 분위기가 연출됐다. 25일 국회에서 있은 윤석열 대통령의 첫 시정연설이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전원 불참으로 얼룩졌다. 1987년 개헌 이후 첫 ‘반쪽 시정연설’로 헌정사에 기록될 전망이다. 여야가 639조 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 심사를 위한 일정에 합의하기는 했다지만 예산 정국의 서막이랄 수 있는 시정연설조차 극심한 정쟁 끝에 파행을 겪은 터라 험난한 여정을 예고한다.
나라 살림이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는데 지방 살림은 오죽하겠는가. 국회와 중앙정부를 상대로 예산 확보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할 지방자치단체들은 정쟁 당사자인 여야 정치권의 눈치까지 살펴야 하는 곤욕을 치르게 됐다. 2023년도 예산안에서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지원 213억 원, 가덕신공항 건설 120억 원 등 8조 237억 원을 확보해 ‘국비 8조 원 시대’를 처음으로 연 부산시로서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국회에 상주 중인 ‘국비 확보 추진단’을 중심으로 부산시 차원의 주도면밀한 대책이 있어야겠다.
이번 예산 정국에서 단연 지방의 이목을 끌고 있는 게 지역화폐의 지원 향방이다. 기획재정부에서는 지역화폐에 지원하는 국비 전액을 삭감하겠다며 서슬이 시퍼렇지만 이는 지방의 실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지적이 많다. 지역화폐는 현재 17개 광역지자체·173개 기초지자체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그 만족도는 무려 86%가 넘는다. 지방민 63% 이상이 예산 삭감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여와 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민의를 적극적으로 수렴해야 할 것이다.
이참에 정치권의 맹성도 뒤따라야 한다. 지방소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벼랑 끝에 놓인 지방의 살림살이는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방치해 온 정치권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국회의원 뽑아 놓으면 중앙 정치판에 휩쓸려 지방 살림살이는 거들떠보지 않는 행태가 반복되어 왔다. 특히 대선, 총선,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승자 독식의 양당제가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지난해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지 30년을 맞았고, 오는 29일 제10회 ‘지방자치의 날’을 앞두고 있지만 지방자치의 갈 길이 여전히 멀기만 한 것은 정치권이 지방자치제를 안착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정책의 실패에는 재정분권의 실패가 기저에 깔려 있다. 국가재정과 지방재정 비율이 8 대 2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기에 그렇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때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 목표치를 6 대 4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했지만 구두선에 그쳤다.
지방재정을 선진국처럼 40%까지 올려놓아야 지방 살림살이의 주름살이 펴진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지방의 재정자주도 또한 현재의 65.7%에서 서둘러 8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중앙집중식 재정 구조도 바꿔야 한다. 지방세 감면이나 비과세의 결정권이 관련 법상 중앙정부와 국회에 있는 것도 손질할 필요가 있다. 재정을 중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는 지방자치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은 틈만 나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유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돈의 자유만큼 일상생활에서 즉각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실질적 자유가 또 어디 있을까. 돈은 우리 사회를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한마디로 피 같은 존재다. 결국 돈은 자유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재화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유지와 정의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해 낸다.
행복한 삶, 나은 살림살이를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의식을 넘어 깨어 있는 지방민 의식이 이제는 절실히 요구된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등 시시각각 불어닥치는 정치적 물결에 속절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떠돌 게 아니라 승자 독식의 양당제마저 당당하게 뛰어넘는 지역적 혜안과 결단이 필요하다. 발 딛고 살아가는 지역민으로서의 살림살이가 좋아져야 국민으로서의 살림살이도 나아질 것 아닌가.
2022-10-27 [18:42]
-
[임성원 칼럼] 메멘토 모리, 세상의 평화를 위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다. 독일의 오래된 속담이면서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 희곡의 제목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서양 격언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지난 4일 김동길(1928~2022) 박사의 부고를 접하고서다. 민주투사에서 보수 진영의 원로에 이르기까지 양극단을 오갔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 그의 삶을 둘러싼 평가조차 부질없게 만들었다. 시신은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했고, 자택은 누나인 고 김옥길 여사가 총장을 지낸 이화여대에 기부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다.
1970~80년대 이 땅에서 젊은이로 살았던 사람치고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고인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각자의 몫이 됐다. 그가 강의를 맡은 ‘서양문화사’ 수업은 인근의 여대생들도 불러들일 만큼 늘 열기와 위트로 넘쳤다. “여러분, 백인하고도 연애하고 흑인하고도 연애하세요. 그렇게 다른 인종과 섞여 연애하고 결혼해서 애를 자꾸 낳아야 인종차별이 없어지고, 세상도 평화로워집니다.”
한 페친은 SNS에서 고인을 이렇게 추억했다. 고2 때 그가 마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 친구와 담치기를 해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분단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린 시련이자 축복입니다. 남쪽은 자유, 북쪽은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 이 둘이 통일하면 이 지구에 자유와 평등이 융합한 새 나라로 우뚝….” 그때의 김동길은 민주투사였고, 그때의 김동길만 기억하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유럽의 한 수도원에서는 일정한 시간에 맞춰 수도사가 복도를 다니며 라틴어 ‘메멘토 모리’를 외친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반야를 얻기 위한 불교 수행법인 백골관과 닿아 있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삶을 돌아보게 하는 데는 죽음만 한 것이 없다는 뜻일 터이다.
메멘토 모리는 전쟁 혹은 평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옛날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개선식 때 노예를 시켜 뒤에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우쭐대지 말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뜻에서다. 평화는 흔히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일컫는다. 죽음은 전쟁과 평화를 뛰어넘으며, 따라서 메멘토 모리가 강조되는 것이다.
세상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평화에서 전쟁의 시기로 이동 중이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세계의 진영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핵전쟁까지 공공연하게 입에 올리는 대재앙의 시대를 맞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영토 안전성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국가와 국민 방어를 위해 분명히 모든 수단을 쓸 것”이라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핵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반도 상황은 시시각각 위협의 강도가 느껴지는 실제 상황이다. 북한이 잇단 미사일 시험발사에 이어 ‘핵 선제 사용’을 법으로 규정했다. 최근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술핵 운용부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에 맞서 남쪽도 ‘핵무장론’이 분분하다. 주한미군 기지 전술핵 재배치, 핵잠수함과 폭격기 등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상시 배치 논의도 확산일로다.
가깝든 멀든 핵전쟁 위기가 강 대 강으로 치달을 뿐 중재나 타협의 설 자리가 없다는 점에서 자칫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적이 우려스럽다. 더욱이 국내 정치권이 보이는 행태는 더 가관이다. 여야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안보 문제를 놓고 패를 나눠 티격태격 싸우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특히 한·미·일 연합훈련을 놓고 ‘친일’ ‘친북’ 프레임으로 맞붙어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1945년 8월 역사상 처음으로 핵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핵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살아 있는 학습장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가공할 파괴력의 핵무기는 77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위력이 1kt(TNT 1000t의 폭발력) 미만에서 수십kt 수준으로 국지전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핵무기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인류는 다시 핵무기 사용의 유혹에 직면해 있다.
메멘토 모리.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기억하라고 늘 일깨운다. 공멸하는 전쟁의 길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대에게 섞여 들어가고 한데 융합해 가는 평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다시 고개를 드는 핵전쟁의 위기 속에서 탐욕과 집착을 벗어던지고 죽음과 의연하게 대면할 수 있는 메멘토 모리 혹은 백골관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2022-10-13 [1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