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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역언론이 살아남는 법
최근 급격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지역언론의 위기가 눈앞에 도래했다. 지역언론의 기반인 지역경제도 건설경기의 침체 등 하락세를 보이고 지자체의 지원도 줄어들고 독자들은 지역뉴스가 뜨지 않는 포털 사이트와 유튜브에 더 관심을 가지고 OTT 플랫폼 등 흥미로운 콘텐츠로 대거 이탈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의 세계에 풍덩 빠진 독자들이 종이신문에서 멀어지자 이용률과 매출이 감소한 지역언론은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웅상신문〉도 예외가 아니다. 2012년, 인구 10만의 웅상에서 창간한 이래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주 수입원인 광고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11년간 그럭저럭 광고 수익을 창출하고 구독률을 높인 것은 지역밀착 취재 덕분이었다. 기자들은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듯 절박한 심정으로 발로 뛰어다니면서 현장 취재하고 이슈 만들어 공론화하고 지역민의 문제해결에 적극적 대안을 제시하는 등 지역신문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했고 직접 웅상 전역의 상가에 신문을 갖다주는 등 전력을 다했다. 처음에 긴가민가했던 지역민의 반응이 갈수록 나아졌고 광고가 저절로 따라왔다. 이제는 좀 안정권에 접어드나 했는데, 언론 생태계 변화로 광고주들이 눈에 띄게 몸을 사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언론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역언론 생존법에 대해 저마다 내놓은 해법은 다양하다. 디지털 혁신의 광풍으로 ‘뉴스 사막화’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 텍사스의 경우, 돈이 안 된다면서 소유주가 130년 역사의 지역신문을 폐간하자 2주의 공백 끝에 〈830타임스〉란 새로운 신문사가 창간된다. 주민들은 직접 기자의 주급을 기부하고 신문을 배달하는 등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즉 지역민들이 전국 언론 대신 지역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지역신문인 830을 선택한 것이다. 830의 생존 동인은 지역민과 밀착한 저널리즘에서 찾을 수 있다.
지역언론사는 아니지만 〈뉴욕타임스〉는 타임스의 가장 큰 문제는 인지도가 아니라 독자와의 연관성이다, 라고 파악하고 '서비스 저널리즘'을 표방한다. ‘독자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스토리’인 서비스 저널리즘은 행복한 인생을 사는 법, 여행용 짐 싸기 등의 주제를 깊이 조사해서 3000~4000자로 작성했고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가져왔다. 지역신문과 가장 연관성 있는 독자는 지역민이다. 지역언론은 지역민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연관성 있는 뉴스와 글을 쓰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면 어떨까.
지역언론의 생존 밥줄은 광고 수익과 구독이다. 광고, 구독, 이벤트 행사 등을 통한 수익 창출은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달려 있다. 따라서 지역언론은 지자체의 지역 경제정책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사례를 만들고 지역경제를 진단,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지역의 문제가 무엇인지 지역민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해법을 제시하고 독자들이 원하는 콘텐츠와 광고를 정밀하게 분석해서 폭넓게 두껍게 구독자를 확보해야 한다. 홈페이지와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 인터넷 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전국화와 지역화를 동시에 실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웅상신문도 현재 다양한 방법의 자구책을 강구 중이다. 지역민의 관심을 붙잡으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지역과 지역신문은 운명 공동체다. 지역이 살아남아야 지역언론도 살아남는다. 지역에 초집중하여 언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광고주를 개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독자 확보에 사활을 다하면 어느 정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지역언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정치와 기업과 지역민이 있는 한 지역언론은 끝까지 생존할 것이다. 물론 지역언론의 위기는 더 심해질 것이고 생존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것이고 그러한 고민과 새로운 시도가 지역언론의 가치를 실현시켜 주고 생존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본다.
2023-09-2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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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간절함이 부산을 국제금융허브로 만든다
부산금융중심지 조성이 내년이면 15년 차를 맞이하지만 성과는 아직 미미하다. 2021년 기준 부산 금융산업의 비중은 전국 대비 여전히 5.2%에 머무르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해결책은 사람에게 있다. 부산 사람이 얼마나 간절하게 달려드느냐 하는 문제다. 물론 올바른 전략 방향 설정과 실행 가능한 실천 지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첫 번째 전략 방향인 정책적 금융허브의 길은 현재 대한민국 중앙정부와 지방자치 관계로 볼 때, 중앙정부가 해결의 키를 쥐고 있다. 부산시만이 추진하려고 할 때는 말에만 그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산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결국 부산 사람, 부산시의 간절함이 성공의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부산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국민과 중앙정부에 ‘부산 국제금융허브’가 대한민국의 프로젝트라고 설득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했지만 지속가능한 성장은 난관에 봉착했다. 지금까지는 선진국을 잘 따라 해 선진국이 되었지만 이제는 세계 경제를 선도해야만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위해 수도권 일극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 운영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 성장의 중심축을 다극화해야 한다. 그 첫 번째 축이 바로 부산이다. 부산이 살면 대한민국이 산다.
다음으로, 부산 국제금융허브의 조성을 전담할 행정기구 설치를 요구해야 한다. 부산금융특구청(가칭)을 만들어 각종 내·외국계 금융회사가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며 제도 마련과 행정력을 갖추어 국제금융허브를 지휘할 종합적 추진기구의 기능도 탑재해야 한다.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은 거의 확정적이다. 이어 수출입은행과 한국투자공사도 부산에 유치해야 한다. 특히 한국투자공사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는 국제금융허브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은 부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장 축의 다극화를 위해서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정책적 지원을 이루기 위해 내년 총선에서 부산의 여야 정치권이 노력하여 주요 정당의 공식적인 공약으로 채택되어야 한다고 본다.
두 번째 전략 방향은 부산 국제금융허브는 ‘디지털 금융혁신중심지’를 목표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9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부산금융중심지의 목표인 ‘해양·파생특화 금융중심지’라는 기존의 틀을 뛰어넘어 세계 경제를 주도할 디지털 금융혁신중심지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일단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으로 디지털 ABCD(AI, Blockchain, Cloud, Data)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두바이 사례 등을 벤치마킹하여 차별화된 서비스의 제공이 요구된다. 걸림돌이 되는 규제는 역시 국회와 중앙정부, 정치권이 협력하여 처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산 내의 여러 주체가 순수한 열정으로 창의적인 일 처리에 나설 것을 권유하고 싶다. 부산시 디지털 전략의 핵심인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의 출범이 지연되고 있다. 운영 주체를 고민하다 보니 출범이 지연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디지털자산거래소인지, 가상화폐거래소인지 등의 구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 역량을 가진 기업은 관이 나서 과감히 돕고, 추후 생길 미래 시장은 또 보완하면 될 것이다.
부산국제금융센터(BIFC)에 소재한 10여 개의 금융 공기업은 중앙정부의 지휘·감독을 받는 공공기관이지만 이를 활용하는 디테일은 부산 사람이 마련해야 한다. 한국자산관리공사의 사업을 예로 들어 보자. PF, 구조조정 대상기업, 선박 등에서 직간접 지원 금융이 다양하게 실행되고 있다. 이런 펀드 운용에 지역의 자산운용사를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한다면 지역 금융산업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공기업의 고유사업도 정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디지털 전환의 속도를 볼 때, 지금이 늦은 것이 아니라 가장 빠른 시점이다. 지금부터 부산 사람들이 부산 국제금융허브로의 비상을 위해 어떻게 임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경윤호 한국자산관리공사 감사
2023-09-0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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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역동성 그 이상이 부산엔 필요하다
부산이 위기를 맞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로 도시의 동력은 떨어지고 젊은이가 떠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 부산의 온 시민들이 2030 세계 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면 2030 세계 박람회는 부산을 살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이다. 굳이 ‘충분하지 않다’라고 첨언하는 이유는 부산의 역동성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도시의 발전은 외생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 추진하는 내적인 역량과 외생적 요인을 활용하여 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정신이나 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세계 박람회가 발전을 위한 외생적 요인이라면 부산의 역동성은 내재적 요인인 것이다.
부산의 역동성은 항구도시의 개방성을 바탕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신적 특성인 개방성, 포용성과 함께 형성되어 부산의 발전을 견인한 원동력이다. 처음 부산에서 업무를 시작했을 때 많은 시민이 부산의 정신적 특징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선뜻 믿기지 않았다. 400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330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청년들은 도시를 떠나 고령화율이 20%를 넘는 노인들이 사는 도시가 무얼 그리 개방적이고 역동적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 것이었다.
그러나 직면한 위기 속에서 부산의 회생을 위한 시민사회의 강렬한 몸부림은 부산의 역동성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 산업은행 부산 이전 그리고 2030 세계 엑스포 유치에 한 덩어리가 되는 부산의 시민사회 운동은 그야말로 부산의 역동성을 잘 보여 준 것이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과 산업은행 유치는 국가적 이익이라는 이름의 국가주의적 이기심에 근거한 수도권 지역의 극심한 반대를 극복하고 성취한 것이다. 2030 세계 엑스포 유치와 관련하여 지난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 때 보여 준 부산 시민의 열의, 기업과 시민들의 100억 원에 달하는 성금 모금은 부산 시민의 역동성을 보여 준 압권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부산의 역동성은 여전히 잘 작용하고 있지만 보다 강력한 성장동력으로 작용하기에는 조금은 부족한 부분도 있다. 그것은 부산의 문화적 특징들이 급격한 도시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려할 때 인구가 줄어들고 고령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산은 지속적인 도시의 성장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산의 문화적 특징인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역동성을 강화해 나갈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역동성을 보전하고 증진시키는 지역사회 거버넌스 체제의 구성에 있어서 대표성을 강화해야만 한다. 지역사회의 거버넌스는 다양성에 기초한 많은 이해관계자가 상호 협력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해 가는 체제이다. 따라서 지역 거버넌스 체제는 지역별 연령별 등 다양한 대표성을 잘 망라해야 견제와 균형에 의한 역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구성된 지역사회의 거버넌스는 대의에 충실하되 이념적 편협함을 극복해야 한다. 부산 역동성의 기초가 되는 인구의 이질성에 근거한 문화적 다양성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인구유입의 중단과 부산 출신 인구가 외부 유입인구보다 많아져 구성원의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이 커지면서 다름 속의 화합이 아닌 같음 속의 불화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일부 지역적 현안에 대해 건설적인 과정을 통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YS와 관련한 부산 민주주의 역사관 건립에 관한 갈등이다.
역동성을 보전하고 지속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노력은 외부와의 의도적인 교류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부산은 여전히 다른 시도에 비해 개방적이지만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공부하고 부산에서 생활을 하는 인구의 비중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거버넌스 체제의 구성의 차원을 넘어 중요한 가치배분을 담당하는 자리의 외부교류는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사회 속에서 미꾸라지와 메기 같은 관계를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부산의 위기극복을 위한 노력인 세계 엑스포 유치, 가덕도 신공항 건설, 산업은행 부산 이전 등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에 역동성이 제대로 작용해야 하며 이를 위한 시민사회 거버넌스 체제의 개선, 인적교류를 통한 가치배분 기관의 인적 구성 다양화를 추진해야 한다.
2023-08-2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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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부산의 공공 공연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
1876년 조일수호조규로 부산이 개항된 후 부산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던 첫 번째 도시가 되었다. ‘박래품(舶來品)’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개화기 상품들이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다.
그중 1884년 봄, 부산의 영국 부영사로 파견된 에드워드 H 파커(Edward H Parker)가 가져와 복병산 관사에서 연주한 피아노가 대한민국 최초의 피아노다. 그 후 1900년에는 부산에 도착한 다른 피아노가 낙동강을 거쳐 달성군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대구로 들어갔다. 대구는 자신들의 지역이 한국 최초라며 수많은 공연과 행사를 벌인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단 한 차례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무려 16년이나 빠른데 말이다.
예술문화, 정신적 풍요·행복 선사
부산은 다양한 문화 섞인 용광로
공공극장 대표·예술감독 체제 필요
행정 경험만큼이나 예술 경험 소중
지역 문화전문가 발굴에 집중해야
강제로 체결된 불평등 조약에 의한 개항이었지만 이후 부산은 국제항으로 탈바꿈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전국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대한민국의 용광로 역할을 했다. 모든 장르의 예술이 부산에서 꽃을 피웠다. 금수현, 윤이상, 이상근, 한형석, 김학성, 제갈삼 등 한국 현대 음악사에 방점을 찍은 음악가들도 많았다. 물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음악가는 전쟁이 끝나고 대부분 서울로 떠났지만, 끝까지 부산을 지키던 음악가도 많았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수많은 부침을 겪은 도시 부산은 가마솥 부(釜)자를 쓴다. 가마솥이란 온갖 것을 다 넣고 끓일 수 있는 솥이다. 부산과 같이 많은 문화가 섞인 지역은 우리나라 어떤 지역과도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다른 지역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것이 부산이 겪은 역사와 환경이다. 전쟁이 끝나고 70년 만에 우리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다. 이제는 예술과 문화가 만드는 정신적 풍요와 행복을 누릴 때이다.
현재 인구 330만 도시 부산은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해 기초공연예술을 위한 ‘장르별 전용 극장’들이 건립 중이다. 도시경제 발전과 마케팅전략으로써, 그리고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문화적 욕구 충족을 위한 준비라는 측면에서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전용 극장이 생기면 예술가들의 일자리도 많아지고, 인구 유입도 늘어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산이 가진 성격,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큰 가마솥이 되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아비투스’는 돌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교육체계를 통해 무의식의 사회화가 만들어 내는 산물이다. 부산만이 가질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필요하다. 다른 지역의 공공극장에 아직 정립되지 않은 방식, 즉 부산의 모든 공공극장은 대표와 예술감독을 따로 두는 방식을 제안한다.
행정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예술 경험이자 무대 경험이다. 예술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경험은 책이나 논문과는 엄연히 다르다. 급하다고 깨진 항아리에 담긴 적은 물로는 솥을 식힐 수 없는 일이며, 장작 한 개비로 가마솥을 데울 수는 없다. 더디더라도 지역 중심으로 전문가 발굴에 집중해야 한다. 부산에도 기회를 얻지 못한 전문인력은 여전히 많다.
예술은 경험에서 나온다. 세계 최고를 목표로 삼지 말고 부산의 상상력, 우리만의 상상력으로 가장 부산다운 이미지를 보여 줄 때 독창적인 문화 예술이 이루어진다. 동북아 해양수도 부산은 언제나 세계로 나가는 통로이자 세계가 들어오는 길이었다. 전문가가 제대로 기획한 가마솥 부산을 세계에 보여 주자. 가장 부산다운 것이 우리의 경쟁력이다.
부산에서 만든 도시 브랜딩은 BIG(Busan Is Good)이다. 물론 뜻은 좋다. 그러나 이웃한 부산의 자매도시 상하이만 봐도 인구 2400만이 넘는 대도시다. 우리가 덩치로 주변을 이기기는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솥이 아니라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가장 아름다운 솥이라야 한다. 부산만의 문화와 예술이라는 황금이 가득 담긴 금솥(金釜)으로 만들자. 가마솥은 전체를 데우는 데 오래 걸리지만 데워지면 쉽게 식지도 않는다.
2023-08-0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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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산문학관을 꿈꾸다
부산문학관. 오랜 숙원이었던 만큼 간절하고 기대도 크다. 그동안 지역문학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했으므로 설렌다. 그런데 마냥 신나지만은 않다. 부산 정신과 지역의 혼을 담아내는 지역문학관의 고귀한 역할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산문학관을 어떤 식으로 마주하게 될까. 그냥 남부럽지 않게 ‘우리도 하나 있다’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지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문학관을 짓는 데 중요한 잣대는 무엇일까. 잘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문학사가 중심이겠지만, 그렇다고 기능성과 유용성이라는 근대적이고 도구적인 잣대로만 지을 것인가. 부산문학관 건립은 그럴듯한 건축물 하나 세우는 일이 아니다. 문학관의 기능은 곧 문학의 기능이다. 문학의 역할 중 최우선은 ‘존재의 회복’이다. 회복이란 근원에 대한 상상력과 함께 공감의 능력을 생성해 내는 힘이다. 근원을 제대로 기억할 때 회복의 상상력이 작동한다. 그때 유한이 무한을 이해하는 방식이 풍요롭게 펼쳐진다. 대상화된 문학관, 유용성만을 따진 문학관은 인문이라는 예언적 지성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문학관에 관한 모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문학관을 기대한다. 개념부터 새로울 필요가 있다. 장소부터가 중요한 개념이다. 넓은 데에 크게 짓고 보자는 것은 그야말로 고정관념이다. 작아도 아름답고 역사성을 품어야 한다. 문학의 가치가 ‘회복’에 있다면 장소 역시 ‘회복’의 철학이 필요하다. 부산의 특성은 해양수도와 피란수도이다. 둘 다 그 자체로 회복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두 특성을 끼고 있는 부산항의 근대사는 한국 전체의 근대사가 아닌가.
부산문학관을 어떤 성과로 내세우려는 건 금물이다. 어떤 장소성을 품고 있는가, 얼마나 부산답고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가 우선이다. 부산이 국제도시가 되면 될수록 부산문학관은 역사성을 바탕으로 한 아름다움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지금 있는 몇 개 작은 문학관들은 모두 동쪽에 있다. 지역 문화의 심각한 불균형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부산문학관만큼은 원도심이나 서쪽에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 중요한 것은 세계적인 문화도시가 되려면 중심 역과 가까운 곳에 배치되는 문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적어도 중심 역에서 10분 내 거리에 큰 극장이나 갤러리, 서점가 등 훌륭한 예술 거리가 형성될 때 그 도시가 문화도시로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산문학관을 기도한다. 혼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문학관, 좀 작아도 꿈의 요람이 되는 문학관을 기다린다. 전 지구적 위기 속에서 ‘크게’ 짓는다는 것은 위험하다. 크면 클수록 엄청난 소비재이기 때문이다. 인문은 덧셈과 곱셈이 아니라 뺄셈과 나눗셈이다. 그렇다면 인문정신이 통째로 담기는 부산문학관의 뺄셈과 나눗셈은 무엇일까. 진정한 공감, 따뜻한 울림은 건축물의 크기와 상관없다. 존재론적인 장소의 힘이 더 절실하다.
부산의 출산율, 부산의 미래는 시민의 행복감에서 나온다.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이 많아지고 문화가 풍성해지는데도 왜 시민은 행복하지 않을까. 극단적인 물질주의를 사는 우리는 아무리 좋은 이상도 소비재로 바꾸고 만다. 그 속도가 여느 나라보다 빠르다. 소비도시를 사는 시민의 속성을 변화시킬 새로운 감수성을 담은 문학관을 기다린다. 미래 공동체를 개척하는 진짜 문학관을 기다린다. 인식이 아니라 감동, 그리고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사유하는 문학관을 고대한다.
보수동 책방골목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고, 문예 청소년과 문학청년이 전국에서 최하위인 부산이다. 부산문학의 위기가 빙산 같다. 이는 예비 중인 부산문학관에게도 던져진 질문이 아닐까. 그동안 부산문학관 건립을 위해 현황 조사와 공개 포럼, 라운드 테이블이 많았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문학관이 기능적으로 책상 위에서 기획되는 느낌에 창작인으로서 당혹스러웠다. 어떤 도구성과 유용성에 치우치는 것 같아 불안하면서 문학이란 이름이 갑자기 곤혹스러워지는 것이다. 부산문학관 설립에 행정적 사고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빈곤한 껍데기를 살아갈 것이다. 우리 시대에 주어진 이 새로운 소명이 무겁다. 부산문학관은 그럴듯한 건축물 하나 더 생기는 일이 결코 아니다.
2023-07-2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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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부산시, 원도심 대책은 없는가
얼마 전 책 속에 편집할 사진을 찾아 부산 이곳저곳을 다닌 적이 있다. 자연스레 부산의 원도심인 중구지역을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중구는 부산의 근현대를 상징하는 중심이기에 당연히 역사성과 문화적 배경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초량왜관의 중심지였고 6·25전쟁 때는 마지막 남은 보루가 부산이었기에 피란민들의 애환이 가장 많이 서린 곳이다. 또 인근 부용동의 임시수도와 함께 주요 정부 수반은 물론 자연스레 문화예술인들의 집합소가 된 곳이 중구 광복동과 남포동, 중앙동, 동광동 등지였다.
용두산공원을 가운데 두고 중앙동에서부터 원도심을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광복로이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넘쳐나던 광복로가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한 집 건너 ‘임대’가 붙어 마치 폐도를 앞둔 거리처럼 삭막하다. 이러한 빈 점포의 거리는 이곳이 부산의 심장이 맞았나 싶을 정도로 광복동과 남포동, 신창동 등 원도심 전체를 뒤덮고 있다. 국제시장 또한 곳곳에 임대가 붙어 있고 새로운 상품은 고사하고 재고 의류점만 우후죽순 생겨나 국제시장의 명성이 퇴색된 지 오래다.
원도심 쇠퇴 문제는 부산뿐 아니라 이미 많은 도시에서 부닥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신도시 개발로 상권이 새로운 곳으로 몰린 탓이다. 하지만 부산은 타지역 도시들과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운대나 화명동 등 신도시의 개발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들 신도시와는 상관없이 지난 30여 년 동안 서면 일대로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서면 지역이 비대칭적으로 발전해 버렸다. 도심의 역동성은 젊은이들이 활력을 가져다주는데, 남포동으로 상징되는 원도심의 거리문화가 정체되면서 서면으로 빼앗긴 것이다.
서울의 인사동은 독특한 고전적 문화로 골목마다 사람들이 넘쳐나고 전주는 한옥마을이라는 테마적 도심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이 세계를 움직이는 주요 기관이 몰려 유명하다면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하나로 중심이 된 도시이자 골목 문화로 활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 모두는 문화적 자산을 근거로 한다.
그렇다면 부산은 용두산공원을 중심으로 충분히 고전적 도심을 유지하고 살려갈 수 있는 문화가 많을 터인데 빈 점포만 나열된 공허한 거리로 전락해 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공간의 상실은 결국 도심지의 슬럼화를 야기하고 나아가서는 범죄의 근거지가 된다. 그러면 거리는 더욱더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되고 상권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원도심의 활력을 찾을 방안은 없는가. 첫째가 행정당국의 적극적 대응이다. 외형적으로 향후 부산역 지하화와 오페라하우스 건립, 이미 개발이 끝난 옛 국제여객터미널과 중앙동 도심으로의 연결, 롯데타워 오픈 등의 이슈들이 남아 있어 사람들을 끌어들일 요소는 충분하다. 여기에다 앞서 열거한 문화적 스토리가 입혀진다면 견고한 원도심을 재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포동 거리 길바닥에 조형된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부산국제영화제의 행사 일부를 다시 남포동 극장가로 대폭 가져와야 하고, 〈부산일보〉의 여론화로 공론화가 된 부산문학관은 입지적으로 원도심에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활용성 못지않게 상징성을 가질 수 있다.
또한 당장 선행할 수 있는 것 중에는 중앙동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중부경찰서에서부터 광복동 입구까지 일방통행로에 주말마다 야시장을 여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안정되고 심리적 압박이 풀리면서 사람들이 밤을 즐기고 싶어 해도 원도심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일차적으로 부산우체국 뒤 사거리에서 광복동 입구까지만 먼저 시행해 보아도 좋다고 본다. 그리하면 중앙동과 광복로의 연계가 보다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러한 일에 행정당국만 나선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도심지 폐허는 건물주들에게도 무한 책임이 있다. 어려운 시기 비싼 임대료만 고집할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탄력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빈 점포로 몇 년씩 비워 두느니 싼 임대료로 입주시켜 상가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아무튼 민관이 합심하여 원도심을 살리고자 한다면 충분한 테마적 자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23-06-2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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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사회적 가치(Social Value)를 경영하자
지난달에 2030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한 사전 행사의 하나로 열린 기후산업박람회에 참가했다. 청정에너지, 탄소중립, 에너지 안보 등이 주로 다뤄졌고 구글, 포스코 등 글로벌기업들의 탄소중립 목표와 그 이행계획을 들었다. 더하여서 글로벌기업뿐만 아니라 공급망으로 연결된 중소기업들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하지 않으면 기업의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우리나라와 EU 등은 ESG라는 비재무적 지표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는 제도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ESG가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는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정부는 2017년에 개발한 사회적 가치 지표(Social Value Index, SVI)를 활용해서 사회적경제기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고 있다. 이 지표는 사회적경제기업의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 등에 기여한 사회적 성과를 계량하여 그 성과를 가시적으로 나타낸다. 금년도에는 측정 기업의 수를 기존 300여 개에서 1500개로 대폭 확대하였고, 우리 연구원이 관련 용역을 수탁하여 전국의 사회적경제기업들의 SVI 측정을 지원하고 있다. 정부는 이 지표를 기반으로 사회적경제기업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민간도 금융 투자 및 지원 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할 것이다.
영업이익 못지않게 공공적 기여 중요
ESG 경영 하지 않는 기업 경쟁력 상실
부산 사회적경제 지원 시스템 취약
사회적기업 위한 투자·지원 확대해야
지역 혁신, 지속가능한 성장과도 직결
일반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사회, 경제, 환경,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라고 정의한다. 각 국가나 사회마다 용어를 달리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회적 가치는 자본주의가 경제의 양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일으킨 실업과 빈곤, 부정부패와 갈등, 불평등과 양극화, 환경오염과 위험 등에 이르는 전반적인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시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공공기관이든, 글로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사회적경제기업이든 다소의 비중에 차이는 있을 수 있고, 또 전통적인 경제적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ESG라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시장과 사회의 생존경쟁에서 도태된다. 특히 기후 위기와 탄소중립 대응, 당면한 사회문제 해결에 기업들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창출하는지가 생존의 관건이 된다.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ESG와 SVI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역 중소기업은 내부 자원의 한계로 사회적 가치인 ESG 성과보다는 경제적 가치인 영업이익에 경영 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부족한 인력과 자본으로 운영되다 보니 ESG 경영에 대한 인식과 필요성이 낮아 그 준비에 소홀한 측면이 있다.
우리 부산에는 ESG 경영에 대한 진단 및 컨설팅,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공 및 민간기관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지역 기업들은 대부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공공 및 민간기관의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 연구원이 올해 ESG 경영연구소를 두어 일정 부분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현실적 여건이 만만찮다. 우선 지역 중소기업이 ESG 경영 역량을 기를 수 있게 지원하는 ESG 경영 진단 및 컨설팅 전문 기관이 지역에 자리 잡아야 한다. 부산시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다.
EU는 2021년 12월에 ‘사회적경제 실행계획(Social Economy Action Plan)’을 발표하였다. 이 실행계획에는 사회적경제 조직이 사회 혁신을 강화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 프로그램들이 담겨 있다. 사회적경제 조직이 창출하는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해서 공공 및 민간 차원에서의 사회적경제 조직의 성장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우리 부산에는 사회적경제 기업이 총 1590개가 있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사회적경제기업은 일반 기업보다 생존과 성장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회적경제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EU의 사례처럼, 부산시도 SVI를 활용하여 사회적경제 지원 정책과 제도를 정비하고, 사회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금융 투자와 함께 공공 및 민간의 시장이 조성될 수 있도록 지원 제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지금은 공공기관이든, 민간기업이든 사회적 가치 창출을 경영 목표로 하고 있다. 지역과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노력은 지역 및 기업의 혁신에 연결된다. 지속가능한 성장과도 관련되어 있다. 지역의 모든 구성원이 사회적 가치를 경영하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2023-06-1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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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부산 이니셔티브'가 4차 PT의 승부수
‘자극의 주머니에 대고 문명을 체로 치면 박람회가 된다.’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우미인초(虞美人草)〉에 나온 문장이다. 문명이 만든 자극의 정수를 모아 놓은 것이 박람회라는 뜻이다. 인류의 산업, 과학기술 발전 성과를 소개하고 개최국의 역량을 과시하는 장으로 경제·문화 올림픽이라고도 불리는 세계박람회의 의의를 문학적으로 멋지게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1851년 영국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 계속된 세계박람회를 통해 우리는 근대 문명사의 흐름과 변화, 발전을 파악할 수 있다.
부산이 2030년에 개최하고자 하는 세계박람회는 1851년부터 지난 170여 년간 35회, 총 14개국에서 열렸다. 20세기 이전의 박람회가 산업혁신의 결과물을 보여 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21세기에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능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 부산 역시 2030세계박람회의 주제를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로 정하고 자연과의 지속가능한 삶,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을 부제로 삼고 박람회 유치에 매진하고 있다.
세계박람회 개최는 인류가 당면한 문제 해결과 문명사적 가치 창출을 선도한다는 의미 외에 개최국과 개최도시에 막대한 경제적 효과도 가져다준다. 부산세계박람회는 부지 조성 및 건축단계에서 부산경남 지역과 전국에서 5조 3000억 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더불어 행사운영단계에서 운영비 지출과 6개월 동안 총 3480만 명으로 예상되는 관광객의 소비 지출에 따른 파급효과 56조 5000억 원을 더해 총 61조 원의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50만 명 이상의 취업유발 효과도 창출된다.
개최도시인 부산에도 도시대개조 차원의 변화와 발전이 예상된다. 엑스포 회장 부지인 북항 재개발 구역과 우암부두는 개최 이후 해양, 전시, 금융, 관광산업의 중심지로 개발이 된다. 각종 기반 시설 확충으로 부산, 울산, 경남 어디서나 1시간 이내에 접근할 수 있는 광역교통망도 구축된다. 부산시는 가덕신공항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차세대 부산형 급행철도(BuTX) 도입도 추진한다. 엑스포 유치 및 개최를 통해 부산이 명실상부한 글로벌 허브 도시로 변모하는 것이다.
부산시는 지난 3차례의 엑스포 유치를 위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으며, 올해 4월에는 BIE(국제박람회기구) 실사단이 방한해 실사도 완수했다. 파트릭 슈페히트 BIE 실사단장은 “부산은 세계박람회를 유치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고 호평을 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실사단을 만나 ‘부산은 이미 준비되었다(Busan Is Ready)’라고 자신감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다. 또한 실사단은 우리 국회에서 여야가 만장일치로 엑스포 지지 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다음 관문은 이달 20일부터 21일까지 열리는 제172차 BIE 총회다. 이번 BIE 총회에선 179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후보국들의 실사보고서가 회람되고, 4차 프레젠테이션(PT)이 진행된다. 최종 투표는 올해 11월 5차 경쟁 프레젠테이션 이후 바로 진행이 되는데, 사실상 이때는 각 회원국이 대부분 이미 지지하는 국가를 결정한 상태에서 참석하기 때문에 이번 4차 경쟁 PT가 부산시의 유치 성공을 위한 쐐기를 박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시는 4차 경쟁 PT에서 디지털 불평등, 기후변화 위기, 보건 격차, 식량 불안, 교육 기회 격차 등 글로벌 공동 과제에 대해 세계 최빈국에서 개발도상국을 거쳐 선진국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경험과 발전 노하우를 공유하고 해결하는 프로젝트인 ‘부산 이니셔티브’를 적극 강조하고 피력할 방침이다. 부산시는 이미 개발도상국별로 맞춤형 프로그램을 다 세팅해 놓은 상태로 이 부분이 아직 지지 도시를 결정하지 못한 회원국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승부수라고 할 수 있다.
개최 최적의 도시 부산과 함께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대한민국, 남다른 열정을 가진 우리 국민 모두가 세계박람회 유치에 나선 원팀 후보라는 자세로 4차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2030세계박람회 유치 성공을 위한 화룡점정을 찍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2023-05-3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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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수구(水球) 인문학
5월 10일은 바다에 해조류나 해초를 심는 ‘바다식목일’이고, 오는 5월 31일은 국가적 바다 기념일인 ‘바다의날’이다. 이즈음, 전국 곳곳에서 바다 관련 행사가 열린다. 1년 내내 땅만 바라보다가 이렇게라도 바다에 관심 가져 주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유를 따질 것도 없이 바다를 멀리하고 갯가 것들을 하대해 온 땅 중심 사고 탓이다.
사실, 인류에게 바다는 늘 두렵고 불안한 위험천만한 공간이었다. 근대 이전, 항구를 떠났던 돛단배 열 척 중 아홉 척은 돌아오지 않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단 한 척만이 귀항(歸港)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만큼 바닷길은 위험과 고난의 험로였기 때문에, 무사 항해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식목일·바다의날 있는 5월
땅 중심의 사고, 전환해야 할 때
‘지구’ 고집할 게 아니라 ‘수구’ 마땅
바다가 곧 치유이고 살림·생명
지속가능 문화, 해양에서 찾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바다에서 생선과 해초 그리고 소금을 얻어 생명을 영위해 왔다. 배의 발명은 항해를 통한 항구 건설을 촉진해 해양문명을 만들었다. 해항도시, 해양금융, 해양산업, 해양관광 등이 그 결과다.
인류가 만들어 온 해양문명을 총체적으로 수집, 연구, 전시, 교육하는 정점에 국립해양박물관이 위치한다면 과언일까? 개관 11주년 만에 연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한 국립해양박물관은 부산에 입지하고 있지만 세계와 소통하며 세계적 해양인문·문화·예술 공간으로 성장해 왔다.
4월 25일 상하이의 중국항해박물관에서 〈해진백품(海珍百品)〉 전시 개막식이 열렸다. 2016년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렸던 〈해양 명품 100선〉 전시의 상하이 버전이다. 이미지 전시라 아쉽기는 하지만,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명품 유물을 상하이 시민들과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경색된 한·중 관계의 정치현실을 놓고 볼 때 민간 차원의 인문교류가 한·중 간 국제정치적 냉기를 녹여 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런 것이 인문학의 사명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국립해양박물관은 유럽과의 교류협력에도 성과를 내고 있다. 바다에 대해 소극적 관조에 머물렀던 동아시아에 비해 능동적 도구적 인식으로 해양을 먼저 발명했던 유럽의 역사와 철학을 벤치마킹하는 동시에 극복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노르웨이나 스웨덴의 북극탐험과 선진적 어업, 네덜란드의 해양금융업,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해양영토 확장 등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우리 나름의 해양인식과 해양철학을 창안해야 한다.
바다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일상화를 위해 ‘수구(水球) 캠페인’을 제안한다. 지구라 불러온 블루 플래닛(Blue Planet)을 지금부터는 ‘수구’라 부르자는 얘기다. 지구가 더 이상 땅 지(地)자 지구가 아니라 물 수(水)자 ‘수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은하계 행성 중 물을 가진 유일한 행성이 지구다. 지구에 물이 없었다면 인류를 비롯한 생명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순환하는 물 생태계의 종착지가 바로 바다다. “바다가 온 강물을 다 받아 안는다”는 ‘해납백천(海納百川)’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다. 그런 만큼 우리는 더 이상 지구를 고집할 일이 아니라 ‘수구’를 호출해야 하지 않을까? 물의 어머니가 ‘바다’니 차라리 ‘해구(海球)’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썼던 카렌 브릭슨이 말했다. “모든 치유하는 것들은 짠맛이다. 땀과 눈물과 바닷물처럼!” 바다가 곧 치유고 살림이고 생명임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명제다. 〈아바타2 물의길〉에서 제임스 카메룬은 “물은 모든 걸 하나로 연결해요”라는 대사를 제시했다. 물이 좌우는 물론 상하로도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는 얘기다. 인간의 욕망이 자행하는 파괴와 약탈이 아니라 치유, 생명, 살림의 화해와 협력, 공감과 공생의 공간임을 역설한다. 이것이 인류가 만들어 온 ‘해양문명과 해양성’의 핵심이다.
인류의 미래를 바다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인문학적 성찰로 이어진다면, 해양쓰레기, 미세플라스틱, 플라스틱 아일랜드, 해양생태계 파괴, 방사능오염수 방류 같은 전 지구적 리스크가 대폭 줄어들지 않을까? 이것이 ‘수구(水球) 인문학’의 사명이자 해양의 미래다! 이것이 육지적 사고에 점철된 약탈경제를 뛰어넘어 지속가능 문화를 가능케 하는 해양적 사고의 힘이다!
2023-05-1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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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노인과 바다의 도시 부산, 문제는 경제다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이 올해로 42년이 되었다. 당시 노인 인구는 3.9%였고, 현재는 18.6%로 비약적 증가세를 보인다. 앞으로 인구 고령화는 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다. 2050년이 되면 60세 이상 인구가 세계 인구의 22%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인구 고령화에 대한 시각과 해법은 제도, 사회경제, 문화적 맥락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노인복지법이 제정된 1981년 노인으로 정의한 65세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노인으로 보기에는 사회변화의 폭이 크다. 65세는 노인이라기에는 너무 젊다. 합계출산율이 0.7명대로 추락하고, 생산연령인구도 5년째 감소하는 시점에서 65세를 노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연금제도, 은퇴제도 등 많은 영역에 과부하를 부른다.
노인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지만 노인정책과 서비스는 변화의 폭이 너무 느리다. 한국의 노인복지 정책을 살펴보면 국민복지연금법(1973), 경로우대제(1980), 노령수당(1991), 재가노인법(1993), 경로연금(1998), 고령자고용촉진법(1991),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2006), 치매관리법(2007), 기초연금제도(2008), 장기요양보험제도(2008), 치매국가책임제(2017)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 기초연금, 노인일자리, 장기요양보험이 정책의 주를 이룬다. 노인복지 예산이 증액되었다고 발표해도 노인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기초연금, 장기요양보험, 노인일자리 등의 대상자 증대로 늘어난 것이지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예산 증액은 아니다. 변화를 수용하면서 대안을 만들어 가기보다는 제도를 잘 시행하기 위해 대상자의 나이와 수급액의 조절을 고민하는 정책을 펼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오래 일하는 나라가 되었다. 실질 은퇴 연령은 72.1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4.3세와 비교할 때 7.8년을 더 일하고 있다. 노인 경제활동 참여율 역시 평균보다 배 이상 높다. 국민연금이 다른 국가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기에 그렇다. 국가는 노인 일자리를 노인의 소득보장을 보완하는 대표 제도로 성장시켰고,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기초연금제도까지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그러나 안정된 노후를 마련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인구 고령화에 대한 새로운 해법 없이 이 상태로 제도를 고수한다면 한국 노인의 노후는 매우 격차가 커질 것으로 본다. 올해 초 노인 일자리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예산을 삭감해 큰 논란이 있었다. 매년 일자리에 탈락한 노인들의 아우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의 노인 인구 50%가 빈곤하다. 노인 경제라는 대전제 아래 세밀한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다.
인생 행복 곡선을 흔히 U자에 비유한다. 과거는 인생 바닥을 치는 연령이 40대, 50대였는데 이젠 50대, 60대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행복한 노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중년의 경제적 안정성이 매우 중요하다. 다행히 국가가 신중년 일자리 정책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은퇴 및 연금제도의 개혁을 시도하려는 조짐을 보인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주요한 과제라 본다. 인구 고령화가 미치는 파급 효과는 그 규모나 범위가 매우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한 촘촘한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초고령사회를 살아가는 국민이 안정되고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노년은 아닐지라도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정부의 노력에 달렸다. 특히 부산은 8대 광역시 중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가 되었다. 직장을 찾아 떠나는 청년 유출로 노인만 남은 도시, ‘노인과 바다’라는 도시 이미지가 강하다.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야 하는 고독한 노인들의 사투를 떠올리는 노인과 바다의 도시 부산. 노인 인구가 많은 미국의 플로리다주나 하와이주와 같이 노인이 살기 좋은 휴양지로 대변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초고층 건물과 바다 절경이 어우러진 친환경 갈맷길이 펼쳐지는 부산. 바다 도시 부산의 콘텐츠는 이탈리아 나폴리, 호주 시드니보다 훨씬 풍성하고 경쟁력 있다. 부산이 초고령사회를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지 않으면 이 좋은 환경을 갖고서도 잿빛 부산으로 가는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3-05-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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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부산 동서고가, 그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
지난해 거의 20년 만에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 머무는 동안 공원과 정원을 중심으로 발품을 팔았다. 2024년 하계올림픽을 준비 중인 파리시는 안 이달고 시장이 표방하는 ‘변화하고 혁신하는 파리’라는 기치 아래 샹젤리제 거리의 1.7km 정원화를 비롯하여 도시 전체가 녹(綠)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심지어 이면도로까지도 차로 하나를 비우고 정원으로 조성하고 있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만성적 차량 정체로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던 20년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리를 지배한 것은 자전거의 물결이었다. 놀라운 변신이었다.
정작 가슴 뛰게 만들었던 현장은 ‘푸른 나무와 식물들로 조성된 산책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였다. 파리 12구에 옛 철도 길을 따라 높이 10m, 총 4.5km 길이로 만들어진 이 기다란 녹지 축은 강력한 영감을 제공했고, 평소 눈여겨봐 왔던 부산 동서고가가 겹쳐 연상되었다. 고가 아래는 공방과 상가 등이 입점해 있었다. 옳거니 했다.
귀국하자마자 반년 정도 ‘부산 동서고가 하늘숲길 포럼’을 준비했고 그 첫 결과물이 지난 3월 선보인 ‘부산 동서고가와 도시를 바꾸는 시민의 상상력’이란 주제로 열린 세미나였다. 부제는 ‘기후위기에 답하고 지역 활성화와 시민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되는’ 동서고가였다.
틈이 날 때마다 현장을 방문했다. 철거를 주장하는 지자체와 고가 주변의 상황도 살폈다.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지만 안전상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철거를 주장하는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고가도로를 바라보기도 했다. 어느 날 졸지에 벽이 되어 단절과 소음에 노출된 시간이 내게도 전해졌다. 하물며 존치라니, 그 억하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너머이다. 예컨대 고가 주변 약 50만 주민의 이해가 반전되어,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희망과 활력소를 창출해 내는 장소가 된다면, 그리하여 부산시의 도시계획, 공원녹지, 보행과 이동, 건축, 관광, 경제를 관통하는 2040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그래서 단절이 소통과 연결이 되고 소음 대신 쾌적함으로 바뀐다면, 나아가 연계 가능한 크고 작은 도시 프로젝트와 결합하여 시너지를 높인다면, 장담컨대 뉴욕 하이라인쯤 우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 해 8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세계적 명소 하이라인도 폐선 부지로 한때 흉물 취급을 받았지만 1.6km의 선형공원으로 바뀌면서 지위는 일변했고, 지금은 뉴요커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 시작을 뉴욕시민이 열었다.
존치가 결정된다면 부산 동서고가는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며 뉴욕 하이라인보다 휠씬 매력적인 장소가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길이가 최장 14km에 폭이 4차선 19~40m로서 언급한 두 선례보다 길고 넓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서고가는 단순한 녹지 축이 아니라 도입할 수 있는 거리와 연결 고리가 널려 있어 시방 부산시가 목을 매다시피 올인하는 월드 엑스포를 능가할 수 있다.
한데 이 모든 상상의 기본은 지역 주민의 수용성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 어떤 정보도 주민들에게 제공된 것이 없다. 그냥 철거냐 존치냐로 가부를 결정지을 일이 아니다. 장단점과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고 공부하며 지역민 스스로가 미래에 대한 선택권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보다 긴 안목으로 본다면 작금의 기후재앙 시대 탄소흡수원으로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이 도시에 머물게 할 배려이자 선물이기도 하다.
물론 관점에 따라 상반된 이해가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지만, 논쟁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아이디어와 문제 해결책이 분명 도출될 것이라 믿는다. 동서고가의 현명한 이용은 기존의 도시개조 프로젝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지역민과 시민 모두에게 이익으로 귀결되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부산그린트러스트는 그 길에 징검다리가 되겠다. 부산시도 동참하기 바란다.
2023-04-1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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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남북 MZ세대와 분단 너머로 도약하자
북한이 고향인 필자는 그곳에서는 ‘장마당 세대’였고 한국에서는 MZ세대에 속한다. 1990년 중반 북한에서 진행된 ‘고난의 행군’ 이후 성장한 ‘장마당 세대’는 배급이 아닌 장마당을 통해 치열하게 생존해 온 세대로 평가된다.
냉엄한 경쟁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MZ세대나 북한의 ‘장마당 세대’는 1980~2004년에 태어난 젊은 층으로, 단순한 세대 구분을 넘어 남북 모두가 겪고 있는 세대 변화와 사회 변화라는 배경을 갖고 있다.
생존의 냉엄한 경쟁을 치르며 성장한 남북 MZ세대는 일견 공통점이 있다. 나약하고 물질적인 세대라는 통념이 남북 사회에 똑같이 존재해도 사실은 좁고 단선적인 질서에서 실용과 개성으로 변화를 도모하는 세대이다.
고향에서 처음 한류를 접했던 날, 집안 벽 한쪽에 걸려 있던 한반도 지도를 보는 어린 마음에 분단이 찾아왔다. 한반도가 하나가 되면 전쟁도, 막혀서 오가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 통일에 대해 부푼 소망과 함께 남북이 하나가 된다면 고향에서 직선거리이고 최남단인 부산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막연히 품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 광경을 경험해야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해 사병 군 복무기간만 13년이었던 시기에 군에 입대하여 앳된 얼굴의 남북한 MZ세대가 서로 마주한 DMZ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홀로 한국으로 왔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어수선한 시기에 이곳의 친구들과 대학과 일터에서 ‘3포세대’나 ‘MZ세대’ 용어의 등장을 경험하며 함께 버텨 왔다. 분단 한반도에서 MZ세대로 남북 모두를 경험한 것은 계획적이지는 않았지만, 시나브로 숙명처럼 여겨진다.
통일문제를 전공한 내가 관련 분야의 정보와 관심이 집중된 수도권을 떠나 부산의 한 대학교에 자리를 잡고 관련 수업을 개설할 때만 해도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우라는 듯 매 학기 6과목씩 개설하는 북한·통일 관련 과목은 필수과목이 아님에도 폐강된 적도, 수강 인원이 저조한 적도 없었다.
기성세대와 다르게 MZ세대는 북한과 통일에 무관심하다는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는 이런 현상은 정치적·당위적 주입보다는 사회적·문화적 접근과 실리적·미래적 욕구의 담담한 일상성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오갈 수 없는 분단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장벽 너머 지대의 사회적·문화적 궁금증을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알아 가며 경쟁의 무한궤도에서 통일이 희망인지를 자발적으로 확인하려 하는 움직임들은 생경하지만, 소신 있는 MZ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각자도생으로 생존하며 시장을 통해 유통되는 한류 등을 통해 외부 세계를 동경하는 북한의 MZ세대와 마찬가지로 무한경쟁을 반복하며 살아온 한국의 MZ세대의 답답함은 K-POP의 열풍처럼 분단 너머를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실용을 중시하는 남북한의 MZ세대가 미구에 자유와 도약의 접점을 찾아 평화롭게 공존하며 공생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다.
MZ세대와 내가 사는 지역도 일면 닮은 모습을 지닌다. 치열한 경제적 상황과 현실 앞에서 멈칫하기도 하지만 거대한 챌린지를 품은 가시성 있는 존재이며 지역이다.
부산은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끝자락이지만 해륙적인 관점에서는 유라시아 철도와 아시아 고속도로의 출발 지역이며 이는 분명히 블루오션이다. 그 시작점에서 동아시아 물류 중심의 꿈을 이루려면 새로운 세대를 통한 효율성과 확장성도 필수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도되는 생존환경의 변화처럼 MZ세대의 개성과 특성을 인정하고, 강요된 의무보다는 기회와 실리가 부각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부산에서 대륙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고 싶다. 부산에서 시작되는 7번 국도를 따라 속초와 고성을 거쳐 원산을 지나면 필자의 고향인 함흥에 다다를 수 있다. 7번 국도는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까지 이어지는데 남북한 MZ세대의 도전과 희망은 그 이상이 될 것이다.
2023-04-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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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역사문제와 역사의 재현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발전 전망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당시 오부치 일본 총리가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고 표현하면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이 제시되었다. 반성과 성찰을 전제로 미래지향적인 로드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양국 간의 ‘역사문제’인 위안부, 강제징용, 역사 교과서, 독도 영유권 등이 쟁점화될 때마다 일본 정부의 언행과 태도는 오부치의 표현에 현저히 미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한국 국민은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하고 있는가에 늘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역사문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인식 차이는 미래를 저당잡고, 양국의 관계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
양국의 정치체제 차이도 이 문제를 되풀이하는 데 기여했다. 자민당 일당 독점체제로 일본 우익은 변함없는 역사인식을 계승하여 왔다. 한반도 식민 지배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결핍되었고, 진정한 사죄 발언은 인색했다. 반면 수평적 정치권력 교체가 발생하는 한국은 서로 다른 성격의 정부가 역사문제에 서로 다른 접근을 보였다. 특히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지난 정부가 무효화하는 결정을 함에 따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지, 반도체 등에 대한 수출규제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현재, 강제징용을 둘러싼 일본의 사죄와 배상문제는 2018년 우리 대법원 판결에서 시작되었다. 14명의 원고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권과 위자료청구권의 판결금과 그 이자를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에게 지급할 것을 골자로 한다. 이 판결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다. 아울러 피해자 개인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 당시 국가 간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간주한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의 법적인 성격에 대하여 양국 간에 합의된 바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현 정부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자 2023년 3월 6일 강제징용문제 대법원 판결 관련 해법을 발표하였다. 이는 민법 제469조에 근거한 ‘제3자 변제’를 통한 해법이다. 일본 정부나 일본 피고기업의 사죄나 보상 없이 한국기업의 재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는 2015년 자신이 공들여 추진한 위안부 합의 이행을 재차 요구하였다. 아울러 한일군사보호협정과 한일안보정책협의회를 재개하기로 했으며, 한일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일본과의 깊숙한 안보협력은 한·일 관계가 역사문제를 넘어서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향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안보협력 체제이다.
이는 강대국들이 일본을 동북아시아에서 핵심 파트너로 삼았던 ‘역사의 재현(再現)’이다. 일본과의 해양세력 동맹을 기반으로 대륙세력(러시아나 중국)을 견제했던 영국과 미국의 대전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일동맹(1902, 1905)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1905)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냉전시기 반소전략으로서 현재의 미일상호방위조약의 기초를 놓았다.
21세기 미국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세력균형 변화로 인해서 지역 내에서 반중 연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2007년 미국, 일본, 인도, 호주가 참여하는 안보대화 협의체 쿼드(Quad)가 출범했고, 2021년 호주, 영국, 미국이 참여하는 군사협의체 오커스(AUKUS)도 결성되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지리적으로 먼 역내 국가들과 상호 안보의무를 갖는 다자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한국 역시 참여를 요구받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오래전부터 ‘역사문제’가 가로막고 있는 한·일 관계 개선을 요구해 왔다.
향후 한·일 양국 간 산적한 문제들이 순차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이루어졌던 니가타현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문제,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문제, 후쿠시마 등 일본 8개 현의 한국 내 수산물 수입금지 조처 등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현 정부는 한·일 관계 악화를 2018년 대법원 판결 탓으로 돌리며,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면죄부를 부여했다. 만일 향후 한·일 관계 현안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이익이 지속적으로 훼손되게 된다면, ‘굴욕외교’ 또는 ‘계묘국치’라고 비판하는 야당의 목소리는 국민들로부터 점차 공감을 얻게 될 것이다.
2023-03-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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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창업도시 부산, 혁신과 속도에 달렸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와 우크라이나전쟁, 경기침체까지 얽혀 있는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이 터널 끝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돌아보면 우리는 이미 비슷한 터널들을 지나온 경험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 2002년 사스 위기, 2007년 금융위기 등 세 차례의 큰 위기 때마다 벤처기업 육성과 인터넷 보급, 전자상거래 활성화, 스타트업 육성 등 과감한 혁신을 통해 오늘날의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위기가 깊을수록 우리 부산의 미래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일단 스타트업 분야의 해외 사례들에서 시작해 보자.
먼저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이다. 현재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출범하자마자 ‘새로운 자본주의’라는 기치 아래 스타트업 육성과 디지털화를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다. 이어 스타트업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4개 대도시에 실리콘 밸리 같은 스타트업 특구 조성 계획과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모두 ‘일본식 성장전략의 대전환’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은 특히 속도 면에서 이게 과연 일본의 정책이 맞느냐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5년 이내에 스타트업 10만 개와 유니콘 기업 100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6월 말 기준 일본의 유니콘 기업 수는 11개로 우리나라(23개)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스타트업 투자액도 8000억 엔 정도인데, 불과 5년 만에 이보다 10배 이상 되는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10조 엔을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제조 대기업의 오픈 이노베이션 등을 활성화시키겠다는 등 구체적인 방법론도 제시하고 있다.
도쿄 역시 일본 정부의 방침에 발맞춰 고이케 유리코 지사가 직접 스타트업 육성 정책에 앞장서고 있다. 야후 재팬 사장 출신인 미야사카 마나부를 부지사로 영입한 데 이어 올해 2월 말에는 부산의 FLY ASIA와 같은 ‘시티 테크 도쿄 2023’이라는 스타트업 행사도 크게 열었다.
한편 민간 분야의 글로벌 혁신 사례로는 단연코 마이크로소프트와 챗GPT를 손꼽을 수 있다. 챗GPT는 그 자체만으로도 누구나 인정하는 디지털혁명이자 거대한 게임체인저이다. 하지만 동시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바로 CEO인 인도 출신의 사티아 나델라이다. 윈도 운영체제의 안정적인 수입에 안주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인공지능 분야에서 구글이나 아마존보다 먼저 챗GPT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근 몇 년간 지속적인 내부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혁신을 존중할 뿐입니다”라는 말로 그는 임기를 시작했고,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에 혁신 정신을 다시 살려냈다.
끝으로 요즘 스타트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글로벌 행사에도 스타트업 관련 프로그램과의 융합이 일어나고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칸영화제의 마켓 행사는 몇 해 전부터 영화 관련 분야 스타트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는 해마다 다양한 예술 장르와 스타트업 행사가 함께 열리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라는 초대형 행사가 열리고 있다. 영화와 예술 두 분야는 서로 전혀 다를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창의와 혁신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정신적 바탕이 있다.
위의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복합 위기의 긴 터널 속에서도 끊임없는 혁신의 파동을 일으키며 전진해 가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부산에서도 창업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혁신의 몸부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부산 창업생태계의 다양한 주역들이 좀 더 절박하고 좀 더 속도를 내어 창업도시 부산을 향해 전진해 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혁신과 속도에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절박한 마음으로 또 다른 부산을 꿈꿔 보자.
2023-03-0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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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
집에 귀한 손님을 들인다는 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대청소도 해야 하고 세간도 정리해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일은 꼭 손님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종 벌이는 일이다. 깨끗하게 정돈하는 일쯤은 몸만 잠깐 쓰면 된다. 해 놓고 나면 성취감에 기분도 좋아진다.
손님맞이가 힘든 이유는 정신적 피로 때문이다. 손님의 시선에서 집을 닦고 꾸며야 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의 속을 알 수 없으니 개운하게 손을 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손님이 오는 시간이 다가오면 공연히 두리번거리게 되고, 초인종 소리에 흠칫하게 되고, 문을 열어 주는 순간에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된다.
4월 엑스포 실사단 부산 방문
무엇을 보여 줄 것인지 고민
부산은 개방성·친화력의 도시
진심과 정성 다한 어울림 강점
부산엑스포는 그런 대동의 마당
이런 정신적 피로를 더는 방법은 돈을 들이는 것이다. 값비싼 가재도구나 장식을 사들이고 평소 먹지 않던 귀한 음식을 내놓으면 손님의 시선을 뺏을 수 있게 된다. 손님은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에 집중하게 될 테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뚫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덜 수 있다.
물론 결산은 나의 몫이다. 값비싼 음식이라고 해서 배 속에 더 오래 머무는 것도 아닌지라, 손님이 떠난 후 남은 음식을 벅벅 긁어 먹으면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손님 덕에 좋은 세간은 장만하지 않았냐고? 그러나 나의 필요로 선택된 세간이 아니었기에 그런 것들은 얼마 못 가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뒷전으로 밀려날 운명이 된다. 이쯤 되면 원초적인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애초에 손님을 부르지 말았어야 했나? 이렇듯 손님을 불러들여 나를 보여 주는 일은 힘겨울뿐더러 심지어 공허하기까지 하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제 곧 4월이면 2030 세계엑스포 실사단이 부산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바깥으로 찾아가서 부산을 알렸지만 이제 손님이 찾아온다. 그냥 마실 삼아 빙 둘러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밖에서 뱉었던 말들을 꼼꼼히 확인하러 온다. 기회는 한 번뿐인지라 다시 불러 모을 수도 없다. 몸의 모든 근육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뭘 보여 줘야 하나?
우리는 ‘보여 주기식 행사’라는 말을 종종 쓴다. 일을 꾸림에 있어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만족을 중심에 놓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겪은 손님맞이 체험에서 느낄 수 있듯이 ‘보여 주기식’은 나의 정신건강을 지키려는 생리적 차원의 반응이기 때문에 그 유혹은 쉽사리 떨쳐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국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문제의 사달은 나와 너를 나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나와 너는 다르고, 너에게 힘이 있으니 나는 너에게 맞춰지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뭘 내놔야 상대가 만족할지 불확실하다. 이때는 세계인 모두에게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는 돈을 살짝 보여 주면 된다. 이 돈을 부산에 발라 놓고 꾸미면 된다. 하지만 이게 먹히기 힘든 노릇인 게, 우리의 경쟁자인 사우디는 돈이 많아도 너무 많다.
보여 주기가 안 되면 어울릴 수밖에 없다. 우리에겐 ‘환대’의 미학이 있다.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려는 풍습은 세계 공통이지만 우리 환대의 핵심은 진심과 정성에 있다. 그리고 진심과 정성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어울림을 향한다. 이 어울림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크게 어우러지면 대동(大同)이 된다. 대접은 손님이 문지방을 넘어서야 하지만 대동은 마당에서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부산의 강점이 돋보이는 순간은 부산이 마당의 역할을 할 때였다. 한국전쟁 때는 전국의 피란민이 모였고 산업화 시기엔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모였다. 부산은 문지방 안에 갇힌 내향성 도시가 아니라 바깥으로 열린 공간이다. 그래서 부산은 세계를 품을 준비가 이미 된 너른 마당이다. 그 공간에 생명과 활기를 부여하는 것은 개방성, 친화력, 그리고 공감과 배려다. 그것이 부산의 마음이고 부산의 문화적 강점이다. 엑스포 유치 노력은 바로 그 부산의 마음을 살리고 키우는 게 중심이다. 그 중심을 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시민으로 한발 더 성장할 수 있다. 그래야 설사 유치에 실패하더라도 크게 얻는 게 있다.
2023-02-22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