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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공원은 채우는 곳이 아니라 비우는 곳이다
‘100년의 기다림, 영원한 만남.’ 2014년 5월 1일 부산시민공원 개장은 이 역사적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시작됐다.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긴 상황에서 개장식은 간소하게 치러졌지만, 공원 개장의 역사적 의미까지 퇴색될 수는 없었다. 일제 강점과 미군 주둔, 우리 땅을 되찾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시민들의 저항과 반환 운동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공간이 바로 부산시민공원이었다.
일제는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후 이 터에 경마장을 만들었고 동남아시아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와 군사 훈련소로 활용했다. 광복을 맞았지만, 미군이 주둔해 1950년 부산기지사령부인 캠프 하얄리아를 설치했고 더 이상 시민들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1990년대 ‘금단의 땅’을 되찾기 위한 시민들의 반환 운동이 불붙었다. 하얄리아 인간 띠 잇기와 서명 운동이 확산했고 마침내 미군은 2004년 7월 부지 반환을 결정했다. 부산시는 하얄리아 부지를 즉각 근린공원으로 지정해 공원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우리 땅 하얄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는 ‘하얄리아 시민공원 추진 범시민운동본부’로 전환됐고 반환 부지의 난개발 방지와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운동에 나섰다. 반환 협상을 둘러싼 한미 간 지리한 공방이 이어졌고 2010년 1월에야 미군으로부터 열쇠를 넘겨받아 공원 조성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부산일보〉 주도로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하얄리아 공원포럼’이 결성돼 공원의 방향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었고 시민 참여 숙의 기구인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공원 조성과 운영에 대한 정책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부산시민공원이다. 부산시민공원에서 ‘시민’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다. 이즈음 뉴욕에는 센트럴파크, 런던에는 하이드파크가 있고 서울에는 서울숲이 있다면 부산에는 부산시민공원이 있다는 말이 생겼다.
부산시민공원 개장 10년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그 세월 생활 속 문화 공원을 향한 시민들의 꿈은 얼마나 자랐을까. 센트럴파크의 꿈은 멀다 해도 서울숲에 견줄 만한 부산시민공원의 정체성은 만들어져 가고 있는가. 아쉽게도 관광객들이 찾는 부산의 핫 플레이스는커녕 시민의 사랑을 받는 도심 속 생활 공원으로 자리 잡는 데에도 여전히 한계가 있는 듯하다. 개장 효과로 한 달 평균 100만 명을 웃돌던 방문객은 개장 이듬해부터 월평균 60만~70만 명 수준에 정체돼 있으며 올해 들어서도 7월 말까지 월평균 방문객은 65만 명 수준이다.
공원이 시민들의 일상 속 여가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접근성이다. 그러나 개장 10년이 되도록 공원의 접근성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서면 도심과 부전역, 송상현광장과의 단절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는 난제다. 부전천 물길로 공원과 서면 도심을 연결하려던 부전천 복원 사업은 중단과 재추진을 반복하고 있으며 부전역 역세권 개발도 진척이 없다. 부암고가교 철거도 하세월이다.
공원 개장 당시부터 시민 참여 활성화를 위한 공원 운영 거버넌스 논의가 많았지만 부산시설공단이 관리하는 것으로 결정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센트럴파크의 컨서번시나 서울숲의 서울그린트러스트와 같이 시민들에 의한 공원 운영은 애초 역부족이었다. 자연히 공원 운영과 활성화를 위한 시민 참여는 멀어져 가고 있다. 시민공원에서 많은 행사들이 열리지만 공원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살린 콘텐츠로 시민들에게 각인되는 행사가 없는 이유다. 공원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고 창조의 대상이라는 말은 시민공원과는 먼 이야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산시민공원을 주인 없는 빈 땅으로 생각하고 여기저기서 공원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공원의 주인인 시민들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부산시민공원이 개장 10년에도 불구하고 공원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제대로 만들어 가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공원은 채우는 공간이 아니라 비우는 공간이다. 공원은 언제나 비어 있는 넉넉함으로 남아 있어야 하고 그 속에 채워야 하는 것은 시민들의 창의적 활동으로 만들어 가는 공원 문화다. 센트럴파크를 설계한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가 “지금 이곳(센트럴파크)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 넓이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와중에 부산시민공원 수목의 생육이 부진해 정밀 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공원 문화만 자라지 못 한 게 아니라 수목도 자라지 못 한 모양이다. 이래저래 부산시민공원 전반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2024년 5월 1일 개장 10주년에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시민 사회의 지혜를 모아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2023-08-2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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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대중교통 요금 아닌 수송 분담률 올려야
부산시가 대중교통 요금 인상 절차에 들어갔다. 시의회에 시내버스·도시철도·부산~김해 경전철 요금 조정안을 제출했고, 지난 7일에는 업계와 시민사회 대표, 전문가 등이 참여해 토론회도 했다. 시의 요금 인상안은 대략 현행 1200원(교통카드)인 시내버스 요금을 400원 인상하고 도시철도와 경전철의 경우 1300원(1구간)에서 300~400원 올리는 거다. 대중교통 운영 적자로 인한 재정 부담이 급증해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게 시의 입장이다. 2007년 989억이던 재정 부담은 2019년 4096억, 지난해에는 7098억 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었다. 지난해는 코로나로 인해 대중교통 이용이 급감하면서 재정 부담이 크게 확대된 측면이 있는데 이번 요금 인상의 명분으로 활용됐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서울시와 울산시도 요금 인상을 추진 중이다. 이대로 절차가 진행되면 9월이나 10월에는 인상된 요금이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말이 300원, 400원이지 시내버스 요금 400원이면 인상 폭이 33%다. 도시철도 300~400원은 23~31%의 인상률이다. 대중교통에 의지해 생활하는 서민들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다. 대중교통은 이동권 보장과 관련해 복지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다른 생활물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시내버스는 2013년 1월 이후 10년 만에, 도시철도는 2017년 5월 이후 6년 만에 요금 인상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서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시의 이번 요금 인상 추진으로 대중교통 정책 전반을 돌아보게 한다. 시가 2007년 대중교통 활성화의 깃발을 내걸고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도입한 지 15년째다. 그동안 나름대로 정책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시철도와 연계해 시내버스 노선 조정이 일부 이뤄졌고 대중교통 환승할인제도 도입했다. 막대한 재정을 들여 간선급행버스체계(BRT) 1단계 구축도 완료했다. 그러나 부산의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은 그 15년 기간 40% 초반대에서 정체다. 승용차 수송 분담률도 30% 초반대로 크게 변함없고 오히려 추세적으로는 꾸준한 상승세다. 막대한 재정 투입과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송 분담률 지표로 보면 참담한 정책 실패다.
우선은 대중교통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못 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환승 불편이나 긴 배차 간격 등 시민들이 느끼는 불편이 여전하다. 도시철도 중복 노선이라든지 장거리 노선 정리 등도 개별 지역적 이해 등에 발목이 잡혀 전면적으로 혁신하지 못 했다는 지적이다.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승용차 수요 관리 정책과 맞물린다. 대중교통 활성화 정책의 효과를 위해서는 승용차 수요 관리 정책을 병행해야 하는데 민선 자치단체의 성격상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큰 승용차 운전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도심 내 승용차 진입이나 주차 규제 등을 통한 수요 관리는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BRT만 해도 승용차 운전자들의 저항이 거세자 오거돈 전 시장이 백지화를 밀어붙이다 시민 숙의를 위한 공론화위원회까지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1단계가 겨우 완공됐다.
대중교통 활성화를 위해서는 전향적 정책이 필요하다. 8월부터 시행되는 대중교통통합할인제도인 ‘동백패스’를 주목하는 이유다. 월 4만 5000원을 초과하는 이용 요금에 대해서는 최대 4만 5000원 한도 내에서 돌려준다는데 어느 정도 파급력이 있을지가 관건이다. 독일이 5월 49유로 한 달 정액권으로 지역 철도, 지하철, 버스, 트램 등 전국 모든 근거리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도이칠란트 티켓’을 도입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물가 상승으로 인한 가계 부담을 덜고 환경보호에도 기여한다는 평가다. 독일 사회가 활기를 띠는 계기가 됐다고까지 하니 대중교통 활성화가 갖는 영향력을 실감하게 한다. 지난해 9유로 티켓의 큰 호응으로 정책을 확대한 결과다. 동백패스도 도시 근로자 출퇴근 교통비를 감안해 4만 5000원 기준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용 현황 등을 면밀히 분석해 기준을 낮추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교통정책은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모든 이용 주체를 만족시킬 수 없다.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 하는 비전과 철학의 문제다. 대중교통 활성화를 위해서는 그만큼 소신과 뚝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부산을 대중교통 친화도시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녀 보면 안다.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편하다.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이 정체 상태인 명확한 이유다. 동백패스 이상의 파격이 필요할 수 있다. 동백패스에 투입되는 500억 원, 1000억 원의 예산을 아까워할 일이 아니다. 도로 건설 하나 포기하면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다. 부산도 이제 그런 고민을 할 때가 됐다.
2023-07-1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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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2024년 부산 우주산업 도약의 원년 만들자
누리호 3차 발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지난 30일 중간결과 발표를 통해 누리호 발사 성공을 공식화했다. 누리호 3차 발사 초기 데이터 분석 결과 목표 고도 550㎞, 목표 투입 속도 7.58㎞/s를 정확히 달성하는 정밀도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주 탑재 위성인 차세대소형위성 2호는 안테나 전개 후 위성 자세 제어 기능까지 제대로 선보였다. 부 탑재 위성 도요샛 4형제 중 3호 다솔이 우주로 나오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계획된 세계 최초 편대비행이나 임무 수행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항우연의 설명이다.
누리호 3차 발사 성공으로 우리는 자체 기술로 만든 발사체로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 원하는 궤도에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독자적 우주 수송 능력을 갖추게 됐다. 1992년 8월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기아나 쿠루기지에서 쏘아 올리며 우주개발에 첫발을 내디딘 후 30년 만에 이룬 ‘글로벌 우주 강국’(G7)의 꿈이다. 북한이 31일 정찰위성을 탑재한 우주발사체(로켓) 발사에 실패한 것도 누리호 발사 성공에 자극받아 조급하게 시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누리호 3차 발사는 성능검증위성을 탑재했던 2차 때와 달리 실제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실용위성을 태워 첫 실전 발사 성공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무엇보다 누리호 3차 발사 성공이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도 이제 민간이 우주산업을 주도하는 뉴스페이스 경쟁에 나서게 됐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3차 발사에는 민간기업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체계종합기업’으로 참여했다. 미국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가 미 항공우주국(NASA) 기술을 이전받아 민간 우주시대를 연 것처럼 우리도 민간 주도로 우주산업 생태계 조성에 나서게 됐다.
우주는 이제 더 이상 꿈과 낭만의 공간이 아니라 전쟁터다. 국가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우주 자원과 첨단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국가의 명운을 걸고 우주산업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기존 우주 강국들에 비하면 한국은 우주 지각생이다. 한국의 글로벌 우주산업 시장점유율은 1%에 불과하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도 된다.
누리호 발사 성공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우주산업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진 건 반가운 일이다. 때맞춰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도 우주산업 궤도 진입을 위해 나서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위치하고 있는 경남, 항우연 등 연구시설이 밀집한 대전,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전남, 자연 입지를 내세운 제주가 지자체 우주 전쟁 대열에 가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이 2024년 전국 지자체 최초로 자체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해양 미세먼지 측정 등 해양 데이터 수집용 초소형위성 ‘부산샛(BusanSat)’이 주인공이다. 부산테크노파크를 중심으로 부산시가 해양과 우주기술 융합을 통한 해양 신산업 육성을 위해 국가 공모사업으로 이룬 성과물이다. 이 사업을 위해 대한민국 1호 인공위성 스타트업으로 꼽히는 ㈜나라스페이스테크놀로지가 2019년 영도 해양혁신도시에 본사를 이전하고 지난해 부산샛을 완성했다. 올해 발사 예정이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내년 하반기로 미뤄졌다.
부산샛 발사가 국제적으로 더 주목받게 된 것은 NASA와 국제 협력 프로젝트로 진행하기로 하면서다. NASA가 해양 데이터 공유를 조건으로 인공위성 발사를 돕기로 한 것이다. 앞서 NASA는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초소형위성 분야 기술성숙도에서 나라스페이스를 최고 등급으로 평가해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증했다.
부산으로서는 우주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최근 우주산업은 해당 도시가 어떻게 수요를 만들어 내느냐가 훨씬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부산이 지향하고 있는 스마트시티를 위한 4차 산업혁명도 필수 인프라가 우주산업이다. 해양과 결합한 우주산업 분야 특화도 가능하다.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수산과학원 등 국가기관이 이미 해양환경 조사와 생물자원 탐사 등에 인공위성 데이터를 활용 중이다. 해양 우주산업 생태계 조성에 더없이 유리한 조건이라는 이야기다.
우주산업이야말로 산업이 갖고 있는 특성 상 민관이 함께 키워 가야 하는 미래산업이다. 부산이 우주산업 생태계를 주도하면 젊은이들이 우주 스타트업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될 것이다. 새로운 산업 생태계 조성이 말처럼 쉽지 않지만 혁신에 목마른 부산으로서는 우주가 새로운 도전 영역인 것만은 분명하다.
2023-06-0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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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과학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지금은 고철 신세로 전락한 부산 기장 해수담수화 시설은 애초 미래 물 산업을 이끌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했다. 그 역사는 2006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설교통부는 미래 가치를 창출할 국가 10대 전략산업의 하나로 해수담수화를 선정하고 광주과학기술원에 해수담수화플랜트사업단을 발족한다. 광주과기원을 중심으로 고려대 등 학계와 두산중공업 등 산업계를 포함해 50여 기관이 참여하는 대규모 조직이 꾸려졌다. 사업단은 R&D를 통해 기존 열을 이용한 증발식이 아니라 에너지 효율이 높은 역삼투압 방식의 해수담수화 신기술을 개발하고 실증 단지(테스트 베드)를 만들어 산업화를 이룬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세계 물 시장을 선점한다는 원대한 목표도 세웠다. 기장읍 대변리 2만 6400㎡ 부지에 2000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하루 4만 5000톤 생산 규모의 세계 최대 해수담수화 시설을 2014년 12월 완공했다.
그런데 2010년 착공과 함께 당시에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삼중수소의 등장으로 논란이 시작됐다. 바닷물을 식수로 추진하면서 주민 수용성을 간과한 게 문제였다. 원전 인근 해상에서 취수가 이뤄지는데 주민 공청회는 물론이고 식수 공급 계획조차 숨겨 불신을 키웠다. 결국 식수 공급은 벽에 부딪혔고 완공된 시설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는 미국위생재단(NFS)에 의뢰해 삼중수소는 물론이고 방사능 52개 품목에서 수차례 식수 적합 판정을 받았다며 주민 설득에 나섰지만 한번 잃은 신뢰는 되돌릴 수 없었다.
삼중수소 논란은 일본 정부가 지난해 4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상 방류를 결정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사고 후 제1원전에서 발생하는 오염수를 1000개 이상의 탱크에 보관해 왔다. 그러나 매년 늘어나는 오염수 저장이 한계에 부딪히자 해상 방류를 결정한 것이다. 일본은 오염수를 ‘알프스’(ALPS·다핵종제거설비)로 정화한 뒤 걸러지지 않는 삼중수소는 해수로 희석시켜 방류한다고 밝혔다. 현재 130만 톤에 이르는 오염수를 30년에 걸쳐 조금씩 방류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미국의 동의를 받은 상태로 상반기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을 마치고 올 여름부터 방류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의 방류 결정 후 우리나라를 비롯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주변국들이 반발하고 나선 건 당연한 수순이다. 세슘 등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이 포함된 오염수를 알프스로 걸러 낸다지만 삼중수소 등 일부는 거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데다 유해성을 놓고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도 오염수 방류에 따른 환경 영향이 미미하다는 주장과 해양 생태계에 누적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이런 상항에서 불신을 더 키운 건 일본의 태도다. 주변국과의 충분한 협의나 투명한 자료 공개 없이 IAEA 검증만 내세웠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공개한 데이터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일본의 아소 부총리 겸 재무상은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라도 처리 과정을 거치면 마셔도 괜찮다”고 발언해 논란만 자초했다. 지난달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린 G7 기후·에너지·환경장관 회의가 끝난 후 일본의 니시무라 경제산업상이 후쿠시마 처리수의 바다 방류를 환영한다는 것이 공동성명에 포함된 것처럼 발표하다 독일 렘케 환경부장관이 “오염수 방류를 환영할 수는 없다”고 밝히면서 발언을 정정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일본은 1986년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직후 ‘신속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전투기를 출격시켜 대기 중 방사능을 채집하는 등 민감하게 반응했던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한·일 간 셔틀 외교 복원으로 관계가 급진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하자 일본 기시다 총리가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한국 시찰을 수용하기로 했다. 정부는 23~24일 전문가로 구성된 시찰단을 파견한다. 일본이 오염수 문제에 진전된 입장을 보인 것이라는 평가와 일본에 면죄부를 주려는 정치 쇼라는 비판이 동시에 나오는 가운데 실효성 있는 현장 검증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기시다 총리도 처리수 방류와 관련해 한국민들의 우려가 많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밝힌 만큼 제대로 된 검증을 위한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 아무리 과학이라며 데이터를 들이댄들 검증 과정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소용없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은 불안하다. 하물며 일본과 바다를 마주하고 있고 수산업의 중심지인 부산 시민의 불안은 더하다. 이 불안을 해소시키는 것은 일본의 몫이다.
2023-05-0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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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부산의 대전환, 세계의 대전환
“우리 부산 사람들은 BIE를 ‘BUSAN IS EXPO’의 약자로 알고 있다.” 3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진행된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 초청 만찬장에서 박형준 부산시장은 엑스포를 향한 부산의 간절함을 위트 있게 풀어낸 건배사로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이끌었다. 동시에 이 장면은 BIE 실사가 시작된 지금 엑스포 후보 도시로서 부산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유치 운동 초기 경쟁 도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압도적 열세였던 부산은 강력한 경쟁 도시로 부상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11월에 있을 개최 도시 선정을 공개투표로 하자고 BIE에 요청했을 정도다. 정부, 부산시, 기업, 시민들이 ‘코리아 원팀’이 돼 혼신의 힘으로 달려 온 결과다.
대한민국을 모처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은 부산엑스포가 가진 또 하나의 힘이다. 국회는 3일 본회의에서 실사단이 방청하는 가운데 참석 의원 239명 전원 찬성으로 엑스포의 성공적 유치와 개최를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 결의안을 실사단에 전달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만찬에서 이번 실사를 통해 한국과 부산의 엑스포 개최 역량과 경쟁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Busan is ready’(부산은 준비됐다)라는 자신감에 찬 인사말로 만찬을 마무리했다. 최태원 부산세계박람회 민간유치위원장은 ‘promise’(약속)를 선창한 후 다 같이 ‘action’(행동·이행)으로 화답하는 건배사로 엑스포 개최를 위한 약속 이행 의지를 강조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자신을 재정을 담당하는 장관이라 소개한 후 성공적 엑스포 개최를 위해 재정을 100% 보장하겠다고 했다.
결국 실사단도 경쟁 도시가 있어 구체적 언급은 힘들다고 밝히면서도 하나 된 대한민국에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파트릭 슈페히트 BIE 실사단장은 “실사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여러 분야에 걸친 광범위한 지지인데 대통령님과 정부의 적극적 지원에 감사하다”며 “엑스포를 잘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Looks like a well-prepared project)”고 밝혔다. 특히 실사단은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지지해 주신 점이 인상적이었다며 ‘amazing!’(놀랍다)이라는 단어를 썼다. 정권이 바뀌어도 부산엑스포는 흔들림 없이 갈 것이라는 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부산엑스포가 정파적 이해를 초월해 추진해야 할 국가 대사이고 세계적 축제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했다.
BIE 실사단은 마침내 5일 부산엑스포의 심장 북항에 선다. 부산여객터미널 홍보관과 전망대에서 부산엑스포의 미래 모습을 설명 듣고 북항재개발 부지 일대를 둘러본다. 북항재개발 부지는 엑스포 실사단 방문에 맞춰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돼 다양한 시민 축제가 진행 중이다. 랜드마크 부지 경관수로를 따라 시민들이 탄 카약이 누비고 다니는 모습은 북항이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음을 실감나게 한다.
엑스포 주 무대인 북항이야말로 부산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실사단이 엑스포를 향한 부산의 열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길 기대한다. 북항은 100년 전 일제가 한반도의 물자를 빼앗아 가던 식민지 수탈의 현장이었고 1970년대 이후 국내 수출입 물동량의 70%를 담당하던 산업화의 심장이었다. 전쟁과 가난의 역사를 딛고 산업화를 이뤄 낸 기적의 현장인 것이다. 현재는 원도심 부활을 이끌기 위해 대한민국 최초로 항만재개발 사업이 이뤄지고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북항 개방을 축하하기 위한 시민 축제의 주제가 ‘북항, 다시 살아나다’인 것도 바로 원도심 부활과 부산 부활의 꿈이 북항 르네상스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부산 부활의 역사적 현장에서 지금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을 함께 풀어 가고 대전환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자는 것이 부산엑스포가 세계인들에게 건네는 제안이다. 짧은 시간에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국가로 탈바꿈한 경험을 공유하고 힘을 합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산은 이제 수도권 집중의 그늘에 가려 쇠락해 가는 도시가 아니라 엑스포를 통해 세계의 대전환을 선도하는 도시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제 월드엑스포는 더 이상 첨단기술의 경연장이 아니다. 엑스포는 당장 인류 앞에 도래한 문제뿐 아니라 미래에 인류가 직면할 문제들에 대해서도 시민들이 생각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장으로 변해 가고 있다. 부산엑스포가 세계의 대전환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으로 자연과의 지속 가능한 삶,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세계의 대전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항해의 출항지가 부산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2023-04-0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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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날자, 부산
다시 봄이다. 코로나의 긴 터널 끝에서 다시 마주하는 봄은 새삼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바이러스가 지배했던 3년, 우리는 서로의 민낯을 가린 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일상을 견뎌야 했다. 우리 곁의 누군가는 소중한 가족을 잃었고, 또 누군가는 소중한 삶을 잃었다. 그 아픔을 딛고 이제 우리는 하나둘 일상을 되찾고 있다. 바이러스 공포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희망 속에 다시 맞이하는 봄이다.
일상 회복이 가장 반가운 곳 중 하나가 항공업계다. 코로나 시작과 함께 직격탄을 맞았던 곳이다. 굳게 닫혔던 하늘길도 다시 열리고 집으로 돌아갔던 승무원들도 일터로 복귀했다. 김해국제공항이 모항인 지역 거점 항공사 에어부산도 날갯짓을 시작했다. 마침 올해는 2030월드엑스포 개최 도시 최종 선정이 있고 이에 맞춰 가덕신공항 개항 준비도 착착 진행될 것이다. 엑스포의 꿈이 이뤄지면 가장 먼저 비상할 곳이 에어부산이다.
그러나 마음껏 날갯짓을 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에어부산이 처한 상황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작업에 발목이 잡혀 있는 까닭이다. 2020년 11월 정부의 통합 발표 당시만 해도 지역에서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오히려 기대가 높았다. 국토교통부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결합한 통합 FSC(Full service carrier)는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운항하고 지방 공항을 에어부산, 에어서울, 진에어의 통합 LCC(Low-cost carrier) 허브로 육성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산업은행도 ‘지역 경제 활성화’를 내세우며 국토부를 거들었다.
통합 작업이 진행된 2년여 기간 ‘항공 마피아’들은 슬슬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대한항공은 애초에는 말을 아꼈지만 지난해부터 LCC 허브공항을 인천공항으로 하겠다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형제의 난’ 와중에 KCGI·반도건설·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3자 연합)은 산업은행이 ‘조원태 경영권 지킴이’ 역할을 한다고 공격했다. 이때 정부, 대한항공, 산업은행이 내세웠던 명분이 지방 공항 LCC 허브 육성이었다. 그러나 올해 최종 통합 승인을 앞두고 이들이 입장을 바꾸면서 가덕신공항 LCC 허브의 꿈이 물 건너가고 있다. 마침내 국토부는 최근 LCC 허브와 관련해 ‘기업 자율’이라는 말로 대한항공과 한패임을 커밍아웃했다. ‘먹튀’도 이런 ‘먹튀’가 없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은 연내 최종 승인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지금대로라면 합병 승인과 함께 가덕신공항 LCC 허브의 꿈은 물론이고 지역 항공사도 흔적 없이 사라질 공산이 크다. 대한항공은 합병과 함께 경제 논리를 내세워 인천공항 LCC 허브를 밀어붙일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지역 반발을 의식해 에어부산, 에어서울, 진에어 3사 체제를 한동안 유지하더라도 에어부산이 고사되고 진에어에 흡수되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지금만 해도 엔데믹에 따른 관광 수요 증가로 알짜 노선들이 쏟아져 LCC들이 중장거리노선 비행기를 도입하며 체급 늘리기에 들어갔는데 에어부산은 통합만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통합 LCC 본사 이전이 안 되면 에어부산이라도 지역 항공사로 지켜야 하는데 부산시와 지역 기업들의 동상이몽으로 좀처럼 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시가 정부를 강하게 밀어붙여야 하는데 제대로 된 대응 전략도 없어 보인다. 어떻게 만든 에어부산인가. 지역 기반의 항공사가 필요하다는 절박감으로 시와 상공계, 시민사회가 백방으로 뛰어 만든 결실이었다. 당시 부산 상공계의 도움 요청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대만과 호주 항공사까지 접촉했겠는가. 결국 영호남 화합 등 갖은 명분을 내세워 삼고초려 끝에 아시아나항공과 손을 잡고 에어부산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어쨌든 에어부산은 이후 항공 수요 폭발과 부산 지역사회의 전폭적 지지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당시 에어부산 홍보팀이 내걸었던 카피가 ‘날자, 부산’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대한항공이 뒤늦게 진에어를 출범시키는 등 부산이 항공업계의 LCC 바람을 주도했다. 남부권 관문공항 가덕신공항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것도 에어부산의 눈부신 성장이었다.
지역의 힘으로 힘겹게 일으킨 항공사를 공중분해시키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국토부다. 국토부의 기만적 태도는 정부의 균형발전에 대한 진정성도 희화화시킨다. 항공사를 만들어 주지는 못할망정 있던 것도 빼앗아 간다. 엑스포와 가덕신공항, LCC 허브가 따로 가는 것이 아니다. 시도 한가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 일이 아니다. 엑스포도 결과적으로는 에어부산과 같은 좋은 기업을 만들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있는 좋은 기업도 뺏기면서 엑스포로 얻을 게 뭐란 말인가.
2023-02-2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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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대학이 많아 좋은 도시 부산
부산시는 2006년 옛 하얄리아 터에 조성될 공원의 이름을 짓기 위해 시민 공모전을 진행했다. 1500건의 응모작 중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기 힘들었다. 시의원, 시민단체 대표, 국어·역사·공원 전문가로 ‘공원명칭심사위원회’를 꾸려 마라톤 회의를 거듭했지만 결정이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미군 부대 이름이었던 ‘하얄리아’를 공원 이름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터의 상징성이 있고 초대 사령관이었던 장군이 고향 플로리다주 도시 이름을 따 부대 이름을 정했다는 역사성도 있었다. 인디언어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도 울림이 있고 공원과 잘 어울렸다. 하얄리아도 심사 대상에 올랐으나 미군 잔재를 공원 이름에 남길 수 없다는 일부 위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배제됐다. 결국 ‘부산시민공원’ ‘부산대공원’ ‘너울공원’ ‘부산공원’ ‘부산가온공원’을 놓고 시민 선호도 조사를 벌이는 우여곡절을 거쳐 2011년에야 부산시민공원으로 이름을 확정했다.
도시의 공원 이름 하나 정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도시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좌우할 브랜드 슬로건을 정하는 일이야 오죽하겠는가. 네이밍이나 브랜딩만큼 주관적 영역도 없다. 500명이 모이면 의견이 500개다.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정해도 여러 뒷말이 따른다. 부산의 도시 브랜드로 ‘Busan is Good(부산이라 좋다)’이 선정됐다. 역시나 부산의 특성과 독창성을 담지 못하고 밋밋하다는 의견과 기존 ‘다이내믹 부산’이 좋다는 부정적 반응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4월로 예정된 2030엑스포 현장 실사 일정을 감안하면 속도감 있는 진행이 필요했을 것이고 부산이 처한 상황에서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다. 부산의 대전환을 내건 이 시점에 브랜드 슬로건을 바꿔 분위기를 새롭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왕에 정했으니 앞으로 디자인과 마케팅, 그리고 시민 공감 확산이 중요할 것이다. ‘I♥NY’을 넘어서는 브랜드가 되길 희망해 본다. 시의 설명대로 ‘Busan is Good’이 갖는 확장성과 개방성이 큰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엑스포 하기 좋은 도시 부산’ ‘창업하기 좋은 도시 부산’ 등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이 대목에서 ‘대학이 많아 좋은 도시 부산’에 대한 기대를 해 본다. 부산은 4년제 14개, 2·3년제 8개로 22개 대학을 갖춘 명실공히 대학 도시다. 그러나 지금 부산의 현실은 ‘대학이 많아 좋은 도시’가 아니고 ‘대학이 많아 버거운 도시’다. 올해 부산지역 대학에서 지원자가 한 명도 없는 학과가 나왔다. 대학의 위기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제2 도시 부산에서 지원자 0인 학과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다. 대학은 도시 혁신의 심장이 되지 못하고 도시는 대학을 품지 못하는 도시가 부산이다. 대학이 문을 닫는 도시에 희망이 있을 수 없다.
윤석열 정부가 교육 개혁의 중심에 지방대 살리기를 둔 것은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다. 교육부는 지역 대학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지역혁신 중심 대학지원체계(RISE)를 마련해 지자체의 대학 지원 권한을 늘리고 규제 완화와 집중적 재정 투자로 지역과 대학을 모두 살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선 5개 시범 지역을 정하고 2025년부터 전면 시행한다. 정부 움직임을 보면 부산이 그 중심에 설 공산이 크다. 시범 도시와 함께 교육특구로 지정돼 사업을 끌고 갈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 파견 인력을 포함해 지자체에 RISE 전담 조직을 만들고 교육 기금에서 예산도 전폭 지원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대체적 얼개다.
물론 RISE가 지역 대학의 경쟁력 강화로 바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반도체학과 증설에서 보듯 수도권 대학 규제 완화라는 이율배반적 정책을 언제든 들고 나올 수 있는 게 지금 정부다. 균형발전을 생각한다면 수도권 대학의 정원 감축부터 진행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다. 역대 정부의 지역 대학 육성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지방대혁신역량강화사업(NURI)과 문재인 정부의 지역혁신플랫폼 사업도 지방대를 살리지는 못했다.
정부는 근본적 해결책으로 지자체 권한 대폭 이양을 내놓았다. 이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잘하면 지역 혁신으로 대학도 살고 지역도 살 수 있지만 제대로 못하면 대학도 망하고 지역도 망하고 그 책임도 오롯이 지역이 덮어쓰게 된다. 지금부터라도 시와 대학들이 똘똘 뭉쳐 돌파구를 찾는 게 시급하다. 다 망하게 생겼는데 지역 대학끼리의 경쟁도 무의미하다.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 타령만 할 게 아니다. 수도권 젊은이든, 세계의 젊은이든 부산으로 불러들일 방안을 찾는 게 중요하다. ‘벚꽃 엔딩’이 울려퍼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짜 ‘대학이 많아 좋은 도시 부산’이 되면 부산은 산다.
2023-01-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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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원전 마피아, 태양광 마적단
한전법 개정 논란이 뜨겁다. 한전의 회사채 발행 한도를 기존 2배에서 5배까지 올리는 내용의 ‘한국전력공사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면서다. 더불어민주당이 대거 반대표를 던져 여야가 상임위에서 합의한 법안이 이례적으로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전의 회사채 발행 한도를 늘리지 않으면 내년에는 전기 요금을 올해 인상분의 3배 이상 올려야 한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이 “한전의 회사채 발행에 따른 이자비용은 결국 전기 요금 인상을 통해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회사채 돌려 막기로는 적자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며 반대를 주도했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은 한전 적자가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 탓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며 민주당을 비난하고 있다. 이 같은 한전법 개정 논란이 주목되는 것은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한 우리의 근시안적 에너지 정책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후 위기로 세계 각국은 국가 경제와 안보 차원에서 에너지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권의 부침에 따라 에너지 정책이 극단적으로 쏠린다. 과학은 없고 정치적 구호와 수치에 좌우된다. 5년마다 원전 확대와 폐기를 반복하는 동안 정책 일관성은 사라지고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산업 육성, 탄소 중립의 목표는 점점 멀어져 왔다.
원전을 녹색 에너지 반열에 올린 것은 이명박 정부다. 현대건설 대표 시절 고리1호기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이 대통령은 특유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 정신으로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추가 건설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59%까지 끌어올리는 원전 르네상스를 이루겠다고 했다. 그러나 깨끗하고 지속가능하고 경제적이라던 이 대통령의 원전 신화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무너졌다. 이 대통령은 원전을 앞세워 2020년까지 온실가스 30%를 감축하겠다고 호언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국제사회로부터 기후 악당이라는 오명까지 들어야 했다.
원전 위주 에너지 정책을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한 것이 문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문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정책 또한 초라한 결과로 끝났다. 집권 초기 4.4%이던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은 집권 기간 7% 안팎으로 상승하는데 그쳤다.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30%까지 올리겠다고 한 약속은 허구로 드러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발전의 간헐성과 토지 이용의 한계 등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은 결과다. 국가 정책은 선한 의도만 중요한 게 아니고 선한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 목표 수치만 제시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 실행 계획은 없었다. 환경단체 구호로는 상관없지만 국정 운영에서는 안 될 일이다. 정권이 바뀌자 윤석열 정부의 국무조정실은 전력산업기반기금 운영의 위법 사례가 적발됐다며 수사 의뢰했고 검찰은 국가재정범죄 합동수사단의 1호 사건으로 문 정부 시절 태양광 비리 의혹 수사에 나섰다. 이 즈음 ‘원전 마피아’에 빗대 ‘태양광 마적단’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윤 정부의 친원전, 탈탈원전 정책 또한 일방적 폭주로 이어지고 있다. 문 정부가 멈춰 세웠던 원전을 재가동하고 폐쇄 수순을 밟던 노후 원전 10기에 대해 운영 기간 연장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안전은 뒷전으로 밀리고 안전성 평가와 주민 공청회 과정에서 마찰만 일고 있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에 대한 근본적 대책 없이 기존 원전을 핵폐기장화하는 정책을 밀어붙여 원전 밀집지역 주민들의 인내를 시험한다. 원전은 미래 에너지 전환으로 가는 과정에 한시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에너지원이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체적 공감대다. 원전의 불가피성과 산업 생태계, 기술적 진화 등을 받아들이면서도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신재생에너지 산업 기술 투자와 산업 생태계 조성을 동시에 진행하는 에너지 믹서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전채 발행 논란에서 보듯 에너지 전환의 핵심은 탈원전이냐 친원전이냐가 아니라 전기 요금의 탈정치화다. 정치권이 전기 요금을 정치화하면서 신산업 창출과 기술 개발을 막고 전기 절약을 끌어내지 못하는 게 진짜 에너지 위기라는 말이다.
문 정부 시절 신고리 5, 6호기 사업에 대한 시민들의 공론화 과정이 있었다. 문 정부는 당시 이미 시작된 5, 6호기 사업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시민참여단은 숙의 과정을 통해 건설 재개를 지지하면서 동시에 향후 원전을 축소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정치인의 선동보다 시민들의 숙의를 통한 합리적 결과 도출이 훨씬 과학적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미래 세대를 위해 정권에 따라 휘둘리지 않을 백년대계의 에너지 정책이 필요한 때다.
2022-12-13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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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의 쏘울앤더시티] 파워 반도체 클러스터 키우자
지난달 26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 동남권 방사선의·과학산업단지에서 파워 반도체 제조기업 제엠제코㈜ 준공식이 열렸다. 부산 이전 1호 반도체 기업 제엠제코는 본사와 연구소, 공장을 경기도 부천에서 모두 옮겨 왔다. 연 매출 100억 원대 중소기업이지만 파워 반도체 분야에서 탄탄한 기술력을 갖춘 강소기업이다. 무엇보다 이 작은 기업에 주목하는 것은 파워 반도체 클러스터로서 부산의 성장 가능성 때문이다.
부산시가 파워 반도체(전력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것은 2012년의 일이다. 반도체 하면 삼성이었고 메모리 반도체 중심의 국내 시장에서 전력 반도체라는 용어 자체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시는 당시 기장군 장안읍에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중입자가속기, 연구용원자로를 유치하고 생명공학을 미래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동남권 의·과학산업단지를 조성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파워 반도체 공정이 연구용원자로와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관련 산업을 클러스터화 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전문가를 수소문한 끝에 차세대 파워 반도체 R&D를 진행 중이던 한국전기연구원과 손잡고 정부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몇 년에 걸친 도전 끝에 2016년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했고 2017년부터 국비를 확보해 ‘SiC 파워 반도체 연구플랫폼 구축사업’과 ‘SiC 파워 반도체 R&D 사업’을 시작했다. 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산테크노파크와 파워 반도체 상용화센터를 구축해 실제 제품을 생산하는 단계에까지 왔다. 이러한 R&D와 생산 시설을 기반으로 파워 반도체 전문 기업 집적화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 10년 세월 전기차와 드론 등 e-모빌리티(e-mobility) 시장이 성장하면서 파워 반도체가 미래산업으로 급부상했다. 반도체 산업은 크게 보면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분야인 시스템 반도체, 그리고 모든 전기의 전력 변환 장치에 들어가는 파워 반도체로 구분된다. 삼성은 초창기 메모리와 파워 반도체를 했지만 IMF 외환 위기 당시 국내 반도체 시장 빅딜 과정에서 파워 반도체를 포기했다. 하지만 e-모빌리티 시장이 급팽창하며 파워 반도체 비중이 점점 커지는 상황이다.
부산이 10년에 걸쳐 산업 기반을 다져 온 파워 반도체가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산업 분야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전기차뿐만 아니라 친환경산업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전력을 기반으로 한 모든 산업 분야에서 파워 반도체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시장에서 독일과 일본이 앞서고 있지만 파워 반도체 소재가 기존 실리콘에서 전력 제어 능력이 600배 뛰어난 탄화규소(SiC·실리콘카바이드)로 넘어가고 있는데 부산의 상용화센터에서 SiC 기반으로 R&D와 생산을 진행하고 있어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집중적 투자가 이뤄지면 글로벌시장에서 충분히 경쟁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부산의 위기는 곧 산업의 위기다. 전통산업이 몰락하면서 지역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은 지역을 떠나고 있다. 젊은이들이 없으니 혁신의 동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산업을 만들지 못하는 악순환 구조다. 지역의 최대 현안인 2030월드엑스포와 가덕신공항도 결국은 지역의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궁극적 지향이다. 옛 삼성자동차 유치 범시민운동과 같이 대기업 유치에 목을 매던 시절도 지나고 있다. 지역 스스로 산업생태계를 혁신하고 미래 동력을 키워야 하는데 파워 반도체가 그런 영역이 될 수 있다. 대학과 연계해 인력을 양성하고 R&D 역량 축적을 통해 산업을 키울 수 있는 지산학(지자체·산업·대학)의 이상적인 모델로도 가능한 분야다. 또 동남권은 기존에도 파워 반도체 소재를 만드는 삼성전기, 불량 유무를 확인하는 리노공업, 모터와 인버터를 만드는 코렌스이엠, 전기차를 만드는 현대차와 르노차 등 거대한 파워 반도체 밸류체인이 가능한 경제권으로 가능성이 높다.
결국은 지역의 관심과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관건이다. 정부의 K반도체 정책은 여전히 수도권 중심의 메모리와 일부 비메모리 투자에 집중돼 있다. 정부도 미래 전략산업으로 파워 반도체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대통령 공약사업에도 들어 있는 만큼 전체 반도체 산업의 작은 한 부분이 아니라 부산을 중심으로 클러스터를 키우기 위한 집중 지원을 이끌어 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미래도 대규모 위탁 생산보다 파워 반도체와 같이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가고 있다. 설계와 웨이퍼 제조, 부품 등 관련 업체들을 클러스터화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견 기업들이 모이고 R&D가 활발하게 이뤄지다 보면 새로운 혁신도 일어날 수 있다. 기장 장안읍에서 삼성전자나 테슬라 같은 기업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2022-11-03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