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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아이를 낳으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아이 많이 낳으라는 육아휴직
우리나라에 육아휴직 제도가 도입된 게 1987년의 일이다. 처음에는 여성만을 대상으로 시행됐다. 남성도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건 그로부터 8년이 지난 뒤였다. 육아휴직은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를 가진 노동자가 쓸 수 있는데, 그 기간은 자녀 1명당 12개월이다.
사업주는 육아휴직을 이유로 해고 같은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되며, 육아휴직을 마친 후에는 휴직 전과 같은 업무나 그와 동등한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는 직무에 복귀시켜야 하고, 육아휴직 기간은 근속기간에 포함시켜야 한다. 만일 사업주가 이를 어길 경우 관련 법에 따라 꽤 과중한 형사 처벌을 받는다. 육아휴직 기간 급여도 설정해 놓았다. 육아휴직은 아이 많이 낳으라고, 즉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국가가 강제하는 제도인 것이다. 그런데 시행 30년도 훨씬 지난 육아휴직 제도에 대해 아직도 왈가왈부 말이 많다. 왜 그럴까.
■시행 30여 년에도 별무소용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의도에서 육아휴직을 강권한다. 하지만 그 의도는 빗나가도 한참 빗나가고 있다.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명예교수. 우리나라의 미래를 몹시도 걱정하는 인구학자다. 그는 2006년 유엔 인구포럼에서 ‘인구소멸 국가 1호’, 즉 지구상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로 한국을 지목했다. 그때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1.13명이었다. 합계출산율은 가임기 여성 1명이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출생아 수를 뜻한다.
불행히도, 콜먼 교수의 ‘예언’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세계 최저를 기록했다. 올해 5월 서울에서 열린 한 심포지엄에서 콜먼 교수는 아예 ‘한국 소멸 시기’를 2750년으로 못 박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2분기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7명이었다. 올해 하반기에는 0.6명 대로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 역대 정부는 저출산 위기 극복을 위해 지난 15년 동안 약 300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요컨대 지난 30여 년 간의 육아휴직 제도가 출산율 제고에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는 이야기다.
■비현실적 휴직 급여가 가장 큰 벽
국가가 쓰라고 권장하고 이를 막는 사업주엔 법적인 제재를 가한다고 엄포를 놓았음에도 육아휴직을 포기하거나 어쩔 수 없이 퇴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우리나라 육아휴직 사용자 비율은 출생아 100명당 여성 21.4명, 남성 1.3명 수준이다. 많은 부모들이 육아휴직 사용을 주저하는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육아휴직을 사용하려면 우선 회사와 동료의 눈치를 봐야 한다. 맡은 일을 동료에게 떠 넘길 수밖에 없고, 복귀 후 임금 인상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도 크다. 회사가 노골적으로 휴직을 말리거나 사직을 권고하는 사례도 많다.
거기에 더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바로 소득 문제다. 고용보험 가입자는 육아휴직을 선택하면 그에 따른 일정한 급여(수당)를 받을 수 있다. 법적으로는 ‘통상임금의 80%를 지원한다’고 명시돼 있다. 문제는 상한액이다. 최대한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월 150만 원이다. 이 때문에 말만 통상임금의 80%이지 현실에선 40% 받기도 어렵다. 구체적인 수치가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우리나라 육아휴직 급여의 소득대체율은 44.6%다. 소득이 반토막 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슬로베니아나 칠레는 100%이고, 체코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70~90% 정도다. 우리나라만큼이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일본도 59.9%다.
더구나 육아휴직 급여의 25%는 복직 후 6개월 이상 근속 시 지급된다. 최대치인 월 150만 원을 받는다 해도 휴직 기간엔 75%인 112만 5000원만 받게 되는 것이다. 한 가족이 아이까지 기르며 월 110여 만 원으로 산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견디다 못해 부업 따위를 찾을 수도 있겠는데, 주 15시간 이상 일 하거나 월 150만 원 이상 소득이 발생할 경우 육아휴직 수당 자체를 받지 못한다.
■예산 퍼붓기 전에 묘책 강구부터
정부는 기존 12개월인 육아휴직 기간을 내년 하반기부터 6개월 연장해 최장 18개월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을 최근 세웠다. 그러면서 관련 예산을 올해보다 약 3500억 원 늘린 2조 1500억 원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실효성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육아휴직을 쓰는 것부터가 어려운데 기간을 늘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세부 조건도 문제다. 육아휴직 연장 대상이 맞벌이 부부인 데다, 남편·아내 모두 3개월 이상 육아휴직을 사용했을 경우에만 어느 한쪽의 연장이 가능하다. “부부 모두 휴직하면 뭘 먹고사냐”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허울뿐인 육아휴직이 되지 않으려면 현실에 맞는 급여가 주어져야 한다.
법적 안전장치를 공고히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여러 통계를 보면 어렵사리 육아휴직을 사용하고도 복귀 전후 회사의 직간접적인 차별과 압박을 견디지 못해 열에 아홉 꼴로 퇴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육아휴직으로 인한 ‘불리한 처우’ 시 사업주를 형사처벌 한다는 남녀고용평등법 조항이 육아휴직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란 지적이 많다. 불리한 처우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그런 처우를 받았을 경우 해당 휴직자를 구제하는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아휴직이 출생률 높이는 데 만능의 해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의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그 실효성을 높이는 데 당장의 묘책이 절실하다. 이런저런 조건 내걸며 미룰 때가 아니다. 아이를 낳지 않아 나라가 없어질 지경이라지 않는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3-09-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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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섬’ 대마도에 핵 쓰레기 처분장?[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일본에서는 대마도를 ‘방인의 섬’(防人の島)이라고 부른다. 대마도는 1300여 년 전 국경수비대 성격의 군대(방인)가 주둔했던 역사적으로 국방의 요충지였다.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가 멸망하고, 서기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왜) 본토에서 온 구원병 수만 명이 전멸한 이후 대마도 서쪽에 성을 쌓고 군대(방인)가 주둔해 침공을 대비했던 ‘국경의 섬’이다. 대마도에는 3년마다 본토에서 군인(防人)이 파견됐고, 이후에는 현지 군대가 대륙에서의 침공을 대비했다. 1278년 몽골의 대마도~이키섬~규슈 침공과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의 역사가 벌어졌다. 임진왜란 때는 오히려 조선 침공의 발판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대륙 세력인 한반도와 해양세력인 일본 사이에서 침략과 방어의 전진기지였다.
‘방인의 섬’ 대마도가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이슈가 되고 있다. 오는 27일 일본 전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고준위 핵폐기물 1만 9000t의 영구처분장을 대마도에 유치하자는 청원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역 사회는 찬성파와 반대파로 완전히 양분되어 있고, 일본 열도의 시민사회단체까지 가세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언론들도 기자를 파견해 현지 반응을 취재하면서 국경의 섬, 대마도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대마도 시의회, 영구 처분장 설치 청원 가결
9월 12일 일본 나가사키현 대마도 시의회(특별위원회)가 원자력 발전으로 나오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인 ‘핵 쓰레기’ 최종 처분장 선정을 위한 ‘문헌 조사’를 수용하는 청원을 가결했다. 찬성 10명, 반대 8명의 근소한 차이였다. 특별위원회 후나고시 요이치 위원장은 ‘문헌 조사 수락에 머무르지 않고, 최종 처분장 유치까지를 포함한 표결’임을 확인했다.
문헌 조사는 해당 사업을 담당하는 일본 원자력발전환경정비기구(NUMO)가, 2년에 걸쳐 지질도나 학술 논문 등 과거의 문헌을 조사해, 지질학적으로 적지인지를 평가하는 첫 단계이다.
문헌 조사 단계에만 참여해도 지자체는 일본 정부로부터 최대 20억 엔(한화 약 183억 원)의 교부금을 받을 수 있다. 이후 단계에 들어서면 새로 약 70억 엔의 교부금이 들어오게 된다.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대마도 지자체에 교부금은 ‘눈앞에 사탕’이다.
지역 단체들도 찬성과 반대 청원을 시의회에 잇따라 제출했다. 특히 건설협회와 시상공회의소 등 경제계는 급속히 진행되는 인구 감소와 경제 쇠퇴를 배경으로 조사 수용 촉진을 요구했고, 일부 어협과 시민단체, 수산단체 등은 조사 수용에 따른 풍평 피해와 안전성을 우려해 반대를 호소했다.
시의회는 지난달 16일 청원단체 대표와 전문가 등을 초청해 심사위원회를 가진 뒤 건설단체와 상공회의소의 청원 촉구를 채택하고, 반대 청원은 모두 채택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하츠무라 히사조 대마도 시의회 의장은 표결 직후에 “찬반 의원 모두 대마도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나머지(중앙정부에 청원 여부 최종 결정)는 시장의 현명한 판단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청원안 수용 최종 결정권자인 히타카쓰 나오키 대마도 시장은 “정말 무거운 의결로 받아들이고 있고 시민이 원하는 선택을 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히타까스 시장은 정례 시의회 기간인 27일 전까지 핵폐기장 유치 결정 여부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하지만, 현지 언론에서는 청원을 최종 결정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16년 만에 논의 다시 쟁점화
대마도는 지난 2007년에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유치가 논의됐으나, 시의회에서 대다수가 유치 반대에 투표했다. 당시 결의문에서 “시민을 양분하는 심각한 상황이 올 것으로 우려된다. 오랫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과학자들도 설명할 수 없다. 풍평 피해로 얼마나 손해가 날지 가늠할 수 없다”라고 반대 사유를 설명했다.
유치가 다시 부상한 배경에는 ‘심각한 인구 감소와 관광 수요 침체’가 있다. 한일 관계 악화에 이어 코로나19 사태로 부산~대마도 항로가 정지되면서 2018년 약 40만 명에 이르던 한국 관광객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항구 주변 상점과 음식점 대다수가 철수했을 정도다. 인구도 1만 명 가까이 줄어 2만 8000명 수준으로 감소했고, 초중학교 폐교가 진행되고 있다. 2055년에는 1만 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면서 무덤을 지킬 사람조차 없을 수 있다고 우려할 정도이다. 중학생 중 30%가량이 본토 고등학교로 전학하면서, 이미 40%의 고령화율을 가속화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문헌 조사’를 요청한 곳은 홋카이도의 2개 지역이다. 2020년 11월에 시작되어 NUMO가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대마도까지 포함되면 최종처분장 유치 후보지는 결국 일본 도쿄의 시각에서는 영토 북쪽과 서쪽 맨 끝에 있는 변방, ‘깡촌’이다. 국가가 실패한 지방 활성화 정책의 고통을 지역에서 오롯이 짊어지는 셈이다.
■지역 사회 양분돼 갈등 심화
핵폐기물 처분장 설치 문헌 조사 청원을 주도하고 있는 대마도 상공회의소는 지난 4월 ‘대마도 핵 쓰레기 최종 처분장 연구회’를 결성했다. 이어 회원 1000여 명 중 간부 117명에 대해 처분장 후보지 선정 조사 수용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 조사 결과 동의 76명, 반대 20명, 미정 19명의 결과를 확인하고, 시의회에 청원을 제출했다고 한다.
대마도 상공회의소 야마모토 히로키 회장의 청원 찬성 요지는 ‘섬의 장래에 대한 위기감’이다. 야마모토 회장은 “회원들이 인구 감소가 진행되는 대마도에서 밥을 먹고 살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대마도 상공회의소 코미야 노리요시 이사는 “코로나19로 인한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코로나로 경제가 매우 피폐해져 국가의 교부금을 활용해, 악화하는 경제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거나,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문헌 조사 응모 청원에 앞장선 대마도 건설업 협동조합은 25년 전에 비해 회원이 40% 감소했다. 조합 측은 “공공 공사가 줄어 건설업계에 타개책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회원 중에서 관광업 관계자 등 조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영구 핵 폐기장이 건설되면, 미래 세대에게 안전 리스크를 넘기는 행위이고, 설사 안전하더라도 핵 쓰레기 처분장이라는 이미지가 생기면, 관광객은 오지 않고, 인구가 줄고, 상품은 팔리지 않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우려다.
자연에너지에 의한 해상풍력발전 등 다른 경제 활성화 수단으로 정부 교부금 20억 엔 이상의 경제효과를 거둘 수 있고, 정부 교부금만으로 고령화와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없다는 이성적 판단도 한몫하고 있다. 반대 주민들은 “핵 쓰레기 처분장 없이, 조상 대대로 지켜온 섬의 다양한 자산을 잘 활용해서 지금 그대로 다음 세대에 넘겨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또, “시의 일은 사슴과 멧돼지 덫을 놓는 게 우선”이라는 비아냥까지 개진할 정도다. 이들은 인구의 25%에 이르는 7400여 명의 서명을 받고, “시장이 문헌 조사를 수용할 경우 ‘시장 소환 운동’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이다.
■대마도 과학적으로 핵처분장 안전한가
이미 대마도 북쪽 지역에서는 비밀리에 두 곳에서 시추 조사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려는 또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최종 처분 적지를 공표한 ‘과학적 특성 맵’에는 ‘대마도가 화산이나 활단층이 근처에 없다’면서 ‘(영구 핵폐기장 부지로)바람직하다’라고 적시했다. 하지만, 정부 지진조사위원회는 지난해 3월 대마도 근해에 활단층이 있다고 발표했다. 대마도 부근에서는 1700년경 규모 7.0의 지진도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가 핵 쓰레기를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을 수 없다는 걱정이 생기는 이유기도 하다.
■대마도 내부 정치도 엇갈려
이번 시의회 청원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시의원조차도 “이번에는 16년 전과 반대로, 문헌 조사에의 응모를 요구하는 소리가 더 큰 것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할 정도다. 히타카스 현 시장의 입장도 묘하게 변하고 있다. 그는 2020년 시장 선거에서 ‘최종 처분장 유치를 하지 않겠다’고 공약했다. 히타카스 시장은 핵폐기장 후보지로 거론되는 대마도 북부지역 출신이어서 더욱 반대 입장이 강했던 상황이다. 그는 올해 시의회 답변에서 ‘선거 운동 당시 유치 반대 공약’과 ‘2022년 여성단체와 면담에서 핵폐기장 유치에 응모하지 않겠다는 답변’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는 6월 정례 기자회견에서는 “(문헌 조사 청원을 추진하는)시의회와 나의 판단은 같을 수 없다”고 반대 의사를 시사했으나 8월 31일 기자회견에서는 “심사숙고하고 있는 단계”라고 단언을 피했다. 지난 12일 시의회 청원이 가결된 이후에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결론을 내고 싶다”라고 밝혔다. 내년 3월 임기 만료인 시장은 히타카스 시장은 재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내년 선거에서 섬이 두 쪽으로 갈려 치열한 갈등이 예상된다.
■한일 관계 화약고 될 수도
일본 본토보다 훨씬 가까운 부산에 핵폐기장 불똥이 튀고 있다. ‘국경의 섬’ 대마도는 일본 본토 후쿠오카에서 147km, 부산에서 48km 거리다. 일본 국내 문제이지만, 사실상 부산과 경남에도 심각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자칫 이 불똥은 한일 관계의 악화, 외교 분쟁이라는 큰불로 악화될 소지가 높다. 벌써 야당은 공개적으로 항의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은 지난 15일 남구 오륙도 앞에서 ‘대마도 핵 폐기물 처분장 유치 청원 규탄’ 집회를 열었다. 서은숙 민주당 부산시당 위원장은 “대마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그 위험은 50㎞ 떨어진 한국에도 생긴다”라고 비판했다. 당장은 ‘반일을 이용한 정치쇼’라는 정치 프레임에 갇힐 수도 있지만, 그 메시지의 무게감은 만만치 않다.
일본 내부에서도 국경 근처에서 핵 쓰레기 최종 처분장 설치로 한국 등 인접국의 반발을 살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일본 주요 언론에서도 “대마도는 국경에 가까워 '방인의 섬'으로도 칭해졌다. 안보상 중요한 지역에 묻어도 되는가. 인근국의 반발을 사지 않겠는가”라는 기사가 연이어 게재되고 있다.
안보적인 측면에서도 논의가 나오고 있다. 현재도 육상자위대 기지가 설치돼 있어서, 일정 면적 이상의 토지나 건물의 매매 시에 성명이나 국적 신고를 요구하는 상태다. 토지 이용 규제법의 ‘특별 주시 구역’으로 지정된 지역도 상당 부분 있다. 그런 국경의 섬에 최종 처분장을 유치해 안보상의 문제는 없느냐는 우려이다.
일부 전직 자위대 대원들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원전이나 핵물질 관련 시설은 공격 대상이 될 위험이 있다”면서 “중국과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방위 강화를 해온 정부가 국경 근처에 ‘핵 쓰레기 처분장’을 설치해도 되는지 의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안보 관점에서는 대마도를 최종처분장 후보지에서 제외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한일 공동 핵폐기장’ 운영 소수 의견도
일부에서는 비현실적이지만, 대마도에 핵폐기장을 한일 공동으로 건립하자는 아이디어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핵폐기장 건설 사업이 여야 정쟁 탓에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부산 인근 대마도에 핵폐기장을 건립할 경우 공동건립·공동운영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논리이다. 물론, 건설과 운영비 상당 부분, 혹은 전액을 한국이 부담하는 조건에서 협의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양국의 심각한 공동 현안인 핵폐기장 공동 건립·운영을 통해 한일 간의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을 한꺼번에 종결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한일 관계는 군함도 유네스코 권고 무시, 과거사 문제 등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폭탄주만으론 해결되지 않을 시한폭탄들이 대거 쌓여 있다.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경우라도 수만 년 함께 짊어져야 할 교집합을 만들 수 있다는 해석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제적으로도 핵을 둘러싼 국가 간 거버넌스를 만든 전례도 없고, 일본 내부 합의가 어렵지 않겠냐”면서 “사실상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지적했다.
■취재 후기
최종 처분장 유치는 현재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다. 대마도가 중앙정부 교부금을 대가로 핵쓰레기 처분장을 유치하는 것이 섬의 미래에 정말 좋은 일인지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헌 조사 대가로 정부 교부금 20억 엔을 받기 위해 시작된 논의가 혹시나, 50년 뒤 실현될 경우 대마도에 살 미래 세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당장의 곤궁 때문에 찬성표를 던진 시의원과 청원을 낸 경제계 인사들의 자손들은 할아버지 세대의 결정에 동의할 수 있을까. 보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이유다. 물론, 당장 2024년 시장 선거 이후 대마도 정치 지도가 변할 경우 중앙정부와의 합의가 준수될지조차 애매한 상황이다.
인구 감소와 경제 위기에 대한 다른 대응책은 없을까. 가령 일본 중앙정부의 전액 비용 부담 조건으로 대마도를 통과하는 한일 터널 건설도 논의할 수 있다. 건설 수요는 물론이고, 대마도가 통행료 수입 징수와 함께, 중간기지 역할을 한다면 막대한 수익과 관광객을 챙길 수 있다. 이미 시의회는 2013년 한일터널 조기 건설을 촉구하는 의견서도 가결한 상태이다. 또한, 중형항공기 이착륙이 가능한 공항 건설을 통해 한국~대마도 정규 항공 노선 확보와 한국 관광객 대거 유치, 수산업·농업·관광을 융합한 6차산업 활성화와 수출 등 다양한 지역 부흥의 아이디어를 한국과 연계해 실현할 방안부터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소모적인 여야 정쟁과 무능한 중앙정부 탓에 핵폐기장 법안조차 마련 못 한 한국은 이런 일본의 내부 갈등조차 부러워야 할 상황이다.
※최종처분장 선정 절차
①문헌 조사(2년 정도) ②개요 조사(4년 정도) ③정밀 조사(14년 정도)의 3단계를 거쳐 결정된다. 단계에 따라 대상 지자체에는 '문헌 조사'에서 최대 20억 엔, 다음 '개요 조사'에서 최대 70억 엔이 교부된다.
조사는 20년 정도에 걸쳐 3단계로 실시하고, 처음에 문헌을 기초로 화산이나 단층의 활동 상황 등을 조사하는 ‘문헌 조사’를 2년 정도, 다음에 현지에서 시추 등을 실시해 지질이나 지하수의 상황을 조사하는 ‘개요 조사’를 4년 정도 걸려 진행한다. 그 후, 지하에 조사용의 시설을 만들어 암반이나 지하수의 특성등이 처분장에 적합한지 자세하게 조사하는 ‘정밀 조사’를 14년 정도 걸려 선정을 진행한다.
2023-09-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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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길고양이, 포용이냐 방목이냐
고양이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달 6일 경남 통영시가 국내 처음으로 공공형 고양이 보호·분양센터, 일명 ‘고양이 학교’를 개소했다. 유기묘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유도한다는 게 취지다. 최근 충남 천안시는 아예 길고양이 보호를 위한 조례안을 만들었다. 이 역시 국내 처음이다. 길고양이에 대한 인식 개선과 개체 수 관리, 인간과의 공존이 목적이다. 국민들의 의견은 갈린다. ‘선진국 수준의 동물권 향상이 필요하다’는 입장과 ‘특정 동물을 위해 혈세를 쓰는 게 적절하냐’는 반대 여론이 맞서고 있다.
■ ‘동물권’ 인식, 변화의 바람
통영의 고양이 학교와 천안의 길고양이 보호 조례안은 고양이에 대한 인식 변화를 잘 보여 주는 사례다. 섬마을 폐교를 활용한 고양이 학교는 구조에서부터 치료·건강 관리·입양에 이르는 전 과정을 도맡는다. 주민 참여 예산과 시비 등을 들여 보호실과 치료실, 캣·북카페 등을 갖췄다. 생후 3개월 미만의 구조묘나 유기묘·장애묘가 우선 입소 대상인데 최대 120마리까지 보호할 수 있다. 고양이를 주제로 한 생명·생태 교육 사업도 담당한다. 이를 위해 통영시는 운영 조례도 마련했다.
천안의 길고양이 보호 조례안은 한마디로, 길고양이와 시민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책의 수립과 시행의 근거다. 길고양이 보호·관리, 교육·홍보, 급식시설 설치, 중성화 사업에 대한 시장의 책무가 명시돼 있다. 권고가 아니라 의무 사항이라는 것인데 시민도 시 정책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길고양이 문제에 따른 주민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길고양이보호관리위원회’ 설치 조항도 담겼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에는 길고양이가 생태계 일원으로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동물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깔려 있다. 길고양이 보호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중성화 수술로 개체 수를 조절해 인간과 공존해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한 걸음 더 성숙해지는 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특정 동물만 보호, 어째서?
하지만 반대 여론도 만만찮다. 유독 고양이에게만 동물권을 주느냐, 특혜가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 지자체 중에는 일반적인 동물복지와 관련된 조례를 만든 곳은 많지만 ‘고양이’라는 특정 동물을 대상으로 조례를 만든 곳은 없다. 이는 국가법령정보센터 사이트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물론 고양이 급식소 설치나 중성화 사업 근거를 위한 한정된 목적의 조례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고양이 보호 조례는 아직은 없는 상태다.
부산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약자 반려동물 진료 지원 조례(2021.3.24), 반려동물 관련 산업 육성 및 지원 조례(2021.12.29), 동물 보호 및 복지에 관한 조례(2022.10.26)가 제정된 바 있지만 고양이를 중심에 둔 조례는 아니다. 부산의 기초지자체 차원에서도 16건의 동물 관련 조례가 제정돼 있는데, 전부 동물복지나 반려동물과 관련된 보편적 내용이다.
길고양이 보호를 반대하는 이들은 고양이가 희귀종도 아니고 멸종위기종도 아닌데 어째서 보호 대상이 되는지 묻는다. 고양이만 세금을 들여서 먹여주고 살려주고 집까지 주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고양이 때문에 금전적, 정신적 피해 사례가 발생하는 점도 반대 여론의 한몫을 차지한다. 고양이 때문에 주차 차량이 손상되고 울음소리로 고통을 겪는 일들이 그것이다. 고양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헤집고 다니거나 새를 사냥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 길고양이, 유해한가 무해한가
고양이는 우리나라 야생생물법이 정하는 ‘유해야생동물’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버려지거나 야생화된 가축 혹은 반려동물로 인해 질병 감염이나 생태계 교란의 우려가 있는 경우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돼 있다. 특히 야생동물에게 피해를 주는 들고양이의 경우 포획·사살·중성화 등의 조치가 가능하다.
문제는 도심지나 주택가에서 자연적으로 번식해 자생하는 길고양이다. 애초 길에서 알아서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점을 인정해 서식지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동물보호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길고양이를 함부로 죽이면 처벌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고양이는 한국에서 두 개의 법적 지위를 지닌다. 고양이는 인간과 자연,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이중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 찬반 논란 속 공존 해법 찾아야
당국과 언론에서 추정하는 전국 길고양이 수는 대략 100만 마리 수준이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가 제시된 적은 없다. 그런데 개체 수를 줄여야 한다는 데에는 대다수가 동의한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개인, 동물권 보호단체, 정부, 지자체,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막론한 얘기다.
적정 개체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꼽히는 것이 중성화 수술이다. 문제는 그 효과에 대한 입장차가 극명히 갈린다는 점이다. 정부는 전국 7대 광역시에서 길고양이가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과장된 발표라고 보는 반론도 있다. 무엇보다 국내외 학자들 사이에서도 관련 연구 결과가 상반되게 나온다.
길고양이 문제는 찬반양론이 나뉘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쉽지 않다. 그 취지대로 동물권 확보와 개체 수 조정이라는 긍정적 효과를 거둘지, 아니면 그냥 길고양이의 무한 증가로 귀결될지 전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길고양이가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무제한적인 증가를 방치해도 곤란하다는 것. 그렇다면 더 이상의 번식을 막으면서도 새롭게 버려지는 고양이가 생기지 않도록 현실적 방안을 찾는 게 중요하다. ‘무차별한 수용’이냐 ‘무책임한 방목’이냐, 이런 이분법을 넘어 공존의 해법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2023-09-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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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9월 위기설… 한국 경제 괜찮나
정부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9월 위기설’이 말끔히 가시지 않고 있다. 금융 당국은 최근 금융가에 널리 퍼진 9월 위기설과 관련해 “위기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국내 금융시장과 금융산업이 전반적으로 안정적 모습이고 금융사들도 위기 상황에 충분히 대응 가능한 수준의 건전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계 부채 증가 속에 개인회생 신청이 늘고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2금융권의 유동성 위기도 고개를 들고 있다. 우리 경제가 하반기에는 침체를 딛고 일어설 것이라는 ‘상저하고’의 전망도 각종 경제지표 악화와 함께 점차 설득력을 잃어 가는 상황이다. 우리 경제는 정말 괜찮은 것일까.
∎왜 9월인가
9월 위기설은 우선 역사적 사건에 기댄 측면이 있다. 세계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2008년의 미국 리먼 사태와 2011년의 유럽 재정 위기가 9월에 있었다. 1997년 우리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도 9월에 발생했다. 지난해에는 레고랜드 사태로 인해 9월 국내 증시 붕괴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대내외적 요인들이 겹치면서 9월 위기설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미국에서는 고금리 여파에 따른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이후 중소형 은행들의 부동산 부실 문제가 본격화했다. 중국도 경기침체 장기화와 부동산 위기로 통화가치가 약세를 보이는 등 불안한 모습이다. 대내적으로는 코로나 대출금 상환 유예가 9월에 종료되면서 금융 부실 사태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에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부실에 따른 2금융권 유동성 위기까지, 위기의 신호들이 쌓였다.
∎코로나 대출 만기 ‘빚 폭탄’
코로나 당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지원했던 대출금의 만기 연장·상환 유예 조치가 9월로 끝나 ‘빚 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정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만기 연장·상환 유예 조치 연착륙 지원 방안’에 따라 대출 만기를 최대 2025년 9월까지 연장할 수 있어 현시점에 상환 만기가 몰릴 가능성은 적다. 또 상환 유예 대출은 최장 5년간 원금 분할 상환이 가능하고 일부 자체 상환으로 대출 잔액도 꾸준히 줄고 있어 상환 만기 도래에 따른 충격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금융 당국의 설명이다. 그러나 경기회복 속도가 예상보다 더딘 상황에서 원금 상환 유예를 받은 자영업자들이 원금 상환을 감당할 여력이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갚기 어려운 이자 상환 유예 자영업들의 경우 부실 위험이 크다. 소상공인 자영업자 등 개인사업자의 연체율이나 채무 상환 포기가 상승하고 있는 것도 연착륙에 대한 불안감을 키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저축은행의 개인사업자 연체율은 6.35%로 지난해 말 3.31%에서 배 가까이 급등했다.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전국 법원에 접수된 개인회생 사건은 7만 575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2.9%나 늘었다.
∎저축은행 유동성 위기 현실화하나
9월 위기설의 또 다른 진원지인 저축은행 업황을 놓고도 금융 당국과 시장 전망이 엇갈린다. 금융감독원은 하반기에는 저축은행의 영업 환경이 개선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저축은행에 유동성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신용평가사의 경고가 나오는 등 시장 전망은 밝지 않다. 9월 위기설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다. 고금리 여파 속에 2금융권에서 돈을 많이 빌리는 영세 자영업자의 대출이 코로나 대출 지원 종료와 맞물려 금융 위기의 뇌관이 될 수 있다. 또 부동산 PF 부실이 언제든 2금융권을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상호금융조합(농협·수협·신협·산림조합)의 연체율은 지난 6월 말 2.8%를 기록해 지난해 말(1.52%)보다 1.28%포인트 늘었다. 그나마 새마을금고 연체율은 제외된 수치다. 저축은행 연체율은 6월 말 기준 5.33%로 지난해 말(3.41%) 대비 1.92%포인트 올랐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저축은행은 올해 평균 총자산이익률(ROA)이 마이너스로 전환하는 등 수익성이 크게 악화했다. 기준 금리 상승 여파로 이자 비용이 늘어나고 부동산 PF 우려에 따라 대손충당금을 늘린 영향인데 경기 상황이 더 악화하면 유동성 위기에 몰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내년이 더 어렵다
금융가에는 예고된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9월 위기설도 당장 현실화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 시장의 대체적 컨센서스다. 최근 한국과의 연례협의에 나선 헤럴드 핑거 IMF 단장은 “한국은 강력하고 건전한 펀더멘털을 가지고 있다”며 “나름의 취약성도 있지만 한국에 금융위기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10월부터 경제지표가 개선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상저하고’의 올해 우리 경제 전망을 유지했다. 그러나 최근의 각종 경제지표는 정부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전 세계 경기침체 우려와 소비 둔화로 반도체 회복세가 늦춰지면서 제조업 생산은 11개월 연속 감소했고 수출도 11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 중이다. 그나마 기댈 곳은 국내 소비뿐인데 가계 부채는 쌓이고 고물가에 올해 상반기 실질임금은 통계가 작성된 2011년 이후 처음으로 줄었다. 한마디로 쓸 돈이 없다는 이야기다. IMF도 9월 위기설에 대해서는 일축하면서도 하반기 기대보다 회복세가 더딜 수 있고 부동산 위기로 인한 중국 경기침체 여파가 내년도 한국 경제에 추가적 하방 압력을 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결국 9월 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 상황에 따른 우리 경제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낙관적 전망만 외칠 게 아니라 비상한 각오로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최근 정치권이 온 힘을 쏟아붓고 있는 이념 논쟁, 역사 논쟁이 한가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2023-09-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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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도심 비키니 차림, 유죄? 무죄?
해수욕장 또는 수영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비키니 차림이 도시 한복판까지 진출했다. 유달리 무더운 올여름에는 비키니 차림을 한 이들이 도심 공공장소에 자주 등장해 화제가 됐다. 비키니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타거나 킥보드를 타며 당당하게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냈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역시 찬반으로 크게 갈린다.
아마 올여름은 대놓고 등장한 도심 비키니 차림을 두고 본격적인 논쟁이 불붙은 해로 기억될 듯하다. 올해를 기점으로 내년에는 비키니 차림의 모습이 더 자주 도심에 나타나지 않을까 여겨진다.
■ 전국 도시를 누빈 비키니 차림
작년 7월 말 상의를 벗은 남성이 뒷자리에 비키니 차림의 여성을 태우고 서울 강남 일대를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했다. 이 광경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국으로 퍼졌고, 한동안 국민적인 화제가 됐다. 당시 ‘논란(노이즈) 마케팅’을 통한 잡지 홍보 효과를 노린 소행으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두 사람 모두 과다노출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송치됐다.
그런데 올여름에는 비키니 차림을 한 채 오토바이나 킥보드를 타는 ‘비키니 라이딩’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여러 번 목격됐다. 부산에서는 지난 19일 수영구 남천동 일대에서 비키니 차림의 여성을 태운 넉 대의 오토바이 행렬이 목격됐으며, 18일에는 대구 중구 반월당역 인근에서도 비키니 차림의 여성을 태운 오토바이가 다수 발견됐다. 며칠 앞서 서울에선 강남구 테헤란로 일대에서 역시 비키니 차림을 한 여성을 태운 오토바이가 나타났고, 홍대 거리 일대에는 비키니 차림으로 킥보드를 타며 거리를 활보한 여성들도 있었다.
도심에서 비키니 차림을 한 여성들을 목격하는 일이 훨씬 잦아진 것이다. 당사자들이 별다른 거리낌 없이 기존 사회 통념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점이 많이 달라졌다.
■ 과다노출 규제, 합의 쉽지 않아
비키니 차림의 도심 질주나 활보에 대한 의견은 찬반으로 크게 갈린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엉덩이 등의 지나친 노출로 타인에게 불쾌감을 준다고 지적한다. 많은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공공장소에서 과다노출은 책임과 배려가 없는 행동, 타인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일탈로 제재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반면, 노출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으로 법적인 제재는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다. 비키니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탔던 이들은 부산 해운대와 대구 동성로에서 ‘당당하게 벗은 내가 문제냐? 불편하게 보는 니가 문제냐?’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비키니 차림을 옹호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면 공공장소에서 과다노출은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커 보인다. 우리 법률 체계도 공공장소에서 과다노출에 대해 경범죄 처벌법, 형법 등 3겹의 관련 조항을 두고 있다. 하지만 노출을 단속하는 측면에선 점점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추세다. 예전에는 여성의 가슴 노출이나 속이 비치는 시스루 의상도 규제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완화된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은 예전과 달리 동시대를 살고 있더라도 세대나 사회 통념, 개인 가치관에 따라 노출을 대하는 편차가 매우 커 전 세대와 사회를 아우르는 합의 도출이 쉽지 않다. 결국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개인과 도시 공간의 관점, 고민 필요
비키니 차림과 같은 도심 과다노출은 앞으로 더욱 사회적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과다노출을 규제하는 법률이 있다 해도, 이를 판단하는 개인의 주관적 성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개방 사회의 추세에 따라 이와 유사한 사례는 더 빈번해지고 다양해질 것이다.
과다노출의 쟁점은 노출 부위가 얼마나 타인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주는가’로 집약된다. 말은 간단하지만, 개인 가치관과 사회 통념의 변화에 따른 주관적 편차가 매우 넓다. 개인주의의 보편화로 이 편차는 더 벌어졌으면 벌어졌지, 줄어들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과다노출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 사회의 공공질서 유지가 맞물린 문제다. 여기다 앞으로 도시의 공간문화를 어떻게 가꿔 나가야 할 것인지에 관한 정책적 함의도 포함돼 있다. 단칼로 매듭을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만큼 개인과 미래 도시 공간문화의 관점에서도 논의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8-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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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통일, 아직도 우리의 소원일까
■“통일 관련 국민 인식 변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지난 13일 ‘국민 통일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올해 6월 9~11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였는데, 그 결과가 꽤 흥미롭다. 핵심 질문은 ‘남한과 북한의 미래상 중 어떤 게 가장 바람직하겠냐’는 것이었다.
여러 선택사항 중 가장 많은 응답은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2국가’였다. 응답자의 52%가 이를 지목했다. 민간인 교류가 거의 불가능한 ‘지금과 같은 2국가’를 택한 사람도 7.9%였다. ‘1국가 2체제’를 선택한 사람은 9.8%였다. 그에 비해 ‘단일국가’가 바람직하다고 응답한 사람은 28.5%에 그쳤다. 요컨대 단일국가로의 통일보다는 남과 북이 별도의 국체를 유지하자는 응답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73.4%가 동의한 반면 필요하지 않다는 답은 25.4%에 그쳤다. 국민 대다수는 남북의 통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현실에서의 통일에는 회의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통일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결과”라고 분석했는데, 도대체 그 무엇이 있어 이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됐을까.
■역대 정권의 통일론은 허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던 세대는 중·노년이 된 지 오래다. 분단 이전 ‘하나의 국가’를 경험한 이들 중 많은 이가 유명을 달리했고, 의식적으로든 의무적으로든 남북은 하나라는 생각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옅어졌다. 지금 ‘MZ’로 불리는 세대에게 통일이 갖는 의미가 기성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형편에 통일에 대해 헌법적 가치(제4조에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한다’고 명시)니 국시(國是)니 아무리 강조해도 듣는 이에 따라서는 비현실적인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의 역대 정권에서 진행된 통일 논의 자체가 가식이었다고 의심하는 이도 많다. 겉으로만 통일을 외쳤지 속으로는 정권 유지를 위해 분단 현실의 고착화를 도모하거나 강화하지 않았냐는 의심이다. 통일의 구호가 권력의 쟁취나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소비됐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의심이 전적으로 허황하다고만은 볼 수 없을 듯하다. 분단 직후 남은 ‘수복’ 북은 ‘해방’을 기치로 내걸고 각각 통일을 주창했다.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벌일 정도로 통일에 모든 것을 걸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당시 극심한 냉전의 국제질서에 편승해 자기들만의 권력 체계를 공고히 했을 뿐이었다. 이후 국제질서가 탈냉전 쪽으로 흐르자 유화적인 방안이 쏟아졌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허상에 그쳤다. 박정희 정권의 ‘7.4 남북공동성명’, 전두환 정권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노태우 정권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 김영삼 정권의 ‘3단계 통일방안’, 김대중 정권의 ‘6·15 남북공동선언’, 노무현 정권의 ‘10·4 선언’ 때마다 금방이라도 통일이 이뤄질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켰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뒤를 이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권 때도 통일이라는 지향점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상대 인정하지 않는 남과 북
사정은 근래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이는 지난 3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윤석열 정부는 종전선언을 절대로 추진하지 않는다”고 밝힌 데서 엿볼 수 있다. 종전선언은 평화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정전체제를 종식시킴으로써 남북간 교류의 물꼬를 공식적으로 트자는 의미인데, 김 장관은 적극 거부했다. 이는 김 장관 개인의 의지에 그치지 않는다. 김 장관에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6월 28일 한국자유총연맹 창립 기념식에서 “반국가 세력들이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비난했다.
김 장관이나 윤 대통령 모두 겉으로는 통일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 장관은 과거 북한 체제 붕괴와 한반도 핵무장을 주장했던 인물이고,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줄곧 ‘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를 고집한다. 두 사람에게 지금의 북한 체제는 대화 상대가 아니라 깨부숴야 하는 악의 축이다.
북의 김정은 정권도 그런 측면에선 다르지 않다. 남과의 대화는 단절했고, 습관처럼 되뇌던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뿐인가.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 등 무력 도발을 반복하며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결국 남이나 북이나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도 정작 발걸음은 통일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평화 해치는 통일은 거부한다?
국민 절반 이상이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2국가’를 남북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상으로 꼽았음은 이런 사정들을 고려할 경우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해진다. 현재 전혀 다른 국체로 있는 남과 북을 억지로 하나의 국체로 합치는 데에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한편, 나아가 이제는 통일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지난 70여 년 간 이어진 갖가지 통일론은 지금껏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통일은커녕 하늘에선 핵미사일이, 바다에선 핵항모가 등장해 서로를 괴멸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통일의 실효성과 실현성에 의문을 갖는 게 당연하고, 그래서 대다수 국민은 “차라리 따로 살자. 대신 서로 인사는 하면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남북의 역대 정권이 ‘강요’했을 수도 있는 통일 논의, 특히 평화를 해치는 통일 논의는 거부한다는 집단 의사 표현일 수도 있다.
죽어도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사이좋게 따로 살 것인가, 지금 우리 민족에게 거대한 화두가 던져져 있는 셈이다. 참고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같은 설문에서 북한이 ‘적대·경계 대상’이라는 응답은 42.1%였고 ‘협력·지원 대상’이라는 응답은 47.1%였다.
2023-08-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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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대 국적선사 HMM 새 주인 찾기… 순항할까?
우리나라 최대 국적선사인 HMM(옛 현대상선)이 해운·물류업계를 비롯한 경제계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최근 HMM이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 회사 최대 주주인 한국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는 지난달 20일 HMM 매각 공고를 내고 본격적인 매각 절차에 들어갔다. 이른바 ‘HMM 민영화’ 작업이다. HMM 매각 주관사인 삼성증권은 오는 21일까지 예비입찰 신청을 접수한 뒤 적격 인수 후보를 추려 본입찰을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 세계 해운업계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특수로 인한 대호황이 끝나고 침체 국면을 맞고 있다. 또한 세계 최대 해운동맹인 ‘2M’의 ‘2025년 해체’라는 큰 변곡점에 직면했다. 2M을 이루는 세계 1, 2위 해운사인 스위스 MSC와 덴마크 머스크가 각자도생을 위해 2년 뒤 결별하기로 결정해 세계 유수 선사들 간 전략적 이합집산과 함께 새로운 해운동맹의 탄생도 예상된다. 글로벌 해운 경기가 침체하고 해운업의 지각변동이 예고된 가운데 HMM의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 추진되는 매각의 순항 여부가 주목된다.
■한진해운 파산
HMM이 국내 최대 선사로 발전한 것은 한진해운의 퇴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7년 2월 국내 1위, 세계 7위의 국적선사였던 한진해운이 파산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 최대 규모 선사들과의 치열한 경쟁과 누적된 적자, 기업주의 도덕적 해이 등으로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해서다. 이 때문에 국가 기간산업인 해운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크게 약화돼 해상 운송을 통한 수출입으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는 물류대란에 시달리는 등 큰 충격을 받으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한진해운이 40년에 걸쳐 전 세계에 구축한 해양영토인 촘촘한 바닷길이 하루아침에 퇴출과 동시에 없어진 탓이다. 이에 자국 해운산업의 중요성을 절감한 우리 정부는 같은 해 4월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을 수립·발표한 데 이어 2018년 7월 실질적 정책 수행 기관인 한국해양진흥공사를 설립한다.
한국해양진흥공사가 지난 5년간 국내 해운업 정상화를 위해 쏟아부은 예산은 무려 8조 9507억 원. 해운업의 가치를 간과해 한진해운 위기 사태에 적절히 선제 대응하지 못한 대가는 이같이 막대했다. 아무튼 그동안 국내 120개의 크고 작은 선사가 한국해양진흥공사의 지원을 받았다. 최대 수혜 업체는 2019년 2만 3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 2020년 1만 6000TEU급 대형 컨테이너선 8척 확보 등에 금융 지원을 받은 HMM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HMM을 국내 1위, 세계 8위의 선사로 키우느라 수혈한 공적자금을 포함한 지원 금액은 모두 3조 원이 넘는다. HMM을 앞세운 한국 해운산업은 국가의 대규모 지원·투자에 힘입어 선복량(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총량) 등 국제 경쟁력을 한진해운 퇴출 이전 수준 가까이 회복할 수 있었다.
■급성장한 HMM
HMM은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선 시절이던 2011년부터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려 왔다. 글로벌 금융 위기에 따른 세계 해운업계 변화와 컨테이너선의 초대형화 추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까닭이다. 하지만 HMM은 정부에 미운 털이 박혔던 한진해운과 달리 위기가 닥칠 때마다 국가와 채권단의 지원이 이뤄져 살아남았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찾아온 국제 물동량 증가, 해운 운임 급등 등의 대호황을 누리며 황금기를 맞았다. 2019년 영업손실이 2996억 원에 달했던 HMM은 2020년 영업이익 9810억 원을 기록하며 10년 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이듬해에는 7조 3775억 원이나 되는 영업이익을 올리고 지난해에도 영업이익 9조 9515억 원의 호실적을 거뒀다. HMM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국내 기업 중 최대치다. 회사 역사상 최대 규모인 눈부신 실적으로 10년 불황을 한방에 털어 냈을 정도다.
HMM은 해운 재건 정책의 지원 덕분에 신규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대거 확보해 선복량을 크게 늘리면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 HMM은 선복량이 2010년 33만 7407TEU에서 최근 82만TEU로 급증해 세계 8위 선사로 도약했다. 호실적과 급성장에 고무된 HMM은 선복량을 오는 2026년 120만TEU까지 늘려 굴지의 글로벌 선사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다시 찾아온 글로벌 해운업 불황에 따라 국내외 선사들의 실적 하락이 우려되는 상태에서 HMM의 중장기 발전을 위한 경영 전략이 잘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HMM 민영화
정부는 HMM의 경영 정상화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로 구성된 채권단을 통해 정책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는 지원 부분에 대한 출자 전환을 통해 HMM의 1, 2대 주주가 됐다. 두 기관이 보유한 지분은 각각 20.69%, 19.96%다. 산업은행이 금융위원회, 한국해양진흥공사는 해양수산부 산하 공공기관인 점을 고려하면 HMM은 사실상 국유화된 셈이다. HMM이 세계 10위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선 선진국인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해 온 K해운을 대표하는 대형 선사가 된 만큼 새 주인을 찾는 민영화 추진에 많은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HMM 매각 작업은 2016년 최대 주주인 산업은행이 이 선사를 현대그룹한테서 넘겨받은 지 7년 만이다. 정부와 산업은행이 HMM 매각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건 부실했던 이 회사가 장기간에 걸친 체질 개선 노력 끝에 정상 기업으로 거듭났다는 판단이 확실하게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매각을 위한 입찰 대상은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의 합산 지분 40.65%다. HMM 보통주 1억 9879만 156주와 CB(영구전환사채)·BW(신주인수권부사채) 전환분 2억 주다. 이를 지난 7일 증시의 HMM 주가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6조 9429억 원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매각 대상 주식의 시가와 경영권 프리미엄 등을 감안할 경우 매각가는 적어도 6조 원대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인수 관심 기업
최소 6조 원대로 예상되는 ‘쩐의 전쟁’에서 HMM을 인수할 승자는 누가 될까? 지난해 여러 차례 HMM 매각설이 시기의 적정성 논란을 빚으며 나돌 때만 해도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글로비스, 포스코, CJ그룹, LX그룹의 LX판토스 등 굵직한 재벌 기업의 이름이 인수 후보로 거론됐다. 당초 HMM의 엄청난 몸값 때문에 인수전은 풍부한 현금을 갖춘 대기업들의 대결이 될 것으로 점쳐졌던 게다. 그러나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인수 의사를 밝힌 곳은 SM상선을 보유한 SM그룹과 하림그룹, 동원그룹 등 중견 대기업뿐이다. 의류 수출업체인 글로벌세아도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올 들어 글로벌 해운 경기 침체 여파로 HMM의 실적과 주가가 동반 하락한 데다 향후 해운업의 불확실성마저 커지면서 HMM 인수전은 생각보다 미지근한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풀이된다.
인수 의향이 있는 SM·하림·동원그룹은 각각 해운업이나 물류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HMM의 경영권을 획득한다면 기존 사업을 더 키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세 기업은 M&A로 사업을 확대하며 사세를 키운 공통점도 갖고 있다. 하림그룹은 2015년 국내 최대 벌크선 운송사 팬오션을 인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SM그룹이 현재 HMM의 지분 6.56%를 가진 3대 주주라는 점에서 인수를 원하기보다는 보유 주식의 주가를 방어할 목적도 있어 보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SM그룹이 HMM 인수 자금으로 책정한 4조 5000억 원은 HMM 매각 예상가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게 이러한 의견이 나온 배경이다.
■바람직한 매각은
현재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면 정부의 HMM 매각이 순항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세계 해운업이 침체로 돌아서고 올해부터 HMM의 실적도 하락하고 있어 선사의 가치와 매력도가 떨어질 수 있는 시기여서다. HMM 인수 예비입찰까지 아직 기간이 남아 있어 재벌 기업의 참여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인수 의지를 드러낸 몇몇 기업의 자금 동원 능력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렇다고 충분한 인수 자금 확보를 위해 사모펀드 등 재무적 투자자(FI)와 손을 잡는 방법은 국민의 혈세가 투입돼 회생한 HMM의 경영 정상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HMM을 성공적으로 인수하더라도 자칫 ‘승자의 저주’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승자의 저주란 M&A 경쟁에서 이겼으나 과도한 비용이나 대가를 치르는 바람에 인수 기업이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을 말한다. 매출 정점을 찍고 몸값이 최대로 높아진 선사를 무리해서 인수했는데, 해운업계 불황으로 실적 악화가 이어진다면 뒷감당이 힘들 수밖에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할 테다.
이처럼 우려스러운 조건 속에서도 산업은행은 HMM 매각을 성사시키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산업은행이 그간 주도해 온 기업 구조조정 대부분이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따라서 HMM 매각마저 차질을 빚거나 무산된다면 국책은행의 책임을 비난하는 여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이 같은 이유로 해운 업황이 좋고 HMM의 기업 가치가 높게 평가됐던 지난해에 매각을 추진해 최대 이익을 실현하지 않은 걸 아쉬워하는 시각이 있다.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매각 이익의 극대화에 치중하는 건 지양해야 마땅하다. HMM 매각은 단순히 한 기업을 팔아 치우는 일이 아니고, 한국 해운업의 흥망은 물론 나라 경제와 관련된 중차대한 사안이다. 정부가 HMM에 공적자금을 대대적으로 지원한 목적도 회사를 비싸게 팔아 차익을 많이 남기는 게 아니라 국가와 우리 기업들을 위한 글로벌 국적선사를 육성하는 데 있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이달 5일 김인현 고려대 교수의 해상법연구센터 강연회에서 유창근 전 현대상선 사장이 강조한 말을 매각 과정에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해운업에 대한 전문성과 애정을 가진 이가 HMM을 인수해야 회사를 키워 나가며 기간산업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HMM은 앞으로 해운업의 불확실한 업황, 2M 동맹 해체에 따른 새로운 경쟁 체제 등 만만치 않은 글로벌 해운업계의 풍랑을 잘 헤쳐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HMM에게 좋은 주인을 찾아 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2023-08-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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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삼풍’ 악몽 소환한 ‘순살 아파트’ 공포
‘순살 아파트’ 공포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LH) 발주 아파트 중 지하 주차장을 철근 없는 기둥으로 만든 아파트 15개 단지가 공개됐다. 부산·경남에서는 양산 사송단지 2곳이 포함됐다. 그 충격파는 이제 민간 아파트로 이동 중이다. 정부는 이른바 ‘무량판 구조’로 지은 전국 293개 아파트 단지로 안전 점검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부산을 포함한 민간 아파트 상당수는 주거동까지 무량판 공법을 적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무량판 구조는 1995년 붕괴한 삼풍백화점이 채택한 공법이다. 그래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다. ‘삼풍’과 ‘무량판’, 이 조합의 소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무량판 공법이 뭐길래
무량판 공법은 ‘대들보(梁)를 쓰지 않는다(無)’는 그 이름에서 의미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수평구조 부재인 보 없이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수직재의 기둥에 슬래브가 바로 연결되는 방식이다. 슬래브는 기둥 상판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말한다.
무량판 구조는 벽식 구조(슬래브+벽체)나 라멘 구조(슬래브+보+기둥)와 달리 벽이나 보를 설치하는 공간이 없어도 된다. 그래서 실내를 넓게 활용하고 층고도 줄일 수 있다. 층간소음이 줄어드는 이점도 있다. 무엇보다 공사 기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크다.
하지만 기둥 주위로 전달되는 하중이 커서 균열에 취약한 만큼 안전성 강화는 필수적이다. 슬래브에는 가로로 길게 철근이 들어가는데 이를 수직 철강으로 보강해야 한다. 주로 기둥 상판 부근에 보강하는 철근을 전단보강근(剪斷補强筋)이라고 한다. ‘전단’은 위에서 누르는 힘과 밑에서 올리는 힘이 부딪혀 어긋나는 것을 뜻한다. 순수한 무량판 구조로는 건축허가 자체가 나질 않는다. 철근 보강은 구조 기준에 명시된 사항이다. 그런데 이번에 드러난 ‘순살 아파트’는 어찌 된 일인지 전단보강근이 필요한 만큼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연결 부위를 제대로 보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뚫림 전단(punching shear)’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중이 실린 천장이 그대로 구멍(기둥)을 뚫듯이 내려앉는 걸 말한다. 층이 높은 건물이라면 최악의 경우 상층부부터 차례로 아래층까지 떨어져 연쇄 붕괴할 위험성이 높다. 마치 떡시루처럼 겹겹이 쌓인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삼풍백화점 붕괴다.
■ 되살아나는 ‘삼풍’ 트라우마
6월 29일은 건국 이래 최대 참사로 기록된 삼풍백화점 붕괴 28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사고 당시 건물 전체가 내려앉은 처참한 광경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약 1500명의 사상자 중 사망자 수 502명은 전 세계 건물 붕괴 사고 가운데 11위 기록이다. 부실 설계와 시공, 무리한 증축과 불법 확장, 인허가 관청의 부정부패, 건설업계의 비리, 경영진의 안일한 대응 등 총체적 과실의 결정판. 한국인에게는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은 참사다.
여기에는 삼풍백화점에 적용된 무량판 공법의 부실도 한몫했다. 설계대로라면 기둥과 천장 사이에 하중 전달을 보조하는 지판이 하나 더 설치돼 기둥 철근과 수평 철근이 잘 연결됐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판 두께가 불충분했다. 일부 기둥은 아예 지판 자체가 없어 기둥과 천장의 철근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상판의 수평 철근 끝부분도 ㄴ자의 갈고리 형태로 시공돼 상판 침하에 따른 연쇄 붕괴를 막는 제동장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모양이 아니라 그냥 평평했다.
이마저도 모자랐던 걸까. 기둥들은 설계상의 지름보다 크기가 25%나 줄었고, 어떤 것은 아예 용도 폐기되기까지 했다. 사고 당시 5층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는 데 단 5분밖에 걸리지 않은 건 그런 이유다.
참사 이후로 무량판 공법은 상가나 전시 건물 말고는 별로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대 중반부터 공사비 절감과 내부 공간 활용이라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아파트 단지의 지하 주차장을 중심으로 다시 채택되기 시작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무량판 구조를 주거동에도 적용하는 아파트가 늘어났다고 한다. 내부 리모델링이 어려운 벽식 아파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7년 이후 준공된 전국 민간 아파트 중 무량판 구조를 채택한 단지는 모두 293곳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105개 단지는 공사가 끝나지 않았고 188개 단지는 이미 입주를 마친 상태다. 일부는 지하 주차장뿐 아니라 주거동에도 무량판 구조를 채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 4월 인천 검단 아파트 지하 주차장 붕괴 사고는 무량판 공법에 전단보강근이 누락된 경우이고, 2022년 1월 외벽이 붕괴한 광주 화정 아이파크는 주거동에 무량판 구조를 채택했던 곳이다. 그 이전의 사례도 적지 않은데, 그동안 위험의 징조는 꾸준히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 ‘천민자본주의’ 그늘 언제까지…
국토부가 지난달 31일 아파트 철근 누락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내용은 충격적이다. △구조 계산을 잘못하거나 아예 누락한 경우 △제대로 구조 계산을 해 설계에 반영했지만 시공 과정에서 전단보강근이 빠진 경우 △설계 도면을 잘못 그리거나 다른 층의 엉뚱한 도면으로 시공하는 경우 등등. 최근 잇따르는 언론 보도를 보면, 실제 공사 현장에서 철근을 빼돌려 이익을 남기는 공공연한 관행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쏟아지는 현장의 관련 증언과 보도는 사람들의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물론 무량판 공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정밀한 설계와 철저한 시공을 거쳐야 하는데, 실수든 의도든 그냥 지나치는 관행이 쌓이고 쌓인 게 문제다. 무량판 공법과 관련해서 지금 현장의 전문성은 전반적으로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설사와 감리사의 상호 검증 장치가 부실했고 정부의 관리·감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전 세계에 ‘천민자본주의’의 오명을 남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바뀐 건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수십 년간 제기된 설계의 재하도급, 시공 과정에서의 다단계 하도급, LH 출신의 전관예우, 이로 인한 설계·감리 부실, 묵인·짬짜미 의혹 등 여전히 무수한 비리와 불법이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정부와 기업 모두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정부가 건설 전반의 모든 문제점들을 파악해 제대로 된 종합대책을 내놔야 한다. 어째서 '순살 아파트'가 ‘프리패스’ 사용 승인을 받을 수 있었나. 철저하게 조사하고 그 책임을 묻지 않으면 100년이 지나도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낼 수 없을 것이다.
2023-08-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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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日 ‘더 데이스’, 한국 원전은 얼마나 다를까?
<이 기사에는 넷플릭스 ‘더 데이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 ‘더 데이스’(8부작)가 국내에 공개됐다. ‘더 데이스’는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7일간의 이야기다. 사고 당시 후쿠시마 제1원전 소장 요시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요시다 조서’와 도쿄전력이 발표한 사고 보고서, 가도타 류쇼가 쓴 ‘죽음의 문턱을 본 남자’를 토대로 정부 관료와 도쿄전력 직원, 원전 직원 등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의 진실에 접근한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위기에 직면했다. 원전 전력이 끊기면서 핵연료를 식히지 못해 폭발로 이어졌고, 다량의 방사능이 누출됐다. 당시 후쿠시마 원전 관련 사망자는 3500여 명, 피난민은 16만 4000명이 발생했다.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피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는 사고 당시 우왕좌왕하던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 소위 원전 전문가들의 무능함과 은폐, 책임 회피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이를 통해 과연 한국은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준비되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드라마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지진과 쓰나미에서 시작했지만, 사람이 키운 피해”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초동 대처에 미흡했고, 일본 사회의 ‘낙하산 인사’와 ‘학벌’ ‘안전의 외주화’ ‘원전 마피아’ ‘관료주의’ 등이 사고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미처 드러내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일본 언론의 각종 기사와 간 나오토 전 총리의 회고록 등 관련 서적, 보고서 등을 종합해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본다.
■낙하산 인사와 비전문성
드라마에서 국가 멸망의 와중에도 원전 고위직을 차지한 관련 비전문가와 일본의 관료주의가 전문적 판단을 하지 못해 타이밍을 놓치는 상황이 수시로 묘사된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원자력 안전을 책임지는 원자력안전보안원 데라사카 원장이다. 데라사카 원장은 총리의 질문에 기초적인 내용조차 대답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한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간 총리가 데라사카 원장에게 “당신, 원자력 전문가요?”라고 묻는다. 대답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였다.
최고학부인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경제산업성 엘리트 공무원 출신인 그는 사고 직전까지 경제산업성에서 슈퍼마켓 등 유통업계를 관장하는 상무유통심의관을 맡았다. 경제산업성 산하 조직인 보안원에서 낙하산으로 원장직을 맡은 상태였다. 원전 사고 당시, 일본 총리에게 기술적 설명을 해야 하는 원자력 행정의 최고 대표가 원자로 시스템에 문외한이었다. 인사 난맥으로 원전 안전 관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일본의 어두운 그림자를 여실히 보여 준다.
■무책임한 일본 원전 학계
드라마에서는 관저와 대책본부, 후쿠시마로 가는 총리 헬기 안에서도 학자나 행정 관료, 도쿄전력 직원 등 원자력 전문가들은 무엇 하나 확신을 갖고 책임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모두 머리를 숙이고 관련 서류를 뒤적거리기 바쁘다. 드라마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속셈과 뼈에 새겨진 관료주의, 매뉴얼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일본의 무능력함이 사고의 핵심이라는 것을 은유한다.
마다라메 원자력안전위원장이 대표적이다. 1970년 도쿄대학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도시바 기술자, 도쿄대 원자력안전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그는 2010년 4월 위원장에 취임했다. 위원장은 총리의 자문역으로 일본 원자력계 최고의 실무자이자 학계 최고봉이다. 간 총리는 후쿠시마 현지 시찰에도 동행했던 마다라메 위원장에게 “폭발할 위험성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마다라메 위원장은 “벤트 작업으로 수소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면 거기에는 산소가 있어서 연소 반응이 일어납니다만, 그건 굴뚝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폭발할 우려는 없다”라고 수차례 단언했다.
하지만, 1호기가 폭발했다는 소식에도, 마다라메 위원장은 “휘발성 물질일 겁니다"하고 대답한 뒤 TV에서 폭발 장면이 나오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아차!’ 하는 신음을 내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당시 총리 집무실에서 일본 원자력 최고 전문가의 그 모습을 목격한 모든 사람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는 주민 대피 회의에서도 “담당 부서가 아니다”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학계 전문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도쿄전력 원전마피아 내부의 갈등
도쿄대 공학부 출신 이른바 원전 엘리트들이 원전 입지 계획을 세우고 도시바나 히타치 등 제조업체들과 작업 방식을 협의한다. 주로 관리자로 경력을 이어 가면서 현장의 일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도쿄 본사에서 사고 수습을 지휘하면서 생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도쿄전력 내부의 이론파와 현장파의 갈등도 한 몫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다.
드라마에서 도쿄전력 본사에서 지휘하는 무토 부사장이 그런 인물이다. 그는 도쿄공대 출신으로, 학회나 업체와는 학연으로 연결된 엘리트였다. 원자력계획부 부부장과 원자연료사이클 부장을 역임하는 등 발전소 현장보다 본사 근무 경력이 훨씬 많다. 2002년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후쿠시마 제1, 2원전과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등이 장기간에 걸쳐 데이터를 고치고, 은폐한 사실이 적발돼 고참들이 대거 은퇴하면서 급부상한 인물이다.
무토 부사장이 이론파라면, 요시다 마사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소장은 2011년 3월 11일 이전에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이다. 도쿄공업대학 기계물리학과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원자핵공학을 공부한 후 1980년 도쿄전력에 입사했다. 사고 10개월 전인 2010년 소장으로 취임했다. 1999년부터 3년간 후쿠시마 제2원전 발전부장을 역임하고 2005~2007년에는 후쿠시마 유닛 소장으로 일하는 등 현지 고졸 사원이나 협력 회사 하청업체 직원들을 지휘하는 현장파였다. 드라마에서는 내부 정치에 강한 이론파 무토 부사장과 현장파 요시다 소장의 갈등이 결국 도쿄전력 내부에서 후쿠시마 사고를 해결하는 암초로 작용했다.
■관료보다 더 관료적인 도쿄전력
도쿄전력 원자력 부문은 원전마피아라고 부를 정도로 다른 집단과 교류를 극도로 꺼리는 조직이다. 또한, 도쿄전력 기업 문화는 상명하복의 조직문화와 윗사람 눈치 보기로 일관해 위기 상황에서 대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든 조직이었다.
드라마에서 도쿄전력 연락책으로 관저에 파견된 다케쿠로 고문은 정치가들에게 얼굴이 알려진 인물로 원전 현장 전문가의 면목은 없었다. 그는 도쿄전력 부사장을 거쳐 해외 원전 수출 계획을 짜는 국제원자력개발 사장을 역임했지만, 발전소 실무경험이 빈약해 총리 관저에서 사고 상황 자문과 수습에 제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더 문제는 도쿄전력의 불투명성이다. 도쿄전력의 사고 은폐는 관행적이었다. 2002년, 2007년 원전 사고 은폐가 사회적 문제가 됐다. 또한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인근 조에쓰 앞바다에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는 단층에 대한 조사(2003년) 결과 길이 20km가 넘는 활단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7~8km에 이르는 단층이지만 활단층은 아니다”라면서 사고 당시까지도 계속 감추면서 방파제 추가 건설 등의 보완 공사를 하지 않았다.
■‘미사일에도 끄떡없다’는 면진중요동 파손
드라마에서 지진 이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현장 지휘는 극심한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건설된 건물인 면진중요동에서 이뤄졌다. 요시다 소장과 본사 비상재해대책실과의 화상회의가 24시간 여기서 열렸다. 면진중요동은 니가타현 조에쓰 지진(2007년) 경험을 참고해 진도 7 이상에도 견딜 수 있도록 2010년 건설됐다. 도쿄전력 측은 “미사일에 맞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라고 홍보할 정도였다. 화상회의 시스템과 가스터빈 자가발전기, 활성탄필터 환기장치가 설치됐다. 이중 출입구가 설치돼 오염된 바깥 공기가 직접 들어오지 않는 설비였다. 지진으로 사무용 본관이 쑥대밭이 되면서 면진중요동은 사고대책본부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원전 수소폭발로 면진중요동 유리창과 문 입구가 깨지고, 찌그러지면서 방사성 물질이 마구 들어왔다. 틈새를 테이프로 막고, 문을 다시 세우는 장면이 드라마에서 여실히 보였다. 간신히 복구한 덕분에 요시다 소장은 면진중요동에서 현장을 지휘했다. 한국의 경우 이런 사태에 대비한 시설이 어떻게 준비됐는지 궁금한 장면이다.
■하청에 의존하는 안전의 외주화
8회 ‘일본 붕괴의 시나리오’에서 요시다 소장은 원자로 냉각용 급수가 힘들어지자 하청업체인 일본원자력경비서비스 고참 직원을 긴급히 찾아 ‘소방차 탱크에 물을 공급하는 방법’을 전화로 문의한다. 하청업체 직원은 “절차가 꽤 복잡하다.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 작업은 불가능하다. 처음 하는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전화를 끊고 얼마 뒤 그 직원은 갑자기 대책본부에 나타나 “아마추어 같은 사원분들께 맡길 수 없다”면서 죽어도 죄책감을 갖지 말아 달라면서 현장으로 향한다. 원전의 핵심 운영 및 정비 기능 대부분이 하청업체에 맡겨져 있는 것을 시사한다.
도쿄전력 기술의 원천은 하청기업의 능력을 언제든 끌어내는 데 기반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을 ‘전화 엔지니어링’이라고 부른다. 하청회사를 돈을 주고 고용해, 전화로 지시해 일을 시키는 방식이다. 원자력 안전 기술이 모두 도쿄전력에 있는 듯 보이지만, 스스로 체득하거나 생산한 기술이 아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소방차를 다룰 수 있거나 중장비를 쓸 줄 아는 사람도 하청업체 직원이어서 위기 상황에서 사원처럼 지휘하거나 명령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고 당시 도쿄전력의 오퍼레이터 50명 가운데 13명은 도시바 사원으로 집계됐고, 3호기 수소폭발 직후 현장에 출동한 직원 상당수도 협력업체 직원이었다. 실제로 후쿠시마 사태를 본 미국 원전 안전 전문가들은 “거의 (하청업체에) 통째로 맡긴다” “안전도 하청을 주고 있다”라며 놀랄 정도였다.
■임시 보관 중인 사용후 핵연료의 위험성
쓰나미로 외부 전력이 끊어지면서, 후쿠시마 원전 4호기 사용후 핵연료 수조 냉각펌프 기능이 마비됐다. 해수와 담수 유입 등으로 논란을 빚는 사이, 통상 40도를 유지하는 수조 수온이 84도로 급상승했고, 15일 오전 6시 폭발했다. 사용후 핵연료라도 붕괴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계속 냉각시켜야만 한다. 당시 4호기는 정기 점검 중이어서 가동하고 있지 않았다. 원자로 안에 있던 핵연료는 모두 들어내, 건물 위쪽 사용후 핵연료 수조에 보관된 상태였다. 4호기의 수조에 들어 있는 세슘137의 양은 약 3700만 퀴리. 체르노빌 사고에서 방출된 양의 약 16배다.
문제는 일반 원자로의 핵연료는 압력·격납용기, 콘크리트 차폐벽 등 여러 방어 장치 아래에 보호되지만, 사용후 핵연료는 격납용기 바깥에 저장한 상태였다. 폭발로 건물 벽이 파손되면서 당시 한국 TV 뉴스에서도 보도된 4호기 옥상 모습에서 수조가 보일 정도였다.
더욱 큰 문제는 3호기. 3호기는 플루서멀(Plu-thermal) 발전이었다. 플루서멀 발전은 우라늄을 원료로 쓰는 일반 원전과 달리, 사용후 핵연료로부터 원자로 안에서 발생한 플루토늄을 재처리해 꺼내고 그 플루토늄을 우라늄에 섞어 만든 MOX 연료(mixed oxide fuel: 혼합산화물핵연료)를 사용한다. 강력한 폭발로 건물 상부 콘크리트가 무너지고, 철골도 꺾이면서 사용후 핵연료 수조가 외부로 드러났다. 수조 물이 증발하면 대량의 고농도 방사성물질이 대기로 퍼질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후쿠시마 사고는 사용후 핵연료 임시 보관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사고 당시에도 수조에서 냉각수가 없어지면 연료가 붕괴하고 열이 발생해, 용융이나 2차 발열이 일어날 수 있다. 연료를 덮는 지르코늄 합금 피복이나 튜브가 발화해, 수백 km 떨어진 곳에 방사성 물질이 쌓여 일본 동북부 지방을 초토화하는 사태가 예견될 정도였다. 임시 저장시설에 보관된 사용후 핵연료는 안전한 보관이란 조건 자체가 불가능한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국의 임시 저장시설에 보관된 사용후 핵연료의 안위가 걱정될 따름이다.
■미국 전문가 총리 관저 상주
미국 정부는 사고 발생 5일 뒤부터 일본 체류 미국인들에게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80km 바깥으로 대피하도록 지시했다. 일본 정부가 아직 원전에서 20km 권역 내의 주민에게만 피난 지시를 내린 시점이었다. 미군은 당시 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를 후쿠시마 제1원전 상공으로 띄워 원자로 온도가 비정상으로 높은 상태라는 걸 확인한 뒤였다. 미국도 압력용기와 격납용기가 없는 곳에 노출된 4호기 사용후 핵연료 수조 문제를 극도로 염려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자국민 대피 권고 발령과 함께 미·일 협의체를 제안했다. 미국은 일본이 “뭔가를 숨기고 있고,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의심했다. 이후 일본은 미국 정부 측 전문가를 총리 관저에 상주시키는 것을 허락했다. 향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태에서도 외국 정부 전문가들이 후쿠시마 현장과 도쿄전력 본사에 연락관 형태로 파견할 수 있는 전례를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주민의 피해와 일본 정부의 은폐
드라마에서는 후쿠시마 주민의 방사능 피폭과 피해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2회차 ‘피난할 필요는 없다’에서 에다노 관방장관은 언론 기자회견에서 “피난은 필요 없다”고 말한 뒤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거주자들은 대피하라”고 말을 바꾸면서 소극적인 대피 지시로 일관한다. 그는 방출되는 방사성물질의 영향도 경미하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당시 총리 관저에는 방사능 오염 확산을 예측하는 시뮬레이션 지도가 이미 보고됐다. 문부과학성 관할 재단법인 원자력안전기술센터가 운용하는 ‘긴급시 신속 방사능 영향 예측 시스템(SPEEDI: System for Prediction of Environmental Emergency Dose Information)이 작성한 것이었다. ‘스피디’는 6시간 뒤까지 풍속·풍향을 예측해서 방사성 물질이 대기에 확산되는 상황을 알기 쉽게 지도에 표시한다.
스피디 예측 결과 방사성 물질이 바다 쪽이 아니라 내륙 북서쪽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매우 중요한 데이터였지만 간 총리를 비롯한 관저에 있던 고위 간부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거나 혹은 전달 사실 자체가 은폐된 것으로 짐작된다. 84번에 걸친 스피디 시뮬레이션 결과는 아사히신문사의 시사주간지 아에라(AERA)에서 사고 17일 뒤에 ‘국민들에게 데이터 은폐’란 제목으로 폭로됐다.
일본 정부가 스피디 시뮬레이션 결과를 주민 대피 결정에 활용했다면, 후쿠시마 제1원전 주변의 주민들이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당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다. 당시 보안원 간부는 이에 대해 “생각이 짧았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관료주의와 무책임에 병든 늙은 일본의 모습에 화가 날 정도이다.
■‘더 데이스’가 한국에 말하는 이야기
더 데이스는 8회로 끝났지만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드라마를 제작한 마스모토 PD는 “12년 전 일어났던 사고가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한다. 요시다 소장은 드라마 말미에 원전 사고를 회고하면서 “인간은 자연 앞에서 무력하다”고 이야기하지만, 드라마는 분명히 원전을 둘러싼 인간의 무능과 조직 부패가 증폭시킨 인재라는 점으로 읽힐 뿐이다. ‘더 데이스’가 보여 주듯, 현재진행형인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단지 오염수 방류 논란에 그치지 않고, 향후 수십~수백년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등 주변 국가들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본 뒤의 솔직한 소감은 “한국은 일본과 얼마나 다른가”였다.
2023-07-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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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재난문자 좀 스마트해질 수 없나[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에 집중호우가 예고됐던 18일 시민들에게 재난문자가 빗발쳤다. 행정안전부는 물론이고 부산시와 일선 구‧군에서 반복적으로 재난문자를 보내 하루에만 20여 건이 쏟아졌다. 앞서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장마철 집중호우로 인명 피해가 속출하자 전국 지자체에 공문을 통해 집중호우 예보 시 과할 정도로 재난문자를 발송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이날 부산에 지역에 따라 시간당 최고 50㎜ 안팎의 집중호우가 예보되자 행안부는 물론이고 지자체가 앞다퉈 재난문자를 발송한 것이다. 집중호우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정부와 지자체가 예고된 위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구체성 없고 반복적인 재난문자가 오히려 시민들의 재난에 대한 경각심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급격한 기후와 사회 변화로 각종 재난 상황이 잦아지면서 재난문자를 둘러싼 논란도 뜨거워지고 있다.
∎2016년 경주 지진 후 지자체 확대
재난문자는 재난 상황을 국민에게 알려 주기 위해 발송되는 문자 서비스로, 2005년 5월 15일부터 시작됐다. 경중에 따라 위급재난문자, 긴급재난문자, 안전안내문자로 나뉜다. 위급재난문자는 전시 상황, 공습경보, 규모 6.0 이상의 지진 등 국가적 위기 상황일 때 60㏈의 경보음과 함께 송출된다. 긴급재난문자의 경우 태풍 화재 등 자연‧사회 재난 발생 시 재난 지역 주변에 위험을 알리기 위한 송출이고 40㏈의 경보음이 울린다. 안전안내문자는 위급과 긴급을 제외한 일반적 재난 경보와 주의보 상황에서 일반 문자 수신음과 함께 보낸다. 긴급과 안전안내문자는 차단할 수 있지만 위급은 차단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재난문자 사용이 확대된 건 2016년 경주 지진 이후다. 당시 지진 발생 후 9분이 지나서야 재난문자가 발송돼 사후약방문이란 비판을 받은 후 지자체로 송출 권한을 확대했다.
∎천편일률적 내용 경각심 저하
지자체로 발송 권한이 확대되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재난문자는 급증했다. 재난문자 서비스 시작 이후 2019년까지 연평균 414건에 그쳤던 문자 발송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동안 연평균 5만 4402건으로 131배 폭증했다. 과도하게 반복되는 재난문자로 피로감을 호소하는 반응도 잇따랐다. 행정안전부는 과도한 재난문자가 오히려 경각심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에 따라 상황에 맞는 송출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지자 과도할 정도의 선제 대응 개념으로 재난문자도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내용이 ‘집중호우 예상 침수 위험지역 통행 자제’ ‘산사태 위험지역 접근 금지’ 등 원론적 내용들이 반복적으로 발송되다 보니 오히려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부산경찰청의 실종자 문자까지 섞였다. 인터넷이나 SNS상에도 ‘짜증모드 안전안내문자’ ‘안전문자 엄청 오네요 전쟁난 줄’ 등 냉소적 반응도 나온다. 일상에 방해된다며 재난문자 알림 설정을 꺼 놓는 사람도 많다. ‘안전안내문자’를 검색하면 ‘안전안내문자 차단’이 바로 따라 나올 정도다. 이 같은 지적을 의식해 18일 집중호우 때는 시와 구‧군의 재난문자가 ‘동천 수위 상승 통행 자제’ ‘우장춘 지하차도 통제’ 등 좀 구체화하기는 했다. 전문가들은 재난문자가 남발될 경우 국민들 사이에선 재난문자가 긴급하지 않다는 학습 효과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작 재난 현장에서는 실효성 없어
재난문자는 정작 참사 현장에서는 사전 예방 기능이 없었다. 산사태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경북 예천에서도 피해 발생 전 예천군에서 ‘우리 지역 호우주의보 발효 중’이라는 재난문자를 1건 발송했지만 원론적 문구로는 참사 예방에 한계가 있었다. 인명 피해가 발생한 후에야 17건의 재난문자를 쏟아냈지만 결국 12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되는 참사를 막지 못했다. 14명의 목숨을 앗아간 청주 오송지하차도 참사의 경우도 해당 지하차도에 대한 차량 통행금지 등 구체적 재난문자는 사고 2시간이 넘어서야 발송됐다. 2020년 발생한 초량지하차도 참사의 경우도 1시간 후에야 재난문자가 나갔다. 이번 집중호우에 발생한 학장천 사고 전에도 구체적 재난 경고는 없었다.
∎오보·오발송 ‘양치기 문자’ 논란
5월 23일에는 서울시가 경계경보 발령을 알리는 위급재난문자를 오발송해 논란이 됐다. 행정안전부가 북한의 우주발사체 발사에 대응해 백령도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했는데 서울시가 이를 오독해 공습경보 사이렌과 함께 위급재난문자를 날린 것이다. 행정안전부에서 서울시 공습경보가 오발령임을 알리는 재난문자를 다시 발송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오발령도 문제지만 앞뒤 없는 문자 내용으로 인해 논란이 확대됐다. ‘오전 6시 32분 서울 전역에 공습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재난문자는 무엇 때문에 어디로 대피하라는 건지 오히려 시민들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기상청은 올해 장마철을 앞두고 극한 호우 시 직접 재난문자를 발송한다는 계획하에 6월 15일부터 수도권 시범실시에 들어갔다. 기상청은 7월 12일 서울에 극한 호우 상황이 발생하자 언론에 재난문자 발송 사실을 알렸지만 동 코드를 잘못 입력해 문자가 발송되지 않는가 하면 엉뚱한 지역에 잘못 문자가 발송되기도 하는 등 문제점을 드러냈다. 결국 이 같은 재난문자에 대한 안이한 대응이 불신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극한 기후 뉴노멀 맞춤형 대응 필요
극한 기후와 사회 현상으로 재난 대응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져 재난문자를 보다 실효성 있게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문구와 횟수 등에 대한 정확한 효과 분석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명확한 지침을 만들 필요가 있다. 나아가 재난문자의 현장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도 고민해야 한다. 오송지하차도의 경우 참사 1시간 전에 지하차도를 통제해야 한다는 112신고가 있었는데 이럴 때 현장 출동과 함께 재난문자를 발송할 수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또 자치단체마다 CCTV가 그물망처럼 갖춰져 있는데 CCTV 상황실과 연계해 실시간으로 위험을 알릴 수는 없느냐는 생각이다. 또 인공지능(AI) 시대에 재난 매뉴얼이 첨단 기능을 활용하지 못 한다는 지적도 있다. 부산시에서 한때 빅데이터 분석에 기반한 재난 대응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원론적 문자가 아니라 정말 필요한 동이나 마을 단위 특정 지역에 특정한 위험을 알리는 재난문자로 구체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누차 있어 왔다. 재난문자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분명하지만 뉴노멀 시대에 얼마나 효과적이고 스마트하게 갈 수 있느냐를 정부와 지자체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2023-07-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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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후쿠시마 오염수 피해, 日에 배상 요구 안 하나
■안전하다? 아니다? 도대체 뭔가
“오염수를 안전하게 처리해 방류하면 후쿠시마산 수산물도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지난 4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국제기준에 부합한다’는 보고서를 일본 정부에 전달한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나흘 뒤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한 말이다.
그런데 박구연 국무1차장이 그로시 사무총장의 발언은 후쿠시마 인근 해역에 있는 어류 등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주장과는 다르다는 설명을 10일 내놓았다. 그러면서 “일본 측이 오염수를 방류하려는 장소가 후쿠시마 바다일 뿐, IAEA 평가 대상은 방류 계획상 오염수의 안전성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후쿠시마산 수산물이 안전하다는 건지 아닌지, 일반인들로서는 금방 이해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박 차장의 설명은 대중의 불안심리를 눅이기보다는 오히려 부채질한 측면이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여부나 오염수의 안전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미 수산물 소비가 급격히 줄며 어업인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시중 횟집에선 찬바람이 불고, 양식 어민들은 재고 처리를 못해 발만 구르고 있다. 오염수는 아직 방류도 안 됐는데 어업인들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국 피해자 지원에 적극적인 일본
일본 어업인들의 사정은 우리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진 않을 터. 일본 정부와 후쿠시마 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이 자국민을 달래려는 시도는 오래됐다. 도쿄전력은 오염수 방류로 인한 일본 국민 개별 피해에 대해 직접 배상에 나섰다. 그 범위가 어업에서 농업, 수산도매업, 관광업에 이르기까지 넓다.
일본 정부는 피해 대책을 위해 막대한 기금을 확보했다. 그 규모가 우리 돈으로 작게는 7500억 원 크게는 1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기금의 상당 부분은 새로운 어장을 개척하고 어업 인력을 양성하는 등 일본 수산업의 황폐화를 막는 데 사용된다. 그와는 별도로, 우리로선 특별히 주목되는 부분인데, 이른바 ‘풍평 피해’에도 기금을 활용해 지원한다. 피해를 입은 어민들로부터 생선을 대신 구입하거나 보관 경비를 지원하거나 판로 따위를 주선하는 식이다.
풍평(風評)은 말 그대로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이다. 풍평 피해는 그런 막연한 소문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다. 오염수 안전에 대한 진실을 헛소문이라는 뉘앙스로 호도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여하튼 불안심리에 따른 간접적인 피해도 구제한다는 의미가 담긴 조치임은 분명하다. 풍평 피해는 지금 우리 어업인들이 처한 현실에 적용하기에 딱 맞는 말이라고 하겠다.
■원인 제공 일본에 배상 요구해야
우리 정부의 어업인 피해 대응은 미온적이다. 특별한 대책은 없고, 단지 수산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기존 사업의 예산을 약간 늘리는 수준이다. 피해를 호소하는 어업인들로서는 섭섭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에 따른 피해를 우리 정부가 배상하거나 지원하는 게 옳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원인은 일본이 제공하는데 우리가 그 부담을 안는 건 온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로선 일본에 배상을 요구해야 하는데, 지금 그런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철저한 수산물 안전관리’라는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우리 어업인들에게 이미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는 만큼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나 도쿄전력을 향해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제법학자인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최근 한 언론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투기는 국제법(국제해양법, 런던협정, 핵안전협정)을 명백히 위반하여 일본의 국제책임이 성립된다. 일본은 손해배상 등 국제책임 해제조치를 해야 한다”며 “하지만 우리 정부와 여당은 일본에 지금까지 항의나 질의 하나 하지 않고 있다”라고 탄식한 게 그 예다.
■결국은 우리 정부 의지가 중요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는 시도가 있기는 했다. 2021년 5월 한림수협 등 제주지역 어업인들이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을 상대로 제주지법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실패했다. 제주지법은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으로 이송했고, 서울중앙지법은 심리 없이 이를 각하했다. 각하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외국의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소송을 진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당시 소송은 배상 자체보다는 오염수 방류를 막기 위한 선언적 의미로 진행돼 사전 준비가 미흡했던 측면이 있다. 오염수 방류와 우리 어업인 피해의 인과관계 증명이나 객관적인 피해금액 산정 등 향후 엄밀한 법적 보완을 거치면 실질적인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특정 국가의 주권 행위라도 중대한 불법 행위에는 피해 당사국이 재판권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소송 준비를 개인이나 민간에 맡겨 두지 말고 우리 정부가 주도해 진행하면 더 효과적일 테다. 이와는 별도로 소송이 아닌 정부 차원의 교섭과 조율을 통해 피해 구제를 모색하는 방법도 있다.
중요한 건 우리 정부의 의지다. 오염수가 방류되더라도 안전하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지금도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방류될 오염수는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자국민에게 오염수 방류로 입게 될 실질 피해는 물론 풍평 피해에도 배상과 지원을 약속했다. 순전히 일본의 잘못으로 애꿎게 피해를 입는 우리 어업인들이다. 우리 국민을 보호해야 할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2023-07-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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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프리미엄 햄버거 시장 '불타오르네'
햄버거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 같은 존재다. 그렇다고 햄버거가 값싼 정크 푸드(쓰레기 음식)라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이다. 최근 프리미엄 수제 버거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햄버거 한 개 가격이 3만 원대라면 그 비싼 걸 누가 사 먹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햄버거 하나 먹자고 매장이 문을 열자마자 뛰어가 구매하는 '오픈런'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뜨거운 프리미엄 햄버거 시장을 주목하고, 혹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 헉! 햄버거 한 개에 14만 원
지난 4일 주문 마감 시간 직전인 오후 6시 50분에 '고든 램지 버거'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고든 램지가 직접 맞이하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든 램지 본인은 아니고 영상인데 아주 그럴듯했다. 유감스럽게도 대기인 수가 많아 더 이상 대기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든 램지가 누구냐고?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셰프다. '헬스키친(Hell's Kitchen)'에 나와 입에 'Fuck'을 달고 사는 욕 잘하는 그 분. 고든 램지 버거는 그가 운영하는 프리미엄 수제 햄버거 전문 매장이다. 지난해 1월 서울 롯데월드몰의 아시아 최초 매장에 이어 지난달 29일 해운대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지하 1층에 개장한 것이다. 이번에 문을 연 센텀시티점은 영국 1개, 미국 2개에 이은 전 세계 5번째 매장이라고 한다.
매장 면적 338㎡(102평)에 100여 석 규모인데도 빈자리가 없으니 눈으로 구경할 수밖에 없다. 요트에서 영감을 받아 매장 인테리어를 진행했다더니 뭔가 모르게 배에 올라탄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햄버거 단품 가격이 2만 7000~3만 3000원이다. 한우 '1++' 등급 패티를 사용해 14만 원이나 하는 국내에서 가장 비싼 '1966 버거'도 있다. 고든 램지 버거는 모든 메뉴에 냉장 보관하는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단다. 그래서 "재료들이 신선해 재료 본연의 맛도 느낄 수 있지만, 그 조화가 좋았다"는 후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고든 램지 버거 측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산으로 오게 된 것은 잠실에 매장을 열었을 때 가장 많이 온 고객들을 살펴보니 부산지역 분들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추가로 고든 램지 버거를 국내에 오픈할 계획은 없다"라고 말했다. 부산에 프리미엄 햄버거 수요가 상당하다는 이야기다.
■ 쉐이크쉑 뒤를 따르는 파이브 가이즈
지난 4월에는 미국 3대 버거 중 하나인 '쉐이크쉑 버거'의 부산 두 번째 매장이 신세계 센텀시티몰에 들어섰다. 한국에서 쉐이크쉑 버거가 얼마나 장사가 잘 되는지 보여 주는 사례는 많다. 쉐이크쉑은 2016년 국내에 진출한 이후 7년 만에 전국에 매장을 25개로 늘렸다. 2017년에는 쉐이크쉑 한국 매장이 개점 7개월 만에 전 세계 매출 1위를 찍어 버리기도 했다. 당시 강남점은 하루 평균 3000~3500개의 버거가 판매되어 전 세계 120여 개 매장 중 단일 매장 기준으로 매출 1위를 기록했다. 청담점 역시 매출이 3위권 안에 든단다.
역시 미국 3대 버거 중 하나인 '파이브 가이즈'는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구에 국내 첫 매장을 열었다. 파이브 가이즈가 한국에 상륙했다는 소식에 소셜미디어(SNS)는 난리가 났다. 개장 당일에는 문을 열기도 전에 수백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중고거래 플랫폼에 판매글까지 올라왔다. 파이브 가이즈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삼남인 한화갤러리아 김동선 전략본부장이 도입을 주도했다. 먹방 유튜버로 이름난 쯔양은 한자리에서 파이브 가이즈 버거 8개를 먹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이브 가이즈는 전국 주요 지역에 25개 매장을 열어 대중성까지 갖춘 프리미엄 버거 쉐이크쉑의 뒤를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프랜차이즈 햄버거 시장 규모는 2018년 2조 9000억 원, 2019년 3조 250억 원, 2020년 3조 1160억 원, 2021년 3조 4670억 원, 지난해 3조 7640억 원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 고등어 버거 만들어 주세요
고든 램지 버거를 먹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해운대 웨스틴 조선호텔의 오킴스로 향했다. 2005년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 당시 투숙했던 미국 부시 대통령이 먹은 햄버거가 있는 곳이다. 부시가 호텔 측에 햄버거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당시 총주방장이 주변 아이디어를 모아 특별한 햄버거를 만들었다고 한다. 부시가 맛있다고 칭찬한 햄버거는 '미스터 프레지던트 버거'라는 메뉴로 지금까지 남았다. 2016년에는 '해운대 명물 프레지던트 버거'가 부산시가 주최한 '부산음식 스토리텔링'에서 최고상을 받기도 했다. 역시나 고급 수제 버거답게 고소한 고기 패티의 맛이 아주 훌륭했다.
사실 미국 대통령과 햄버거는 인연이 깊다. 파이브 가이즈는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갑자기 방문해서 직접 햄버거를 사 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본 방문 중에 아베 일본 총리와 골프장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이 햄버거를 만든 '먼치스 버거'에는 '트럼프 버거'라는 메뉴가 만들어져 지금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월 백악관 인근 햄버거 가게로 직접 전화를 걸어 햄버거를 주문하는 영상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프레지던트 버거도 너무 좋은 스토리를 갖췄다. 게다가 내년에는 부산에 '미쉐린 가이드'가 선정하는 미쉐린 레스토랑이 생긴다고 한다. 프레지던트 버거, 부산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좀 더 활성화할 수는 없을까.
부산의 햄버거 관련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부산의 시어인 고등어를 이용한 햄버거 만들기 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1989년 9월 21일 자 <부산일보>에는 고등어와 정어리를 사용해 버거 형태로 만드는 기술이 개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수산식품연구소의 이응호 교수가 대형선망수협의 용역을 받아 고등어 버거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내용이다. 고등어 고기 85%와 돼지고기 15%를 합쳐서 패티를 만드는 방식이다. 대형선망수협은 1989년에는 고등어 버거 만드는 레시피 등을 수록한 고등어·정어리 요리집을 펴냈다. 하지만 부산 시내에서 고등어 버거를 파는 곳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제주도에 '정체불명'이란 상호로 고등어 버거를 파는 집이 나올 뿐이다. 고등어 버거를 어떻게 먹느냐고? 터키 이스탄불에 가면 꼭 먹어야 할 음식으로 고등어 샌드위치가 꼽힌다. 부산 명물 고등어 버거의 등장도 기대해 본다.
글·사진=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7-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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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아가야, 이 땅에 태어난 죄(?)로…
최근 경기도 수원시의 한 아파트 냉장고에서 수년째 방치됐던 영아 시신 2구가 발견되면서 온 국민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미 세 자녀를 두고 있던 30대 친모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또 연이어 출산하게 되자 이런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경찰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초저출생 시대에 충격적인 ‘영아 살해’ 사건이 발생하자, 전국에서 이를 막기 위한 제도적 보완책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이참에 영아 불법 입양,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 후 극단적 선택까지 망라해 영유아와 아동 보호를 위한 종합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 살해·불법 입양 대상 ‘유령 아기’
이번 영아 살해 사건은 처음부터 경찰에 의해 밝혀진 게 아니다. 감사원이 보건복지부를 정기감사한 것이 실마리가 됐다. 병원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있는데 출생신고는 되지 않은 무적자(無籍者)가 2015년부터 작년까지 8년간 2236명에 달한다는 감사 결과가 그 시작이었다. 이 중 1%인 23명을 표본조사한 결과, 수원의 사례를 포함해 총 3명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고, 1명은 베이비박스에 유기됐다는 것이다.
23명의 표본조사만 해도 이처럼 온 국민이 충격을 받을 정도인데, 앞으로 나머지 전원을 조사한 결과는 어떨지 벌써 두렵다. 여기다 병원 외에서 출산한 경우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나라 출생신고 시스템이 아우르지 못한 영아는 더 많을 것이다. 어쨌든 이미 표본조사만으로 큰 충격을 준 이상 정부는 철저한 조사로 현황을 파악해야 한다.
수원 사건이 충격적이지만, 냉장고의 영아 시신 유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부산에서도 2017년 6월 30대 여성이 2014년, 2016년에 각각 출산한 아기의 시신을 동거남의 집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체포됐다. 2006년 7월엔 서울 서래마을에 살던 프랑스 여성이 2002년, 2003년 각각 출산한 아기 2명을 살해한 뒤 자택 냉동고에 보관해 오다 적발되기도 했다.
이번처럼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영아는 다른 한편 불법 입양의 대상으로 선호된다. 특히 영아 입양을 원하는 입장에선 출생신고가 안 된 아이가 제도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아 인기라고 한다. 카카오톡 공개 채팅방이나 인터넷 등에는 이처럼 법원 허가를 거쳐야 하는 정식 입양을 피해 불법 입양을 문의하는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정식 절차를 회피하려는 이런 불법 입양은 당연히 파악조차 하기 어렵다. 2020년 1월부터 작년 9월까지 출생 미등록 상태로 사회복지시설에 입소한 아동이 269명이라는 보건복지부의 조사와 영아 유기가 매년 100~180건에 달한다는 경찰의 추산을 감안하면 매년 불법 입양되는 영아도 상당할 것으로 추측된다.
■ 부모에 의한 극단 선택의 희생도
미성년 자녀와 함께 죽음을 꾀하는 일명 ‘가족 동반자살’은 요즘 ‘자녀 살해 후 극단 선택’이라는 용어로 바꿔 부르는 추세다. 어린 자녀의 생존권을 부모가 마음대로 박탈하는 살인 행위라는 점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당시 부모가 처했던 상황과는 관계없이 부모에 의한 명백한 범죄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영아 살해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역시 매년 증가 추세라고 한다. 물론 정부나 복지 기관 등의 공식적인 집계는 없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부모가 자녀 살해 후 자신도 삶을 마감하는 사례는 2020년 12건, 2021년 14건이라고 한다. 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00년부터 20년간 가족살인 범죄 보도를 분석한 결과, 부모의 극단 선택 전 살해로 숨진 자녀는 알려진 것만 175명이었다고 한다.
언론 보도나 경찰 수사로 알려지지 않은 피해 아동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인 아동과 이후 피해 방지를 위한 정부나 사회의 관심은 대부분 사건 발생 초기에만 반짝할 뿐, 장기적인 제도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 종합적인 보호시스템 절실
수원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유령 아기를 출산 단계부터 막기 위한 여러 논의를 진행 중이다. 의료기관이 신생아 출생 사실을 지자체에 통보해 출생신고 누락 자체를 막는 출생통보제의 도입은 전반적으로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반면, 산모가 익명으로도 출산할 수 있도록 하는 보호출산제에 대해선 아직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어쨌든 정부와 국회가 영아 보호를 위한 보완책 마련에 나선 만큼 곧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일단 단기 처방은 그렇게 하더라도, 지금부터는 영유아 정책에 관한 전반적인 점검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출생 단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양육까지도 포함하는 종합적인 영유아 보호시스템을 고려해 볼 때가 됐다. 영아 살해와 불법 입양, 자녀 살해 후 극단 선택은 사실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의 심각한 인구 문제를 고려하면 출생과 양육 환경의 개선을 더는 개인의 영역에만 맡겨 두기가 어렵게 됐다. 이는 공적 기관의 역할 강화가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국가가 사회안전망 차원에서 책임감을 갖고 종합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외국도 마찬가지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새롭게 변하고 있는 가족의 개념과 구성 등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7-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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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해사법원 부산 설립 불 지필 때다
요즘 인천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24시간 내외국인들로 붐비는 대한민국 관문인 인천국제공항 얘기가 아니다. 이달 5일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청이 공식 출범과 동시에 인천에 개설된 데 이어 13일 인천에서 ‘해사(海事)전문법원 인천 설치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서명운동은 인천시가 인천상의, 인천지방변호사회, 인천지방법무사회, 인천항발전협의회 등으로 구성된 ‘해사법원 인천 유치 범시민운동본부’와 함께 추진하는 일로, 인천 시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인천시는 오는 11월까지 시민은 물론 국민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한편 7월 집중 서명 기간을 운영해 100만 명 목표를 앞당겨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인천의 이 같은 움직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후보 시절 서울에서 해사법원 설립을 사법 분야 공약의 하나로 발표한 데 기인한다. 이에 따라 인천이 해사법원을 유치해 도시 발전을 가속화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서울에서의 대선공약 발표보다 앞선 대선 운동 기간에 부산에서 공개한 11대 부산공약집에 ‘해사법원 부산 설립’을 아예 명시한 바 있다. 이는 해사법원 부산 설립이 오래전 부산에서 필요성을 제기한 뒤 줄기차게 요구해 온, 부산 시민의 숙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의 간절한 바람이나 인천의 서명운동과 달리 현재 해사법원 신설을 위한 논의는 여야 정치권의 극심한 정쟁에 밀려 표류하는 모양새다. 부산이 주도적으로 논의의 불씨를 되살리면서 부산 유치에 절대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해사법원 꼭 필요한 이유
해사법원은 국내외 바다를 매개로 발생하는 각종 사건과 법적 다툼 등 해사사건을 전담해 처리하는 전문 법원을 말한다. 국내에서 일어난 선박 충돌사고나 선원법, 해상보험 관련 사건의 경우 수요가 있는 서울고법과 서울중앙지법, 부산지법 등 4곳의 민사법원 내 해사사건 전담재판부에서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접근이 쉽지 않은 해상이라는 특수성이 있는 데다 판사들의 전문 지식과 사건 처리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처리가 지연되거나 분쟁 당사자들의 불만을 사기 일쑤다. 담당 재판부 법관들이 일반 사건을 같이 맡고 2~3년마다 보직이 바뀌는 상태에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해사사건의 신속하고 명쾌한 처리에 역부족인 게다.
이 때문에 국내 선사와 기업 상당수는 해사 분쟁이 생기면 빠른 해결을 위해 영국과 싱가포르, 홍콩 등 해양 선진국의 전문 중재소나 해사법원에 의존하고 있다. 외국 기업과 얽힌 해사사건이 증가하는 가운데 사건 내용도 해상 운송 계약과 선박 건조 약정, 해양 규제 위반 등으로 다양화되고 복잡다단해진 것도 한 이유다. 외국 재판에 맡긴 해사사건은 통상 1건당 소송 비용이 10억여 원이나 된다. 이 바람에 매년 해외로 빠져나가는 돈이 3000억~5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엄청난 국부 유출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세계 1위, 선복량 세계 5위, 무역 세계 7위 등 세계 10위권의 해양강국이면서도 정작 해사법원이 없는 우리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닌 셈이다.
■국내외 설립 추진 움직임
국내에 해사법원이 설립된다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지식산업 시장이 열리고 한국 법률 시장의 외연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해사법원 도입은 수요가 큰 해운업을 포함한 해양수산 관련 다양한 산업과 관련 서비스 업종의 발전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몇 년 전에 해안 지역 도시에 10여 개의 해사법원과 30여 개의 지원을 설치해 연 1조 원 이상 규모의 해양지식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이유다. 중국은 근래 세계 유명 판사 영입, 믿을 수 있는 판결 등을 국내외에 홍보하며 아시아 해사법률 서비스 시장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법조계에서도 해사법원 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 소속 사법정책연구원은 2021년 발간한 <해사법원 설치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해사법원 설치를 위한 정책적 기반을 제시했다. 이어 지난해 1월 법원행정처가 합의부 2개, 단독부 4개 등의 해사법원을 설치하는 의견을 국회에 보내기도 했다. 부산은 훨씬 일찍이 해사법원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부산에서는 2011년부터 법조계와 해양수산 업계,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해운 서비스업의 발전과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해사법원을 설립하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함께 지난해 기준 세계 7위의 컨테이너 물동량, 세계 2위 환적화물 처리 실적을 기록한 부산항을 가진 글로벌 해운·항만·물류 중심도시인 부산에 해사법원을 설치해 국가균형발전을 꾀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논의 중단 속 유치는 4파전
10여 년에 걸친 부산의 끊임없는 해사법원 설치 여론에 지역 국회의원들이 압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지난 20대 국회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김영춘·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유기준 등 부산 출신 두 의원이 해사법원 신설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회 임기가 만료되는 바람에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현 21대 국회에서도 국민의힘 안병길(부산 서동구) 의원이 해사법원 부산 설치 등의 내용을 담은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해 놓고 있다. 또한 같은 당의 윤상현(인천 동미추홀을)·배준영(인천 중강화옹진) 의원과 장동혁(충남 보령서천) 의원, 민주당 이수진(서울 동작을) 의원이 각각 발의한 해사법원 신설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들 법안은 발의 의원들의 지역구가 있는 도시에 해사법원을 두기로 해 문제가 있다. 법안별로 부산과 인천, 세종(장동혁 의원 법안), 서울 등 4곳이다. 해사법원 유치 4파전인 셈이다. 네 지역 간 유치 경쟁은 해사법원 설립 논의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해사법원 신설 문제가 유치 신경전이 치열한 탓에 대화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여야가 다른 사안들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하며 다투기에 바쁜 것도 한 원인이다. 이러다 해사법원 관련 법안은 임기가 겨우 9개월가량 남은 21대 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천의 경우 부산항에 이어 국내 2위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는 인천항, 국제 항공화물 세계 2위이며 국제 여객 세계 5위인 인천공항, 해양경찰청,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 아태지역사무소 등의 소재지란 점을 강조하며 해사법원 유치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인천이 서울과의 접근성이 뛰어나고 우리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가깝다는 걸 장점으로 내세운다. 서명운동은 향후 해사법원 설립 논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서울에서는 해사 분쟁이 많은 해운회사와 화주 기업, 보험사의 본사 대부분이 있고 변호사도 많은 서울에 해사법원을 두는 게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또 본원은 서울에 설치하고, 부산 등지에는 지원을 설치하자는 입장이다. 세종은 정부세종청사에 있는 해양수산부 등 해양정책 기관과의 연계성과 전국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이미 확보된 법조청사 부지를 고려할 때 해사법원의 적합지라는 것이다.
■최적지 부산, 선택 아닌 필연
인천, 서울, 세종 3개 도시의 주장은 저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해사법원 신설과 부산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공을 들인 세계적 해양도시 부산에 비하면 타당성이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바다와 연관된 해사사건을 전담할 전문 법원을 세종과 서울 같은 내륙 지역에 설치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인천이나 서울에 해사법원을 두는 것 역시 국가경쟁력을 떨어트리는 주범으로 지적되는 수도권 비대화를 심화할 뿐 지역균형발전에 역행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300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로 대구(235만 명)를 제친 데 이어 부산(331만 명)까지 위협하는 국내 제3 도시로 올라선 인천은 해사법원이 아니라 고등법원 설치가 더 시급한 실정이다. 인천은 인구 규모에 맞지 않게 별도의 고법이 없어 서울고법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불편이 크다. 해사법원은 부산에 양보하고 인천고법 설치 운동에 주력하는 게 맞다.
이에 반해 부산에 해사법원이 있어야만 하는 절박함과 부산이 최적지인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부산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수출입 화물 99%를 수송하는 해운의 물동량 가운데 무려 75%를 책임진 굴지의 글로벌 해양도시다. 해양사고를 담당하는 해양안전심판원을 비롯해 전국 해양수산 관련 기관단체의 70%가 집중된 부산은 조선업과 조선기자재 및 해양플랜트 산업이 발달한 이웃 울산·경남권까지 감안하면 ‘해양수산 수도’라고 불러도 될 테다. 해양레포츠와 해양관광 분야마저 급성장 중인 부산에 국내 첫 해사법원이 들어서야 할 필요성은 불문가지라고 하겠다. 증가 추세인 해사사건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선 최적의 환경과 인프라를 갖춘 부산에 해사법원을 설치해야 마땅하다. 윤 대통령이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해사법원 부산 설립을 공약한 이유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는 부산이 주도적으로 나서 해사법원 부산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논의의 불씨를 되살리고, 부산이 가진 수많은 당위성을 적극 알려 나가야 할 것이다. 올 들어 부산에서는 2030부산월드엑스포(국제박람회) 유치전에 총력을 쏟으면서 해사법원 문제를 등한시한 측면이 있다. 인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이 앞장서고 전 시민과 각계각층이 뭉쳐 가라앉은 해사법원 부산 유치 열기를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 이미 발의된 관련 법안들은 여야 간 정쟁 지속과 내년 4월 10일 22대 총선에 대한 관심에 밀려 이번 국회에서도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대통령이 부산 시민에게 약속한 대선공약을 빠르게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요구된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당정 협의를 통해 해사법원 설립 문제를 상의함으로써 여당이 국회 논의를 조속히 구체화하도록 만들 일이다. 해사법원 설치의 주체인 대법원도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부산·인천 간 유치 경쟁이 치열해질 경우 부산 본원, 인천 분원 체제 도입을 검토할 만하다. 세계 주요국 해사법원과 경쟁할 수 있는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해사법원 신설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2023-06-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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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범죄자 신상 공개, 어디까지?
‘부산 돌려차기 사건’ 2심 선고를 계기로 범죄자 신상 공개 문제가 핫이슈로 떠오른 요즘이다. 국민 눈높이와 법 감정에 맞게 강력 범죄의 신상 공개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뜨겁다. 대통령이 나서서 확대 방안을 지시했고 피해자 측도 헌법소원을 예고한 마당이다. 하지만 무죄 추정이라는 기본 원칙과 인권 보호 측면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신상 공개, 어디까지 해야 할까.
■ 현행법 맹점들 수두룩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귀가하던 여성을 따라가 무차별 폭행을 가해 의식을 잃게 한 뒤 성폭행까지 시도한 중범죄 사안이다. 12일 부산고법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이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신상 공개의 제도적 허점이 드러났다는 데 있다. 신상 공개는 경찰과 검찰 조사를 받는 ‘피의자’ 단계에서는 가능하지만 재판에 넘겨진 뒤 ‘피고인’이 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핵심이다.
현재 피의자 단계에서 가능한 신상 공개는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해당될 때만 적용된다. 그것도 범행 수단이 잔인하거나 피해가 중대한 경우, 재범의 우려가 높을 경우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례에 해당하는지 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
여기까지는 아직 피의자에 한정된 절차다.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의 신상 공개는 아예 법적 근거가 없다. 법원이 선고와 동시에 신상 공개 명령을 내릴 수는 있지만, 성범죄자에만 해당된다. 이번 ‘돌려차기 사건’의 피고인은 그나마 성범죄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신상 공개가 가능해진 경우다. 하지만 피고인이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하면 신상 공개는 유죄 확정 전까지 다시 연기되고 형기를 마친 뒤에야 거주지 인근 주민들에게 제한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이게 현행법이다.
앞서 말한 신상공개심의위원회도 문제가 많다. 각 시도 경찰청마다 위원회가 따로 구성돼 판단 기준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힘든 구조다. 최근 10년간 신상 공개 심의는 전국 60여 건에 불과했다. 그 역할도 노하우도 축적됐다고 보기 어렵다. 대폭적인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 “개선과 보완” 높아지는 목소리
윤석열 대통령은 12일 여성 대상 강력 범죄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여당은 물론이고 야당도 관련 법안 제정에 들어간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살인이나 여성 상대 범죄 중 죄질이 나쁜 경우는 신상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나머지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만 최소한의 심의를 거쳐 결정하도록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상 정보 공개는 범죄 잔혹성보다는 재범 방지라는 본래 취지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번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측이 “가해자가 출소하면 50세가 된다”며 “충분히 보복할 수 있는 나이라 여전히 두려운 심정”이라고 피력한 걸 보면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법원 재판 단계에 들어가면 성범죄자 말고는 살인 등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신상 공개 대상이 아니다. ‘돌려차기 사건’의 가해자가 살인미수로만 재판받았다면 신상 공개는 영원히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형이 확정되기 전 피고인 신분이라도 신상 공개가 가능하도록 하고, 신상 공개 대상 범죄를 성폭행에서 살인 등 다른 흉악 범죄로 넓히는 등의 보완책이 필요하다.
■ 무죄 추정의 원칙과 인권 보호
일각에서는 법의 최종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신상 공개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거하는데, 모든 국민은 이 원칙에 따라 인권을 보호받는 게 사실이다. 결국 피의자·피고인을 모두 범인 취급하면 심각한 인권 침해를 낳을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실제로 진범이 뒤늦게 잡힌 경우뿐만 아니라 범인으로 몰려 기소됐지만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과거 사례들은 숱하다. 그 피해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할 때도 많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세계 각국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상 공개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 보도의 실명 공개에 제한을 두거나 범인으로 체포된 사람의 초상권을 인정해 옷이나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다만, 무죄 추정의 원칙은 국민의 알 권리와 관련된 중대 범죄의 경우에는 제한된다. 신상 공개는 엄격한 요건 아래 예외적으로 인정된다. 그 취지는 오로지 추가 범행 방지와 알 권리 충족에 있다. 피고인 단계에서 추가 범행의 우려가 줄고 재판 후 범죄자 신상 공개를 통해 알 권리를 충족할 수 있다는 게 신중론자들의 입장이다.
문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필요’라는 모호한 판단 기준이다. 피의자가 공인(公人)이거나 사안 자체가 연쇄살인 등 국민적 관심이 높은 케이스가 있다. 이를 어떤 기준으로 일반 사건과 구분할 것인가. 결국 수사기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은 없는가. 대단히 예민한 문제라서 섬세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 공적 기관 대신하는 사적 제재
이렇듯 현행법상 신상 공개 기준이 투명하지 못하다 보니 법적 절차 없이 범죄자의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사적 제재’도 속출하는 형편이다. 얼마 전 한 유튜브에서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의 사진과 이름, 직업 등을 공개한 적이 있다. 이어서 서울의 한 구의원도 SNS에 신상 정보를 올려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에 대해 일부 시민들은 사법기관도 하지 못한 걸 개인이 해냈다며 응원을 보냈다. 2차 가해, 보복 범죄, 스토킹이 계속되면서 피해자 보호가 미흡한 상황인데, 불법이라도 신상 공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적 신상 공개는 우리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게 중론이다. 성범죄자는 늘어나는데 처벌 수위는 오히려 약해지고 있는 현실은 실제 수치로 확인된다. 낮은 형량을 내린 사법부와 이에 공감 못 하는 국민 사이의 괴리가 사적 신상 공개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 언론은 신상 공개 못 하나
하지만 사적 제재가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경찰·검찰·법원 등 공적 기관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의 제재는 주관적 판단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끝없는 갈등과 보복의 악순환을 부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특정 피의자·피고인 신상을 공개하는 사적 제재는 위법의 소지도 안고 있다.
미국에서는 사적인 신상 공개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언론이 먼저 피의자·피고인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데 주저함이 없기 때문이다. 2017년 미국령 괌에서 한국인 부부가 아이들을 차량에 방치했다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미국·한국 언론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났는데, 미국 언론은 이 부부의 ‘머그샷’(mug shot·범죄자 인상착의 기록 사진)을 모자이크 없이 처리한 반면 한국 언론은 부부의 얼굴을 가린 채 공개했다.
한국 언론이 신상 공개에 소극적인 건 1998년 대법원 판결의 영향이 크다. ‘범죄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공공성이 있지만 피의자 신상을 보도하는 것은 공공성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하지만 미국 언론은 범죄자를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공인’(public figure)으로 본다. 가해자 인권보다 공익과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이라는 입장이 뚜렷하다.
■ 관련 법안 ‘탄력’… 세심하게 지켜봐야
지금 분위기라면 우리 역시 신상 공개 확대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가해자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인권이라는 데에 긍정적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관련 법안은 현재 여러 가지 내용들이 논의되거나 발의된 상태다. 앞서 20대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정유정의 사진이 실물과 너무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이에 따라 신상 공개의 실효성 문제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상 공개 결정 시점부터 30일 이내의 피의자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내용의 특정강력범죄법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와 있다.
또 신상 공개 때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리지 못하게 하거나 수사 과정에서 촬영한 사진·영상물을 공개하도록 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더 나아가 기존에 공개된 사진만으로는 피의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 ‘머그샷’ 공개도 거론되고 있다.
국민들은 법 개정 논의와 과정들을 세심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알 권리’와 ‘인권’의 문제는 당장 일상적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는 신상 공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2023-06-17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