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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부산어린이대공원 활성화, 관광 명소가 답?
바야흐로 현대 도시는 공원화 시대를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치고, 대표적인 도심 공원이 없는 곳은 없다. 이런 흐름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전국 주요 도시들이 공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저마다 ‘공원 도시’를 주창하고 있다.
부산시도 이에 따라 기존 도심 공원의 활성화 또는 새로운 공원 조성을 위해 다양한 검토를 하고 있다. 최근 추세를 반영한 움직임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도심 공원의 방향이나 성격에 대한 공론화 없이 우선 개발이라는 목표부터 설정한 채 한쪽으로만 치닫는 것이 아닌지 우려도 된다.
■어린이대공원 활성화 용역
부산시는 최근 도심의 대표적인 공원인 어린이대공원 활성화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 용역 착수를 발표했다. 활성화 방향에 대해서는 향후 여러 논의가 진행되겠지만, 현재 알려진 바로는 공원을 개발해 관광 명소로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폐업 중인 동물원 ‘더파크’의 부지를 활용해 국내 최대 규모의 실감형 가상 사파리를 만드는 방안과 함께 공원 내 이동성을 높이기 위한 모노레일 또는 친환경 셔틀버스와 같은 교통수단 도입, 그리고 성지곡 유원지를 한눈에 내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설치 등을 구상하고 있는 듯하다.
시의 복안은 어린이대공원의 변화를 통해 부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해 부산을 방문할 때 꼭 들르고 싶은 관광 명소로 조성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시민의 휴식·편의 관점서 봐야
부산시의 발표 이후 시민들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일단 어린이대공원을 시민의 휴식과 편의를 위한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자원으로만 여긴다는 지적이 먼저 제기된다. 도심 공원의 일차적인 역할은 시민들의 휴식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지자체는 이를 위해 공원의 원형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편의 시설을 갖춰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어린이대공원의 관광 명소화를 위해 레스토랑이나 조명 기구 등 다양한 위락 시설을 설치한다면 결국 공원의 주인은 시민이 아니라 타지 관광객이 되는 셈이다. 이들을 위해 공원 외부의 도심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설을 공원 안으로 들여온다면 공원 본래의 취지가 무색해질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환경단체나 시민들이 우려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다.
부산시민이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어린이대공원은 편백 등 숲이 울창한 데다 넓은 수원지까지 갖춘 곳으로, 언제나 조용하게 걸으면서 사색을 즐길 수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자연 속에 파묻혀 심신의 긴장을 풀 수 있는 점이 어린이대공원 최대의 장점이자 또 자랑거리다.
시가 지향하는 어린이대공원의 관광 명소화는 벌써 용어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 ‘조용한 힐링의 숲’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시민들이나 환경단체의 지적처럼 어린이대공원은 천혜의 자연 그대로 보존될 때 본연의 가치를 더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어린이대공원에 대한 개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공원 훼손의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게 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외부 접근성 향상은 하세월
어린이대공원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안은 어쨌든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두고 계속 고민해야 할 부산의 과제다. 특히 공원 내 모노레일이나 친환경 셔틀버스와 같은 방안 외에 이제는 아직도 뚜렷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해묵은 과제에도 관심을 둘 때가 됐다. 외부에서 어린이대공원으로 올 수 있는 접근성을 높이는 문제다.
도시계획과 관련된 어려움과 재정적인 한계 등이 있음을 알지만, 지금까지 역대 부산시장들은 이 부분에 대해 로드맵이 담긴 어떤 구상도 내놓지 않았다. 한두 사람이 나선다고 해서 해결될 사안도 아니고, 또 수년 내 구체적인 성과를 낼 수도 없다고 여겨서인지 어린이대공원으로 접근하는 교통 문제 해결은 줄곧 외면해 왔다. 이번 시의 용역 착수 보고회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가 없다. 사실 어린이대공원을 찾는 시민뿐 아니라 외부 관광객이 지적하는 가장 큰 불편함도 열악한 외부 접근성이지만, 이는 여전히 논외로 취급될 뿐이다.
■시민공원과 연계 강화
어린이대공원 활성화를 위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시민공원과 연계 강화다. 시민공원이 처음 개장될 당시에도 어린이대공원과 시민공원의 연계 강화는 두 공원 활성화의 핵심적인 요소로 부각됐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사정을 보면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진전된 성과를 찾기는 어렵다. 인접한 두 공원은 지금도 여전히 제각각 굴러가고 있다.
어린이대공원과 시민공원은 거리의 인접성이나 상호 기능의 보완성 측면에서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어 보이지만, 시의 정책적 측면에서는 지금까지 뚜렷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시민공원 처지에서는 앞으로 어린이대공원과의 연계 강화 여부가 공원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민공원은 조성된 지가 이미 10년이 지나고 있다. 하지만 도심 공원으로서의 확고한 위상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도심 속 울창한 숲을 기대했지만, 수목 상태를 보면 10년 세월의 연륜은 고사하고 여전히 초라하고 엉성하기만 하다. 울창한 숲속에서 느긋한 여유를 기대했던 시민들은 지금도 시민공원에 오면 쉽게 그늘막을 찾기조차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게다가 지금 시민공원의 넓은 잔디 광장에는 부산국제아트센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시민의 문화생활 향유를 위해서는 필요한 시설이지만, 역으로 대형 건물이 들어섬으로 인해 그만큼 공원 녹지가 줄어든 측면은 감수해야 했다. 최근에는 이곳에 부산 독립운동기념관 건립 얘기까지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념관의 필요성 인정과는 별도로 그 건립 부지가 또 시민공원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선 이견이 만만찮았다. 부산에서 시민공원의 위상이 어떤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 새삼 보여 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안 그래도 시민공원(47만㎡)은 서울을 대표하는 월드컵공원(346만㎡)이나 올림픽공원(144만㎡), 용산공원(243만㎡)에 비해 그 규모가 턱없이 초라하다. 위치는 모두 도심이지만, 서울의 공원들은 수목 상태나 접근성 등에서 시민공원보다 훨씬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시민공원의 활로는 어린이대공원과의 연계 강화로 찾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시의 추가적인 검토와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 같다.
도심 평지 공원인 시민공원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부산시민들의 숲속 힐링 공간으로서 어린이대공원을 따를 만한 곳은 없다. 그만큼 시민 애착도 크다. 어린이대공원을 활성화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온다면야 이 또한 좋은 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대가로 힐링 공간의 평온함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린이대공원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부산시민이고, 공원 활성화도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9-2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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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거대 양당제 폐해 극복 방안은
내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경제 위기와 민생 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듯 7개월가량 남은 총선의 기선을 잡으려는 싸움에 사활을 거는 모양새다. 거대 양당은 일부 강성 지지층을 등에 업고 편향적인 진영논리로 상대방을 맹공격하는 이념 과잉도 서슴지 않는다. 오로지 총선 승리를 위한 지지세를 확보하고 결집할 목적뿐이라 그럴 테다.
양당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와 독립군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이전을 둘러싸고 거친 이념 공방으로 정쟁을 벌이던 지난달 28일. 이날 정의·기본소득·진보당 등 야권 4당은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재가동해 선거제도 개편을 논의하자고 제안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날 시민단체 부산분권혁신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시민정치 활성화 방안 및 총선 시민의제 포럼’에서도 선거제 개편과 함께 정당법 개정의 필요성까지 제기됐다. 이 같은 주장이 나온 이유는 뭘까.
정치 양극화 조장하는 선거제
우리나라 총선은 한 선거구에서 1위 득표자만 당선되는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제다. 1등이 아닌 후보자를 선택한 표는 모두 사표가 되는 것이다. 이는 풍부한 인재풀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당선자를 많이 배출할 수 있는 여당과 제1야당에 유리한 제도다. 두 당이 전국적으로 득표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나머지 군소 정당은 득표보다 더 적은 의석을 가져가면서 거대 양당제로 고착화돼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를 빚는다. 또 선거구마다 당선자를 지지하지 않은 절반가량의 표심은 내팽개쳐져 민심이 왜곡될 우려가 높다.
인구수를 기준으로 획정된 현행 선거구제에도 문제가 있다. 선거인구 상한선(약 27만 명)과 하한선(약 13만 5000명)에 따른 총선 선거구는 총 253개다. 가뜩이나 중앙집권적 정치·행정 체제에서 인구가 많은 수도권과 대도시가 더 좋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내년 총선에 대비해 기존 선거구의 인구 증가로 분할이 필요한 지역은 18곳인데, 이 중 수도권이 12곳이나 된다. 반면 인구 감소 탓에 2개 선거구를 통합해야 하는 곳은 비수도권이 대부분으로 11곳에 이른다. 수도권은 분구에 분구를 거듭하지만, 비수도권은 3~4개 기초자치 시·군이 1개 선거구로 묶여 지역 대표성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 늘고 있다. 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 밀양·의령·함안·창녕선거구가 그렇다. 대도시인 부산조차 남구갑과 남구을선거구 통합이 불가피할 정도인 게 비수도권의 현실이다.
균형발전 저해하고 정쟁 격화
거대 양당제는 선거구제와 맞물려 비수도권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 채 수도권 일극체제를 심화해 개선 과제로 꼽힌다. 지역구 의석이 253개로 제한된 가운데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수도권 국회의원은 늘어나는 대신에 침체나 공동화에 시달리는 비수도권을 대변할 의원은 상대적으로 줄어 지역균형발전을 저해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지역 정서와 특성이 다른 여러 시·군이 통합된 농어촌 선거구는 당선자의 출신지가 아닌 곳 주민의 소외감과 소지역 갈등을 낳아 현안 해결과 지역 발전을 어렵게 한다.
결국 유권자가 날로 증가하는 수도권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거대 양당의 중앙당이 표를 의식해 수도권을 집중 지원하면서 비수도권에 대한 관심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거대 양당제가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소멸을 부채질하는 한 요인으로 지적되는 이유다. 거대 양당은 국가와 국민을 챙기는 일을 앞세우기보다는 집권에 혈안이 돼 극심한 다툼을 끊임없이 일삼으며 무능한 ‘식물국회’ ‘동물국회’를 만든 지 오래다. 이에 따라 여야 협치를 기대할 수 있는 정치는 실종돼 국민의 정치 불신과 혐오감을 키운다. 수도권·비수도권 간 불균형 심화 같은 거대 양당제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선거제 개정 등 정치 개혁이 절실하다는 비판이 잇따르는 건 당연하다.
선거제 개편 논의 지지부진
비난 여론에 떠밀린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올 들어 국회 정개특위를 가동하며 선거제 개편 논의에 들어갔으나 비례대표제를 두고 의견 차이가 심해 진척이 없다. 지난 20대 총선 방식인 병립형 비례대표제, 권역별 준연동형제 등 다양하게 제시된 방안은 양당이 유불리를 따지며 현격한 입장차를 보여 길을 찾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소수 정당은 무시됐다. 이 역시 거대 정당제 폐해의 하나다. 공직선거법상 총선 1년 전에 새로 적용할 제도를 확정해야 하지만, 이미 법정 시한을 5개월 넘겼다. 개점휴업 상태인 정개특위가 선거 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뜻을 외면한다는 원성을 사는 대목이다.
그러다 지난 1일 양당이 소선거구제 유지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에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승자 독식과 사표를 완화하는 방안으로 거론된 중·대선거구제를 배제하겠다는 것이라 다른 소수 야당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더욱이 국민의힘은 비례대표 선출과 관련해 기존 준연동형의 폐지와 병립형 회귀를 강력히 원하는 분위기다. 준연동형은 소수 정당의 국회 진출과 사표 방지를 가능케 하며, 병립형은 득표율에 비례해 의석을 나눠 거대 양당에 유리하다. 이런 이유에서 야권과 시민단체들은 양당이 시간을 질질 끌거나 밀실 협상을 추진하다 총선 시기에 임박해 기득권 사수 쪽으로 야합하진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다당제·지역정치 활성화해야
선거제 개편의 핵심은 정치 양극화와 거대 정당 간 극한 대립을 부추기는 기득권 구도를 타파하는 데 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기득권 유지에 필요한 비례대표 의석을 대거 확보하기 위해 각각 위성정당을 창당하는 꼼수를 부린 바 있다. 이 때문에 야 4당은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방지법 도입을 당론으로 채택할 것을 촉구한다. 일리 있는 얘기다. 개혁은 기득권 포기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와 정치를 발전시키고 국회를 진정한 민의의 전당으로 만들려면 양당이 사표 축소, 지역 대표성 확대, 비례성 강화라는 대의에 충실한 선거제 개편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마땅하다.
부산분권혁신운동본부의 포럼에서 나온 주장처럼 정당법 개정이 거대 양당제의 문제점 해소와 다당제 구현에 실효적인 대안이 될 수 있어 정치권이 적극 검토할 만하다. 정당법 개정 내용은 작은 당을 제약하는 요건을 완화하고 중앙당을 서울에 두도록 강제한 규정을 없애 정치의 다양성과 지역정당 활성화 기반을 확보하자는 것으로 모아진다. 중앙당이 광역·기초의원 공천권을 휘두르며 지역정치에 간섭하는 상황에서 당이 상식과 멀어져도 순응해야 해 지역민에 밀착된 생활정치와 정책 경쟁을 힘들게 한다. 대구·경북과 광주·전남의 경우 각각 국민의힘, 민주당의 일당제나 다름없는 실정이다. 거대 양당제가 지방자치를 삼키고 있는 셈이다. 그 피해는 비수도권과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과 시민단체들이 총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 힘을 모아 여야를 압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시민정치의 역할이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09-0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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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가야사 연구복원, 멈춰선 안 된다
유네스코(UNESCO,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다음 달 중순께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를 연다. 이 행사가 주목되는 건 여기서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등재된다면 이는 우리나라 역사·고고학계의 쾌거라 할 수 있다. 잊혔던 가야사의 실체와 가치가 비로소 국내외에서 인정받게 되는 전기가 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요청한 가야 고분군은 경남 김해시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해 함안군 말이산고분군 등 모두 7개다. 현재로선 등재가 유력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네스코 자문심사 기구인 이코모스(ICOMOS,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도 지난 5월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유네스코에 권고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등재 조건으로 심사 대상 유물·유적에 대한 해당 국가의 보전 의지를 중시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들어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에 대한 의지가 이전 정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런 모습이 자칫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넓어진 연구 지평
가야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거론되는 단계에 이른 건 우리 학계에서 가야에 대한 연구가 근년에 크게 활발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 비해 질과 양에서 향상된 연구실적을 축적했다는 이야기다.
가야사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과거엔 많아야 한 해 두 자리 숫자에 불과했던 가야 관련 연구논문 발표 건수가 2021년 120여 건, 2022년 130여 건으로 근래 확실한 성장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연구자료로서 신뢰도가 높은 한국연구재단(KCI) 등재 논문은 2021년 21건에서 2022년에는 34건으로 1.5배 이상 증가했다. 논문만이 아니라 가야 관련 고고학 학술대회도 2021년 21건, 2022년 19건으로 예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이 연구들은 또 김해 등 기존에 알려진 가야 유적 분포지를 벗어나 전북 장수군 등 호남 지역까지 연구 범위를 넓혔으며,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중소 규모 고분과 관방(국경의 군사보호시설 등) 유적까지 조사해 고대 가야의 실체를 더욱 다층·다면적으로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괄목할 만한 성과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가야사는 ‘베일에 가려진 신비의 제국’이라 불릴 만치 우리 역사에서 소외된 채 제대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게 달라진 데에는 정부 차원의 집중적인 지원과 의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추진했던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이 특히 그렇다. 부실한 예산 집행이나 지자체별 이벤트식 사업 추진 등에 대한 갖가지 비판도 제기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업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일궈낸 것이다.
가야사 연구 지원은 이전 정부 때도 있었다. 그 규모는 김대중 정부 때 1279억 원, 박근혜 정부 때 339억 원에 달했다. 문재인 정부는 규모를 크게 키워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에 3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했다. 이 같은 지원 속에서 영·호남 지역 30여 곳의 가야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추진됐고, 거기에 각 지자체의 호응까지 더해지면서 전에 없던 결과를 가져왔다. 이 기간 가야 고분군 6곳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됐으며 보물급 유물도 숱하게 출토됐다. 국책사업으로 진행된 덕에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까지 새롭게 전해진 것은 또 다른 성과였다. 가야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이처럼 정부, 지자체, 학계, 국민의 합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크게 떨어진 동력
하지만 지금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은 동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윤석열 정부 들어 해당 사업이 국정과제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는 않다. 지난해 9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도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이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문화재청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국정과제에서 뺐다는 건 그만큼 해당 사업을 중시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한 총리의 이날 발언에선 그 어떤 열정이나 적극성을 찾기 어려워 의례적인 수사에 그쳤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어떤 형태로든 가야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조치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이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경남도 의회도 지난해 9월 ‘국가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 확보 차원에서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을 지속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정부 건의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에 대한 답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정부 지원 필수 국책사업
현재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은 2020년 6월 제정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를 둔 ‘제1차 역사문화권 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 정부 예산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인데, 이는 결국 정부의 의지에 따라 흔들릴 여지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건 그 부분이다. 정권이나 정치적 이념에 따라 국책사업이 축소되거나 멈춰 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잊힌 역사의 연구복원은 단기간에 끝낼 일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에서 다양한 사업이 폭넓게 진행돼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필수적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올해 들어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뚜렷한 연구 성과나 유의미한 발굴이 있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특별법이 명시한 가야 문화권역별 정비 사업 추진도 언제 어떻게 시행될지 오리무중이다. 학계에서 시급하게 요구하는 가야사 연구 기반의 저변 확대도 요원하다.
■국정과제 준하는 책무
이러는 사이 가야의 정체성을 놓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갈등만 높아지고 있다. 강단 학계와 재야 학계가 개방적인 논의나 객관적인 검증 노력은 없이 서로 상대방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앞서 이러다가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 자체가 배가 산으로 가는 격으로 엉뚱한 결말을 맺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지경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서는 안 된다. 전환의 계기가 필요하고, 거기에 정부가 중심을 잡아 줘야 한다.
가야사가 우리 역사의 곁가지가 아니라 영호남을 아우르는 당당한 본류임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서 이미 실증적으로 드러났다. 요컨대 가야사를 연구하고 복원하는 일은 탈락된 고대사의 퍼즐을 채움으로써 우리 민족의 온전한 뿌리를 찾는 과정인 것이다. 어느 정부가 됐든 이념이나 진영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에 준하는 수준으로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의 지원 체계를 새롭게 확충해야 할 것이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3-08-2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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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영화 도시 부산 ‘천일야화’로 꽃피울 수 있어요”
부산영상위원회는 1999년 12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설립됐다. 지금까지 부산영상위가 촬영을 지원한 영화 및 영상물이 1800편에 달한다니 과연 ‘영화 도시’ 부산이라고 부를 만하다. ‘메이드 인 부산’ 영화 만들기 최전선에 선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보상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엔딩크레딧에 오른 자신의 이름 석 자 뿐. 하지만 그게 그렇게 뭉클한 순간이란다. 부산영상위 양성영 차장은 22년 차 로케이션 매니저다. 그를 만나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듣고, 영화가 부산에 그토록 중요한 이유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해 봤다.
-로케이션 매니저는 어떤 일을 하는가
▲영화나 영상물을 만들 때 촬영 장소에 관한 모든 업무를 전담한다. 먼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가상의 장소를 현실에서 구현할 가장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후보로 만든다. 그 후보 장소에 대해 감독 등 주요 스태프와 의논해 최종 결정하면 촬영 전후로 이뤄져야 할 현장 상황을 정리하고, 해당 장소 촬영에 대한 인허가 취득, 촬영지 인근 시민의 협조 체계를 구축해 촬영을 진행한다. 촬영이 끝나면 촬영 전과 같은 상태로 원상복구해 향후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이 과정에서 도로 통제를 계획하고, 위험한 촬영 시에는 안전대책을 검토한다. 주민들에게 불편을 줄 경우에는 주민 설명회도 연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자격이 있다면
▲로케이션 매니저에게는 기본적으로 사진 촬영을 해서 현장을 카메라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대학 시절 ‘사진은 사상이다’는 최민식 선생의 강의를 듣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거리, 사람, 건물, 자연 등 부산의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부산영상위 직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했다. 평소 촬영했던 부산의 거리와 자연 등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제출해서 좋게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부산영상위에는 로케이션 매니저가 6명이 있다. 기무라 다쿠야가 나오는 ‘히어로’나 ‘착신아리 파이널’ 같은 일본 영화는 주로 내가 맡았다. 예전에 동국대 불교학과 나온 분은 ‘달마야 놀자’ 촬영이 들어오자 무조건 자신이 맡겠다고 한 뒤 정말 열심히 했다.
-새로운 장소는 어떻게 발굴하는가
▲과거에는 무조건 발품을 팔았다. 새로운 건물이나 공간이 조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현장에 가서 문을 두드리고 명함을 건네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지도와 전화번호부에만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사전 조사를 충분히 한다. 구글·네이버·다음의 위성지도 항공사진과 로드뷰를 살펴보고, 방문객들의 리뷰와 사진을 참고한다. 장소가 결정 나면 전화나 이메일로 사전답사 협의를 한 후 일정을 잡아 방문한다. 현장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면 괜찮을 공간을 카메라에 담고 스태프들의 업무 동선과 주차공간까지 파악한다. 평소에도 로케이션 매니저는 자신만의 탐험인 ‘헌팅’을 한다.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공간에서 어떤 스토리가 전개될지 상상한다. 공원을 걷다가도 여기서 데이트나 마약밀매를 하면, 범죄가 벌어지면, 어느 장소가 좋을까 생각한다. 장소를 볼 때마다 계속 상상을 한다.
-지금까지 담당한 작품은 얼마나 되는지. 일화가 있다면
▲전담해서 지원했던 작품은 헌팅을 포함하면 총 225편, 그중 94편의 부산 촬영을 지원했다.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땅과 건물을 보러 다니니 투기꾼으로 곧잘 오해받는다. ‘친절한 금자씨’를 찍을 때는 눈 내리는 주택가가 설정이었다. 주례여고 앞 주택가 골목이 배경이었는데 부산에서는 눈 보기가 힘들다. 도로와 주변 주택 옥상에 눈처럼 보이기 위해 수십 트럭 분량의 천일염을 뿌렸다. 그때 촬영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소금을 살살 퍼가서 그걸 막느라고 고생했다. 금자 씨가 집을 드나드는 장면의 촬영을 위해서는 인근 주택가에 주차된 차량을 모두 다 빼야 했다. 그게 무려 500대에 달했다. 2000가구에 통지문을 돌리고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그 당시 ‘대장금’으로 인기 절정이었던 이영애 씨가 이 동네에 와서 촬영하니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결국 주민들의 협조를 끌어냈고, 인근 초등학교를 임시주차장으로 활용해서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부산에서 영화를 많이 찍으면 부산에 어떤 점이 좋은가
▲도시에 스토리가 많이 만들어진다. 아랍에 가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재상의 딸이 살기 위해서 하루에 한 번씩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나. 그러면 왕은 너무 재밌어서 죽이기를 날마다 미룬다. 부산이 수천 개의 영화에 나오면 수천 개의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제는 ‘부산행’, 오늘은 ‘블랙 팬서’, 내일은 ‘파친코’라는 식이다. 부산이 악마가 되었다 천사가 되었다 하면, 사람들은 부산에서 또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궁금해진다. 아시아의 천일야화를 만들어 내는 곳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게 홍콩이었는데, 표현의 자유가 막히면서 끊어지고 말았다. K팝·K컬처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한국에 와 보는 게 꿈이 되었다. 영화 ‘부산행’이 나오고 나서 동남아 사람들이 그렇게 한국을 좋아한다. 미국 문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블랙 팬서’ 찍은 도시라고 하면 부산을 다시 본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미국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영화는 부산을 좋아하게 만들 스토리 자원이다. 천 가지 이야기가 있는 부산이 가능하다. 도시 매력도가 높아지면 그 도시에 가 보고 싶어진다.
로케이션 장소에서 관광 명소로 이어진 사례는 꽤 많았다. 감천문화마을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히어로’에 등장하며 조금씩 알려졌다. 이후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단골 촬영장소가 되었고, 예술가들의 창작소가 들어서며 유명해졌다. 호천마을은 드라마 ‘쌈마이웨이’를 촬영하면서 명소가 되었다. 영도 흰여울 마을은 ‘변호인’ 촬영으로 떴다. 기장 아홉산숲은 ‘군도’와 ‘대호’, 죽성 드림성당은 드라마 ‘드림’을 촬영해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양 차장은 부산은 해안도로가 정말 멋지게 형성되었는데 아직까지 부산의 해안도로를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호천마을→민주공원→구덕터널→엄궁동 부산건축자재 판매단지 앞 강변길→ 을숙도·다대포 해안길→송도해수욕장→남항대교→영도→부산항대교→광안대교→수영강변대로→APEC 나루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추격 장면 촬영에 최고다. 산복도로, 바다, 강, 공단, 원도심과 미래도시의 느낌까지 모두 담을 수 있다. 영화사에 남을 멋진 장면이 탄생할 것 같다는 22년 차 로케이션 매니저의 예감이다.
<로케이션 매니저가 말하는 부산 여름 여행지>
양 로케이션 매니저에게 여름 여행지를 물었더니 역시나 해수욕장이 먼저 나온다. 해운대, 송정, 광안리, 송도, 일광, 임랑, 다대포, 영도 감지해변, 울주 나사리까지 ‘해수욕장 도장 깨기’를 해 보면 어떨까. 산으로 간다면 아홉산, 금정산, 장산, 황령산을 떠올린다. 전문가답게 뜨거운 한낮을 피해 새벽 해뜨기 전이나 심야에 헤드랜턴을 장착하고 가 보시란다. 북구 만덕동 석불사에 가면 경주 남산에 가야 볼 수 있는 장면을 부산에서 느낄 수 있다. 아미산 전망대에서 노을을 보면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시기·질투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여름에는 좀 덥지만 낙동강 생태공원도 언제나 좋은 곳이다. 영화 전문가답게 영화 관련 시설도 추천했다. 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는 에어컨이 빵빵해서 시원하고, 책상에 앉아서 보는 수영강 뷰가 일품이다. 이곳에는 총 4만 종에 달하는 자료가 있다. 특히 시네마테크부산의 역대 기획전 관련 자료 및 부산국제영화제 역대 출품작 자료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여기서 영화사에 남는 영화 보거나 영화 음악을 LP로 들으면 그야말로 꿀맛이란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8-0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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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물관리 일원화’ 무엇이 문제인가
충북 청주시의 오송지하차도 참사를 계기로 정부의 ‘물관리 일원화’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일원화된 물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환경부가 수질 관리와 규제에만 초점을 맞춰 재해 예방에 부실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다. 국토교통부에서 환경부로 넘어갔던 치수 기능을 국토부로 재이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 자리에서 한화진 환경부 장관에게 “물관리를 제대로 못 할 거면 국토부로 다시 넘기라”고 질타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는 모양새다.
■수질·수량 관리 환경부 일원화
기존 물관리 체계는 정부조직법상 수량 관리와 재해 예방 업무는 국토교통부, 수질 관리 업무는 환경부로 이원화돼 있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고로 1994년 건설부의 상하수도 기능이 환경부로 이관됐지만 국토부는 수량, 환경부는 수질이라는 물관리 시스템의 큰 틀은 유지됐다. 그러나 부처 간 업무 중복과 과잉투자에 따른 비효율 개선을 위해 통합 물관리 체계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이어졌다. 개발과 공급 위주의 하천·수자원 관리에서 균형적이고 지속 가능한 통합 관리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우리나라에 지속적으로 수량과 수질 관리 통합을 권고해 왔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결국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8년 정부조직법 개정을 통해 물관리 업무는 환경부로 일원화됐다. 물관리 일원화는 낙동강 통합 물관리를 통해 부산 대체 식수원 확보의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환경부 수해 관리 능력 논란 재점화
환경부의 치수 능력에 대한 우려는 물관리를 환경부로 일원화하기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 과정에서부터 제기됐다. 환경부 부처 특성상 환경 보호를 위한 규제 기능이 앞서 재해 예방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의힘은 환경부에 물관리 권한을 몰아주는 것은 수해 피해를 키울 수 있다고 했다. 방제 업무는 토목 사업의 성격이 강해 국토부에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연중 강수량의 70%가 장마와 태풍 등 폭우기에 집중되는데 연중 강수량이 일정한 유럽 국가의 물관리 모델을 따라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도 했다. 2020년 대규모 홍수로 제방 유실 등 큰 피해가 발생하자 홍수 관리는 환경부, 제방 관리는 국토부에서 담당해 대처가 미흡했다는 지적이 잇따랐고 국토부에 남아 있던 하천관리 기능까지 환경부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번 수해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다시 물관리 일원화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된 것이다.
■일원화에도 하천 관리 체계 혼선
환경부 치수 능력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토부냐 환경부냐가 아니라 하천 관리 체계가 제대로 일원화되지 않은 게 근본적인 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국토부 하천관리과가 환경부로 옮겨 간 것은 지난해 1월의 일이다. 환경부 하천 관리 업무가 아직 정착이 덜 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천은 하천법에 따른 국가하천, 지방하천과 소하천정비법에 따른 소하천으로 나뉘는데 4대강 중심의 국가하천 관리는 환경부에서 하고 지방하천과 소하천 관리는 지자체로 이양했다. 4대강 정비율은 97%에 이르는 반면 지방하천과 소하천 정비율은 50%에 불과한데 지자체가 예산은 수반되고 생색은 나지 않는 하천 정비를 소홀히 하면서 하천 관리에 허점이 생겼다.
오송지하차도 침수 원인이 된 미호강도 미호천교 증설 공사 과정에서 하천 점용 허가권은 환경부 금강유역환경청이 갖고 있는데 관리는 충북도를 거쳐 청주시에 위임돼 체계적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박창근 대한하천학회장(가톨릭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은 “오송지하차도 참사는 국가 재난 시스템의 문제인데 엉뚱하게 물관리 일원화의 정치 공세로 몰아가고 있다”며 “지자체로 이관된 지방하천과 소하천 관리까지 환경부로 통합해 체계적 하천 관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물관리 일원화에 대한 정치적 공방보다 물관리 일원화의 완결성을 갖추는 게 급선무라는 이야기다.
■국가 물관리 컨트롤타워 필요
전체 수자원 측면에서 보면 국가 물관리 체계는 더 복잡하다. 지난 15일 월류한 괴산댐 관리 주체는 수자원공사가 아니라 한국수력원자력이다. 팔당댐 같은 발전용 댐은 산업통상자원부 소관으로 한국수력원자력이 관리한다. 전체 용수의 60%를 차지하는 농업용수는 농림축산식품부 소관으로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한다. 산지의 빗물 관리는 산림청 소관이다. 전체 물관리를 강력하게 통합할 국가 컨트롤타워가 필요한 이유다. 물관리 일원화에 따라 2019년 국가물관리위원회가 출범했지만 제대로 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국무총리와 민간 공동위원장 체제로 관련 부처 장관과 전문가들로 막강한 조직을 갖추고 있지만 허울뿐이다. 이 때문에 국무총리 위원장 체제가 아니라 환경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실질적 실행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국가 물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부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수자원청’이나 ‘물관리청’ 등의 특별 외청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각 부처와 기관별로 나뉜 책임 소재를 넘어선 강력한 통합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기후변화 뉴노멀 물관리 정책 필요
전문가들은 이제 기후변화를 뉴노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선진국형 재난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10년 단위로 하천정비기본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국회 입법화를 통해 도시침수기본계획도 수립해 수재에 대응해야 한다. 도시 침수의 경우 예·경보 발령 기준이 없는데 장기적으로 도시 침수 위험 지도 등 시스템이 필요하다. 온천천 대규모 저류조와 같은 인프라도 필요하지만 지역적 강우 특성 등을 감안하면 소규모의 분산형 홍수 조절 시스템을 여러 개 만드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물관리에 대한 큰 방향을 잡아 가고 재난 관리에 대한 체계적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집중호우로 인한 지하차도 참사 반복도 결국 체계적 재난 대응 시스템 부재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장석환 대진대 스마트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4대강 보나 물관리 일원화를 놓고 정치 공방을 벌일 게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맞는 물관리와 재해 대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기후변화를 감안하고 인명 피해 방지에 초점을 맞춰 국가 물관리와 방재 시스템을 꼼꼼하게 다시 짜야 한다”고 밝혔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2023-07-2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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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두구동에 피는 문화의 꽃
“요즘 두구동, 가 보셨나요?”
부산 금정구 두구동 공덕초등학교 일대.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 1~2층짜리 낮은 물류 창고가 가득한 이곳은 요즘 트렌드에 관심이 많은 힙스터들이 대거 몰리는 핫 플레이스로 변신 중이다. 2010년부터 예술가들의 보석 같은 공방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으면서 도시 외곽 농촌인 두구동 마을의 색깔까지 바꾸고 있다. 대학 교수, 건축사, 패션 디자이너, 미학 연구자 등 다양한 경력의 전문 아티스트가 자기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서로의 예술적 성장을 돕고 있다.
■보석 같은 아티스트들 속속 집결
2019년 4월 ‘열린 작업실’로 개관한 붐빌(BOOMVILL) 스튜디오. 부산 유일의 유리 블로잉 공방인 이곳에서 유리 아티스트 이재경 작가와 이정윤 작가가 1200도 가마의 후끈한 열기와 함께 유리를 녹이고 덧대고 불고, 구부리면서 유리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일본 타마미술대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도 남이섬 문화원장, 한국도자재단 유리예술감독, 경희대 교수를 거친 이재경 작가는 유리공방 설비를 서울에서 통째로 부산으로 옮겼다. 코끼리 설치 미술가로 유명한 이정윤 아티스트는 이곳에서 미술사 교육과 함께 설치 작품도 직접 만든다. 금속작가 김재훈과 주얼리 디자이너 공행재 부부가 운영하는 보석공방 ‘주얼리갤러리공’. 금속이라는 소재를 통해 매력적인 금속과 주얼리 작품을 제작하고, 교육하는 공간이다. 예쁜 정원을 갖추고 있는 주얼리갤러리공에는 금속 및 주얼리, 오브제 작품을 판매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원을 졸업한 홍찬일 작가의 금속공예공방에서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금속공예·주얼리·금속 조각을 테마로 작품을 제작한다.
건축 전공으로 3년 전 두구동에 정착한 김병석 작가는 목공방 ‘BSK woodworks’에서 원목 가구 및 원목 소품을 주문 제작한다. 김병석 작가는 “도심의 번잡함이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작가들이 조용히 작업하기 좋은 두구동을 선호하는 듯하다”면서 “공방 작가분들은 여기 아예 뿌리 내릴 생각으로 온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소개했다. 패션을 전공한 박지혜 작가는 헤이그린 원예공방에서 식물 공간 조경과 조경 수업을 한다. 최근에는 창고의 거친 느낌을 살리고 원예로 포인트를 준 촬영 스튜디오까지 차렸다. 미학을 전공한 김창훈 작가의 두구두구커피공방은 작업공간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피와 예술의 접목을 시도한다.
부산대 미대를 졸업한 한국화 작가 조재임은 붓으로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쓰지 않고 한지나 생견에 물감을 흩뿌려 채색한 뒤 잎과 가지의 형태를 하나하나 오려 내 반복적으로 붙이는 작업을 한다. 중국 항저우에서 화조화와 인물화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정상지 작가는 한국화공방 이목유지(耳目有知)에서 번지지 않게 특수처리된 화선지에 세필로 먹선을 긋고, 정교하게 채색하는 공필화 작업을 한다. 최근에는 아이를 키우는 일상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따뜻한 색감과 귀여운 이미지로 그려 내고 있다. 이들 10개의 공방은 유치원생부터 초중고생, 미술 전공자와 작가, 동네 주민들이 삼삼오오 커피를 마시거나, 교육받고, 실습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한다.
미국 뉴욕 프랫대학원을 졸업한 이정윤 작가는 “이렇게 아이덴티티가 뚜렷한 공방들이 한곳에 모이기가 엄청나게 어렵다”면서 “부산 두구동에서 만난 다양한 예술가들이 서로 경험하지 못했던 영감을 주고받아 증폭시키고, 또 다른 흐름을 만드는 아티스트들의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예술가들의 플랫폼으로 승화
2022년 두구동에 공방을 둔 작가 10명이 비영리법인 ‘하이 두구(Hi Dugu)’란 이름으로 한데 뭉쳤다. 협업과 공유를 매개로 예술가 커뮤니티를 형성한 것이다. 개별 공방 차원의 행사는 물론이고, 아트페어와 전시회, 작가와의 교류, 재즈 페스티벌, 미술 교육 등 다양한 행사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그 결실이 지난해 12월 사흘 동안 ‘하이 두구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이어졌다. ‘북극곰 달 무드 등’(박지혜) ‘나만의 커피 블렌딩’(김창훈) ‘바람풍경 만들기’(조재임) ‘오색빛 칠보공예’(홍찬일) ‘비단 채색화’(정상지) ‘나만의 유리컵&블로잉 체험’(이재경) 등 교육 프로그램과 소품 위주의 아트 페어도 열렸다. 지난 6월에는 금정문화회관에서 하이 두구 회원 작가들의 합동 전시회도 개최했다.
장르가 다양한 작가들의 공방이 입소문 나면서, 유치원생, 초중고생은 물론이고, 미술 전공 학생과 전문 작가, 일반인 등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방문객들은 공방 몇 군데를 방문한 뒤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즐기고, 금정체육공원 일대를 산책하면서 한나절을 보내는 등 자연스레 하이 두구 예술인촌 탐방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정도다.
붐빌 스튜디오 이재경 작가는 “예술인들이 콜라보를 이루면서 서로의 작업에 지지가 되는 등 이점도 많다”면서 “설치작가와 유리, 금속, 목공 등 장르가 다른 작가들이 밀집하면서, 상상으로 그칠 수 있는 구상과 이미지를 기술적 협력을 통해 작품으로 수월하게 만들어 낸다”고 소개한다.
주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도 증가하고 있다. 붐빌 스튜디오의 붐빌 키즈는 물론이고, 홍찬일 금속공방, 헤이그린, 이목유지 등 각각의 공방에서 원데이 레슨과 방학에는 주변 어린이를 위해 전문 작가들이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운영한다.
붐빌 스튜디오 이정윤 작가는 “두구동 엄마들이 인스타그램 등을 보고 아이를 데리고 오거나, 학생들이 지나가다가 공방에 불쑥 들어와서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경우도 많다”면서 “아이들이 공방에서 직접 유리를 녹여 자신만의 목걸이나 컵, 보석 팔찌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예술과 친숙할 기회를 갖게 된다”고 밝혔다.
■브루클린 덤보와 같은 예술인촌으로
두구동은 5년, 10년 뒤에는 어떻게 될까. 작가들은 현재도 많은 예술가가 두구동으로 오고 싶어 하고, 공방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다면서 예술인 숫자가 훨씬 많아질 거라고 기대한다. 차츰 전문적인 아티스트들이 모이면 뉴욕 맨해튼 브루클린의 덤보(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나 일본 가나자와 예술인촌처럼 지도에 스탬프를 찍으면서 예술인촌 공방을 견학하는 그런 문화 단지로 성장하려는 바람도 갖고 있다.
실제로 브루클린 덤보는 뉴욕 맨해튼교와 브루클린교 사이에 있는 버려진 공장 지역이었지만, 비싼 집값을 이기지 못한 맨해튼 예술가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예술가 집적 지역으로 변모했다. 뉴욕시는 예술가들이 이곳을 가구와 액세서리, 조명을 만드는 공방으로 활용하도록 청년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공공 갤러리 제공 등을 통해 적극 장려했다. 덤보와 가나자와, 두구동의 공통점으로 △도심과의 접근성 △싼 임대료 △편의성 △멋진 자연 경관 △장르를 불문한 다양성 △민간 예술인 주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일본 유학 후 두구동에 정착한 공행재 작가는 “한국도 일본의 마츠리 등 마을 단위의 문화예술 활동을 접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일본 가나자와, 미국 브루클린의 덤보나 소호, 서울의 성수동처럼 두구동이 누구나 걷고 보고 경험하고 싶은, 예쁜 예술인 마을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2023-07-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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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국가보훈부 승격, 국립묘지 개선 방안은
현충일 전날인 6월 5일, 국가보훈부가 출범했다. 1961년 군사원호청 출범 이후 62년 만의 부 승격이다. 때맞춰 박민식 초대 장관이 15일 “국립묘지를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묘지는 그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국립묘지는 국군묘지로부터 출발한 태생적 한계 때문에 지위와 계급에 따라 안장 대상자와 구역, 규모, 비석의 차이가 엄연하다. 핫플레이스도 좋지만 묘지의 불평등성과 구조적 문제들을 직시하는 것이 먼저다.
◆“친일파에게 국립묘지라니”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한 반민족행위자와 군사반란 가담자 등을 국립묘지에서 이장하라.” 현충일이었던 이달 6일, 국립대전현충원 앞이 시끌벅적했다. 국립묘지법 개정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목소리를 높인 것인데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현재 대전현충원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37명, 5·16과 12·12 군사 반란 가담자 21명, 반헌법 행위자 7명, 제주 4·3 등 민간인 학살 관련자 10명이 안장돼 있다. 모두가 객관적, 역사적 사료를 통해 친일 등의 행각이 드러난 사람들이다. 이런 부적격자들이 독립운동가, 애국지사가 묻힌 국립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순국선열을 능멸하고 민족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분노가 터져 나온 이유다. 물론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데, 이들을 국립묘지에서 분리하려면 법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현충일을 맞아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가 열린 것이다.
◆국군묘지서 출발, 그 태생적 한계
우리나라 국립묘지는 애초 국군묘지에서 출발했다. 1955년 국군묘지라는 이름으로 서울 동작동에 들어선 전사자 묘지가 바로 한국 최초의 국립묘지다. 국군묘지의 모델은 식민지 시대의 일본식 군 묘지였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였을 테다.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당시 안장자들의 묘지 면적과 형태는 동일했으나 묘역을 분할하는 기준이 있었는데 바로 ‘계급’이었다. 묘비를 포함한 모표(墓標·무덤 앞 표석)의 크기도 계급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일본군 묘지가 모델 ‘태생적 한계’
묘역 구분부터 묘비 크기·모양까지
철저하게 계급에 따라 구분돼 있어
나라사랑·호국의 마음은 똑같은데
죽어서도 불평등한 차별 안타까워
해외선 면적·비석 크기 모두 평등
우리도 ‘묘지 평등주의’ 실현해야
독립지사·친일파 한 공간 묻혀 아이러니
별도 묘역 만들어 관리 방안 검토를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공식 재편된 건 1965년의 일이다. 이때 안장 대상자가 대폭 확대된다. 애국지사와 경찰관은 물론 향토예비군까지 포함되면서 기존의 군인 묘지, 전사자 묘지를 넘어 ‘국가유공자’ 묘지까지 아우르게 된다. 그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바뀐 2005년에는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까지 안장 대상이 됐다.
현재 국립묘지 종류는 현충원 말고도 호국원, 민주묘지, 선열공원이 있다. 현충원은 서울과 대전에 2곳에 있는데 포화 상태에 이르러 경기도 연천에서 제3 현충원 건립 사업이 추진 중이다. 호국원은 6·25와 베트남 전쟁 참전자에 대한 묘지 지원을 위해 설립됐다. 국가유공자와 장기복무 제대군인까지 안장 대상이다. 전국적으로 경기 이천, 경북 영천, 전북 임실, 경남 산청, 충북 괴산, 제주 등 6곳에 호국원이 있다.
◆죽어서도 차별받는 호국의 마음
국립묘지를 가로지르는 공간적 특징은 한 마디로 ‘죽음의 불평등성’이다. 나라 사랑, 호국의 마음은 누구도 다르지 않을 텐데, 죽어서도 차별받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앞서 말했듯 이는 국립묘지의 원형인 동작동 국군묘지에서부터 이미 내재화된 것이었다.
현충원에 가보면, 국무총리나 국회의장 등의 비석은 가장 위쪽 자리에서 받침돌과 비대석 위에 서 있다. 그 아래 장교들의 묘비가 있고, 더 밑에 일반 사병의 비석이 있다. 장교 묘비는 상단 양쪽 모서리가 없는 이른바 ‘귀접이’ 형태이고, 사병의 비석은 그냥 윗부분이 둥근 형태다. 지위와 계급에 따라 묘비의 위치도 다르고 형태도 다른 것이다. 특히 장군 묘역은 묘지 전체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좌우에 장병을 거느린 모습이다. 묘역 구분과 묘비 크기가 장군, 장교, 사병에 따라 다른데, 이 자체가 위계와 특권을 구조화한 국립묘지의 근본적 한계를 상징한다.
그나마 1960년대 중반까지는 망자의 계급과 상관없이 묘의 면적은 동일하게 적용됐다. 이 평등성마저 무너진 게 1965년이다. 당시 원칙적으로 2평이어야 할 묘역은 이승만 대통령 안장 때 무려 500평으로 넓어졌다. 초법적 발상이자 위법적 조치였다. 이를 계기로 1970년대 들어서는 국립묘지 안의 차별과 불평등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다. 이는 묘역 구분, 묘의 면적, 묘의 형태, 상석과 같은 묘의 부속시설, 묘비의 크기와 재질, 안장 방법 등에서 두루 확인된다. 지금도 국립묘지에 가보면 1평의 사병 묘역과 8평의 장군 묘역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일단 한번 만들어진 묘지 경관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충원은 사실상 반영구적인 불평등의 공간, 또 하나의 부끄러운 역사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프랑스의 묘지 평등주의
국립묘지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차별’은 우리만의 유난스러운 현상이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는 철저하게 평등하다. 대통령부터 사회 공헌자, 장군, 일등병까지 같은 공간, 같은 크기의 분묘에 사망 순서대로 나란히 안장돼 있다. 미국 전역 155곳의 국립묘지 모두가 이 같은 평등 정신을 구현한다.
프랑스 국립묘지는 파리의 ‘판테온’이 유명하다. 대통령이라 해서 무조건 안장되는 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공감대를 얻은 위인이 안치되는 것이 특징이다. 사망한 후 시간이 흘러 철저한 평가를 거칠 만큼 그 기준이 무척이나 까다롭다. 이곳 역시 모든 묘의 형태가 동일하다. 한편 독일 점령기 레지스탕스 활동 중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 공간은 별도로 마련돼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도 죽음의 평등성이 잘 구현된 묘지로 꼽을 수 있다. 유엔군 전몰 용사 2300여 명이 영면해 있는데, 묘역은 나라별로 구분돼 있지만 개별 묘소의 면적과 묘석의 크기, 명패 등은 모두 동일하다.
◆위계 없는 통합이 필요하다
우리 국립묘지 안장 제도도 이제 신분이나 계급적 차별의 시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2001년부터 호국원이 생기고 봉안당 형태로 전환되면서 위계적 질서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향후 국립묘지의 평등성 확보다. 국가보훈부가 이제부터 ‘묘지의 평등주의’ ‘죽음의 민주화’ 정신을 개혁의 큰 그림으로 잘 잡아나가야 한다.
이런 방향성 속에서 안장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지역별, 권역별 균형을 고려한 중장기적 계획이 나와야 한다. 전문가들은 우선 현충원과 호국원 등으로 나눠진 국립묘지 종류를 통폐합해 현충원으로 일원화하는 방안을 해법으로 내놓는다. 전체를 현충원으로 격상해 차별성이 사라지면 안장 대상자들이 거주지 인근의 국립묘지를 선택하는 일이 수월해질 수 있다.
독립유공자를 별도 구역에서 관리해 예우하는 방안도 중요하다.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독립운동가 묘소가 전국에 무려 3천여 개다.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들은 최고의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국립묘지 개혁은 국민적 공감대와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이뤄내기 힘들다. 승격된 국가보훈부의 역할이 막중하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06-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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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쪼그라드는 인구, 공론화하는 이민
근래 한국 사회를 둘러싼 최고 화두는 저출생과 인구의 고령화 문제다. 전문가들이나 정책 입안자들이나 우리 사회가 금세기 중반까지 저출생과 고령화의 추세적 경향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특히 저출생 문제는 그동안 국가 전체가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더 심화하는 양상이다.
인구의 측면만 본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축소 지향의 사회’로 들어섰다. 이제는 변화 추세에 대응하는 새로운 시각의 인구 정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점차 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민 정책이다.
최근 고용노동부와 서울시가 하반기부터 도입 계획을 밝힌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는 우리나라의 이민 정책과 관련해 이미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이민청 신설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이민 정책의 변화는 우리 사회의 미래와 맞물려 점차 쟁점화하고 있다.
■이민 수용 문제, 수면 위로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를 둘러싼 논쟁의 끝은 국내의 이민 수용 문제로 이어진다. 이 제도는 직접적으로는 육아 부담을 줄여 저출생 문제에 돌파구를 마련해 보겠다는 취지지만, 결국은 초저출생과 고령화 사회를 맞아 외부 인구 유입을 위한 테스트베드 역할을 숨길 수 없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은 0.80명 안팎으로, 이마저 매년 감소세다. 지금으로선 출산율을 올리기 위한 정부 정책은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다. 여기다 인구 고령화로 인한 생산 현장의 노동력 감소는 당장 국가 경제에 발등의 불이 됐다. 노동력 부족은 지금도 심각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이 더 걱정된다.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 현상은 이미 우리 경제의 상수가 됐다.
그 타개책의 하나로 거론되는 대안이 외국인 이민의 수용이다.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국외 이민에 대해 문호 개방을 검토해 볼 시점이 됐다는 주장이다. 윤석열 정부가 이전 정부보다 더 이민청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최근 재외동포청 개청에 가려 이민청 설립 이슈가 다소 뒷전으로 밀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다. 이민청 필요성은 국가 존속의 장기 전략적 차원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점차 공감대를 넓혀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국내 거주 외국인 수가 작년 말 기준 21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에 가까워지면서 이미 다문화 국가로 향하는 중이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외국인 근로자의 유입이 계속 이뤄질 전망이고 보면 지금부터라도 체계적인 이민 정책을 위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인구 전환기 컨트롤타워 필요
이민 문제가 점차 공론화하는 것과 맞물려 정부 차원에서도 향후 인구 정책과 관련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할 시기라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인구 감소와 저성장의 장애물을 넘기 위해 제기되는 이민의 수용 여부는 특히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사회·경제·문화적인 측면까지 그 영향이 매우 크다. 2018년 제주도로 입국한 500여 명의 예멘 출신 난민 신청자 수용 여부를 두고 우리 사회가 찬반양론으로 갈려 극심한 홍역을 치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민 논쟁은 우리나라가 단일민족 신화와 완전히 결별해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가 됨을 의미한다. 우리 국민들의 인식 전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민으로 인한 사회 갈등 등 사회통합의 과제를 불가피하게 한다. 또 저출생, 고령화 외에 지방소멸 등 국가균형발전 과제와도 직결된다. 여기에 통합 정책 기관으로서 이민청의 필요성이 부각된다. 이민청이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 종합 비전 제시와 관련 정책을 총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이민과 관련한 업무는 결혼 이주민 여성의 경우 여성가족부, 고용허가제 등 단기 외국인 노동자는 고용노동부, 출입국 관리 등은 법무부가 맡고 있다. 예산도 제각각일뿐더러 각 부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수백 가지가 넘는다. 우리나라의 장기적인 인구 구성과 정책 방향, 사회·문화 통합과 같은 전략적 비전이나 목표를 제시할 수 없는 구조다. 일본이나 중국도 이미 이민자 전담 부서를 강화 또는 신설한 만큼 우리도 서두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 구조 개선이 먼저” 주장도
이민청과 이민을 둘러싼 논의가 최근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민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시각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전문가들의 분석을 보면 인구 절벽 시대에 이민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민자와 함께 어울려 살거나, 이와 관련해 세금이 더 들어간다면 부정적인 시각이 급격히 증가한다.
국민의 이중적인 시각 외에도 이민이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의 인구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이민이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민 추진과 인구 문제 해결은 다른 차원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사회 불평등, 여성 차별, 교육과 주거 양극화 등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선 아무리 이주민을 받아들여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여긴다. 실제로 이주민들은 국외 거주 기간이 길어질수록 출신 국가의 출산율이 아니라 이주한 국가의 출산 경향을 따른다고 한다.
이민 유입으로 일선 노동 현장의 인력 부족을 넘기려는 발상도 임금이 낮고 노동 환경이 열악한 직종의 일자리를 제삼 세계 출신의 인력들로 돌려막기를 하는 데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식으로는 차별적이고 비인권적인 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먼저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민 수용만으로 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민이 당장 현실적으로 여러 방안 중 유력한 하나의 대안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일단 윤석열 정부가 그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이민 유입의 이점 역시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사 당장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면 언제까지 이를 외면할 수도 없다. 이미 우리나라는 세계 속에 고립된 국가가 아니다. 개방 국가로서 국내 거주 외국인은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다.
관건은 이민자를 우리 사회의 특정한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적인 관점이 아니라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여길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민청 설립과 이민 허용은 이런 측면에서 접근해야 우리나라가 다문화 국가로 연착륙할 수 있다. 정부의 역할도 여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국민들이 이민자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벗고 정확하고 객관적인 인식을 갖도록 꾸준하고 다각적인 노력이 병행돼야 하겠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6-14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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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이대로 괜찮은가
지난달 21~26일 일본의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계획에 대한 정부 시찰단의 현지 점검이 이뤄졌다. 이어 31일 시찰단장인 유국희 원자력안전위원장이 시찰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23~24일 진행된 방류시설 시찰 활동 내용을 주로 설명했을 뿐 오염수 방류에 대한 평가를 미뤄 안전성 논란은 지속될 전망이다. 앞서 여야 정치권은 이번 시찰을 둘러싸고 날선 공방을 이어 왔다. 더불어민주당은 형식적인 깜깜이 시찰에 불과해 방류에 면죄부를 준다고 비난한다. 국민의힘은 시찰은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정상회담 성과인데, 야당이 일본의 들러리로 폄훼하며 국민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정략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얘기만 앞세워 정쟁을 벌이는 여야가 한·일 관계 개선을 의식한 정부와 함께 오염수 방류의 문제점이나 쟁점은 외면하는 모양새다.
■불안감 주는 오염수의 정체
일본은 오는 7월부터 후쿠시마원전 내 1000여 개 저장탱크에 보관된 오염수 약 140만t(2022년 기준)을 바다에 투기할 예정이다. 오염수는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성지곡수원지 저수량 61만t의 2.3배나 되고, 경남 양산시 동면 법기수원지 저수량 157만t에는 조금 못 미치는 엄청난 양이다. 이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녹아내린 원전의 핵연료를 식히는 데 사용된 물이다. 앞으로 30년간 하루 130t가량의 오염수를 바닷물로 희석해 배출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오염수가 방사성 물질을 정화하는 ALPS(다핵종제거설비)로 처리됐다는 이유로 오염수 대신 처리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정화를 거쳤으므로 오염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할 목적에서다. 1993년 국제적으로 고준위핵폐기물의 해양 투기가 금지된 이후에도 원전 처리수 같은 저준위핵폐기물은 여전히 바다에 버려지는 실정이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오염수 방류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후쿠시마 오염수는 정상적인 원전 가동 시 발생하는 처리수와는 엄연히 다른 데다 ALPS로도 방사성 물질의 하나인 삼중수소를 제거하지 못해 문제가 심각하다. 더욱이 바닷속 삼중수소의 유해성 여부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는데도 일본 정부는 안전함만 강조할 뿐 투명한 정보 공개를 꺼려 의혹과 불안감을 키운다. 후쿠시마 주민들과 일본 어민들조차 오염수 방류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다.
■여야는 대책 마련 대신 정쟁만
일본 내 오염수 방류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는 마당에 방류가 임박하면서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 국민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최근 국내 수산업계와 어민들이 생계의 터전인 해양의 오염과 수산물 안전을 크게 우려해 방류 중단을 주장하고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테다. 이에 여야가 실효적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정치적으로 접근해 정쟁의 도구로 삼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민주당은 자주 써먹는 절대다수 의석의 힘을 활용해 대책 마련에 나서기는커녕 여권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방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다. 일본이 허용한 것만 살펴본 시찰로는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다며 정부·여당에 친일 프레임까지 씌웠다. 2021년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과 김남국 의원 코인 논란 등 민주당에 악재가 겹친 국면을 전환하려는 속셈이 강해 보인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국민 안전을 핑계로 한 비과학적 괴담으로 되레 불안을 조성한다고 응수했다. 야당의 정치 공세에 밀리지 않겠다는 집권당의 이 같은 자세는 국민 불안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 탓에 시찰단이 향후 어떤 결론을 내놓더라도 신뢰를 얻기 힘들어 여야 간 공방이 가열될 공산이 크다.
■잦은 수산물 불신… 대책 시급
여야는 당장 다툼을 멈추고 합심해 정부에 신뢰할 수 있는 과학적인 검증 등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할 필요가 있다. 그간 정부가 일본의 오염수 방류 방침에 우려 표명과 정보 공개 요구 정도의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해서다. 정밀한 조사나 사찰도 아닌 단 이틀의 점검에 그친 현지 시찰도 그런 수준으로 읽힌다. 게다가 정부는 오염수 방류에 대한 공포는 비과학적이라며 이달 말께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오염수 조사 최종 보고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입장이다. 반면 원전 이용을 촉진하는 활동에 주력하며 일본의 입김도 강하게 작용하는 IAEA가 일본을 두둔하는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어 우려스럽다.
수산업계와 어민들의 걱정은 오염수 방류로 당장 빚어질 수산물 수요의 실종 사태다. 오염수에 대한 국민의 불안 심리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류가 시작될 경우 불안감이 증폭해 수산물 불신이 확산할 게 불 보듯 뻔하다. 벌써부터 손님이 줄었다는 일부 횟집의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다. 장기간에 걸친 방류에 따른 해양과 수산물의 오염은 차후 문제다. 수산업은 막연한 불안감에도 소비 심리가 얼어붙어 업계와 어민들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연관 업종까지 연쇄 피해를 겪는 특성이 있다. 정부가 이 사실을 간과해 사태 해결의 시급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작은 변수에도 국민적 외면을 받았던 수산물 파동 사례는 많다. 2016년 5월 환경부가 고등어를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지목하자 고등어 관련 수산인과 상인들이 극심한 소비 부진과 가격 폭락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3개월 후 질병관리본부가 경남 거제에 유행한 콜레라의 원인을 해수 오염으로 추정하는 바람에 전국 횟집과 수산물 가게의 개점휴업으로 이어졌다. 2000년 중국산 꽃게·복어에서 발견된 납덩어리 사건, 2005년 중국산 장어 말라카이트 그린 검출 사건 때도 그랬다.
■정부 적극적·체계적 대응 필요
2017년 기준 한국의 1인당 연간 수산물 소비량은 세계 1위 수준이다. 2019년 국민 1인당 수산물 소비량은 70kg으로 쌀(60kg), 육류(56kg)보다 훨씬 많다. 수산물이 우리의 중요한 식량 자원이란 얘기다. 정부 시찰단의 보고와 IAEA의 판단에 국가의 명운을 맡겨선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정부는 생존권을 위협받는 수산업계와 어민들의 절규가 오염수 방류로 절망으로 바뀌기 전에 하루빨리 업계와 국민에게 미칠 영향을 분석해 피해 방지와 보상 대책을 강구할 일이다. 또 정부가 시찰단과 함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의 안전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신속하고 정밀하게 분석해 국민 불안을 해소하는 적극성을 보일 때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에 충분한 과학적 근거 제공과 투명한 정보 공유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여야의 지원과 협치가 요구된다.
오염수 방류는 단기간에 끝날 사안이 아니다. 방류된 오염수는 쿠로시오해류 등을 타고 4~5년 뒤 우리 해역에 유입된다고 한다. 정부·여당은 별 영향이 없다는 일부 전문가의 주장에 기댈 게 아니라 조속히 수산물과 해수 방사능 검사를 확대해야 마땅하다. 장기적으로는 냉정하게 상황을 관리하며 철저하고 체계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과학적이고 꼼꼼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정부가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현실적으로 막을 순 없겠지만, 육지 보관 같은 대안을 제시하며 방류 중단이나 방류량 축소 등 요구할 건 요구하는 외교가 필요하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05-3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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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마약 중독의 첫걸음, 약물 오남용
목하 나라 전체가 마약 때문에 난리다. 대통령은 “국가를 좀먹는 마약범죄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으르고, 정부는 정부대로 검찰·경찰·관세청 합동 마약범죄 특별수사본부를 꾸린다며 부산하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마약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특히 문제다. 아이들이 마약에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14살짜리 중학생이 용돈을 모아 필로폰을 구입하는 세상이다. 이런 형편에 유달리 바쁜 사람이 있다. 최창욱 부산마약퇴치운동본부장이다. 기관, 기업, 학교 등에서 쏟아지는 마약 강의 요청을 최 본부장은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마약 대책은 청소년에게로 무게중심이 옮아가야 한다는 게 그가 주창하는 바다. 직접 만나 그 까닭을 묻고 들었다.
■급증하는 청소년 마약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2년 38명이던 청소년 마약사범이 2022년에는 481명으로 집계됐다. 10년 새 무려 12.7배나 증가한 것이다. 전체 마약사범 수가 같은 기간 9255명에서 1만 8395명으로 2배 증가한 사실과 비교하면 청소년 마약범죄가 얼마나 심각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마약범죄의 암수율이 28.57배라고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마약범죄가 드러난 것보다 30배 가까이나 많다는 의미지요. 수사 당국에 의해 압수된 마약이 2012년 50.1kg에서 2022년 804.5kg으로 급격히 늘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마약 범죄자는 수십만 명이고, 청소년도 최소한 1만 명은 넘는다고 추정할 수 있겠지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평소 약물에 너무 둔감해진 게 원인입니다. 아무도 아이들에게 약물의 폐해를 설명해 주지 않아요. 학교에서도 금연 교육은 있어도 약물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청소년 마약범죄 확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구하는 약물
마약이라면 흔히 아편이나 헤로인, 코카인, 필로폰처럼 무시무시한 것들을 떠올리지만, 최 본부장의 관점에선 마약은 그런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신경안정제 같은 향정신성 의약품, 본드나 부탄가스 같은 흡입제, 다이어트약(비만치료제), 공부 잘하게 하는 약(ADHD 치료제), 수면제도 마약과 같은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약물들은 알려진 마약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아프다는 핑계로 병원에서 처방받아 공공연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마약 중독으로 가는 시작점일 수 있다.
“마약류는 개인을 넘어 가정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약물이라고 WHO(세계보건기구)가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정의한다면,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물질이라고 봅니다. 호기심, 치료 등 이유를 불문하고 단 한 번이라도 사용하면 파멸하는 무서운 물질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약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구할 수도 있고요. 비만치료제나 주의력을 높이기 위한 ADHD약은 마약류로 분류되는 향정신성의약품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복용합니다. 심지어 학부모가 구해 주는 경우도 있어요. 중독성이 있는 에너지드링크는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지요. 이런 일들이 결국 약물 오남용을 조장하고 결국은 마약 중독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하지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육교를 이용하듯, 약은 꼭 필요할 때 용법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약물 오남용이 마약범죄로 이어지는 사회적 현상은 반드시 개선돼야 할 과제입니다.”
■‘좀비 마약’ 펜타닐
청소년들의 약물 오남용 실태는 사실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진통제인 타이레놀로 인한 사고가 가장 많은 연령대가 10대라는 보고도 있다. 청소년들에게 약물을 찾는 이유를 물어보면, 실제로 아파서라기보다 친구의 권유나 스트레스 해소 때문이라는 대답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이런 행태는 약물을 습관적으로 찾게 하는 원인이 되고 부작용의 위험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잠을 잘 자기 위해 찾는 졸피뎀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따르면 복용자의 6~7%가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에는 진통제인 펜타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펜타닐은 치사량이 겨우 2mg일 정도로 위험한 약인데도 통증을 호소하면 대부분 병원에서 처방받을 수 있다. 지난해에는 부산·경남의 병원과 약국을 돌며 펜타닐 패치를 처방받아 판매·투약한 10대 41명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펜타닐은 소량인 패치로 처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주 적은 양으로도 사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기 암 환자도 사흘에 한 번만 쓰고 또 같은 자리에 연속으로 붙이는 것을 금할 정도로 위험합니다. 미국에선 2015년부터 2021년까지 7년 동안 펜타닐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21만 명에 달합니다. 펜타닐은 또 쉽게 중독에 빠질 수도 있고, 중독되면 뇌 일부가 손상돼 마치 좀비처럼 걷는다고 해서 ‘좀비 마약’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펜타닐 중독자들은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처방받는, 소위 ‘의료 쇼핑’을 통해 펜타닐 패치를 구입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약물 오·남용 교육부터
청소년기에는 또래 문화의 영향이 매우 큰 법이다. 또래 집단에서 소외받지 않기 위해 친구의 약물 권유를 거부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한다. 학업으로 인한 고통을 잊기 위해 약물을 사용하기도 하고, 정서적 민감도가 높은 때라 감정 기복에 따라 약물 남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청소년들에게 익숙한 텔레그램이나 트위터, 다크웹 등을 통하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약물을 구할 수 있는 환경도 문제다. 청소년들의 경각심은 더없이 무뎌져 있는데 약물, 나아가 마약을 구할 데는 주변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약물에 대한 사전 교육이 더욱 절실하게 여겨진다.
“마약 중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국민 보건의 문제입니다. 청소년에게서는 그 책임이 더 크다고 하겠지요. 마약사범에 대한 엄정한 수사와 처벌도 필요하지만, 잠재적인 중독자를 양산하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약물 오남용에 노출된 청소년들은 가까운 미래에 심각한 마약 중독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연결고리를 끊어 줘야 합니다. 청소년 약물 오남용예방교육을 확대 시행하는 시스템 마련이 매우 시급하고, 아이들만이 아닌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예방교육도 동시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2023-05-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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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현직 경찰이 고독사 관련 책 낸 이유
지난해 6월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코너에 고독사 관련해서 인터넷용 기사를 쓴 직후였다. 독자로부터 메일을 몇 개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그가 보낸 것이었다. “나는 고독사 문제에 관심이 많은 현직 경찰이다. 그동안 나온 대부분의 기사는 고독사를 단편적으로만 다뤄서 아쉬웠다. 고독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만나서 차나 한잔하자”는 내용이었다. 독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먼저 만나자고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고독사에 관심이 많은 경찰’이라는 대목에 이끌려 바로 답장을 보냈다.
■우리 구에는 고독사가 없어요
부산 영도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권종호 경위(56)였다. 권 경위는 처음 만나던 날 직접 만든 보고서를 들고나왔다. 부산시가 파악하고 있는 고독사 현황은 현실과 괴리가 크다는 내용이었다. 부산 모 구의 예를 들면 고독사 예방에 한 해 수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면서 최근 3년간 공식적으로 2건의 고독사가 발생했다. 하지만 특수청소업체들은 해당 구에서 한 해 수십 건의 고독사를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 경위는 “고독사 대책이라는 게 고독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책임 면피용 정책이지, 편안하게 살다가 죽을 권리가 보장되는 실질적인 예방책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그는 고독사라는 단어조차 사람들이 잘 모르던 2012년부터 주민센터와 구청, 시청을 쫓아 다니면서 고독사라는 재앙을 알리고 다녔다고 했다. 아주 특이한 경찰이었다.
지난해 10월 권 경위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영도구에서 노인 고독사가 하루에 2건이나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보도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회부 영도 출입기자에게 바로 제보를 했고, ‘영도구 연이은 외로운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10월 20일 자 <부산일보>에 기사가 실렸다. 그걸로 할 일은 끝났지만 권 경위와 함께 현장 한 곳으로 동행했다. 고인의 시신은 이미 치워졌지만, 말로만 듣던 고독사 현장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현관문 옆에는 고지서 더미가 수북했다. 그보다 먼저 집안 전체에서 퀴퀴하다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한 묘한 냄새가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고독사의 흔적이었다. 집 안 가득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배낭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배낭 속에는 고인이 어떤 분인지 짐작하게 해 주는 서류가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스승의 날에 받은 교육부 장관 표창장과 얼마 전까지 넣은 지원서류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부인과 자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유로 가족이 해체된 것일까. 그때 권 경위가 그만 나가자고 재촉했다. 안쪽의 사정을 알리 없는 젊은 관광객 한 무리가 지나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얇은 문 하나 사이라는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여보, 사랑해 조금만 기다려
권 경위는 경찰로 30년 넘게 일하며 100건이 넘는 고독사 현장에 출동했다. 그가 겪은 사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건이다. 첫 번째는 너무 사이가 좋았던 노부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 만에 할아버지가 따라가셨다. 달력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여보, 사랑해 조금만 기다려 곧 갈게”라고 적혀 있었다. 농 밑에 놓인 흰 봉투를 열었더니 “집을 치워 주시는 분께 미안한 마음에 식삿값을 남깁니다. 집사람 옷을 한 벌 준비했는데 수고스럽지만 태워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돈이 들어 있었다. 권 경위는 이날 많이 울었다고 했다. 두 번째는 고시텔에서 있었던 청년 고독사다. “20년 혼자 살아 온 무연고자입니다. 은행에 돈이 있으니 화장 처리 비용으로 사용해 주세요. 경찰관님! 저는 혼자 살아 혼자 가는 것이니 제발! 오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연락하는 것은 절대! 하지 마세요. 조용히 떠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서른여덟 살 청년이 남긴 글이 가슴팍을 후빈다. 그는 무연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고인이 남긴 돈과 보증금만 가지고 끝내 시신 인수를 포기했다.
권 경위는 오해를 정말 많이 받았다고 했다. 공식적으로는 고독사 발생이 0건인데, 누군가가 수십 건이 발생했다고 떠들고 다니면 불편하기 십상이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가장 큰 문제는 고독사의 정의가 애매하다는 데 있는 것 같다. 2021년부터 시행된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은 고독사를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되는 죽음’으로 정의한다. 지자체 담당자에 따라 일정한 시간은 5일도 7일도 된다. 망자가 고독하게 죽지 않았기에 고독사가 아니라고 우기는 담당자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고독사는 도쿄 24시간, 그 외 지역은 48~72시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권 경위가 생각하는 고독사는 사망 후 72시간이 지나 발견된 죽음이다. 무엇보다 명확한 고독사 정의가 시급하다.
■청년 은둔 생활자를 밖으로
권 경위는 뒤늦게 고백을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너무 지쳐 있을 때 <부산일보>에 난 기사를 읽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고독사 예방은 그가 맡은 업무가 아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지도 않은 일개 경찰의 말이 씨가 먹힐 리가 없다. ‘고독사’를 다룬 책은 국내에 전무한 상태였다. “권 경위는 이미 고독사 전문가다. 당신이 고독사에 관한 책을 쓰면 그때는 사람들이 귀 기울여 줄 것”이라고 조언했다. 불과 몇 개월만에 책을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난 2월 <고독사는 사회적 타살입니다>가 깜짝 출간됐다. 이 책은 현직 경찰관의 눈으로 바라본 고독사 현장을 담았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어 언론 인터뷰가 이어지는 중이다. 보건복지부, 한국사회보장정보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등에서 고독사 관련 강의 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고독사 전문가 권종호 작가를 2일 새삼스럽게(?) 다시 만나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고독사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기관에서 먼저 강의를 요청했다니 반가운 일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 강의는 현직 기자들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강의한 뒤에는 어떤 질문이 들어오는가.
▲청년 고독사에 대한 관심이 많다. 청년 은둔 생활자를 밖으로 나오게 하는 방법에 대해 많이 물어본다. 경찰, 구청, 자살센터에서 왔다고 하면 대개 거부감을 갖는다. 기관에서도 자신들을 쫓아내니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다고 한다. 어르신들을 보내 보니 세 번 만에 집에서 같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구청 직원은 바빠서 이야기를 못 들어주고 사진만 찍고 가도 자식을 둔 어르신들은 다르다.
-이 책에는 고독사를 예방하기 위한 몇 가지 대책이 나와 있다. 그중에서도 ‘생전계약’ 제안이 흥미롭게 느껴졌는데 소개해 달라.
▲무연사회에서는 가족의 몫이었던 요양간호, 장례식 등을 오롯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일본처럼 정부로부터 위임받은 단체가 생전계약을 맺고 생전사무와 사후사무를 나눠 돕도록 하자는 것이다. 몇년 전에 생전계약으로 사후 뒤처리를 위탁받는 안심장례서비스를 구상해서 전단지를 돌린 적이 있는데 많은 문의 전화를 받았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걱정이다. 내가 죽으면 집을 팔아서 아내가 시설에서 생활하게 도와 달라”는 식이었다. 나는 힘에 부쳐 이 활동을 중단했지만 정부 차원에서 생전계약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독사를 막는 데는 AI나 로봇 같은 기술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구청에서 집계한 고독사 건수와 경찰이 파악한 건수가 다른 이유는 현장 때문이다. 경찰은 현장에 가지만 구청에서는 안 나온다.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고독사 현장을 함께 가서 보자. 현장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현장에 오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살기에는 그동안 본 것이 너무 끔찍하고 애잔했다. 사람들이 고독사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나는 성공한 것이다.
2023-05-0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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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부산에 전국 첫 ‘꿀벌 연구 연합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대규모 꿀벌 실종 사태가 재연되고 있다.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됐다. 꿀벌 실종이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규모 집단 폐사가 해를 거듭해 반복되면서 양봉농가의 위기감도 높아졌다. 꿀벌 실종에 따른 피해는 양봉농가뿐 아니라 꿀벌을 매개로 한 다른 과일·채소 농가로도 확산된다. 전국의 양봉농가들은 정부를 상대로 집단행동에 나섰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일 전국 17개 시도의 꿀벌 담당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책회의를 갖는 등 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에서는 전국 처음으로 양봉농가, 전문가, 시가 함께하는 ‘꿀벌 연구 연합체’가 출범했다. 국가 차원의 근본적 대응책 마련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는 상황이다.
◆해를 거듭해 심해진 꿀벌 집단 폐사
한국양봉협회는 4월 현재 소속 농가에 있는 벌통 153만 7270개 중 61.4%인 94만 4000개에서 꿀벌이 폐사한 것으로 집계했다. 벌통 하나에 1만 5000마리에서 2만 마리의 벌이 사는데 이를 환산하면 최소 141억 6000만 마리 이상의 꿀벌이 사라진 셈이다. 지난해 전국적으로 70억 마리의 꿀벌이 사라져 농가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해를 거듭해 더 악화됐다. 우리나라 전체 양봉농가의 14%를 차지하는 경남에서는 이번 겨울 70% 안팎의 꿀벌이 사라졌다. 부산도 양봉농가가 많지는 않지만 개별 농가 피해는 심각하다. 부산에서는 140여 양봉농가에서 2만 봉군 규모를 유지했는데 올봄 10% 정도인 2000봉군만 남았다. 한국양봉협회 부산지회 양호진 회장은 “지난해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양봉 농가들은 텅텅 빈 벌통을 보며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양봉협회는 지난달 9일 정부세종청사 농식품부 앞에서 회원 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꿀벌 집단 폐사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회원들은 붕괴 직전의 양봉 산업을 직시하고 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올해 과일·채소값 급등 우려
꿀벌 집단 폐사는 양봉 농가의 피해에 그치지 않고 꿀벌을 매개로 한 과채 농가로 확산된다. 국제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 중 71개가 꿀벌 수정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올해 꿀벌 집단 폐사가 심각한 상황으로 확인되면서 과수농가의 벌통 쟁탈전이 시작됐다. 밀양 얼음골 사과 농가들은 벌통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김해 한림의 딸기 하우스 농가들도 수정 작업을 제대로 못해 생산량이 크게 줄고 기형은 늘었다. 참외, 수박 등 대부분 과채 농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화분 매개 벌의 임대료도 치솟았다. 최근 과수용 벌통 1개를 빌리는데 5만 원 안팎이던 가격이 10만~11만 원으로 배 이상 뛰었다. 이 때문에 과채 농가의 생산비가 올라가고 생산량이 줄어드니 농산물 가격이 치솟고, 결국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된다.
◆기후변화 전 지구적 꿀벌 실종
올해 집단 폐사 주범으로 우선 지목되는 것은 응애라는 진드기다. 응애는 벌통에 기생하며 애벌레의 체액을 빨아먹고 병원성 바이러스를 옮긴다. 이 때문에 양봉 농가에서는 응애 방제를 하는데 올해 방제제에 대한 내성이 부쩍 높아졌다. 이는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변화 등과도 연계된다. 꿀벌은 월동이나 여왕벌의 산란 과정 등에서 온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상기온은 꿀벌 생태계에 치명적이다. 200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꿀벌이 집단 폐사하는 군집붕괴현상(CCD)이 첫 보고된 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와 꿀벌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또 꿀벌 먹이원인 밀원 감소, 농약 과다 사용, 등검은말벌의 침공, 심지어 전자파 문제까지 다양한 요인이 꿀벌 생태계 파괴에 영향을 미친다. 국내 최초로 ‘꿀벌동물병원’을 개원한 꿀벌 전문가 정년기 원장은 “근본적으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문제가 있겠지만 개별 양봉농가를 들여다보면 꿀벌 폐사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며 “철저한 현장 조사와 분석, 연구, 그에 따른 처방 등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부산에서 꿀벌 연구 시작한다 ?
지난 10일 꿀벌 연구와 양봉 산업 발전을 위한 민·관·학 협의체인 ‘꿀벌 연구 연합체’가 전국 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부산에서 결성됐다. 이날 결성식에는 양봉농가, 전문가, 시 관계자 등이 참석해 꿀벌 집단 폐사 피해 상황과 원인을 공유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부산의 경우 양봉농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최근 도심 양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꿀벌 생태계와 환경 문제에 대한 체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연합체를 꾸리게 됐다. 지금까지 시 차원에서 양봉농가에 방제제 등을 지원했으나 앞으로 꿀벌 생태계와 도시 환경 전반에 대한 연구와 양봉 산업 발전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합체는 앞으로 전문가 인력풀 확충 등을 통한 체계적 연구로 꿀벌 질병과 기후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갈 계획이다.
◆국가 차원의 근본적 대책 수립해야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해 집단 폐사 사태를 겪으며 ‘양봉 산업 5개년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등 대책을 추진 중이지만 여전히 농가 지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 각국은 꿀벌 실종을 국가적 재난으로 보고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등 근본 대책을 강구 중이다. 미국은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정부 차원의 위원회를 구성했다. 유럽연합(EU)도 꿀벌 보호를 위한 범정부연합체를 구성했으며 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유럽 전역의 자연을 되살리기 위해 2030년까지 화학 살충제 사용을 50% 수준으로 줄이기로 했다. 우리의 경우 국가 차원의 근본 대책은 고사하고 대학 수의학과에 꿀벌 전문가 과정도 없는 실정이다. 주요 국가들은 어느 대학 수의학과에서나 꿀벌을 가르치고 전문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조현수 시 동물방역팀장은 “꿀벌 폐사를 단순히 방제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인 도시 환경 차원에서 접근해 보자는 취지로 연합체를 발족했다”며 “꿀벌 생태계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감안할 때 우리도 국가 차원의 전문 연구기관 설립 등 장기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2023-04-1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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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21세기정치학회와 니미츠항공모함 승선
북한이 전술핵탄두 ‘화산-31’을 전격 공개하고 핵 선제공격 시사 등 고강도 위협을 강화하던 지난달 28일 미국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함(USS Nimitz·CVN-68)이 부산 해군 작전기지로 입항했다. 니미츠함은 약 10년 만이지만, 미 해군 항모의 방한은 6개월 만이다. 미국 항모가 이처럼 짧은 간격으로 국내 입항한 전례는 찾기 어렵다. 니미츠함을 기함으로 하는 미 해군 제11항모강습단도 한반도에 전개됐다. 해군 작전기지 안벽에 정박 중인 니미츠함에 입항 다음날인 29일 21세기정치학회 소속 정치학자 10여명과 함께 승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선을 승리로 이끈 체스터 니미츠 제독 얼굴이 그려진 복도와 계단을 이리저리 올라가 선내 갑판에 도착했다. 행사장으로 주로 사용하던 선내 갑판에는 영화 ‘탑건: 매버릭’에서 톰 크루즈가 조종한 F/A-18 슈퍼호넷 전투기와 EA-18G 그라울러(Growler) 전자전기가 손에 닿을 거리에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그라울러’
2014년 미국 핵추진 항모 조지워싱턴호 취재 등 미군 항모에 2~3차례 올랐던 기자로서도 EA-18G 그라울러 전자전기를 눈앞에서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슈퍼호넷 전투기 조종사로 취재진 안내 당직을 서고 있던 미 해군 조종사에게 “그라울러를 전시한 목적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이틀 전까지 작전에 투입했는데, 도색 상태가 양호한 전투기를 골라서 배치했다”고 답변을 비껴갔다. ‘으르렁거리는 사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라울러는 슈퍼호넷을 개조한 미 해군의 유인 전술용 전파방해무기체계이다.
실전 투입은 2011년 3월. 이탈리아의 아비아노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5대의 그라울러가 리비아군 방공망을 무력화했다. ‘하늘의 마법사’로 불리는 그라울러는 전쟁 초기에 날개 끝에 광대역 수신기로 적의 전파를 수집, 날개와 동체 하부에 장착된 5개의 AN/ALQ-99 재밍 포드로 고출력 방해전파를 송신해 적의 방공망과 지휘통신망을 먹통으로 만들고 암람 미사일을 쏘아 길을 튼다. 그라울러 전자전기 편대 배치만으로도 상당한 전쟁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도 2013년 12대의 그라울러 도입을 추진했지만, 미국이 수출승인을 거부한 기종이기도 하다. 국방 전문가들은 “5~6대의 그라울러가 선도하는 공격 편대는 북한 평양의 4중 방공망과 미사일 기지를 연결하는 지휘통신망을 순식간에 파괴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에 대한 미군의 ‘무언의 경고’로 해석되는 장면이었다.
■어떤 영역에서도 대응 가능
축구장 3개 넓이인 비행갑판에는 함재기 이착륙 과정에서 길게 긁힌 자국들이 있었다. 비행갑판에는 F/A-18 슈퍼호넷 전투기와 E-2 호크아이 조기경보통제기, EA-18G 그라울러, 대잠수함작전용 MH-60R 시호크 해상작전헬기 및 MH-53 페이브로 특수전헬기 등 수십 대가 날개를 접어 올린 채 앉아 있었다. 미국이 ‘떠다니는 군사기지’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 하나의 전력을 갖춘 니미츠함을 통해 ‘확장억제(핵우산) 실행력’을 강조하는 듯했다.
갑판에서 만난 미 해군 장교에게 “F-35 스텔스 전투기는 왜 보여주지 않느냐. 군사 기밀이냐”고 묻자 “비밀인지 잘 모르겠다”는 답만 돌아왔다. 대신 “동급 기종의 전투기라도 정비 정도에 따라 전투력이 확실히 달라진다”면서 항공기 정비 노하우에 대해 자랑했다. 제11항모강습단장 크리스토퍼 스위니 제독은 전날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다양한 무기체계에 대응할 다양한 수단이 있고, 어떤 영역에서도 공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니미츠 군함 기호인 CVN-68이 새겨진 함교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는 21세기정치학회 소속 정치학과 교수들과 언론사 기자들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니미츠함과 함께 전개된 미 해군 이지스 구축함과 상륙함 등에 실려 있을 무인무장헬기와 무인함 등 비밀 자산에 대한 궁금증마저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한·미·일, 중국 코 앞에서 연합 훈련
니미츠함은 부산항을 출항해 3~4일 남쪽 공해상에서 한국·미국·일본 3국 연합 대잠수함전 훈련과 수색구조훈련에 돌입했다. 미국 주도의 3국 연합 대잠수함전 훈련은 작년 9월 이후 6개월, 수색구조훈련은 2016년 이후 7년 만이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비롯해 핵무인수중공격정 ‘해일’ 등 북한 수중 위협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애초에 설명됐다. 하지만, 대잠전 훈련 구역이 북위 30도 36분 밑으로 내려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로부터 약 300해리(555㎞) 안까지 근접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이 상당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센카쿠 열도는 일본과 중국 간 영유권 분쟁이 고조되고 있는 지역이어서 미군이 대중국 견제성 메시지를 보냈다는 해석마저 제기된다.
■격랑의 한반도 어디로 가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미연합훈련 기간 중 동선을 감춘 채 도발을 자제했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달리 숱한 미사일 발사와 실물 핵탄두 공개 등 핵전술 고도화를 과시하면서 강 대 강 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또한, 북한을 두둔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을 견제하려는 중국이 한·미·일과 갈등하는 양상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미·중 패권경쟁과 북핵 위협이 거세지면서 한·미·일 3국의 군사협력이 빨라질 전망이다. 일본은 정보수집위성 8기를 운용 중이며, 글로벌호크 고고도 정찰기는 물론 다양한 ISR(정보·감시·정찰) 기체를 통해 동북아시아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국은 북한 잠수함의 SLBM 등 수중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미국의 ISR 자산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이다.
또한, 북핵 위협 대응이라는 한국의 이해, 대만 위기 상황에 대처해 일본 오키나와섬 인근 난세이제도에 군사 거점과 동맹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전략, ‘적 기지 공격 능력 확보’ 과제를 이루려는 일본의 입장이 묘하게 한반도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다. 한반도가 한·미·일 해양 세력 대 북·중·러 대륙 세력의 전선으로 복귀한 모양새다. 한·미·일 안보협력 확대를 공언한 윤석열 정부는 그 범위를 북한 이슈에서 지역 및 글로벌 문제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하는 추세다. 오는 26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니미츠함을 함께 승선했던 21세기정치학회 조경근 고문(정치학 박사)은 “미국이 섬세한 공공외교를 세밀하게 펼치면서 미국에 대한 (군사안보적) 신뢰를 심어주는 노력을 볼 수 있었다”면서 “다만 한국이 한·미·일 안보협력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국·러시아와 멀어지는 외교적 손실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으로서는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가 북한의 핵 도발에 대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중국에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격랑 속으로 서서히 접어드는 한반도, 많은 고민과 지혜가 필요한 듯하다.
2023-04-0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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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고개 숙인 한국 야구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일본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한국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3회 연속 본선 1라운드 탈락. 한 수 아래라던 호주한테 덜미를 잡히더니 ‘라이벌’ 일본에 9점 차로 대패했다. 기대 이하다. 어떤 이는 이게 한국 야구의 진짜 실력이라 했다. 냉소가 아니다. ‘야구 변방’은 정확한 진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를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한국 프로야구가 4월 1일부터 정규 시즌을 시작한다. KBO(한국야구위원회) 리그의 품질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거기에 한국 야구 중흥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WBC서 확인한 ‘우물 안 개구리’
한국 야구의 부진은 무엇 때문일까. 먼저 투수력 하락에 방점이 찍힌다. 호주에게 8실점 하고 일본에 13점을 내줬다. 체코·중국한테도 각각 3실점과 2실점을 기록했다. 베테랑 투수들은 상대팀에게 철저히 분석 당했고, 새내기들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다. 요약하면, 노쇠함과 경험 부족 탓이 크다. 그 뒤에 ‘자만’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피드 업’은 근래 세계 야구의 트렌드다. 한국 야구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일본 투수들은 시속 150km 이상의 빠른 볼을 우습게 던졌는데, 특유의 제구력도 여전했다. 한국 투수들은 극소수를 빼곤 그렇지 못했다. 스트라이크든 볼이든 원하는 곳에 투구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야구는 기본기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한국은 여기서도 구멍이 났다. 어이없는 주루사와 주루 미스가 득점 기회를 번번이 날렸다. 수비에서도 기초적인 실수가 나왔다. 평범한 송구와 포구를 잘 못해 실점의 빌미를 만들었다.
한국의 WBC 조기 탈락은 벌써 세 번째다. 더 이상 불운 탓을 말할 수 없다. 2017년 한국의 발목을 잡았던 이스라엘이나 이번 대회의 호주는 약체로 평가받은 팀이었다. 100경기 이상을 치르는 프로야구 리그도 없고 이름값 높은 메이저리거도 없는 나라다. 심지어 동호회 야구 체코에도 혼쭐이 난 한국 야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본도 한국 야구로부터 배웠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은 한국에 두 번이나 지면서 노메달의 망신을 당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좌절과 반성이 없으면 절치부심도 없는 법. 일본 야구는 결국, 세계 정상급으로 거듭났다. 우리도 실패를 거울삼아 근본적인 대안들을 찾아야 한다. 눈앞의 성적에 연연해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는 거시적 관점을 세우는 게 먼저다.
야구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선 국가대표 전임 감독제에 대한 재검토 목소리가 높다. 전임 감독제는 2017년 도입됐다가 곡절 끝에 2022년 폐기됐다. 과거를 돌아본다. WBC 준우승을 일군 김인식 감독은 정작 자신의 KBO 소속팀은 신경 쓰지 못했다. 올해 이강철 감독도 대표팀과 소속팀 양쪽으로부터의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전임 감독제의 장점은 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젊은 인재를 발굴하고 순조로운 세대교체를 준비하면서 장기적 로드맵을 짜는 지도자의 역할이 그것이다. 국제대회에 자주 나가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도 전임 감독제는 유리하다. 세계적 추세와 변화하는 규정에 발 빠른 대처도 가능하다.
그 밖에도 야구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외국인 선수 제한 완화, 정기적 국가 대항전 개최, 고교야구 알루미늄 배트 부활 등이 거론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엇갈리는 사안도 없지 않다. 과학적 검증과 연구를 통해 장단점을 충분히 살피는 진중함이 요구된다.
KBO 리그 '질적 향상'이 해답
한국 야구의 중심축은 엄연히 프로야구다. WBC에서 호성적을 바란다면 KBO 리그를 잘 가꾸면 된다. 프로야구가 재미있고 풍성해지면 관중이 많이 찾을 것이고 그러면 선수층도 두터워져 실력도 높아진다. 당연한 얘기다. WBC 같은 국제대회 성적은 저절로 따라온다.
KBO 리그는 2017년 역대 최다인 840만 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그러나 2018년(807만 명)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난해엔 600만 명을 간신히 넘겼다. 팬들을 다시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려면 KBO 리그가 제대로 된 경기력을 보여 줘야 한다. 아니면 프로야구마저 소수의 팬들이 즐기는 ‘마니아 스포츠’로 전락한다. 결국 질적 수준의 향상이 관건이란 얘기다. 세계 정상급으로의 발돋움도 그래야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기반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금과 인프라, 인재 육성, 선수 복지, 팬 참여 확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야구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가 그렇다. 현대적 편의시설과 첨단 기술, 팬들을 위한 안락함을 갖춘 경기장 등 일단 하드웨어가 훌륭하다. 선수들의 과도한 몸값에서 거품을 빼고 이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나라도 인프라 개선의 묘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선수 발굴에 통 큰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 시스템도 눈여겨볼 만하다. 유소년 리그라든지 스카우트 프로그램 등은 한국 야구가 인재 육성에 충분히 반영할 만한 내용들이다. 선수 복지 개념도 마찬가지다. 연령별 투구 수 제한, 부상 방지 프로그램처럼 선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는 엄격한 규정이 돋보인다. 다채로운 축제와 소셜 미디어 캠페인을 개발해 야구팬들을 관리하고 참여 확대를 유도하는 적극적인 노력들도 참고할 만하다.
튼튼한 기초와 철학적 소신을
한국 야구의 저변은 여전히 얇다. 어쩔 수 없이 이웃 일본과 비교하게 되는데 열악한 처지는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2020년 일본 전역에 야구부가 있는 고교는 3940곳(야구 등록 선수 15만 명), 한국은 올해 기준으로 95곳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 아마 야구의 현장엔 위기감마저 감돈다. 저출생에다 코로나 사태가 겹쳐 유소년 야구 선수가 태부족해서다. 특히 초등학교 야구부가 크게 줄었다는 게 문제다. 중학교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하는 4년 뒤엔 신인 지명에서 우수 선수를 찾아내기 힘들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선수 부족이 야구 발전의 발목을 잡는 것보다 서글픈 풍경도 없을 것이다.
한국 야구의 뿌리는 아마 야구다. KBO가 선수 발굴과 구장 인프라 보강 등 아마 야구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 백 마디 말보다 단 한 번의 실천이 절실한 때다.
선수와 지도자들의 노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야구라는 몸의 제전을 손수 만드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훈련과 신기술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선수들은 존재의 본질을 구현하는 사람으로서 직업적 소명 의식을 다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철학적 소신, 반성과 성찰 같은 무형의 덕목이야말로 인프라와 경제성, 리그의 품질보다 더 소중한 가치다. KBO 리그 운영, 선수들의 노력, 팬들의 사랑, 이 삼두마차가 끌고 가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기대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03-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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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빗장 풀린 케이블카, 전국 명산 뒤덮나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설악산국립공원 내 새 케이블카 설치가 환경부의 조건부 동의를 받으면서 전국의 다른 명산에도 다시 케이블카 설치 논의가 불붙고 있다. 환경부는 최근 강원도 양양군의 오색케이블카 설치 사업 환경영향평가에 대해 조건부 동의 의견을 밝혔다. 1972년에 설치된 기존 권금성 케이블카에 이어 설악산 내 두 번째 케이블카를 허용한 것이다.
상부 정류장의 위치를 하향 조정하는 조건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환경 훼손 등을 우려하는 케이블카 반대 측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환경부의 판단을 주시하던 전국의 다른 지자체들도 서둘러 케이블카 추진 의사를 밝히는 등 곳곳에서 케이블카 논의가 뜨겁다.
40년 만의 설악산 케이블카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논의는 40년 전인 1982년 처음 제기됐다. 제기될 당시부터 찬반 논란으로 뜨거운 감자였던 오색케이블카 설치는 문화재현상변경허가 등 문제로 수년 동안 진척이 없었다. 그러다 2015년 대청봉~관모능성 구간으로 예정했던 노선을 오색지구~끝청으로 변경·보완한 뒤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조건부 승인을 얻으며 속도를 내는 듯했지만, 환경영향평가 조작·부실 의혹이 제기돼 다시 좌절됐다.
이후 몇 차례 더 우여곡절을 겪은 오색케이블카 설치는 지난해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으로 탄력을 받기 시작해 결국 이번에 환경부의 승인을 얻었다. 오색케이블카는 길이 3.3㎞로, 8인승 곤돌라 53대가 시간당 800여 명을 실어 나를 예정이다. 사업비는 1000억 원으로 2026년 완공될 계획이다.
환경부 승인으로 40년 동안의 오색케이블카 논란은 일단 행정적으로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는 명산을 끼고 있는 전국 지자체에 ‘케이블카 설치 가능’이라는 새로운 불씨를 던졌다. 벌써 전국 곳곳에서 케이블카 설치 논의가 불붙기 시작한 점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지리산 케이블카’도 재점화
오색케이블카 허용으로 그동안 케이블카 설치를 저울질하던 전국 지자체들도 공식적으로 사업 추진을 밝히고 있다. “국립공원 설악산에도 케이블카가 허용됐는데, 우리 지역이라고 안 될 이유가 없다”며 앞다퉈 나서는 모양새다.
현재 케이블카 설치가 거론되고 있는 지역은 전국 10여 곳에 이른다. 남부권역만 해도 당장 지리산과 울산의 신불산, 부산 황령산, 대구 팔공산을 비롯해 서울의 북한산, 충북 속리산, 광주의 무등산 등 곳곳에 걸쳐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곳은 경남·전남·전북의 3개 도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 지리산이다.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논의는 오래됐다. 그러나 사업 주체를 둘러싼 지자체 간 경쟁과 정부의 승인 여부, 환경단체 반발 등 문제로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우선 경남도가 2012년, 2016년, 2017년 세 차례에 걸쳐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지리산 장터목~함양군 마천면 추성리를 잇는 길이 10.5㎞의 케이블카를 추진했으나, 환경부에 의해 3차례 모두 반려됐다. 그런데 오색케이블카 승인을 계기로 분위기가 바뀌자 박완수 경남지사가 이달 2일 지리산 케이블카 추진 재개를 선언하며 선수를 치고 나왔다.
여기에 최근 전남도와 구례군도 지난해 반려됐던 지리산 케이블카 재추진 의사를 밝히며 가세한 상태다. 예전 독자적인 케이블카 설치를 추진했던 인근 경남 하동·함양군, 전북 남원시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이들까지 합세할 경우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의 주도권을 놓고 다시 이웃 지자체 간 과열 경쟁이 재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신불산·황령산 케이블카도 시동
울산 울주군도 오색케이블카 승인에 고무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20년 숙원인 신불산 케이블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직 지자체장이 신불산을 포함한 울주 7봉을 산악 대표 관광지로 만들겠다며 신불산 케이블카 설치를 공약한 마당에 오색케이블카 소식은 이 사업 추진에 더 없는 청신호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 울주군은 그동안 낙동강유역환경청의 환경영향평가 ‘부동의’ 의견을 반영한 새로운 현황 조사와 기본설계 등을 바탕으로 신불산 케이블카 설치를 위한 행정절차 진행에 착수했다고 한다. 내년 초 착공, 2025년 하반기 준공이라는 로드맵까지 마련하며 총력전을 펼 기세다.
부산에서도 민간 기업이 도심에 위치한 황령산 정상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말 부산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에서 안건이 조건부 통과됐는데, 지역사회의 반대 여론 등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대구시의 팔공산 케이블카도 주목 대상이다. 홍준표 시장 취임 이후 불교계와 환경단체의 반발에 밀려 사업을 중단했지만, 최근 케이블카 빗장이 풀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구시는 당장 사업 재개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으나, 언제든 사업이 재추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정부의 명확한 가이드라인 필요
전국에서 케이블카 설치 논의가 봇물 터지듯 나오는 것과 더불어 이를 둘러싼 찬반 논란도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케이블카 설치 논란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양측 주장의 논점은 그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반대 측의 주된 논거인 환경 훼손 주장과 찬성 측의 관광산업 활성화가 늘 팽팽하게 맞선다. 반대 측은 케이블카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빚어질 환경 훼손과 함께 설치 이후 많은 인파로 인한 자연 생태계의 훼손은 피할 수가 없다고 여긴다. 게다가 자연 공원은 그 자체의 가치를 존중하고 보존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고 주장한다. 인공물 설치는 근본적으로 여기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찬성 측은 자연환경도 지키면서 지역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케이블카 설치는 괜찮은 방안이라고 꼽는다. 정해진 노선을 따라 관광객의 동선을 유도하면 오히려 자연 훼손을 줄이면서도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지역경제도 활기를 띠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측의 주장은 어느 곳이고 지역 특성에 따른 세부 여건을 제외하면 크게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양측의 팽팽한 주장 사이에서 정부가 뚜렷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일관성 있게 이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케이블카 입지 선정의 타당성과 재해 위험성 등을 비롯한 환경평가 과정에서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논의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 시일이 걸리더라도 논의 과정에 진입 차단의 벽을 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케이블카 설치의 빗장이 열린 지금, 전국의 명산을 보존하면서도 지자체의 현실적인 요구를 양립시킬 수 있는 정부의 혜안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3-08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