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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부산의 역동성은 ‘제작극장’으로
흔히들 부산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경제위기는 물론이고 도시인구 감소도 위태로운 상태다. 도시의 동력은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부산을 떠난다. 도시가 역동성을 잃었다는 말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2030세계박람회에 기대거나 새로운 국제공항 건설이 그런 역동성을 가져다줄 것이라 말한다. 물론 시너지가 생기는 환경을 만들 수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도시의 역동성은 새로운 건물이나 어떤 일과성 행사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현재 암스테르담 존 애덤스 연구원장으로 있는 러셀 쇼토는 저서 〈세상의 중심이 된 섬〉에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독창적인 개방성이었다”며 그런 신세계의 아이디어가 처음으로 구체화 된 발상지가 맨해튼이라 했다. 그러면서 뉴욕은 미국에서도 문화적 융합이 너무 거칠고 극단적이어서 미국이 아닌 외국에 있는 독립체 같다는 표현까지 했다. 즉, 도시 속에 다양한 문화가 서로 부딪힐 때 역동성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만들어 내는 문화는 그 종류가 너무도 다양하여 모든 부분을 다 알 수 없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으로는 필자의 눈에 보이는 것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서양 클래식은 우리의 문화와는 관련이 없는 것인가부터 짚어봐야 한다. 이 문제는 한국에 있는 IBM이 한국 회사인가 미국에 있는 삼성이 미국 회사인가 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배척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원래 문화라는 것은 주변에 있는 다른 문화와 섞이면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전용 극장 오페라하우스·국제아트센터
기획·생산·소비까지 담당하는 제작 기지로
문화의 구심점 역할 땐 부산의 미래 활짝
우리가 전통과 고유문화라 하는 것도 인접국들의 다양한 영향을 받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바뀌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문화는 다른 문화 요소와 만나 새로운 형태를 창출하기도 하고, 다른 장르와 만나 또 다른 장르를 만들기도 한다. 문화·사회·역사·지리적 융합을 통해 인류의 문화가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 클래식이라서 우리 문화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면 이는 문화가 가진 물과 같은 속성을 간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이 만들어 낸 대표적인 문화가 재즈이듯이 문화는 온갖 것이 섞이면서 발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산은 기초 예술이 낙후한 도시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좋은 공연에 수많은 관중들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몰리는 것을 보면 그런 장르를 향유할 관객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좋은 공연이 많지 않거나 경험한 것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음악적인 관점에 한정한 것이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예술을 “금이 되는 진흙”이라 했다. 전위예술가 쿠사마 야요이와 건축가 안도 다다오 덕분에 영국 여행 잡지로부터 ‘꼭 가봐야 할 세계 7대 명소’ 중 하나가 된 일본의 조그마한 섬 나오시마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난 2주간 부산광역시는 부산 지역 최초의 전용 극장이 될 부산오페라하우스와 부산국제아트센터의 건립에 따라 시민들의 네이밍 선호도를 조사했다. 2개 공연장의 명칭을 구체화해 브랜드 디자인 개발을 진행할 예정이며, 지속적인 홍보를 통해 세계인이 찾고 싶은 ‘문화관광 매력 도시’ 부산으로 거듭나고자 한다는 것이 부산시의 취지였다. 그렇지만 이름을 공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극장 속에 담을 내용이다. 그 해답은 일과성 행사나 건축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백화점 명품관을 둘러보고 바구니에 담아오는 식의 프리젠팅 시어터에도 있지 않다. 정답이 진정한 ‘제작극장’에 있음을 음악가들은 모두 알고 있다.
부산 사람이란 현재 부산에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고향이 어디든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부산이다. 부산은 항구였고 피난처였기 때문에 누구든지 넉넉하게 품었다. 원래부터 그런 도시였다.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전문성으로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들이 정착해 먹고 살 수 있는 도시로 만들자. 그들은 많은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환경을 보장하면 오게 된다. 그들이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환경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는 것은 새로 만들어지는 오페라하우스와 국제아트센터가 제대로 된 제작극장이 되면 가능하다. 그들이 모이면 부산은 한국 최고의 예술창조 도시가 될 것이다. 음악이 음악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예술도 같이 융성할 것이며 문화가 이끌어 가는 미래 산업도시도 만들 수 있다. 세계 각지에서 살아온 그들의 경험이 부산이라는 가마솥에서 들끓게 만들자.
2023-09-2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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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를테면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논법을 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명백한 사실이 카이사르에게만 해당되지 자신에게는 도무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프랑스 철학자 장켈레비치는 저서 〈죽음〉에서 톨스토이를 인용하면서 ‘그러한 삼단논법에는 내가 믿을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죽음’, 이 두 글자는 너무나도 낡고 흔해빠진 말이어서 그것이 뜻하는 실체적인 의미는 곧잘 흡수되지 않는다. 마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란 메뉴를 떠올리듯, 그것은 일상에서 필요에 따라 호출되곤 하는 ‘단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청년 고독사 비율이 역대 최대치라거나, 산업현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에 관한 뉴스를 들으면 당장 분노와 슬픔이 밀려와서 현실사회를 성토하지만 그때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멀리하지만, 죽음은 끼니마다 먹게 되는 밥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수다의 테이블’ 위에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가 솔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자기기만’에 익숙해진 탓에 늘 찾아서 걸치게 되는 자신의 옷처럼 편안해 질대로 편안해진 습성을 생각한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을 설파하면서 자신의 시민윤리와 덕목을 은근히 과시하지만, 사실 그도 자기기만의 수렁에 빠져 있다는 사실만큼은 철저하게 숨기는 게 사람이다.
며칠 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시인이 죽었다. 코로나 백신 부작용에 따른 합병증 진단을 받고 사투를 벌이다가 그리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실감은 심리적·물리적 거리에 비례한다. 가족이나 친척의 죽음은 지인의 죽음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슬픔의 결은 또 다를 것이다. 중동 국가의 어느 왕자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귓등에 윙윙거리는 귀찮은 모기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처리’한 뒤 느끼는 ‘애석한 쾌감’만치도 훨씬 못 미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렇듯 죽음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 비껴가면서 늘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삼단논법의 명쾌한 전제에 이은 결론인 것이다. 죽음이라는 결론은 너무도 명백해서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입술을 경유해 몸속으로 들어가리란 예상보다도 더욱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게도 살뜰하게 나를 대했던 시인의 사망 소식을 들어도 ‘자기기만’의 안락한 습성마저 깨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버선발로 상가에 들어가 통곡을 해도 모자랄 인연이었는데도 내 있는 곳과 장례식장의 거리를 가늠했으며, 휴대전화 부고 앱을 통해 조의금을 전달하면서 액수를 잠시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의 생전 모습과 지난날의 인연을 떠올리며 발인 날까지 ‘경건하게’ 지내자 생각하는 것만으로 애써 애도의 뜻을 지켰다 자위했으니 말이다.
죽음은 언제나 타인에게만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그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다른 진실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죽음, 너는 나를 속였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속인 주체는 죽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명명백백한 진실이지만 자신에게만큼은 맨 나중에 찾아오리라는 착각을 주곤 하는 ‘죽음’은 우리 사회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애도의 언어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란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말이 언제부터 ‘상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장례식장에서 부고 화환이나 부의금 봉투에 기재된 이후 널리 퍼진 듯하다. 마치 식당 정수기 위에 표기된 문구인 ‘물은 셀프입니다’처럼 말이다. 자신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듯한 상태인 ‘죽음’이 ‘삼가’와 ‘고인’과 ‘명복’이라는, 죽음이란 말보다도 더 낯설고 덜 사용하는 세 단어로 분화되면서 죽음은 비로소 삼단논법의 명쾌한 논리처럼 ‘대상화’된다. 대상화된 죽음은 물기가 빠져나가 바싹 말라버린 수건처럼 그저 자신 앞에 놓인 ‘사물’이 되는 것이다.
SNS 부고 소식에 천편일률적으로 주렁주렁 매달리는 문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의 발화 주체들은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애도의 뜻을 전달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 말고는 전달할 마음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둘러싼 이의나 문제 제기가 한밤 공동묘지의 고요처럼 증발해 버린 목소리가 되고, 상투적인 애도의 말이 서로 질세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에 소리를 보태 자신의 본심을 표시했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죽음’은 늘 자기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비극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조차 자기기만을 숨기는 휘장이 되는 사회에서 진정한 위로는 어디에 숨어서 웅크리고 있을까.
2023-09-1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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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외국인 유학생이 지역에 정주하려면
최근 정부가 현재 17만 명 수준인 외국인 유학생을 2027년까지 30만 명으로 늘려 세계 10대 유학 강국으로 도약하는 ‘스터디 코리아 300K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해 지역에 정주하게 함으로써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과 지역 대학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 대한 대중의 여론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사의 댓글을 살펴보면 “외국인 유학생에게 쓸 돈이 있으면 한국인 학생한테 쓰라”라는 말부터 특정 종교, 특정 국적의 유학생은 받으면 안 된다는 혐오 표현까지 부정적인 의견이 넘쳐난다.
한국은 지난해 합계출산율 0.7명을 기록해 ‘인구 소멸 1호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지역 대학은 학령 인구가 감소하여 20년 안에 절반 이상 문을 닫아야 할 것으로 예측되며,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출, 고령화, 노동력 부족 등 문제로 수도권 외 지역은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해 지역에 정주하게 하는 방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하나의 대안이다. 반지성적 감정으로 무작정 외국인 유학생 유치를 반대하는 것은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이들이 지역 사회에 정주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건설적 논의가 이뤄져야 할 시점이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은 큰 방향에서 옳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세부 각론에 있어 미흡하거나 부작용이 예상되는 지점이 있으므로, 정책 실행의 주체인 대학과 지자체는 보다 정치하게 정책을 보완해 실행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정부 발표에 따르면 외국인 유학생 유치를 확대하기 위해 대학 입학 조건 중 하나인 한국어 성적을 공인 한국어능력시험(TOPIK) 점수 대신 수업 이수 증명서 등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 실질적 입학 기준을 완화한다고 한다.
기존 기준에도 대학 수업을 이수하기엔 한국어 능력이 부족하여 전체 외국인 유학생 중 7.9%가 중도 탈락하고, 중도 탈락이 불법체류로 이어지는 실정이므로 대학에서는 외국인 유학생 대상 한국어 교육 강화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현재 대학에서는 자유 선택 교양 학점으로 한국어 과목을 이수하게 하고 있으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수준별 수업이 불가능하고 과목 간 연계성과 교육 시간이 부족하여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따라서 입학 후 1~2년 동안 학문 목적의 한국어 집중 교육 과정을 이수하게 하고, 이를 졸업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학사 제도 도입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학업 수행에 필요한 한국어 능력을 갖추고 전공과목을 이수할 때 외국인 유학생들은 ‘프리 라이더(무임승차자)’라는 인식이 사라지고 성공적으로 학위를 취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정부의 취업 연계 강화 방안에 따르면 외국인 유학생, 특히 이공계 학과 유학생을 주조, 금형 등의 뿌리산업, 제조업, 조선업에 종사하는 인력으로 양성한다고 한다. 즉 육체노동을 기반으로 하여 한국인의 취업 수요가 적은 1, 2차 산업 분야에 외국인 유학생을 취업시키겠다는 복안이다.
물론 지역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지역 대학에서 양성하자는 취지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외국인 유학생들이 취업할 수 있는 분야를 이른바 3D 업종으로만 한정하는 시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이 우리 경제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은 다양하므로 외국인 유학생의 취업 수요도 함께 조사하여 정책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예로 외국인 유학생의 66.7%가 인문·사회계열이므로 지역의 관광 및 무역 관련 산업체에 외국인 유학생 취업을 연계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외국인 유학생 유치, 교육, 취업에서 나아가 지역 정주를 위한 정책도 함께 마련될 필요가 있다. 외국인 유학생이 지역에 정주하기 위해서는 주거 문제가 필수적으로 해결돼야 하므로 인구 감소가 심각하여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에 거주할 경우 저렴한 비용으로 주택을 임대해 주는 정책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외 결혼, 출산, 보육 등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생애 주기별 복지 정책을 마련한다면 성공적으로 지역에 안착하여 정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다. 외국인 유학생들을 노동력 대체 수단, 등록금 보충 수단, 돈벌이 수단 등 목적을 위한 모종의 수단으로 취급하거나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포용할 때 진정한 글로컬 시대가 열릴 수 있다.
2023-09-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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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1943년 아그네스 데밀은 뮤지컬 ‘오클라호마’의 안무자로 고용되었다. 작품은 단숨에 인기를 끌어 2212회의 기록적 공연을 이어 갔다. 그러나 당시 그녀는 자신이 영혼을 온통 부어 넣었던 작품들이 비평가와 대중으로부터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있었다는 점에 낙담하고 있었다. 오클라호마 초연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데밀은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과 음식점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다.
“난 탁월해지고 싶은 열망은 불타오르지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솔직히 없어.” 이렇게 데밀이 고백하자 그레이엄은 곧장 응답했다. “너를 무엇이 행동하게 재촉할까? 그건 생명의 에너지야. 그걸 늘 간직하고 있어야 해. 넌 자신을 믿을 필요가 없어. 너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충동을 인지하고 그것을 가로막지 말고 움직이도록 길을 열어 둬.” 데밀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은 작품에서 기량의 부족이나 엉성한 연결이 보여 즐겁지 않고 불만스럽기만 하다고 한탄했다. 그러자 그레이엄은 “예술가는 만족하지 않아”라고 서두를 꺼내며 격정적으로 외쳤다. “어떤 순간에도 만족은 없지. 우리를 계속 행진하게 하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살아 있게 만드는 건 바로 기이하고 신성한 불만, 축복받은 동요뿐이야.”
마사 그레이엄의 불만에 대한 찬사는 최근 뮤지컬 ‘시카고’의 프로그램 노트에서 읽을 수 있다. ‘시카고’는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 25주년을 기념해 작년 10월부터 미국 51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하였고, 그 투어를 마치자마자 공연 팀은 5월 한국에 왔다. 사실 ‘시카고’가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1975년이다. 이 오리지널 작품은 밥 포시가 안무하고 연출하였는데,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약 20년 후 1996년 ‘시카고’는 재탄생하였고, 이것은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리바이벌의 연출은 월터 바비, 안무는 앤 레인킹이다.
불만이 인생의 원동력이라는 마사 그레이엄의 글을 인용한 사람은 바로 이 안무자이다. 오리지널 ‘시카고’에서 여자 주인공 록시 하트 역은 원래 밥 포시의 아내인 그웬 버돈이 맡았는데, 나중에 앤 레인킹으로 교체되었다. 레인킹은 이렇게 말한다. “어렸을 때 나는 마사 그레이엄이 아그네스 데밀에게 말했던, 현명하고 놀라운 글귀를 읽었다. 이때 얻은 깨달음이 내 영혼 깊숙이 자리 잡아 나를 성숙하게 했다.”
불만의 가치를 에너지로 활용하는 대표적 인물이 ‘시카고’의 록시 하트이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록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야심 찬 코러스 걸로 묘사된다. 그녀는 명성과 인기를 열망하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록시는 이렇게 노래 부른다. ‘나는 유명인이 될 거예요. 모두가 아는 그런 사람 말이죠. 사람들은 내 눈, 머리카락, 치아, 가슴, 코를 알아볼 것입니다. 멍청한 수리공의 아내로부터 벗어나 나는 록시가 될 거예요.’
‘시카고’의 핵심은 명성의 추구이다. 많은 사람은 명성을 뜬구름이라고 하찮게 치부한다. 그러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은 인생은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록시의 남편 아모스는 작품 전반에 걸쳐 아내가 그를 형편없이 대할 때에도 아내를 지원하기 위해 기꺼이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배우자로 묘사된다. 아모스가 출연한 장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그가 부른 노래 ‘미스터 셀로판’이다. ‘사람들은 나랑 나란히 걸으면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 내 이름은 미스터 셀로판이 맞아.’ 이 노래는 아내 록시를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가 무시당하고 과소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에 대한 가슴 아프고 우울한 반성을 담고 있다. ‘미스터 셀로판’이라는 제목은 아모스가 중요한 인물이 아니기에 마치 사람들에게 투명판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 모두 명성을 갈망한다. 록시의 남편 아모스처럼 인기 없이 셀로판처럼 사는 인생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불만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상이하다. 아모스 같은 사람들은 불만이 자신을 부식시킬까 두려워 불만의 길을 차단하여 그것이 에너지로 흐르지 못하게 한다. 반면 록시 같은 부류는 불만을 도전과 변화의 도구로 활용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라틴어 구절이다. 아모르는 사랑이며 파티는 운명을 의미하는 파툼(fatum)의 2격형이어서, 아모르 파티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핵심 개념이다. 니체에게 아모르 파티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서술한다. 불만의 고통, 인기의 열망, 질투의 감정을 포함한 모든 일을 좋은 것으로 활용한다면,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록시 하트는 명성을 열망한다. 이것은 그녀에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록시는 운명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한다.
2023-08-3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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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지금 우리 학교는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생활비를 후원하다가 종내에는 아예 학교를 설립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등학교가 명문고로 자립 기반을 갖추자 국가에 기증한다. 학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이야기다.
한국 사회 불평등 임계점 넘어
교육의 변화에서 해법 찾아야
공공기능 위한 공간 혁신 필요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어른 김장하’를 봤는지 물어보거나 혹은 꼭 보기를 권유한다. 그렇게 만난 ‘어른 김장하’는 꼰대라는 용어에 묻혀버린 ‘어른’이라는 말을 불러내 가슴 뭉클하게 했다. 참으로 어른이 많아졌으면 하는 시대다.
그런데 청년도 노인도 학생도 선생도 불행한 사회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청년은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불행했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 노인 빈곤과 노인 자살률은 우리나라가 세계 1위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현장을 온몸으로 받아온 노인들에게 존엄한 인간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서이초 교사의 자살로 드러난 교권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다.
이런 사회 현상을 보며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이미 임계점을 넘었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박탈감이 개인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고 최근 들어서는 타인에 대한 공격과 혐오 범죄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회적 문제의 중심에 교육이 있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한국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가장 사회적인 수단이 한국의 교육이라고 말한다. 12년 동안의 줄 세우기식 공교육이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승자와 패자로 구분해서 승자 독식의 사회를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경쟁 지상주의의 주입식 교육은 학력 계급사회를 만든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과 패자의 열등감은 당연하다.
서울대에 가도 반수를 하는 이유는 ‘의대’를 가기 위함이고, 경제학과, 사회학과 등을 나와도 최종 종착지는 로스쿨로 이어지는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대학입시에 킬러 문항 출제 배제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능력주의와 경쟁사회가 불러온 불평등을 사회적 문제로 푸는 대신 자신을 죽이고 타인을 응징하는 것으로 치닫는 사회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변화가 절대적이다.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는 “경쟁 교육은 야만”이라고 했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독일은 1970년부터 경쟁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학교를 만들어 놓은 일본도 2014년부터 경쟁 교육을 더 이상 시키지 않고 있다.
교육의 변화와 더불어 필요한 것은 학교 공간의 혁신이다. 교육부의 학교 공간 혁신사업과 맞물려 근래 들어 학교 건축에 있어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신설 학교가 대상이다. 기존의 학교도 공간 변화를 꾀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기존의 학교는 학생, 교사, 지역사회 중심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관리자의 관리 편의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학교를 이용하고 머무르는 사람은 학생인데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라 볼 수 없다. 획일화된 교실은 창의성보다는 전체주의를 양산한다.
노후 학교를 대상으로 리모델링하는 ‘그린 스마트 스쿨’ 사업이 있기는 하지만 소수의 학교로 제한되어 있다. 특히 공공 건축물 중 학교에 평균 건축비가 가장 적게 책정된다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지금은 폐교가 늘고 있지만 예전 학교의 대부분은 동네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자리 잡았다. 마을 공동체의 핵심 공간이었던 셈이다. 영국과 독일 모두, 학교는 지역공동체와 커뮤니티를 맺고 공공시설의 역할을 단단히 한다. 심지어 독일은 지역민이 지나가다 대학 강의에 들어와 듣는 경우도 종종 있고 이것을 이상하게 보지도 않는다.
학교가 경쟁이 없는 교실, 학생 중심의 다양한 공간, 거기다 지역 공동체와 함께하는 공간이 된다면 학교폭력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변화된 공간은 수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간이 바뀌고 수업 방식이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지금의 선택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진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2023-08-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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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기후위기, 예술, 자연
기후위기 문제는, 최근 예술가들의 작품과 미술관 전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서도 기후위기를 주제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 온 장한나 작가의 ‘뉴락(New Rock)’ 전시가 열리고 있다. ‘새로운 돌’이라는 뜻의 ‘뉴락’은 작가가 전국을 떠돌며 채집한 화석화된 플라스틱을 가리키기 위해 직접 만들어 붙인 이름이다.
실제 돌이나 바위가 아니라, 버려진 플라스틱이 풍화·퇴적 작용을 거치면서 자연의 일부가 된 물질이다. 자연물이 퇴적되거나 생명체가 붙어 암석화된 것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개미나 동물들이 정착해 살아가는 집이 된 스티로폼, 이끼가 낀 플라스틱과 같은 것들이다. 즉 자연물과 인공물 중간의 물질로 양자가 결합되어 두 극단 사이의 경계를 보여 주는 존재가 뉴락이다. 작가는 이러한 존재가 지구에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우리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플라스틱 사용과 환경 문제를 알리기 위해 이러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뉴락들을 본 관람객들은 분명 돌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돌이 아닌 플라스틱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뉴락들이 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진다. 뉴락이 떠 있는 바다 속을 수조 안에 재현한 ‘신생태계’라는 작품은 묘하게 환상적이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뉴락이 이렇게 아름답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가는 거라면, 플라스틱을 계속 사용해도 된다는 것일까’라고 질문하는 학생도 있고, 쓰레기를 미화하는 것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아름다운 쓰레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관람객들도 있다.
장한나 작가는 아름답다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은 될 수 없으며, 경고와 같은 통상적인 방식이 아닌 아름다움을 통해 기후위기 문제를 환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의 말대로 옳음과 아름다움, 즉 선(善)과 미(美)는 근대 철학자 칸트(1724~1804)가 마음의 삼분법을 이론화하여 설명함으로써 이미 오래전에 분리된 개념이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의 3대 비판서를 통해 지식, 윤리,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인간 마음의 작용 과정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근대 철학을 완성했다.
특히 칸트는 자연미와 예술미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했는데 양자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도 각각이 가지는 공통적 성격을 규명했다. 예술은 인간이 계획한 생산물이라는 점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지만, 예술의 의도가 너무 명백하거나 거슬리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마치 자연처럼 보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거꾸로 자연은 그것이 예술처럼 보일 때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때는 의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며 전적으로 자유로운 자발적 존재로서 그것의 감상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자연미가 예술미보다 더 자유롭고 순수하다고 본 것이다. 뉴락은 자연이기도 하면서 예술이기도 하다.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뉴락은 자연미의 관점에서는 아름답지 않지만, 예술미의 관점에서는 아름다울 수도 있다.
기후위기 관련 교육 등은 대개가 답이 정해져 있고, 어쩔 수 없이 혐오감이나 공포심을 유발하거나 위험을 경고하는 방식이 된다. 그러나 답이 정해진 예술과 전시는 흥미롭지 않다. 오히려 예술 작품과 전시는 상충하는 논의의 장이 역동적으로 펼쳐질 수 있을 때 더 성공적이다. 아름다운 뉴락을 접한 관람객들은 한참 동안 서서 감상하기도 하고 함께 온 가족, 연인, 친구들과 여러 의견들을 나누며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전시를 보러 온 학생들은 가끔 뉴락이 예술 작품이 맞는지 묻기도 한다. 작가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닌, 채집된 물건도 예술이 될 수 있느냐는 좋은 질문이다. 뉴락은 작가가 특별한 의미 전달을 위해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레디메이드 예술이고, 개념미술이다. 또한 사회적 관심과 변화를 위해 직접 행동하는 작가의 실천적 예술 작품이다.
사실 장한나 작가의 뉴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처음 뉴락을 만났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을 관람객들도 느끼게 되는 소위 ‘현타’의 순간인 것 같다. 바로 그 깨달음의 순간이 이 작품을 개념미술로 만든다. 애초에 작가의 뉴락 채집은 2017년 바닷가에서 돌멩이라고 생각하고 집어 들었던 그것이 너무 가볍다는 데 놀라고, 이어 돌이 아니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 돌처럼 보이는 꽤 아름다운 뉴락들이 사실은 플라스틱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의 가슴속을 스치는 미묘한 감정, 섬뜩함, 이질감, 불편함, 염려와 걱정 등이 이 작품의 의미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려는 것도 이것이다.
2023-08-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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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다른 삶을 살아갈 용기
캐나다 출신 가수 레너드 코헨은 1960년에 그리스 히드라 섬에 있는 작은 집 한 채를 산다. 히드라 섬은 수도 아테네에서 배를 타고 2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섬이다. 히드라 섬으로 숨어들 때 코헨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가수 코헨이 아니라 시인이자 소설가 코헨이었다. 1960년대 내내 코헨은 그 작은 섬에 칩거하면서 시집과 소설을 출판한다. 지금도 히드라 섬에 가면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골목에 있는 옛집을 볼 수 있다. 개인 소유라서 내부를 구경할 순 없지만, 젊은 코헨이 어떤 분위기에서 창작열을 불태웠는지 짐작할 만하다.
영국 유학 시절 나는 코헨의 광팬이었던 룸메이트의 손에 이끌려 히드라 섬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벌써 햇수로 25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지난달 아테네에서 있었던 학술행사가 끝난 뒤에 나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코헨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중년의 쇠퇴를 피하기 어려운 나이가 된 나는 정체 모를 그리움에 이끌려 패기만만했던 나의 한때를 숨겨 두고 온 그 섬에 다시 가 보고 싶었다. 히드라는 헤라클레스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의 머리를 자르면 둘이 생긴다는 그 괴물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문자 그대로 읽으면 ‘물’이라는 뜻이다. 형체는 없지만 그럼에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물이다.
레너드 코헨이 살았던 그리스의 작은 섬
수십 년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 간직
기꺼이 불편함 선택 섬 사람들 존중받을 만
기후 위기로 삶터 사라질 위기 안타까워
환경 보전을 위해 히드라 섬 주민들은 자동차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동 수단은 도보 아니면 나귀들이다. 다른 섬으로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 한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서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를 탔다. 조금 이른 휴가를 나선 관광객을 잔뜩 실은 페리가 히드라 섬에 도착하자 머리 깊숙이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섬의 정경은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변한 것이 없었다. 가게도 그대로였고 주인들도 그대로였다. 어린아이들은 자라 있었고 새로운 고양이들이 태어나서 그늘에서 늘어지게 잠들어 있었다.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섬은 지금 그대로 모습으로 영원할 것 같았다. 작은 초등학교에 한국의 도시 어느 동네에서 내가 볼 수 있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섬에서 자란 아이들의 꿈은 항해사가 되거나 아니면 나귀 조련사가 되는 것이다. 공부를 하려면 육지로 나가서 학위를 따고 해외에서 취업을 하겠지만, 그러다가 섬으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해변에서 키오스크를 운영하는 한 여성은 독일에서 일하다가 귀향했고, 같은 장소에서 마주친 중년 남성은 놀랍게도 한국 울산에서 일하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챗봇이 나오고 인공지능 관련 신기술이 문명의 단계를 업그레이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쉴 틈 없이 쏟아지던 세계에서 나는 갑자기 아침저녁으로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과거의 세계로 빠져 들어온 것 같았다. 토끼 굴로 뛰어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가게 주인들은 다 마을 주민이었고, 섬 주민들 중에서 일하지 않는 이들은 유일하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뿐이었다. 며칠 지나니 모두 길에서 마주치면서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던 나에게 익숙한 마을 공동체였다. 문득 옛것을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는 이 세계가 과연 속도를 생명으로 삼는 현대적인 세계보다 후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편리성을 얻기 위해 포기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소중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히드라 섬의 일상이었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본인들 스스로 불편한 방식을 선택한 삶도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말 그대로 돈의 가치로 모든 것을 재단해서 일률적으로 줄 세우기를 시키는 경쟁 구도가 삶의 다양성을 재단하는 절대적 기준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익숙함을 내던지고 낯선 환경으로 과감하게 나아가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히드라 섬에 머무는 동안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예외 없이 기후 변화의 위기가 이 아름다운 섬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다행히 로도스 섬처럼 폭염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온은 연일 40도 이상을 오르내렸다. 우리가 편리함을 위해 내달려 온 그 속도만큼 지켜져야 할 많은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음을 새삼 느꼈다. 코헨의 자취가 남아 있는 히드라 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다른 삶을 살아갈 용기가 없다면 지금 이 삶의 방식도 오래 지속하기 어려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23-08-1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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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없었던 일’은 없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정치적 해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없었던 일’로 하기이다.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하여 적극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보다 사안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 그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이슈가 되는 사안을 처음부터 숨기고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문제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는 무속인의 대통령 관저 선정 개입 의혹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무속인 천공이 대통령 관저 이전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대통령실은 의혹을 제기한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과 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 그리고 관련 내용을 최초 보도한 기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이에 따라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 결과 천공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풍수 전문가이자 관상가인 백재권 사이버한국외대 겸임교수가 육군총장 공관을 답사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백 교수가 답사할 때 경호처장과 청와대 용산 이전 TF팀장이 동행하였는데, 이는 대통령실이 고발 당시 이미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이 천공이 아니라 백 교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실은 처음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왜 이런 사실을 공개하여 의혹을 풀지 않았을까. 만약 사실이 드러난다면 정치적 공세를 받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숨겨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를 숨기고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는 사실이 없었던 일로 되지는 않으므로 이는 올바른 정치적 해법이 아니다.
두 번째 유형은 진행 중인 사안일 경우, 이를 백지화해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는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 백지화가 있다.
지난달 6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김건희 여사 일가에게 특혜를 주고자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이 고속도로 노선의 종점을 바꾸었다는 야당의 의혹 제기 때문이다. 원 장관은 김 여사 일가가 소유한 선산을 처분하지 않는 이상, 야당의 선동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원인 그 자체, 즉 고속도로 사업 자체를 백지화해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도 좋은 정치적 해법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충분한 설명이 없어서 도리어 의혹만 증폭되고, 또 이 문제에서 비롯한 다른 사회적 갈등이 끊임없이 파생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유형은 문제가 되는 사안을 통해 얻은 이익을 되돌려 주어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아들의 석사 학위 반납과 딸의 의사 면허 반납을 들 수 있다.
조 전 장관의 아들은 연세대 대학원 입시에 사용되었던 인턴 증명서가 문제가 되자, 지난달 10일 석사 학위를 반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딸 조민 씨도 지난달 5일 자신의 의사 면허를 반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학위와 의사 면허는 자진 반납 제도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학위와 의사 면허를 자진하여 반납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모종의 의도를 가진 정치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언의 의도는 문제가 되는 행위를 자진해 되돌려 줌으로써 해당 사안을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돌려준다고 하여 잘못한 일 자체가 없었던 일로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유형의 전략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없었던 일로 하기’ 전략은 사과를 훔치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사과를 훔치고 포도를 훔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유형은 사과를 훔치다 걸리자 훔치지 않았다고 큰소리치고는 사과를 안 사겠다고 우기는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사과를 훔친 뒤 다시 돌려주고, 이미 돌려줬으니 훔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격이다. 어느 경우이든 훔친 행위, 즉 잘못된 행위가 없었던 일로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없었던 일로 하기 전략은 애초에 정치적 해법이 될 수 없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우선 발생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잘못된 점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있다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을 받고, 제도에 문제가 있다면 구조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발생 원인에 따라 해결책을 마련한 후 이를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국민들이 기대하는 올바른 정치적 해법이다. 없었던 일로 하자는 식의 접근은 해법이 되기는커녕 국민을 기망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2023-08-0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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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진정한 사랑과 친절을 믿고 기다리며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들르곤 하는 식당이 있다. 자갈치시장 인근 밥집인데 고등어구이 정식 메뉴가 인기가 있는 집이다. 주인은 할머니다. 밥을 먹고 현금을 내밀면 정겹고 구수한 말투로 인사를 하지만, 카드를 내밀면 카운터 위에 수건으로 덮어 놓은 카드단말기를 꺼내 조심스레 전원 스위치를 켠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도 없이 손님을 돌려보낸다. 식당을 나서는 뒤통수가 간지럽게 구시렁거리는 볼멘소리는 덤이다.
이런 식당이 아직도 많다. 주로 오래된 식당일수록 그렇다. 오랜 장사 생활로 산전수전을 겪은 자갈치시장 일대 상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억척같은 ‘자갈치 아지매’를 연상한다. 자갈치 아지매 이미지는 분명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는 자갈치시장 일대에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자갈치는 부산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장소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었다. 이곳이 부산에 있다는 사실쯤은 이제 누구라도 알고 있다. 부산이 곧 자갈치요, 자갈치가 곧 부산이다.
얼마 전 서울의 한 교사가 교내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임용된 지 얼마 안 되는 새내기 교사였다. 이런 사건은 우리들에게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학교에서 가끔 벌어지는 선생님과 학생, 학부모가 관련된 각종 사건사고 소식들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숱하게 들어왔다. 이번 사건처럼 과도한 업무나 학부모의 간섭 등으로 고통받는 교사들에 대한 소식은 슬픔을 넘어 숙연함까지 자아낸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현재 한국 교육현장 일선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잘살고 힘깨나 쓰는 학부모들이 밀집된 서울 서초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 강남은 박정희 정권 때 본격적으로 개발된 지역이다. 경부고속도로 완공을 위해 한남대교 남단과 양재 구간을 연결하는 건설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이 지역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둘째는 1971년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정치 자금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영동지구 개발로 1980년대에 이르러 원주민들이 쫓겨나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외지에서 온 엘리트 계층이 대거 몰려들면서 어느새 이 지역은 서울에서도 부자들을 대표하는 동네가 된 셈이다.
다시 자갈치시장으로 가 보자. 자갈치시장은 부산항 남항이 끼고 있는 수산시장이다. ‘자갈치’라는 명칭은 예전부터 바닥에 자갈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매축공사에 따라 지금은 매립되고 사라진 당시의 용미산을 기준으로 자갈치시장 남쪽은 남항, 북쪽은 북항이 된다. 1931년에 시작된 남항 매축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곳은 전관 거류지 일본인이 이용하는 ‘남빈 해수욕장’이었고, 대대적인 매축공사 이후 시가지가 확장된 지역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당시에는 ‘남포동 시장’이라고 불렀다. 부산항 제1부두에 있던 부산공동어시장이 현재 자리로 옮겨 오면서 자갈치시장과 공동어시장을 잇는 거대한 수산시장 벨트가 자리 잡았다.
한 교사의 죽음과 재래시장 인근 식당 주인의 불친절한 서비스가 자연스럽게 서로 교차했다. 한쪽은 불합리하고 편견으로 가득 찬 한국 교육의 실상을 상징하고, 다른 한쪽은 조그만 이익 때문에 상실해 가는 상거래의 도의(道義)를 실감 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곤 하는데, 그건 ‘식자층’일수록 더 그런 듯하다. 자본주의는 분명 안 좋은 사회 시스템이지만 개인의 주관과 감정을 배제하고 정확한 거래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이념과 체계’이다. ‘냉혹한 자본주의의 세계’란 말을 자주 입에 담듯이, 자본주의는 이익과 손실이라는 철저한 셈법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체계다. 주는 게 있으면 반드시 돌려받는 게 생기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자본주의’는 현실의 교육 시스템이 야기하는 문제나 상인의 부도덕한 상술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자본주의나 사회체계를 떠나 형성된 인간 윤리의 말살과 훼손이 어디서부터 작동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개인의 성품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병리 현상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가. 특정한 행위를 두고 그 원인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환원주의’다.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현상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있을 것 같진 않다.
자기 성찰이 실종된 시대에 앞서 말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진정한 사랑과 친절, 이 두 낱말이 위의 사례를 상기하면서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너무 뻔한 도출이라 식상하겠지만, 아직도 나는 이 두 단어가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 묘안이라고 믿고 싶다.
2023-07-2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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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여행의 의미에 대한 영화적 탐구
‘어디로’ 여행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말은 넘치지만, ‘왜’ 여행해야 하는지 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한다. 여행 산업은 ‘어디에’에 초점을 두고 여행을 홍보하여, 공항의 안내소나 여행사의 홈페이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정보는 아름다운 도시나 문화적 명승지 같은 것뿐이다. 그런데 여행의 이유와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이해가 깊을수록 여행의 경험을 개인적 욕구와 잘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의미는 추상적 주제이므로 직접 사유하기는 힘들지만, 영화를 소재로 생각하면 쉽다.
단순하게 여행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설명은 여행 경험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한다. 여행은 모험, 탐험, 변혁을 상징하는 복잡한 교향곡이다. ‘여인의 향기’ ‘버킷 리스트’와 같은 영화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상징성을 훌륭하게 예시하여 여행의 다면적 의미를 드러낸다.
인류는 원시 시대부터 탐험을 시작하여, 우리는 대양을 가로질러 우주로, 그리고 자신의 의식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버킷 리스트’는 불치병에 걸린 두 남자 에드워드와 카터의 여정을 따라간다. 이들은 죽기 전에 자신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스카이다이빙을 하며 그들은 두려움에 맞서고, 에베레스트에 오르며 높은 산맥의 적막함을 느끼고, 인도의 타지마할을 방문하여 장엄한 건축 속에 사랑의 상징을 보고, 중국의 만리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여행하며 고대 건축의 위대함을 목격한다.
여행은 외부 세계를 탐험하는 것만이 아니다. 저명한 여행 작가 피코 아이어는 “우리는 마음과 눈을 열기 위해 여행한다”고 말했다. 내면의 여정은 ‘여인의 향기’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군대에서 사고로 실명하여 은퇴한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은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가득 차서, 추수 감사절 기간 자신을 돌봐 주는 고등학생 찰리 심스와 함께 뉴욕으로 여행한다. 이 여정은 외부적 탐험 이상의 의미가 있다. 중령은 형네 집을 찾아가 싸늘한 그들의 시선을 통하여 자신의 무가치한 상태를 확인하고, 차 안과 호텔에서 찰리는 중령과 대화하며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신을 본다.
여행에는 불확실성이 내재되어 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빛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잘 모르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의 측면을 발견하고, 유연하고 용감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이렇게 여행은 도전을 기꺼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변화를 촉진한다.
여행의 변혁적 잠재력은 두 영화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버킷 리스트’에서 부유한 사업가 에드워드는 물질적 소유를 능가하는 가족의 가치를 배운다. 생의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는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던 딸과 화해하며 귀여운 손녀의 뺨에 키스한다. 그러고는 “이 세상 최고 미인과 키스한다”는 버킷 리스트를 지워 버린다.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는 앞이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탱고를 추고 페라리를 몰며, 찰리는 자살하려는 프랭크를 설득하여 생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도전적 경험은 개인의 성장을 촉진한다. 의미 부재의 암흑 속에서 절망하던 프랭크는 다시 삶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찰리는 프랭크의 변화를 통하여 거꾸로 격려를 받으며 소심한 소년에서 순수하고 용감한 청년으로 진화한다. 이 점은 학교의 상벌위원회에 찰리의 보호자 자격으로 참석한 프랭크가 찰리의 행동을 옹호하는 장면에 잘 나타난다. “친구를 밀고하지 않는 오늘 찰리의 침묵이 옳은지 그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위원 여러분께 이점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찰리는 자신의 미래를 사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팔지 않았습니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진로를 계획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목적지 선택, 이동 속도, 머무를지 앞으로 나아갈지 결정하는 것은 모두 여행자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여행 과정에서 우리는 인생의 장악력을 확인한다. 이러한 자유는 두 영화에서 잘 드러난다. 신체적 장애 때문에 제약된 삶을 살아온 프랭크는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인간이 되고, 에드워드와 카터는 질병으로 상실했던 인생의 고삐를 다시 거머쥔다. 주인공들의 여정은 환경적 조건이 그들의 삶을 좌우하는 것을 거부하는 해방이며 자율성의 선언이다.
요약하면, 두 영화는 캐릭터의 변화하는 여정을 압축하여 여행의 다면적 의미를 나타낸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여행은 외면과 내면의 탐험이며, 개인적 변화의 촉매제이자 자유의 상징이다. 우리는 이러한 영화적 내러티브의 렌즈를 통해서 여행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2023-07-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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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기분 좋은 도시, 기분 좋은 건축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것은 축구와 안토니 가우디이다. FC바르셀로나는 축구를 즐겨 보지 않는 사람들도 알 만큼 세계적인 축구 클럽이고, 안토니 가우디 또한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바르셀로나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르셀로나의 건축물 일곱 개는 모두 안토니 가우디 작품이다. 인구가 160만 명인 바르셀로나에 한 해 관광객이 3000만 명 다녀간다고 하니, 가히 관광으로 도시가 먹고사는 듯하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가의 이름이 도시의 상징이 된 특별한 도시, 바르셀로나는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대학시절부터 책으로가 아닌 실제로 보고 싶었던 현대건축의 전시장인 이곳, 바르셀로나에 지금 와 있다. 대한건축학회 부울경지회(회장 이상진)가 마련하고 부산건축가회(회장 이봉두)가 참여하여 공동 기획한 스페인 건축문화 탐방으로 바르셀로나에 온 필자는 가우디가 남긴 ‘사그라다 파말리아 성당’ 앞에서 그의 작가정신과 예술혼, 그리고 그런 그를 길러 낸 바르셀로나가 부러웠다.
1882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성당을 가우디가 맡게 된 건 1883년으로, 그가 사망할 때까지 동쪽만 지어졌다. 그가 지은 동쪽을 보고 나머지 서쪽을 후세가 짓고 있는데 아직도 완공되지 않았다. 입체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식 건축양식의 가우디 시기와 후대의 시공과 설계의 조화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 변천이 흥미로웠다. 성당은 가우디 사후 100년에 맞춰 2026년에 완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르셀로나 시 당국이나 시민이 완공에 필요한 자금력과 기술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천천히 시간을 가지며 공사를 진행하니 각기 시대와 상징, 공간을 달리하여 극적인 효과와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나의 건축물이 시간과 공간별로 만든 스토리텔링은 관람자들이나 가톨릭 신도들에게 신비감과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3차원의 공간에 시간이 더해져 건축은 4차원이 된다. 건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느낌이 달라진다. 거기에다 개인의 체험이 더해지면 특별한 공간이 된다. 시간의 사용이 공간의 흔적으로 남을 때 건물은 건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더불어 건축의 프로세스에 시민들을 참여시킨다면 그게 곧 스토리가 된다. 오래오래 짓는 건축물이 많은 이야기를 담아 역사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여행자들이 가우디의 작품을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 이유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 한 사람만으로 기억되기에는 멋진 건축물이 너무 많다. 가우디의 영향인지, 독특하고 다양한 건축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 없는 바르셀로나인들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대건축 거장들의 건축물을 마주할 수 있는 이곳은 기분 좋은 도시임에 틀림없다.
지난 6월 말, 발간된 인문 무크지 〈아크〉 6호 ‘기분’에서 차윤석(동아대) 교수는 “건축과 도시는 사람들이 ‘기분’ 좋게 걸을 만한 공간과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며 그것이 건축과 도시가 지켜야 할 미덕이자 의무라고 했다. 건축과 도시가 제대로 인식되고 이해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디자인과 양식이 필요한데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지고 디자인된 건축과 도시는 세월을 넘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필요조건을 충족한 셈이라며 현재의 세대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건축과 도시는 다음 세대가 이해하고 즐기기 위한 기반이 된다고도 했다. ‘불특정 다수’, 즉 ‘공공’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건축과 도시는 눈을 즐겁게 해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유럽의 도시와는 달리, 부산은 압축된 도시화 과정을 겪었다. 피란 이후 만들어진 혼종문화는 다양성을 포용하고 항구, 포구, 산과 들, 305km의 해안선, 산복도로, 골목과 강 등 모든 자연을 품고 있는 매력적인 풍경을 갖고 있다.
강동진(경성대) 교수는 〈아크〉 6호 ‘기분’에서 ‘부산’ 하면 해양, 영화, 물류업, 수산업, 근대 역사, 컨벤션 등이 떠오르지만 그 어느 것도 국제사회에서 강력한 마케팅 파워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들을 부산 풍경이라는 대주제 아래 집중시켜 다시 엮어 내야 한다고, 섬세하면 섬세할수록 느리면 느릴수록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생각하면 기분 좋아지는 도시, 방문하면 기분이 더 좋은 도시, 세월을 넘어 오래 지속되는 부산을 위해 남기고 채울 것들을 찾아야겠다.
2023-07-1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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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뜨거운 여름에 떠나는 미술관 여행
영국의 대영 박물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은 60만 점이 넘는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시되는 작품 수만 3만 5000여 점에 이른다. 루브르는 16세기 프랑스와 1세 왕실에서 시작되어 450년이 넘는 긴 소장품 수집의 역사를 자랑한다.
루브르의 소장품은 나폴레옹 시대에 급격하게 늘어났다. 루브르가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유물은 나폴레옹 원정 당시 점령지에서 약탈한 전리품들이 많아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개관 초기에는 나폴레옹 미술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폴레옹 군대를 따라다니며 수집만 하는 수집관이 있었는데, 루브르의 세 개의 관 중 드농관은 유명했던 수집관 드농을 기려 이름 붙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과는 별도로 루브르는 프랑스인들에게는 프랑스혁명의 상징적 결과물로서 아주 중요한 곳이다. 민중들이 투쟁을 통해 왕과 귀족으로부터 직접 쟁취해 낸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역사적인 의미 때문이다. 본래 루브르는 프랑스 왕가가 사용했던 왕궁이자, 프랑스 왕들의 수집품들을 보존하던 곳이었다. 공화정 이후 나폴레옹은 이 루브르궁을 민중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루브르는 1793년 대중들에게 처음 개방되었다. 이렇게 박물관을 귀족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개방한 것은 루브르가 최초이다. 루브르가 중요한 것은 근대적 개념의 첫 공공미술관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공공미술관들의 주요 기능은 대체로 ‘전시’ ‘교육’ ‘수집과 보존’, 이 세 가지이다. 루브르 이전에도 유럽에는 미술관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체로 왕이나 귀족 가문이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한, 수집한 예술품 ‘보존’을 주된 기능으로 하는 ‘수장고’ 역할이 컸으며 특권층들에게만 작품을 보여 주었다. 지금 우리가 미술관의 기본적 역할로 여기는 ‘전시’와 ‘교육’이라는 기능은 바로 루브르 미술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교양 있는 귀족 계층이 아닌 교육받지 못한 대중들에게 전시를 개방하기 위해서는 ‘교육’ 기능이 반드시 필요했다.
루브르에는 엄청난 분량의 중요한 미술 작품과 유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관람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밀로스섬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의 ‘비너스’ 조각상이다. 본래 루브르는 이 작품을 그리스 시기 다른 조각상들과 같은 전시실에 전시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다른 작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비너스 앞에만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루브르는 비너스에게 혼자만의 전시 공간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비너스 조각에 그렇게 매료되었을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람객들은 비너스에게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느낀 듯하다. 많은 이론가들이 이 완벽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애를 썼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비너스의 얼굴과 몸 전체에 적용된 황금비율이다. 황금비율은 1대 1.618의 비례로서 고대로부터 완벽한 균형과 미의 법칙으로 여겨져 왔다. 황금비율은 고대 피라미드의 높이와 밑변으로부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명함, 노트, 책의 가로와 세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되는 비례 원칙이다. 이 황금비율은 보는 사람에게 안정되고 완벽한 균형과 미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에는 이러한 고대의 비례와 균형의 규칙이 철저하게 적용되어 있다. 비너스의 몸 여러 곳에는 수많은 황금 비례가 발견된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여신을 재현하는 데 왜 그렇게 강박적으로 황금비율을 적용했던 것일까?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에서 신의 위력이 나온다고 보았으며,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례와 균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점 없는 이상화된 완벽한 존재로서 비너스는 시공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다.
대리석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조각의 기술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기에 확립되었다. 이상적인 비례와 균형을 갖춘 그리스 조각들은 르네상스 조각과 회화에 모범이 되었다. 특히 밀로의 비너스는 그리스 시기에 만들어진 조각으로 팔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 그대로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더 큰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다른 그리스 조각들은 원형에 가깝게 발굴되거나 보존되는 경우가 드물었고, 남아 있는 대부분은 로마 시대 모작이기 때문이다.
밀로의 ‘비너스’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치 연작’,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등의 걸작들과 함께 루브르를 찾는 관람자들에게 고전적인 미의 전형을 제시하면서 세계 3대 박물관으로서 루브르의 위상을 굳건히 해 주고 있다. 올여름 프랑스 루브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 작품들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2023-07-0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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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논쟁의 씨앗이 떨어진 자리
며칠 전 아침에 깨어나 보니 새벽 1시 30분경 어느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주말 오전이었지만 그의 직업 특성상 출근하는 날임을 알고 있었기에 출근 시간에 맞춰 한 번, 그로부터 한 시간여 뒤에 한 번 더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필시 용건이 있었기에 ‘불편한 시각’이었는데도 그즈음 휴대폰을 열어 통화를 시도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한다. 전화벨 소리는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소리다.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통화를 하는 일은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다. 나 자신이 누구에게 할 말이 있을 때 전화를 거는 행위 또한 일방적인 신호다. 여기서 ‘일방’과 ‘언어적 교감’은 미묘하게 갈라진다. 언어적 교감을 위해서는 어느 편이든지 먼저 일방적인 신호를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을 때 먼저 행한 일방적인 신호는 ‘정다운 눈짓’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상대방과 언쟁을 높이게 되거나 어떤 사정으로 사이가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때는, 일방적인 신호는 ‘적의(敵意)를 실은 탄두’였다고 오인(誤認)하게 된다.
생각으로 시작해서 생각으로 끝나야지, 그 생각이 궁리를 거듭해 사실관계 자체를 잘못 해석하거나 오해를 거쳐 굳건한 판단에 닿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SNS를 달구었던 시인과 독자 사이의 논쟁, 그리고 여기에 수많은 의견이 달라붙어 ‘확전’의 양상마저 띠었던 ‘언어 타락-권력 논쟁’을 복기해 본다. ‘유명 시인’과 ‘유명 독자’ 사이에서 촉발된 민감한 글들이 SNS 곳곳에 퍼지면서 그 논쟁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왔다. 어떤 식으로든 양자가 논쟁을 거듭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고 ‘평온’해진 상황에서 그 일을 거론하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문득 ‘생각’과 ‘판단’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깊고도 먼지 말을 하고 싶다.
상대에 대한 생각이 궁리를 불러오고 막연하나마 판단을 내리게 되면 상대방의 진면목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스스로 상대방을 결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럴 때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에는 무수한 오해와 편견이 활자 밑에 깔려 있다. ‘유명 독자’가 펼쳤던 명쾌한 논리와 문학 현실의 맥을 잘 짚었던 시각적 예민함은, ‘유명 시인’의 자기 확신과 엘리트주의적인 논법을 뚫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 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것은 사실 두 사람이 합작해서 간신히 쌓아놓은 장벽이 아니라, 두 사람이 보여준 논쟁과 화법에 달라붙어 편을 갈라 서로를 ‘무찌르기’에 바빴던 군중들이었다.
사람 마음만큼 간교한 것도 없다. 흔한 말로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표현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 점은 사람만큼 허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내면을 가진 존재도 없다는 말과도 같다. 사태가 이럴진대 우리는 저마다 숱한 맹세와 약속과 믿음을 드러낸다. 그 맹세와 약속과 믿음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언어 타락-권력 논쟁’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지금쯤 그 논쟁을 상기하며 어떤 생각을 할까. 모르긴 해도 아마 논쟁을 펼치면서 비판했던 논리와 판단이 더 굳건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득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으로 촉발된 논쟁적인 담론을 수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반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나 종교 논쟁만큼 해답 없는 논쟁도 없다. 여기에 문학도 끼워 넣고 싶다. 요새 한동안 뜸해서 그 옛날의 ‘문학 논쟁’이 그리웠던 사람들은 앞서 말한 논쟁을 지켜보며 논쟁의 진위와 상황과는 관계없이 흐뭇함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문단에서 ‘논쟁’은 일종의 금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는 문단사가 말해 준다. 논쟁의 끝은 자멸이거나, 절필이거나, 희생양이나 따돌림의 대상이 되거나, 문학 자체에 대한 환멸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둘러싼 세간의 공격을 이겨낼 용기가 없는 작가는 함부로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지면에 발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간 문학 논쟁을 치르며 눈물, 콧물, 핏물 따위를 흘려왔던 숱한 작가들의 암묵적인 결론이었다.
그런 ‘비극적인’ 문단이 각자 다양한 방식과 형식대로 ‘자족적이면서 안온한’ 문화를 ‘꽃피울 때’조차 논쟁의 씨앗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씨앗을 줍는 자는 결코 씨앗이 떨어진 자리를 잊지 않는 법이다. 판단과 억측을 허용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씨앗을 최초로 발견한 자만이 논쟁의 최후를 그릴 수 있다. 그 나머지들은 바람 부는 대로 흩날리는 쭉정이들뿐이다.
2023-06-2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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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부산 돌려차기' 사건과 지명 낙인
작년 5월 22일 새벽 5시께, 부산 부산진구의 한 오피스텔 공동 현관에서 30대 남성이 귀가하던 20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해 의식을 잃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폭행의 잔혹성만으로도 사회적 공분을 샀지만 이후 추가 성폭행, 보복 범죄 예고, 신상 공개와 사적 제재, 적반하장 반성문 논란 등이 이어지며 아직 관련 보도가 많이 쏟아지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이 사건은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으로 명명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 이름에 굳이 ‘부산’이 들어가야 하는지 의문이다. 단지 사건이 발생한 장소라는 이유만으로 범죄 사건의 명칭에 지역명이 사용된다면 그 지역 이미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엑스포 유치를 위해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여야 할 중요한 시기에 부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을 심어 줄 수 있어 더욱 우려된다.
예를 들어 경기도 화성시를 보자. 1986년부터 8년에 걸친 연쇄살인 사건의 이름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명명돼 지금도 화성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살인의 추억 도시’를 떠올린다. 진범이 잡힌 뒤 화성시의회는 이 사건 명칭을 ‘이춘재 살인 사건’으로 바꿔 달라는 명칭 변경 촉구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경찰이 사건 명칭을 변경했지만, 한 번 형성된 부정적 인식은 낙인 효과로 인해 쉽게 바뀌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부정적 인식이 고정관념처럼 굳어지기 전에, 해당 지역민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기 전에, 지역명이 들어간 재난, 사건, 사고의 명칭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 한 번 명명된 이름을 바꾸기가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 중인 ‘세월호 참사’가 그 예이다. 세월호 참사는 처음에는 ‘진도 여객선 침몰 사건’으로 불렸다. 그러다 참사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하고 지역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세월호 참사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사실 명칭을 변경할 필요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재해와 재난, 사건과 사고의 명명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을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피해자와 지역명 대신 가해자를 전면에 드러내는 작명이 되어야 한다. 2008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서 조두순이 8세 여자아이를 납치해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피해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명명하면 ‘나영이 사건’이 되고, 가해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이름하면 ‘조두순 사건’이 된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까.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가해자 중심의 사건 명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 제도 내에서 사건 초기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해자를 사건명에 드러내기 힘들 경우, 지명이라는 공간성 대신 시간성을 드러내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건과 사고 등에 지역명을 사용할 경우 해당 지역에 유·무형의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지역명을 빼고 ‘6·25 전쟁’과 같이 날짜라는 시간성을 사건 이름에 드러내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가 항공기를 납치해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한 테러 사건도 초기에는 ‘뉴욕 쌍둥이 빌딩 붕괴 사건’으로 명명됐다. 그러나 이후 ‘9·11 테러’로 바뀐 전례가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하자, 한국심리학회는 성명을 내고 지역 혐오를 방지하기 위해 ‘10·29 참사’로 부르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처럼 공간성 대신 시간성을 드러냄으로써 해당 공간에 거주하는 지역민에 대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마저도 어렵다면 범죄 혐의로 사건 이름을 명명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즉, 사건 발생 장소를 부각하여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라고 부르는 대신 범죄 혐의를 중심으로 ‘돌려차기 강간 살인미수 사건’으로 명명하는 식이다.
물론 사건, 사고가 발생한 지역의 이름을 전혀 거론하지 말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사건, 사고가 발생한 지역명은 해당 사건을 객관적으로 얘기할 때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중요한 정보다. 다만 해당 사건에서 지역이라는 공간이 사건의 본질과 큰 연관성이 없다면 사건 이름이나 언론 보도에서 굳이 지역명을 게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단순히 특정 사건, 사고가 일어난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험 지역’이라는 낙인을 찍어 해당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리고 지역민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관행은 이제 지양돼야 한다.
2023-06-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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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시티투어버스의 변신은 무죄!
여행 트렌드가 변화하고 있다. 어디를 가는 여행이 아니라 무엇을 체험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평범한 여행에서 벗어나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여행에서 우선순위로 두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색 탈 거리를 비롯해 짜릿한 레저 활동과 그 도시만의 고유한 문화 체험, 현지인과 함께 먹는 로컬푸드 여행, 현지인들의 일상 체험까지 글로벌 관광도시는 독특한 이색 체험을 선보이며 여행객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여행할 도시를 알아볼 때 한 번쯤은 시티투어버스를 고려해 봤을 것이다. 버스 좌석에 앉아 가이드의 음성 설명을 듣고 원하는 곳에 내려서 구경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이동할 수 있는 시티투어버스는 어느 도시에서든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시티투어버스 자체가 그 지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명물이고 관광상품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고풍스러운 트롤리버스(Trolley bus)부터 오픈된 2층에서 바람을 맞으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버스 등 각양각색의 시티투어버스가 전 세계적으로 운영 중이다.
가는 여행에서 체험으로 트렌드 변화
세계 도시 고유한 경험 제공 안간힘
선진 도시, 다양한 버스관광 눈길
뉴욕 공연·런던 럭셔리 디너 운영
여행객 선호 도시 발돋움 위해
부산도 참여형 연극 등 이벤트 추진
뮤지컬로 유명한 뉴욕 여행을 계획한다면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에 들어갈 것이다. 브로드웨이를 목표로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이들의 도시가 바로 뉴욕이다. 뉴욕의 시티투어 버스 '더 라이드(The Ride)'는 이러한 배우나 가수 지망생들과 함께 도시 자체를 무대로 공연을 선보인다. 더 라이드 투어버스의 창밖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3열로 고정된 좌석은 마치 극장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발레, 재즈, 비보이, 힙합 등 4~5개의 공연 팀이 중간중간에 나타나서 2~3분의 짧은 공연을 보여 준다. 버스가 관객석이라면, 맨해튼 도시가 무대가 되는 아주 특별한 공연이다. 75분 동안 극장식 버스를 타고 맨해튼의 주요 관광지를 돌아보며 차창 밖의 퍼포먼스도 감상하는 더 라이드 투어버스는 뉴욕이라는 도시 감성인 공연문화와 버스를 이용한 공연 기술이 접목된 고부가가치 관광 상품으로 뉴욕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특별한 체험 프로그램이 되고 있다.
빨간색 이층 버스 도시 런던은 어떨까? 가장 대중적인 빨간색 이층 버스 투어인 '홉온 홉오프(Hop-on, Hop-off) 버스'도 변신하고 있다. 창밖을 보며 관광지를 감상하는 일반적인 관광에서 버스에 앉아 편하게 최고급 요리를 경험하는 럭셔리 디너 버스가 운행 중이다. 이 버스는 런던의 시티투어버스의 대중적인 빨간색 외관으로 익숙한 이층 버스지만 내부는 탁 트인 럭셔리 레스토랑이다. 옆면과 천장 모두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360도 파노라마 뷰를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런던의 도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런던의 변덕스럽고 안개가 낀 날씨도 운치로 변하는 순간이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만나는 고급스러운 공간과 멋진 뷰까지, 최상의 조건에서 런던을 감상하는 즐거움만으로도 이 새로운 이층 버스는 여행의 특별한 체험을 제공한다. 런던의 관광명소를 방문하면서 즐기는 여유롭고 행복한 럭셔리 만찬은 오직 런던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경험과 추억을 제공하니 예약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이런 글로벌 관광 도시 명물인 시티투어버스의 변신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부산 시티투어버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5월 코로나로 중단된 시티투어버스 운행을 올해부터 완전히 재개했다. 시티투어팀 직원들과 기사들의 아이디어와 열정을 바탕으로 원작 '오즈의 마법사'를 각색한 관객 참여형 연극 '부산을 달리는 도로시'와 부산 대표 호러 캐릭터인 '영도 할매'가 출연하는 '섬머 호러 나이트 투어' 테마 탑승권의 완판을 시작으로 반려견과 함께하는 시티투어 등 다양한 이벤트의 시티투어로 부산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최근 주말과 공휴일 하루 탑승객 1000명을 돌파하면서 코로나 이전 2019년도 탑승객과 비슷한 수준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 부산 시티투어버스 해운대 코스 레드라인은 부산항대교를 달리는 스릴 만점 고공 버스로 참여한 관광객이 직접 올린 다양한 콘텐츠들의 누적 조회수가 5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롤러코스터 같은 부산항대교를 안전하게 운전하는 기사님은 SBS 월요일 교양 '생활의 달인'으로 소개되어 운항 시간대마다 매진이 되고, 부산에 오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명물로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 특수를 누리고 있다. 부산 방문의 스릴 만점 대표코스를 비롯해 또 다른 명물 상품이 어떤 테마 이벤트로 부산 시민의 자랑이 되고, 방문하는 여행객의 버킷리스트로 자리매김할지 부산 시티투어의 다양한 변신이 궁금해진다.
2023-06-14 [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