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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예술가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
벚꽃 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던 어느 봄날, 음대 출신이지만 이제는 공대 교수가 다 되어버린 벗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마침 출시도 안 된 앱을 테스트 중이었다. 반가운 얼굴은 잠시였고, 생전 처음 보는 고가의 VR(가상현실) 기기를 바로 착용시켜 주었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은 단순한 기술 체험이 아니라, 공간을 가르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적 같았다.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음악을 ‘보았다’. 이는 단순히 신기한 경험을 넘어 공연예술의 패러다임이 흔들리는 전환의 순간이었다. 악기 사이를 거닐면서 감각 그 자체로 음악을 느끼는 새로운 형태의 무대였다. VR 현장에서 느낀 진동, 위치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음향의 밀도, 연주자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긴장감은 전통적인 콘서트홀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던 입체적인 몰입을 선사했다.
포스텍 AI·확장현실 콘텐츠 수업 활용
부산 대학 예술과 기술 접목 교육 절실
과감한 실험으로 혁신적 미래 만들어야
클래식 음악은 기술 도입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예술 분야 중 하나다. 시각예술이나 다른 공연예술이 첨단 IT 기술을 통해 새로운 형식을 빠르게 실험하는 동안, 클래식 음악은 오랫동안 기존의 창작·재현 방식을 주로 선호했다. 시각예술에서는 미디어파사드가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클래식 장르도 더 이상 수동적인 음악 감상 형식이라는 전통적인 공연 방식에만 머무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몰입형 체험은 그 가능성을 여실히 증명했다. 관객이 객석에 앉아 공연을 경험하는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공연 내부로 직접 들어가 자신만의 시선과 위치에 따라 감각을 재구성하는 상호작용의 주체가 되게 하였다.
공간 음향 시스템은 연주자의 위치에 따라 음향의 밀도를 조정하여, 실제 공연장에서 연주자 바로 옆에 있는 듯한 감각을 제공한다. 관객은 공연 중에 인터랙티브 컨트롤을 통해 다양한 시점과 지점으로 이동하며, 각 악기의 음향을 360도로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시각적 몰입을 넘어 청각적 요소까지 공연의 일부로 만드는 혁신적 기술이다. 2019년부터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협업한 도이칠란트의 사운드 디자이너 헨리크 오퍼만은 해당 프로젝트에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었다. 기존 VR 공연과는 차별화하여 관객이 능동적으로 공연을 감상할 수 있게 설계했다.
이 콘텐츠는 예술가의 상상력에서 나왔다. 바이올리니스트 팀 서머스가 자신이 연주할 때 느끼는 몰입감을 관객도 연주자처럼 직접 듣고 경험할 수 있게 신박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포스텍은 이러한 몰입형 체험을 교양 음악 수업에 도입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음악대학도 없는 공과대학에서 양은영 교수가 AI와 XR(확장현실) 기술을 활용한 교육콘텐츠를 4년 전부터 직접 제작해 강의에 활용하고 있었다. 메타버시티 교육추진단장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포스텍의 과감하고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라고 한다.
김석준 교육감은 다수의 언론 인터뷰에서 AI를 활용한 교육을 강조했다. 예술교육에도 AI를 도입한다면 학생 수준에 맞게 상호작용이 가능한 창의적인 음악 감상, 연주, 창작 교육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감각을 다듬는 일이라면, 기술은 그 감각을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하는 언어가 된다. 부산이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일상과 공교육으로 끌어들여 실현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면,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창조하는 풍요로운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해양수도 부산은 새로운 클래식 전용극장을 갖춰가고 있다. 하지만 첨단 기술을 이해하고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융합형 전문가 양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이제는 교육과 예술 그리고 기술을 연결하는 중간 지대가 절실하다. 지금이라도 지역 예술대학이 학과 간 협력으로 아트 & 테크놀로지 과정을 운영한다면, 대학 교육도 창의적 감각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관련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예술 관련 학과 교육이 AI 기반 교육 시스템과 연계되어야 한다. 실감형 콘텐츠의 제작과 실습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여느 때보다 절실하다.
창의적인 생각이 예술을 만든다. 창의적인 기술도 예술이 걸어갈 다음 차원을 뒷받침하는 문을 열어준다. 기술은 이제 단순한 도구를 넘어 감각의 경계를 확장하고 인식을 바꾸는 새로운 언어다. 그 언어를 가장 먼저 익히고 구현하는 예술 도시야말로 내일의 문화 중심지가 될 것이다. 미래는 ‘모방의 시대’를 벗어나 먼저 경험하고 과감히 실험하는 도시만이 창조적인 흐름에서 앞장설 수 있다. 아울러 지속적이고 혁신적인 지원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의 장이 될 것이다. ‘21세기 크로노토프’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그 문을 누군가 먼저 열고 당당히 나가는 일만 남았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2025-05-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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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토픽(TOPIK)을 네이버에 팔면 안 되는 이유
외국인의 중국어 능력을 평가하는 중국의 HSK, 일본어 능력을 평가하는 일본의 JLPT처럼, 우리나라에도 외국인의 한국어 능력을 평가하는 한국어능력시험이 있다. 바로 ‘토픽’(TOPIK, Test of Proficiency in Korean)이다. 토픽은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이 시행하고 있는 국가 주도 어학 시험으로서 외국인 유학생의 입학과 졸업, 외국인 노동자 및 이민자의 비자 발급과 취업 등에서 중요하게 활용된다. 그 때문에 많은 외국인이 토픽을 보는데 2024년 한 해에만 49만 명 이상이 응시할 만큼 규모가 크고 공신력을 담보한 한국어능력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국어능력시험 토픽이 네이버에 팔린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슨 공공분야 소프트웨어(SW) 사업을 민간에 개방하는 민간투자형 SW 사업이 있는데, 네이버 컨소시엄(네이버·엔에스데블·대교)의 ‘한국어능력시험 디지털 전환 사업’이 수익형 사업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네이버 컨소시엄이 3500억 상당을 투자하고 토픽 문항 출제에서 채점, 시험 시행에 대한 모든 권한과 토픽 운영에 따른 수익을 가져간다고 한다. 말 그대로 돈으로 토픽을 산 것이다.
정부는 AI를 활용한 토픽 디지털 평가 체계를 구축하면 출제와 채점 등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급증하는 시험 응시 수요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민관협력을 통해 한국어 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대효과는 득보다 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어렵게 조성해 온 한국어 교육 생태계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먼저 AI 활용 자동 문항 생성과 자동 채점, IBT(인터넷 시험) 전면 도입을 통한 응시 기회 확대를 살펴보자. 물론 AI로 시험 문제를 만들고 학습자의 작문, 말하기를 채점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이 시험을 시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AI가 출제한 문항이 타당도를 확보할 수 있을지, AI 채점 결과가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까지 한국어 교육 학계에서 논문과 같은 객관적 방법으로 네이버 컨소시엄에서 도입하고자 하는 AI 활용 토픽 문항 생성과 자동 채점의 타당도, 신뢰도에 대한 검증이 단 한 차례도 이루어진 바 없어 이러한 우려가 더욱 커진다.
현재 토픽 문항 출제와 채점은 한국어 교육 전문가 집단의 교차 검증을 통해 문항 타당도와 채점 신뢰도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문항 출제와 채점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지만 그만큼 국제적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경제적 논리만을 앞세워 검증되지 않은 디지털 평가 체계를 도입한다면 지금까지 어렵게 쌓아 온 국가시험으로서의 공신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토픽이 민영화되면 응시료 수익 확대를 위해 PBT(종이 시험)를 폐지하고 PBT보다 두 배 비싼 IBT 방식으로만 토픽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학습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한글 자판으로 쓰기 시험 등을 봐야 하고, 이는 토픽 시험에 대한 접근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인터넷 및 컴퓨터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에서는 시험 자체가 실시될 수 없고, 응시료가 비싸져 저소득 국가의 학습자들은 상대적으로 응시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다. 결국 이는 국가 차원의 한국어능력시험이 가지는 ‘공공성’을 훼손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어 산업 활성화 문제를 살펴보자. 국립국제교육원의 민간투자형 SW 사업 제안요청서를 검토해 보면 민간기업은 토픽 운영 수익 외 부대사업을 통해 수익을 높일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즉, 토픽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하는 기업에서 토픽 관련 학습 사업을 운영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이것이 공정한 것일까.
네이버 컨소시엄은 수천만 학습자의 개인정보 및 시험 관련 정보를 독점하고 자신들이 만든 알고리즘을 통해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한다. 그리고 이 정보를 활용해 토픽 시험 점수를 쉽고 빠르게 올릴 수 있는 학습 시스템을 구축한 후 학습자를 모집해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이는 국가시험이 공익이 아닌 민간기업의 사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또 기존의 한국어 교육 산업체 및 교육 기관은 경쟁력을 잃고 사라져 지금까지 힘겹게 가꿔온 한국어 교육 생태계는 멸종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시험의 공신력, 공공성, 공정성, 공익성을 이유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국가를 대표하는 어학 시험을 민간기업에 맡기지 않는다. 국립국제교육원은 조속히 토픽 민영화 시도를 철회해야 할 것이다.
2025-05-0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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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비 내리는 봄날의 편지
어제는 지인과 함께 부산 자갈치 시장 어귀 양곱창 가게에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남해가 고향이라던 주인은 요새 손님이 없다며 누굴 향해서인지 모를 지청구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비단 최근만의 일일까요. 술집에 앉아 한산한 골목을 우두커니 바라보니 십여 분 간격으로 사람 한둘 지나갈까, 오래전 북적이던 골목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며 쇳소리의 고함소리가 나서 유심히 지켜보니 중년의 취객이 누구한테 퍼붓는지 모를 험한 소리를 내뱉으면서 비틀거리며 지나갔습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4월의 한복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1990년대 중후반까지 이곳 남포동과 광복동을 비롯한 원도심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유명한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는 원도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약속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워낙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며 물결처럼 지나다 보니 약속 장소에 각자 도착했으면서도 서로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렸던 때가 종종 있었겠지요. 지금 비프광장 일대입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상권의 극심한 침체로 울상을 지었던 원도심도 점점 회복이 되어가나 싶다가도 더러 한숨을 내쉬는 상인을 보곤 합니다. 요즘 부평깡통시장이나 비프광장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인구가 줄어들고, 청년 일자리 해소는 오랫동안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고, 이런 현상과 맞물려 비혼, 비자녀와 독거세대가 급증하는 오늘날 ‘인간답게’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종종 생각하게 됩니다. 상인들은 입만 열면 경기가 안 좋다고 말합니다. 소비자는 비싸서 먹을 곳이나 살 거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1990년대 부산 원도심 장면을 유튜브로 보면 그때가 그립다는 댓글이 많이 달립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수구지심(首丘之心)이 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인데, 행복했든 그렇지 못했든 지난 시간의 단면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물큰 생기지요. 물론 마음이 그렇다는 얘기지, 막상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섣불리 탑승하려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해를 넘기면서 수상한 시절을 겪다 보니 저뿐만 아니라 사람들 대부분이 어딘가 뒤숭숭한 느낌 가시지 않습니다. 정국이 비상계엄으로 요동을 치다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요즘 저마다 묵혀두거나 미뤄두었던 일과 계획을 차근차근히 정리하면서 착수하기도 합니다.
벚꽃도 만개하여 이제 땅바닥을 어지럽게 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끊임없이 쏟아지고 지껄이는 말을 가만히 듣노라면 이 세상이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 아니 사는 일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그러는 중에 안타까운 사건·사고 소식에 한동안 멍한 날도 찾아오곤 합니다. 누구처럼 돈주머니나 낯짝이 두꺼워서 나라야 어찌 되건 자신과 식솔만 평안하면 된다는 철학을 지닌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평생 일해도 만져보지도 못할 액수의 재산을 신고하고 출마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외칩니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대선일이 지정되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국민은 급격하게 떨어진 경제 지표뿐만 아니라 ‘내일’에 대한 고민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먼 데 있는 듯한 희망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퇴근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권을 사는 사람도, 취직이 어려워 한숨을 내쉬는 청년도, 장사가 안돼 멍하니 골목만 바라보는 가게 주인도, 비록 이룬 것 하나 없이 ‘연명’ 수준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는 모든 사람에게도 오늘은 지나고 내일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우리가 이렇게라도 이 땅에서 무언가를 하면서 다른 사람 해코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기적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과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그룹이 훨씬 적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숱한 유명인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보면서 스스로를 되짚으며 박탈감에 빠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사람이 ‘간증’처럼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의 삶과 인격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세상은 몇몇 엘리트들이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같은 상식 정도만 지니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이 천천히 이룩해 나갑니다. 봄날이 지나고 무더위가 기습하면서 향기를 뿜었던 꽃은 모조리 떨어지겠지만, 여름 내내 가을 겨울이 지난 동토에서 새근새근 움트는 소리가 새로운 땅을 일군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2025-04-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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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이번에 내리실 역은 옳은 쪽입니다"
비상계엄 선포부터 탄핵 선고가 나오기까지 122일 동안 시민들은 광장으로 모였다. 그 시간을 돌이켜 볼 때 특히 눈에 띈 것은 MZ세대들의 등장이다. 이들은 기존의 시위 형식에서 볼 수 없었던 자신들만의 문화를 집회에 녹여냈다. 이들이 참여한 집회 현장은 K팝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에스파의 ‘위플래시’,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 등을 부르며 친숙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었다. MZ세대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수제 응원봉을 들고나왔다. 당시 이같은 K집회 현장을 지켜본 외신 반응은 뜨거웠다. 로이터통신은 “시민들이 시위에 들고나온 응원봉이 기존의 촛불을 대체하며 비폭력과 세대 간 연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차세대형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런 분위기는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일깨웠으며, 적극적인 시민 참여를 끌어냈다.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문화적 코드와 정치적 의사 표현을 절묘하게 접목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강국이다. 분단의 악조건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상식적일 때 국가 위상이 서고 그 안에서 기본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의 수준과 위상도 반영된다. 1987년 민주주의의 근간을 보여준 민주항쟁, 1998년 IMF를 이겨낸 국민의 저력, 2002년 월드컵의 함성, 2010년 촛불로 이뤄낸 민주주의 등을 보면 그러하다. 특히 탄핵 정국에서 MZ세대들이 응원봉으로 이뤄낸 ‘빛의 혁명’은 386세대와 MZ세대가 공유하는 감동을 전했다. 우리 국민의 커먼센스(Common Sense)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켜내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현장에는 기득권자가 아닌 시민이 있었다. 도망가지 않았다. 시민이 하나가 되어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있다. 이제 이 나라의 미래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공동의 것을 공동의 것으로 만드는 사회인 민주공화국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세계사 최초로 무혈 시민혁명을 이룬 민족이자 민주주의 선도 국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미 전 세계는 존경의 시선으로 K컬처, K푸드를 넘어 K민주주의를 부러워하고 있다.
탄핵 정국을 돌이켜 보면 이미 경기는 끝났는데, VCR 판독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누가 봐도 아웃인데 심판들의 이견으로 주심은 판정을 못 하고 관중들은 귀가하지 못하는 꼴이었다. 그 시간은 역대급으로 비현실적이었다. 관중은 야유와 함성으로 경기장을 박살 낼 기세여서 혼란스러웠다. 결정이 나야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본연의 일을 한다. 그렇게 122일 동안 헌재의 결정을 기다렸다. 마지막까지 온갖 낭설들과 소위 정치 1단이라는 자들의 예측 아닌 추측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202504041122’라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간을 맞이했다.
“탄핵 사건이므로 선고 시간을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시각은 오전 11시 22분입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2분 동안 지난했던 겨울의 시간에서 나오는 순간이었다. ‘한국의 마그나 카르타’라며 결정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결정문 중에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란 문장과 ‘국가 안전보장과 국토방위를 사명으로 하여 나라를 위해 봉사하여 온 군인들이 일반 시민들과 대치하도록 만들었습니다’란 문장이 필자의 마음속으로 녹아 들어왔다. 장기간의 평의와 숙고를 통해 그 결정문을 국민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쉽고 유연한 논리로 작성함으로써 당일 투입된 군인들이 지고 있을 마음의 짐을 그나마 내려 주었다. 이런 것이 법의 힘이다. 국민 대부분은 그토록 장고의 시간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이 결정문을 통해 다시 봄을 기대하게 되었고 그렇게 대한민국은 2025년 봄을 맞이했다. 2025년 4월 4일 청명(淸明)은 세상을 맑고(淸) 밝게(明) 만들기에 좋은 날인 것이다.
지인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탄핵 현장에서는 매주 토요일, 때로는 예정 없이 긴급하게 집회가 열렸다. 대형 스피커, 무대 설비, 행진 트럭 등을 동원해 한 번 집회를 열 때마다 2억 원 이상의 돈이 지출된다고 한다. 1700여 시민단체가 연대 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비용은 또다시 시민의 모금과 후원으로 충당해 낸다고 한다. 모든 부채와 책임은 국민의 몫이다. 서글프다. 생활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오르고, 서민들의 지갑은 갈수록 얇아진다.
이제 시대가 부여한 시간이다. 구조적 모순은 반드시 바로 잡고 좌우로 구분 짓는 극단적 대립, 양비론적 시선들은 이번 참에 하차하시기를!
마침 지하철에서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옳은 쪽입니다.”
2025-04-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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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
현대 한국 사회는 급속한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발전 덕택에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하지만, 비관주의와 냉소주의로 채색된 문화적 풍경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진보와 성장의 약속에 대한 집단적 환멸을 반영하는데, 사회 구조적 압박, 정치적 격동, 지도층의 위선 때문에 촉진되고 있다. 비관적, 냉소적 태도는 헬조선, 삼포세대 같은 대중 담론과 청소년 문화, 심지어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인기 창작물에도 스며들어 불신과 좌절에 시달리는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개인의 삶을 웅크리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조장한다.
비관주의는 부정적 결과를 예견하거나 최악의 상황에 시선을 집중하는 경향이다. 비관주의자는 일이 잘못될 것이고, 난관은 불가피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사고 방식의 바닥에는 인생이란 불가피하게 힘들고, 예측 불가능하거나, 사회 제도가 불공정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직장 면접을 앞두고 비관주의자는 자신은 지방대 출신이니 어차피 떨어질 것이라고 포기한다. 비관주의는 실망과 좌절로부터 개인의 감정을 보호하는 방어 기제로 작동하지만, 늘 불편한 결과를 바라보기 때문에 쉽게 우울한 기분에 빠지며, 성취 동기를 줄여버리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심리적 내전에 조롱·불신 확산
개인 삶 위축 인간 관계도 단절
사유하는 낙관주의적 자세 필요
냉소주의(cynicism)란 용어는 개(kynikos)라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의 냉소주의 학파는 사회적 규범과 제도를 부정하고 마음대로 방랑하는 개의 자세를 추종하는 태도로 묘사되었다. 반면 현대의 냉소주의는 사람이나 기관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고, 이기심이나 탐욕, 그리고 음모로 얼룩져 있다는 회의적 태도이다. 이를테면 냉소주의자는 정치인들이 가난한 사람을 진심으로 돕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표를 얻기 위해 벌이는 술책이라고 여긴다. 혹은 친구의 친절을 진정한 선의가 아니라, 미래에 호의적 보답을 얻기 위해 꾸미는 작전이라고 본다.
비관주의와 냉소주의는 서로 다르다. 비관주의는 부정적 결과에 초점을 두는 반면, 냉소주의는 의도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동기 지향적 자세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근본을 고려하면 비관주의가 냉소주의의 뿌리이다. 비관주의가 냉소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실패한다고 예상하는 상황에서, 실패의 원인을 관련 기관이나 인사들의 불순한 의도에서 찾을 때 냉소주의는 생기는 것이다.
비관주의는 스토아주의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스토아주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예상하는 비관주의적 자세를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실패에 대비하게 하면서, 부와 성공, 명예처럼 대중이 추구하는 것들의 가치를 부정하여, 그것을 얻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한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의 전략은 종종 이점보다 훨씬 더 해악이 크다. 비관주의적 자세를 취하면 세상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므로 삶이 우울하고 지루하며, 타인의 동기를 불신하기 때문에 인간 관계를 형성하기 힘들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런 랭어는 신간 〈사유하는 신체〉에서 비관주의의 대안으로 ‘사유하는 낙관주의’(mindful optimism)를 제안한다. 결과를 낙관해도 결과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리부터 나쁜 결과를 예상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낙관적 기분으로 지내다가 실패를 목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단순한 낙관주의는 그냥 일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게으르게 살기 쉽다. 반면 사유하는 낙관주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길이 있는지를 사유하고 그것을 실행하면서 결과를 낙관하는 자세이다.
더 나아가 사유하는 낙관주의는 실패와 성공을 가르는 기준마저 사유한다. 대개 우리는 사유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시험에 합격하고, 돈을 벌고, 선거에 승리하고, 인기를 얻는 것을 성공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기준을 바꾸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며, 오히려 실패일 수 있다. 경쟁이 최고로 치열한 대학 학과에 합격하여 자신의 취향이나 소질과 어울리지 않는 전공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차라리 불합격이 성공이다. 어떤 교수는 국회의원에 당선하였기 때문에 연구 분야에서 업적을 이룰 기회를 상실했다. 깊이 생각한다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유하는 낙관주의자에게는 실패마저도 성공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최근 몇 달 동안 심리적 내전으로 묘사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양분되어 조롱과 불신, 비난과 자조(自嘲)의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 풍토 속에서는 개인의 삶은 위축되고, 인간 관계는 단절된다. 사유하는 낙관주의의 자세는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의 질환을 치유하는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25-04-1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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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철도 지하화 사업에 대한 바람
도시에서의 고민은 항상 보존과 개발 사이의 갈등에 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성장동력 사이에서 역사를 보존하고 개발의 해법을 찾는 것, 공공성을 지키면서 수익을 창출하는 것. 이는 건축가에게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과제다.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건축주와 수많은 협의 과정을 거치는데 하물며 도시 공간 구조를 변화시키는 사업에 있어서는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 지리적, 역사적 조건 외에도 개발과 확장은 때때로 공간을 단절시킨다. 그로 인해 도심은 파편화된다. 부산은 그러한 단절과 재구성이 반복된 도시다.
부산의 철도 노선은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 구조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했고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도시가 성장한 이후 철도는 도시 공간을 단절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철도가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생긴 물리적·사회적 단절은 도시 내 이동을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의 개발을 막고 있다.
부산역~부산진역 2.8km 구간
철도 지하화 통합개발 선도사업
원도심 회복의 중요한 계기 마련
도시 구조 재편하는 시발점 돼야
북항재개발만 해도 그렇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항재개발 1·2단계 사업은 원도심 통합재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북항재개발 지구와 산복도로를 연결해 단절된 도심을 이어야 하는데 부산역 조차장이 부산역과 원도심, 그리고 북항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연계 개발이 어려웠다. 지난 2월, 부산은 ‘철도지하화 통합개발 선도사업’에 선정되어 원도심 연결사업의 길이 열렸다. 선도사업 구간은 부산역에서 부산진역까지 2.8km 구간이다. 이 사업은 철도로 단절된 도시 공간을 연결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부산 원도심은 과거 부산의 중심지였다. 남포동과 중앙동, 부산역, 초량 일대는 물류와 상업의 중심이었고, 사람과 문화가 뒤섞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변화와 신도시 개발로 인해 원도심은 점차 쇠퇴했다. 도시의 핵심 기능이 이전하면서 활력이 넘쳤던 원도심은 빈 점포와 노후 건물이 증가하면서 공동화 현상이 심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철도 지하화는 원도심 회복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 사업은 단순히 철도를 지하로 옮기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철도 부지의 상부를 인공지반(데크)으로 덮어 복합적으로 개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산시는 인공지반 위는 공공주택과 공원, 문화시설 등 복합 용도로 활용하고 부산진 CY는 부산신항으로 이전시킨 후, 그 부지에 상업·업무지구를 복합해서 첨단산업지구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사업부지가 국공유지와 철도공단 소유지기 때문에 사업 추진 리스크가 적다 해도 유휴부지의 상업성이 얼마나 보장될지가 관건이다.
해외에서도 철도 부지의 상부를 인공지반(데크)으로 덮어 복합적으로 개발한 사례가 있다. 철도차량기지 위에 인공지반을 덮고 상업, 업무, 주거, 공원을 조성한 미국 뉴욕의 허드슨야드와 철도 부지를 덮어 인공지반을 형성해 그 위에 업무지구와 공공시설을 조성하여 도심 내 공간 활용도를 높인 프랑스 파리의 리브고슈, 그리고 철도 부지를 입체적으로 활용하여 상업, 업무, 주거, 공공시설이 혼합된 공간으로 개발한 일본 신주쿠 복합터미널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도시 공간을 효율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유럽 교통망 연결을 효율적으로 재정비하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21 프로젝트’는 환경문제 관련 시위, 예산 초과 및 투명성 논란, 정치적 논란 등으로 1994년 공식 발표된 이후 예산 초과와 지연을 반복했다. 부동산 수익을 올리는 목적과 함께 유서 깊은 중앙역을 모두 철거하고 수백 년 된 나무들을 자르는 문제가 원인이었다. 2010년 착공 이후 공사 일정이 여러 차례 조정되어 2026년 12월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슈투트가르트 21’은 공공의 참여와 투명성, 그리고 개발과 보존 간의 균형을 위해 참고할 사례로 볼 수 있다.
철도 지하화 사업은 국토교통부, 국가철도공단, 부산시가 함께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하지만 부산역 조차장 일원이 북항 2단계 개발사업과 맞물려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관련 부처 간 논의가 필요하다. 북항 2단계 개발사업은 해양수산부의 관할이기 때문에, 철도 지하화와 별개로 추진될 경우 공간 활용의 비효율성과 사업 진행의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관 부처 간 긴밀한 협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중심 역할은 부산시가 해야 한다. 쇠퇴한 원도심 통합재생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지리적 단절은 해소됐는데 자칫 사회적 단절을 가져올까 걱정이다.
철도 지하화는 도시 구조를 재편하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길을 찾고, 파편화된 도심을 다시 통합해 잊힌 공간에 새로운 생명과 도시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25-04-0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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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위기의 부산, 문화도시로 대전환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동북아를 대표하는 환적항을 보유한 국제물류 중심지다. 하지만 부산은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도시임은 물론이고, 지속적인 청년층 유출로 인해 인구 감소가 가속화되고 있다. 인구 330만 명은 이미 무너졌고, 2024년 12월 기준 부산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23.9%로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한때 부산 경제를 떠받쳤던 제조업이 약화된 지 오래고, 양질의 일자리도 줄어들었다. 현재 부산의 고용률은 전국 평균보다 낮으며, 남아있는 일자리마저 대다수는 자영업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 산업 중심 경제 전략에서 벗어난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문화·예술·관광’을 핵심으로 한 새로운 성장 전략 구축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금도 보여주기식 개발과 단기적인 성과를 노리는 일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시 경쟁력은 단순한 인프라 건설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문화 정체성과 브랜드 구축에서 나온다.
부산과 같이 환적항을 가진 싱가포르는 중국 상하이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한다. 물류 허브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도시 경쟁을 극대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물류와 금융 중심도시에서 문화 콘텐츠와 관광을 강화해 ‘아시아 문화 허브’로 자리 잡은 싱가포르는 중요한 메시지를 알려준다. 특히 싱가포르 예술의 중심지인 ‘에스플러네이드’는 지역 및 국제 예술가들에게 창작과 공연의 기회를 제공하고, 관광객들에게도 큰 매력을 발산한다. 싱가포르 최초의 공연예술 전문도서관을 비롯해 1600석의 콘서트홀과 2000석 규모의 극장에서는 음악, 무용, 연극 등 세계적인 수준의 공연은 물론이고, 다양한 무료 행사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공연 전후로 식사와 쇼핑을 즐길 수 있는 부대시설은 방문객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며, 건축물의 역사와 음향 시설 탐방을 위한 가이드 투어도 마련되어 있다. 도시의 문화 콘텐츠에 관광을 결합해 도시 경쟁력을 높인 성공적인 모델이다. 적극적인 정부 주도 예술정책으로 싱가포르의 문화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제는 단순한 물류도시가 아니라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부산이 환적항으로 위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95년에 발생한 고베 대지진이다. 당시 일본의 대표 무역항이 지진 피해로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부산항이 고베항을 대체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핵심 항만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 물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행운은 노력 없이 유지되지 않는다. 더욱이 중국의 상하이항, 닝보항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부산항 환적물량이 줄어들고 있다. 환적항이라는 물류 허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싱가포르처럼 문화·관광을 융합하는 도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중앙정부와 부산시는 부산의 위기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문화예술계 예산 또한 정치적 홍보나 이벤트성 행사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엑스포 유치 실패로 6000억 원에 가까운 시민 혈세를 낭비했고, 가덕도 신공항, 북항 재개발, 부울경 메가시티 등 대규모 프로젝트는 부산 시민의 삶을 위해 어떻게 운영할지 그 실행 계획을 제대로 알 수조차 없다. 산업은행 본사 이전의 실질적 경제 유발 효과도 꼼꼼하게 따져 검토해야 한다.
부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에 예산을 쏟아붓기보다 지속 가능한 문화예술 인프라 구축을 위한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개관을 준비하고 있는 클래식 전용홀이나 오페라하우스는 지역 문화예술회관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독자적 공연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전문 인력인 예술단을 부산시가 직접 고용하는 체계를 갖추어야 가능해진다. 이런 것이 제작극장이다. 실기 중심 교육에 머물러 있는 지역 대학의 교육도 콘텐츠 중심의 커리큘럼으로 개편해야 한다. 문화예술이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전문적으로 길러내고, 지역 내 공연장과 연계한 현장 중심의 실무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 나아가 투자 대비 수입이 극도로 적은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적 삶을 꾸릴 수 있는 주거 지원 정책과 자녀 교육 환경 개선도 필요하다. 지역의 많은 예술가나 예술단체는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생존을 고민하고 있고, 우수한 예술가들조차 예술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수도권이나 해외 공연예술 단체에 의존하는 일회성 문화 소비도시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시설물만 넓히고 짓는 것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예술가들을 직접 고용하는 데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위기에 직면한 ‘부산 살리기’는 더 이상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시민의 삶과 도시의 미래를 살리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이어야 한다.
2025-03-2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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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잭팟'은 없다
지난 13일 부산상공회의소는 부산형 복합리조트 유치를 위한 전문가 라운드 테이블을 개최했다. 부산상의 회장은 인사말에서 “오픈 카지노(내국인 출입 가능 카지노)로 인한 부작용은 적절히 규제하고 복합리조트로 인한 경제적 부가가치를 극대화할 방안을 전문가들과 함께 모색하겠다”고 했는데, 이를 통해 부산상의에서 추진하는 복합리조트는 오픈 카지노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상의는 2017년 북항 재개발을 계기로 복합리조트 유치를 추진했으나 오픈 카지노 도입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발로 추진이 중단된 바 있다. 이후 간헐적으로 복합리조트의 필요성을 주장해 오다 가덕도 신공항 개항과 연계해 8년 만에 다시 본격적으로 오픈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 유치를 언급한 것이다.
복합리조트 유치에 찬성하는 이들은 글로벌 허브 도시를 표방하는 부산이 아시아 주요 도시들과 경쟁하기 위해 하루빨리 복합리조트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천은 벌써 복합리조트를 운영 중이며 태국과 일본 오사카는 가덕도 신공항이 개항할 2030년경 복합리조트를 개장할 예정이어서 부산도 시급히 복합리조트를 만들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합리조트를 조성하게 된다면 세수 증대를 포함해 엄청난 경제 효과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2017년 샌즈그룹은 북항 복합리조트 조성에 6조 원 이상을 투자한다고 했으며 이때 부산상의에서 발주한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복합리조트 조성에 따른 경제 효과가 4년간 23조 원의 생산 유발 효과, 1만 6000여 명의 고용 유발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지노 사업을 사행산업으로 규정해 덮어놓고 반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내국인 출입에 있어서 도박 중독자 출입 금지, 출입 가능 일수 제한 등의 규제 방안을 마련한다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칠 정도의 장밋빛 전망이다. 부산의 경쟁 도시 인천의 예를 통해 살펴보자. 2023년 12월 인천에는 미국 인디언 모히건 부족의 카지노 회사인 모히건이 약 2조 원을 투자해 축구장 64개 넓이의 부지에 5성급 호텔, 1만 5000석 규모의 공연장, 외국인 전용 카지노 등을 포함한 복합리조트 인스파이어가 문을 열었다.
인스파이어는 개장 전 향후 30년간 약 167조 원의 생산 효과, 60조 원의 부가가치 효과 등 230조 원 규모의 경제 효과를 창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개장 1년 만에 1500억 적자를 내고 결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탈에 경영권을 넘겼다. 업계에서는 베인캐피탈이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을 감축하거나 일부 시설 운영을 축소할 가능성이 있으며, 2046년까지 6조 원을 투자한다는 처음 모히건의 계획도 불투명해졌다고 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인스파이어 건설 시 지역업체 참여와 고용 창출, 낙수효과 등을 기대했으나 지역업체는 전체 공사 금액 1조 2000억 원의 1.34%인 163억 정도만 하도급을 받았다고 한다. 또 공사에 투입된 인력 중 지역 인력은 8%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카지노가 세금을 많이 내 세수 확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국세여서 지자체가 가져갈 세수도 많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카지노 산업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매우 미미하다. 그런데 내국인 입장이 가능한 오픈 카지노를 열게 된다면 오히려 지역에 독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오픈 카지노를 운영하게 되면 지역 주민의 돈이 카지노에 들어가고, 그 돈이 해외로 유출되게 된다. 내국인 입장이 가능한 강원랜드 카지노의 매출이 연간 1조 2000억 원 수준으로 강원랜드 외 16개 카지노 전체 매출 합과 비슷한 규모임을 감안할 때 얼마나 많은 국부가 해외로 유출될지는 굳이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자명하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도박 산업과 함께 공존하는 성매매와 마약 산업의 활개, 개인의 도박 중독과 그로 인한 가정 파탄 등 무수히 많은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국무총리실 소속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도박 중독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연간 78조 원에 달한다고 해 그 문제의 심각성을 가늠할 수 있다.
오픈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로 침체한 지역 경제를 단번에 활성화하겠다는 꿈은 좀처럼 터지지 않는 잭팟과 같다. 느리더라도 우리 지역 산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지역 대학과 함께 육성해 수도권 기업 못지않게 좋은 대우를 해 줌으로써, 이들이 부산에 정주하며 산업에 기여하는 선순환적 구조를 만들 때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2025-03-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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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부산항 북항 문학 르네상스를 꿈꾸며
올해 5월 7일은 1985년 ‘5·7문학협의회’가 결성된 지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군사독재와 반민주주의의 폭거가 횡행하던 때,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을 비롯한 소설가와 시인 및 문학평론가 등 일군의 문인들이 문학인의 결속과 협의체의 필요에 따라 중구 동광동의 한 식당에 모여 5·7문학협의회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이 협의회는 1987년 11월 ‘부산민족문학인협의회’로 확대 재편되어 지금의 (사)한국작가회의 부산지회, 즉 ‘부산작가회의’의 전신이 되었다.
부산작가회의는 그간 부산민예총 등 타 기관의 공간 일부를 빌려 오랜 시간 더부살이를 해오다 지난해 연말 동광동 인쇄 골목 쪽 비어있던 사무실을 임대받아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지역의 문학단체를 대표하는 부산작가회의의 독립적인 공간이 5·7문학협의회가 결성되고 무려 40년이 지난 시점에야 안착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단체의 공간 마련이 비용이나 예산이 비로소 확보되어 이루어졌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40년 전 중구 한복판에서 결성된 문학인의 뜻과 의지가 시간이 흘러 구성원이 확대되고 다양한 창작 세계를 펼쳐왔던 이력의 공간적 구심점이 다시 원도심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중구 일대는 작가 모인 작품 집필 공간
부산작가회의·소설가협회도 둥지 틀어
새 시대 이끄는 ‘원도심 창작 산실’ 기대
최근에는 부산소설가협회 사무실도 중앙동 부산우체국 뒤편 골목에 자리 잡은 건물에 들어서기도 했다. 인쇄소와 출판사가 즐비해 1980~1990년대 당시 문학인의 교류가 활발했지만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문화공간과 구성원 및 단체의 이전과 분산의 흐름에 따라 침체의 늪에 빠졌던 ‘원도심 문학’이 이제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는 형국이다. 아울러 그동안 숱한 예술인들의 ‘문화사랑방’ 구실을 했던 ‘양산박’이나 ‘강나루’ 등의 주점이 사라지면서 오갈 데 마땅치 않은 작가들이 각종 창작프로그램이나 북콘서트를 비롯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는 장소가 확장됨에 따라 삼삼오오 이곳 중구 일원으로 모여들고 있다.
부산 중구, 특히 동광동과 중앙동 일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오욕과 영광을 아우르는 장소였다. 동광동은 1678년부터 1876년 부산포 개항까지 지금의 용두산 일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량왜관의 동관(東館)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동관’과 인근 ‘광복동’의 첫 글자를 따 지은 행정구역이다. 중앙동은 1900년대 초부터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북항 매축공사에 따라 바다를 매립, 지금의 중앙대로와 충장로 일대가 새롭게 형성되면서 기존의 일부 지역에 편입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과 대륙 침탈을 위한 발판으로 건설한 1부두와 부산역 등의 육·해상 교통 플랫폼을 끼고 있어서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과 문화가 유입된 곳이기도 하다.
한때 한국 패션 1번가로 명성이 높았던 광복동, 한국에서 가장 큰 어패류처리조합인 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 한국 최초로 조성된 공설시장인 부평깡통시장이 있는 부평동, 한국 최대 규모의 책방골목이 있는 보수동 등 이곳 중구는 부산에 한정되지 않고 한국 전체로 봐도 손색없는 근·현대사와 문화의 ‘성지(聖地)’ 중 하나이다. 여기에 부산항 북항을 끼고 있는 동광동과 중앙동 일대에 속속 둥지를 틀면서 자리를 잡고 있는 문학단체와 작가들이 가세해 바야흐로 부산 문학이 제2의 르네상스를 꿈꾸기 위한 기반과 여건이 얼추 마련되었다. 2017년경에는 다른 구(區)보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중구 일원에 터를 둔 문학인들의 조직인 부산중구문인협회가 조직되어 지난해 제1회 용두산문학상을 제정하여 한평생 중구민으로서 창작 활동을 했던 아동문학가 강기홍 선생을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함성이 1987년 6월의 항쟁으로 되살아나 광복동과 남포동 그리고 중앙동의 거리에서 불꽃처럼 피어올랐던 땅이기도 하다. 비록 17세기 초량왜관 조성으로 근대적인 의미의 시가(市街)가 형성되었지만, 이후 세계사적인 격동과 전쟁 및 산업화·근대화를 지나면서 이 나라 산업과 문화의 조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곳이다. 자갈치시장과 공동어시장을 중심으로 한 남항 일대와 임시수도기념관이 자리한 서구 부민동의 독특한 역사·문화적인 공간, 그리고 부산근현대역사관과 백산기념관을 품은 대청로를 가로지르면서 웅크리고 있는 형형색색의 글감들이 작가의 펜이 스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부산항 북항 일대에 오래전부터 작가들이 살면서 작품을 생산해 냈다. 삶의 터전으로서 주거 공간의 시간을 지나 지금은 ‘기획된’ 행위로써 작가들이 속속 모이는 공간의 시간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시간 속에서 운명처럼 글을 써야 했던 지난 세대의 작가정신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예술 형식과 내용을 불러내는 작업이 북항 일대에 번지기를 기대한다.
2025-03-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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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예술인 복지지원센터를 아시나요?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춘삼월이다. 새싹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하며 바깥 공기는 들숨으로 설렘이 스며들며, 날숨으로 지난했던 시간을 내보내는 희망의 계절이 온 것이다. 고모가 사준 책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 대학이라는 미지의 바다에 첫발을 내딛는 신입생, 자연과 사람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간을 올해도 어김없이 맞이한다.
2025년의 봄은 전 국민을 법 전문가로 만들어 버렸다. 각종 미디어에는 평생 다시 볼까 싶을 수많은 재판 영상을 일상처럼 접한다. 매일 마주하는 미디어에 법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날이 없다. 조선시대 어른들은 인의예지(仁義禮智) 같은 덕목을 강조하며 법 없이 살라 했거늘, “야! 구속시켜”라는 말이 요즘의 단골 농담으로 입에 오르내린다.
예술인 복지 정책, 성과 요구 방식
예술 활동 증명 절차 통해야 지원
자격 미비해도 사회가 품어줘야
‘헌법 77조’는 전 국민이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미디어에 노출된다. 우리에게는 지난 10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내란으로 인한 불면증은 국민의 트라우마가 되면서 내란과 탄핵 그리고 앙시앙레짐(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절대왕정 체제를 가리키는 용어)의 시대를 반복해야만 하는 불안한 정국을 10년 사이에 두 번씩이나 맞이하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시대를 하루하루 버텨간다.
그러고 보니 신학기에 법 관련 에피소드가 있었다. 모 대학 출강 시절이다. 지역에서는 제법 정문의 위용이 근엄한 학교였다. 정복과 모자를 쓴 정문 지킴이 분이 입차하는 차를 막아 신분 확인을 하던 시절이다. 학기 초는 출입증 발급이 안 된 상태라 구두로 확인한다. 하필 학과도 아니고 무슨 과목을 강의하러 왔냐길래 “표현기법”이라고 답하니 “법대는 오른쪽 끝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하시고는 경례를 멋지게 하시는 거다. 그날 첫 강의는 미술대 학생들에게 법을 가르쳐야 하나! 웃음을 머금으며 강의실로 갔던 기억이 있다.
서구의 역사에 비하면 60, 70년이 뒤쳐졌지만 우리나라도 2000년부터 시대의 요구에 따라 문화예술진흥법이 시행되고 2012년 11월 25일부터는 예술인 복지법이 함께 작동되고 있다.
예술인 복지법의 핵심은 예술인의 법적 지위 보장, 예술인 고용보험 및 사회보장제도 적용, 창작지원금 및 생활 안정 지원, 불공정 계약 및 노동권 보호이다.
부산문화재단에서 부산예술인 복지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복지혜택을 받는 예술인들은 매우 작은 수치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 활동 증명이라는 절차를 득해야 하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제출한 자료를 근거로 심의를 거쳐 ‘예술인 활동 증명서’를 승인해 준다. 각종 지원을 받으려면 증명이 되어야 한다.
부산광역시 예술인복지 증진에 관한 조례 제4조(증진계획의 수립·시행)에 의하면 ‘부산광역시장은 예술인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해마다 예술인복지증진계획을 수립·시행하고, 추진 상황을 시의회에 보고하여야 한다(2020년 개정)’고 명시되어 있다. 현재 부산예술인 복지지원센터는 독립된 조직이나 형태 없이 부산문화재단 내에 2~3명의 직원이 도맡아서 감당해 내고 있다. 독립된 센터 없이는 지역 예술가들과 가까이하기엔 한계가 있다. 시행 시점부터 변화 즉 발전이 없는 명분만 있는 상태이다. 지역 예술인들은 예술인 복지 제도 혹은 센터가 존재하는지 알고 있을까?
복지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소외된 자, 즉 자격이 미비하더라도 사회가 그들을 품어주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미디어를 통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예술가들의 소식은 남의 일이 아니다. 제도와 정책은 사각지대를 애써 외면한다. 모름지기 복지라는 보편적 지원의 시각에서 사회보험 강화 정책, 경력 단절, 산재보험 가입, 예술인 신문고 이용 등 다양한 특례, 미시 정책 개발을 바탕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의 복지 정책은 성과를 요구하는 지원 방식이다. 유형의 결과를 만들어야 하니 기초예술지원과 다를 바 없다.
부산에 세계적인 미술관과 예술공원이 생길 모양이다. 부산의 브랜드 가치와 시민들은 소위 고급문화를 누리는 삶으로 격상될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지역 예술가는 오늘도 예술복지의 사각에 놓여있고 예술과 삶의 경계에서 작두 타듯 하루하루를 버텨 낸다. 드러나지 않아도 본인의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수행하는 예술가들, 화려한 건축물은 아니더라도 세계적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부산에 터전을 잡고 지역문화를 위해 애쓰는 예술가들의 삶을 살펴볼 조그마한 센터 하나 마련되면 좋겠다. 이런 상상을 하며 봄 댓바람에 몇 없을 학생들을 만나러 강의실로 간다. 오늘의 강의 주제는 “얘들아, 성공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거라.”
2025-03-0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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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기원전 399년 봄 아테네의 광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렸다. 시민 2명이 소크라테스를 기소했는데, 혐의는 신에 대한 불경죄와 청년 세대의 정신적 부패 조장이다. 재판은 하루 만에 끝이 났고, 50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피고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재판 과정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으나, 피고는 아무 죄가 없는데도 처형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그에게 철학은 인생의 교훈이나 삶의 지혜를 탐구하는 연구가 아니라, 편견을 제거하고 사고를 깊게 하는 문답의 실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란스럽거나 근거가 부족한 신념을 다소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의견, 판단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것의 토대를 깊숙이 파헤치는 지성적 활동을 철학이라고 생각하였다.
국민에 의한 통치라는 ‘민주주의’
비합리적 편견 등에 휘둘릴 수도
사유와 이성의 훈련 뒷받침 필요
당시 아테네 사회에는 잘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잘살려면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세속적 신념이 팽배해 있었다. 이것을 부정하거나 다른 가치관을 제시하는 것 대신, 소크라테스는 학생들에게 먼저 잘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대체로 학생은 잘산다는 것은 즐거운 인생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즐겁게 살지만 쾌락에 빠져 건강을 잃은 사람의 사례를 들면서, 그런 삶도 잘사는 것이냐고 묻는다. 이제 학생은 이전의 의견을 발전시켜, 잘산다는 것은 절제하는 삶이라고 답한다. 다시 소크라테스는 절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학생은 제대로 절제하려면 무엇이 자신에 이롭거나 해로운지 알아야 한다고 답한다. 다시 문답은 이어진다. 이런 토론 방식을 문답법 또는 변증법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소크라테스에게 철학 그 자체이다.
변증법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아테네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청년들은 자신의 사고가 얼마나 얕은지 깨닫고 더욱더 공부해야 한다고 마음먹게 되며 동시에 부모나 교사, 전통을 이전처럼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아테네의 기성세대들은 소크라테스 때문에 청년들의 심성이 비뚤어졌다고 믿고 소크라테스를 미워하여 아테네에서 제거하려고 하였다. 불경죄란 국가가 믿는 신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자세인데, 실제로는 전통이나 조상,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경멸하는 태도와 행동을 가리킨다. 소크라테스의 혐의 두 가지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아테네에서 불경죄로 처벌된 유명인은 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판을 받기 전에 도망쳤고, 알키아데스는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도주했으며, 프로타고라스는 사형 판결을 받았거나 추방되었다. 이런 판결은 모두 민주주의적 절차를 따랐다. 민회에서 추첨으로 선출된 배심원들이 투표하여 다수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민회는 에클레시아라고 부르는데,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결정하며, 전쟁을 선포하고, 장군을 선출하고, 민주주의를 해칠 위험이 있는 인물을 투표하여 추방한다. 민회는 18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참여할 자격이 있었다.
민주적 절차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유명한 사건은 아르기누사이 해전 직후에 벌어졌다. 기원전 406년 아테네 함대는 지금의 튀르키예 해안의 아르기누사이 제도 근방에서 스파르타 해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폭풍우 때문에 표류하는 25척의 전함을 구출하지 못했고, 익사한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테네 민회는 장군 8명을 해임하고 소환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2명은 도망하여, 6명이 재판을 받았다. 첫날 재판에서 장군들은 나쁜 기상 때문에 생존자를 구출할 수 없었다고 변론하였고, 이것이 민회에 모인 군중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저물어 재판은 다음 날로 이어졌고,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이날 그 해전에서 구출되지 못하고 익사한 승무원들의 가족들이 재판이 열리는 민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은 장군들에게 엄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요구하였고, 정치가 칼릭세노스는 더 이상의 토론 없이 장군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투표하자고 제안했다. 몇몇 사람은 이 제안이 부당하다고 반대하였으나, 반대자들에게도 장군들이 받을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자 그들은 반대를 철회했다. 이날 재판을 진행하는 민회의 진행자는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충분한 토론 없이 투표하자는 제안에 반대하였으나 투표는 그대로 진행되어 장군 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민주주의는 그리스 말로 데모크라티아인데, 국민 즉 데모스가 통치한다는 뜻이다. 국민은 편견 또는 질투 같은 감정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지성으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둘 다 민주주의이지만, 전자는 타락한 민주주의이고 후자가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도 아테네처럼 타락의 위기이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의 타락을 경험하였으며, 지성의 훈련을 통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2025-0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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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봄, 돌봄, 공동체 그리고 건축
대전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하교하던 8살 초등생이 살해당했다. 피의자는 같은 학교 교사다. 가장 늦게 혼자 하교하는 아이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워킹맘들의 불안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게 됐다.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마저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 된 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왕따, 집단 폭력 외에도 학생과 교사의 인권을 이야기하기조차 부끄러운 상황이다.
“교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우울증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마저 안전하지 않다”라고 하면서 특정 집단의 문제로 몰고 가는 건 위험하다. 오히려 교육 환경과 안전의 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을 점검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특히, 한부모 가정이나 부모 모두 일을 하는 경우 아이들 돌봄은 가장 힘들고 또 중요한 문제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방과 후 여러 학원에 다니게 하면 경제적 부담은 더욱 증가한다. 저출생 문제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돌봄이다.
최근 대전에서 발생한 초등생 비극
지역과 연계한 학교 역할 고민 던져
아동·노인 돌봄 등 다양한 용도 가능
사회적 기여 확대 방안 검토할 시점
대전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은 맞벌이 혹은 한부모 가정뿐 아니라 노인, 장애인, 취약 계층에 대한 돌봄 체계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미비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돌봄의 책임을 지역사회가 함께 나누고, 이를 위한 공간과 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학교 시설과 유휴 공간을 지역사회와 연결하여 ‘공동체적 돌봄’을 강화하는 방안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아이가 있으면 그 마을의 어른들은 아이의 양육 과정에 자연스럽게 함께 참여하곤 했다. 하굣길에서 마주치면 안부를 묻고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마을 잔치가 벌어진 것처럼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아이가 방과 후 집에 오지 않아 학교에 찾아가면 십중팔구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교는 마을의 중심이자 커뮤니티 공간의 기능을 했다.
여전히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지만 인구 소멸, 저출생과 함께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하교 후 방치되는 넓은 공간을 아동 돌봄, 노인 돌봄, 장애인 돌봄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한다면 교육 환경을 개선하면서 동시에 지역사회와의 유기적 관계도 구축할 수 있다.
일본 사이타마현 요시카와시의 미나미소학교는 지역의 공공시설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주민센터, 노인주간보호센터, 육아지원센터, 어린이 보육시설의 기능을 하나로 묶은 복합화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이 학교는 동선 분리와 운영 시간 조정을 통해 학생과 지역 주민이 공간을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주민들이 사용하는 시설은 1층 동쪽에, 학생들의 특별 교실은 서쪽에 배치해 동선을 명확히 구분했다. 또한, 시설별 운영 시간을 조정하여 학교는 평일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 주민센터는 오전 8시에서 오후 8시 등으로 운영된다. 프랑스의 에코 스쿨(Eco-School) 모델은 학교를 지역 친환경 커뮤니티 센터로 전환해 활용하는 방식이며, 핀란드에서는 민간단체인 ‘만네르하임’이라는 아동복지연맹과 학교가 협력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돌봄의 개념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 노인들은 가족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생활했지만, 현재 노년층은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 ‘신중년’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정되고 있다. 이들은 독립적인 생활을 원하면서도, 사회적 교류와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한다. 일본의 코다마 프로젝트는 시니어와 아동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교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시니어에게는 돌봄 교사의 역할을 부여하여 지역사회의 통합을 이루는 데 일조했다.
건축의 사회적 역할에서도 ‘돌봄’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 학령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평생교육을 확장해야 하는 이 시점에 학교 시설은 학교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지역사회의 거점 공간이자 가장 안전한 복합 공간으로 조성되도록 우선하여 고려돼야 한다.
앞서 밝혔듯이 대전 초등학생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피의자는 가장 늦게 하교하는 아이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 대상은 특정한 아이가 아니라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공공의 눈이 있었다면 함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돌봄은 더 이상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지역사회와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제는 돌봄을 위한 공간을 새롭게 정의하고 공동체의 역할을 확장할 때다.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 튼다는 우수(雨水)가 지났는데도 한파는 여전하다. 이러저러한 사건, 사고로 마음까지 추운 시절, 돌봄이 우리 사회에 봄기운을 몰고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5-02-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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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기초예술은 미래 먹거리다
최근 중국 인공지능 챗봇 서비스인 ‘딥시크’의 등장으로 전 세계가 놀랐다. 딥시크가 보여준 놀라운 효율성은 곧바로 세계적인 반도체와 전력 기업의 주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관련 기술들은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무한 경쟁에 들어간 기술 혁신의 속도는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따라가기 어렵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다. 우리가 자신 있게 다른 나라와 격차를 벌릴 수 있는 산업 분야는 무엇인가? 바로 K문화라 불리는 문화산업이 그중 하나다. 우리는 김구 선생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다”라고 한 ‘그 힘’을 가지고 있다.
주요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쏟아져 나오는 우승이나 상위 입상 소식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지난 2월 9일,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콩쿠르에서 16살의 발레리노 박윤재가 그랑프리를 수상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공연예술에서 음악 분야를 넘어 무용 분야에까지 나타난 성과들은 단순히 개인적 능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가진 문화적 영향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것이다.
문화로 세계에 우뚝 서는 일은 개인의 열정이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교육, 특히 기초 예술교육은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기초가 튼튼해야 오래 유지되고 큰 업적을 만들 수 있는 법이다. 문화와 예술은 단순한 미적 즐거움이나 개인적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창의성이나 사고력을 함양하는 중요한 자본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같이 누리는 힘은 사회적 소통과 연대를 만들어내어 우리 사회의 기초를 튼튼하게 만들고 풍요롭게 하는 자산이 된다. 당연히 예술을 즐기고, 공유하며, 거기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제27조는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문화적 삶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와 예술을 즐기며 과학적 진보의 혜택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사회권 규약’ 또는 ‘A 규약’이라고 불리는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제15조에서도 ‘모든 사람은 문화적 삶에 참여할 권리, 과학과 기술 발전의 혜택을 누릴 권리, 자신의 문화적·창조적 이익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든 개인이 예술을 즐기고 창작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껏 예술을 누릴 권리만 강조한 것 같다. 이제는 예술의 창작에 직접 참여할 권리를 말할 때가 되었다. 배우고 싶다면 누구나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술교육이 더 이상 부모의 경제력이나 지역에 따라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권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있는 누구나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국의 클래식 음악교육은 개인의 성장 환경에 따라 기회나 질적 수준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무엇보다도 높은 교육비와 악기 구입비 때문일 것이다. 지금 부산이 준비하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는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오페라하우스 설립이 단순한 건물 짓기만 되어서는 안 된다. 오페라와 관련된 다양한 공연예술 교육을 누구나 쉽게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예술이라는 추상적이고 ‘불안정한’ 직업을 선택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모든 기초학문이 그렇듯이 기초예술도 아주 큰 명성을 얻기 전에는 부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기초학문 위에서 응용학문이 발달하듯이, 기초예술이라는 바탕에서 소위 ‘돈이 되는’ 일자리가 생기는 법이다. 국가가 기초학문을 지원하는 것처럼 기초예술도 지원해야 한다. 이런 지원에는 기초예술을 배우기 위한 시스템과 그 예술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미래 대책까지 포함해야 한다. 오페라하우스가 제작극장이 되어야 하는 올바른 이유다.
오페라하우스가 장소 임대업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제작극장이 된다면 이런 것을 한꺼번에 해낼 수 있다. 공공극장의 본연은 단순히 공연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예술 창작과 관련된 여러 직업군이 함께 일하는 복합 공간이기 때문이다. 예술극장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수익을 창출하는 공간이 될 수 없다. 세계 각지에 있는 어느 오페라하우스도 정부나 민간 지원 없이 유지되는 곳은 없다. 공공극장은 예술가의 일터이자 기초예술 교육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경쟁력을 가진 문화도시로 가는 첩경이다. 우리나라 삼성이 오랫동안 지원했던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미국 마스터카드나 영국 데톨이 메이저 스폰서가 되는 이유도 그 장소가 일자리이자 교육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제작과 교육이 함께 있는 예술 환경을 부산이 먼저 만들자.
2025-02-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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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딥시크 쇼크’와 AI 인재 육성
‘파란 고래’가 일으킨 파도에 전 세계가 출렁이고 있다. 이 파란 고래는 중국에서 왔고 나이는 두 살, 이름은 ‘딥시크(DeepSeek)’다.
창립 2년이 채 안 된 중국의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는 저사양의 값싼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반도체를 사용하여 ‘챗 GPT o1’과 비슷한 수준의 성능을 가진 생성형 인공지능을 개발해 선보였다. 딥시크가 밝힌 개발 비용은 오픈AI GPT 개발 비용의 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굳이 고사양의 비싼 GPU와 반도체를 쓰지 않고도 성능 좋은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타나자 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GPU 생산 업체인 엔비디아의 주가 시가총액이 하루 만에 6000억 달러, 한화로 약 840조 원이 증발했다. 이뿐 아니라 전 세계 인공지능, 반도체 관련 주가가 요동쳤다.
전 세계 충격 준 중국 인공지능 모델
개발자, 자체 육성한 국내파 청년들
핵심 인재 떠나는 우리 현실과 대비
관심이 집중되면서 딥시크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가령 딥시크 개발에 고성능 AI 반도체를 사용했을 것이며, 따라서 발표보다 훨씬 더 많은 개발 비용이 들었을 것이라는 의혹, 또 개발 과정에서 오픈AI의 기술을 훔쳤다는 의혹, 딥시크는 중국 정부의 검열을 받기 때문에 특정 문제에 대한 답이 제한적이라는 지적, 딥시크 사용 시 개인정보를 비롯한 민감한 데이터가 중국으로 유출될 수 있다는 비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지적과 비판을 일부 수용하고, 딥시크의 발표가 어느 정도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딥시크의 등장은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오픈AI의 챗 GPT가 비공개 폐쇄형 모델인 반면 딥시크는 오픈소스로 개방되었다. 소스가 모두에게 개방됨으로써 누구나 손쉽게 인공지능 모델을 개발하고, 경쟁을 통해 더욱 혁신적인 발전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딥시크는 고성능 GPU와 반도체를 더 많이 투입할수록 인공지능 성능이 더 좋아진다는 기존의 성공 방정식마저 깨트렸다.
살펴본 바와 같이 딥시크는 폐쇄에서 개방, 고비용에서 저비용으로 인공지능 모델 개발 방향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막대한 자본을 가진 몇몇 소수 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한 인공지능 기술과 시장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됐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건전한 경쟁과 혁신이 이뤄지고 그 결과 인류 모두가 낮은 비용으로 고성능 인공지능 기술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맥락에서 딥시크의 등장은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인 마크 앤드리슨의 말처럼 ‘스푸트니크 모멘트(Sputnik Moment)’에 비견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딥시크 쇼크에서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딥시크가 중국 토종 국내파 청년들을 중심으로 개발됐다는 점이다. 창업자 량원펑(40)은 중국 저장대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하였고, 딥시크 핵심 개발자로 알려진 뤄푸리(30) 역시 베이징대에서 컴퓨터언어학을 공부한 순수 국내파다. 이외 대부분의 딥시크 개발자 역시 국내파로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젊은 청년들이라고 소개됐다. 중국 정부는 2017년 ‘차세대 AI 발전 계획’을 세우고 국내 AI 인재 육성에 힘을 써 왔는데, 이게 딥시크라는 결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에 반해 인공지능 3대 강국을 목표로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참담하다. 시카고대 폴슨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AI 인재의 40%가 해외로 떠나고 있으며, 미국 스탠퍼드대 인간중심 AI 연구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은 AI 인재 순유출 국가로 분류된다. 해외 인재가 우리나라를 찾기는커녕 국내에서 어렵게 육성한 인재가 되레 해외로 떠나는 실정인 것이다.
지금은 AI가 경제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와 나라 경쟁력까지 좌우하는 시대다. AI 시대에 대한민국이 생존하기 위해 우수한 AI 인재를 육성하는 것은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정부는 각 부처의 인재 정책을 통합해 장기적 관점에서 생애 주기별 AI 인재 육성 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AI 인재 육성 정책은 학부와 대학원 과정 지원에 집중되어 있는데, 초중고 AI 인재 발굴과 육성, AI 석학 연구자 및 교수들의 정년 연장 등으로 지원 대상을 넓힐 필요가 있다. 또한 뛰어난 신진 연구자에게는 병역 대체나 면제, 출산 및 육아기 자율 근무와 같은 혜택을 주는 방안도 고려돼야 한다. 생애주기에 따라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우선 마련하고 성과에 따른 획기적 보상 체계를 구축해야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자생적 AI 연구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딥시크 쇼크는 위기이자 기회다. 지금이 바로 파격적인 AI 인재 육성 대책을 마련하여 인공지능 3대 강국으로 도약할 골든 타임이다.
2025-02-0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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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글쓰기의 악몽
지난 연말부터 설날을 지난 지금까지 한국에서 벌어진 윤석열 대통령 탄핵 관련 사태를 생각하면, 이처럼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더욱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는 때도 아마 없을 것 같다. 2017년 전직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으로 국정농단의 전모가 드러날 때도 우리는 눈과 귀를 의심했던 사실을 기억한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근래 10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 정국의 주인공이 돼 TV 화면에 생생하게 중계되는 ‘비극 아닌 비극’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통령 탄핵 사건을 두고 연말부터 연일 탄핵 찬반 집회가 도심 한복판에서 꽁꽁 언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현재 구치소에 구속 수감된 대통령이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부쩍 “반국가 세력” 운운하면서 그간 무의식에 잠들어 있던 국민의 이념 정서와 감정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당시만 해도 사태가 이렇게 급박하게 파국으로 치닫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나 또한 대통령의 경직된 사고를 걱정하면서도 역사 교과서에서나 존재한다고 믿었던 ‘비상계엄’이 2024년에 선포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대통령의 지난 발언들을 비롯해 대통령 고교 동문인 몇몇 국무위원과 국방부 예하 수장들의 인선과 승진을 생각하면 이제야 뭔가 아귀가 맞춰지는 듯하다.
물론 이런 ‘복기(復棋)’에서 끄집어낸 정황과 속내를 꿰맞춰 본 사람들이 많을 줄로 안다. 여기에 지난 1월 19일 폭도들의 법원 침탈, 계속된 선거관리위원회 부정선거 의혹 제기, 극우 유튜버들의 지속적인 ‘가짜뉴스’ 선동이 국민의 눈과 귀를 혼몽하게 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는, ‘새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지난해에다 여분의 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법률 체계가 탄핵 심판 과정에서 교묘하게 적용되어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의 과정뿐만 아니라 심지어 계엄령 선포 직후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에 들이닥친 계엄군의 작전마저도 대통령의 ‘통치행위’란 이름으로 하등 위법일 리 만무하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에서 봇물 되어 터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은 단순하고 명백하지만 그 사실을 들여다보는 눈과 인식이 다양해진 점에서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대통령의 주장대로 고도의 통치행위였든, 자신에게 심각한 파국을 안겨다 줄 것이 분명한 국회 특검법 상정을 무마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목숨을 건 무리수였든, 지금의 ‘대한민국호’는 분명 안개로 가득한 바다 위에 위태롭게 떠 있다. 차기 대선을 꿈꾸는 예비후보들도 자신의 속셈을 위장한 채 당분간 눈에 보이지 않는 선거 전략을 기획할 것이다. 언론 보도에서 탄핵 관련 단독기사와 속보가 끊이지 않는 이때, 글쓰기가 업인 나 자신을 돌이켜본다.
글은 말보다 어렵다고들 한다. 당연한 것이, 말은 수시로 할 수 있지만 글은 곰곰이 생각한 뒤에라야 나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장이나 문맥 또한 일관성이 있고 호응에 맞아야 함은 물론이요, 글에 내비친 글쓴이 견해의 진실성 여부와 관계 없이 그 생각의 앞뒤가 명쾌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사람이 말로써 드러내지 않는 평소 자신의 철학과 소신, 그리고 세계관을 은연중에 세상에 알리는 일이 된다. 어떤 누구도 어떤 이유에서든 글쓰기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가 없다. 사람은 글을 쓸 때 가장 진솔하고 정직한 상태로 돌아간다. 글은 거짓을 모르기 때문이다. 설령 거짓이나 현혹의 수단으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의도를 숨길 수 없기에 글은 거짓을 모른다.
글이 새처럼 광활한 하늘을 휘젓고 다니면서 인간의 무한한 상상과 크레바스(빙하 속 깊고 거대한 틈)와도 같은 심연의 사고를 확장할 때, 인간 문화와 정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건 아니다. 요즘처럼 ‘말하기’와 ‘듣기’로써 세상을 함부로 재단하고 확신하고 맹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일수록 글이 지닌 ‘오묘한’ 가치를 되짚는 일이 잦아졌다.
1·19 ‘법원 찬탈’을 감행했던 젊은이 대다수가 자신의 그런 행위를 초래하게 한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들었던 말은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일종의 전염병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역설을 깨닫게 한다. 그런 말을 엄선해서 글로 옮겨야 하는 나로서는 새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글쓰기의 악몽’을 예감한다. 악몽 같은 현실은 시간이 지나면 어떤 형식으로든 수습이 되지만, 한 번 휘갈긴 글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내가 점점 드러나니 말이다. 그나저나 또다시 을사년을 맞이한 심정이 괜한 기우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5-01-30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