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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사랑이 끝나고 남은 빚… 법정으로 간 연인들
“그땐 정말 결혼할 줄 알았어요.” 사랑이 끝난 자리에 돈 문제가 남는 것만큼 씁쓸한 일이 또 있을까.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이 이별 후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법정에서 서로를 할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최근 SNS에는 젊은 연인 사이에 고가 명품을 선물하거나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등 ‘통 큰 사랑’을 과시하는 모습이 넘쳐나지만, 그 이면에는 관계 파탄 후 금전 문제로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많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수많은 약속과 금전적 지원이 ‘빚’이라는 현실의 무게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연인 사이에서 금전 거래를 할 때 명확한 서류를 작성하거나 구체적 증거를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이다. 서로 사랑하고 믿는다는 이유로 굳이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연인 사이에 오간 돈이 ‘차용’인지 ‘증여’인지를 구별하는 건 사건의 핵심이다. 차용이라면 반환 의무가 있지만, 증여는 그렇지 않은데, 법적 분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입증책임’이다. 계좌이체 내역이 있으면, 대여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체 내역은 돈이 건네졌다는 것만을 입증할 뿐이다. 상대방이 그 돈이 증여나 호의로 준 돈이라고 주장할 때 반박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법원은 ‘다른 사람의 예금계좌에 금전을 이체하는 등으로 송금하는 경우 그 송금은 소비대차, 증여, 변제 등 다양한 원인에 기하여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송금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소비대차에 관한 당사자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쉽사리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두 사람이 연인 관계에 있는 남녀 간이라고 하여 금전 수수의 원인을 곧바로 증여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그 원인이 대여인지 증여인지는 돈을 주고받은 경위와 용도, 당사자들의 경제 사정 및 구체적 생활 관계, 액수, 반환 의사 유무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관계 파탄 뒤 법정 공방 사례 많아
금전 거래 물증 남기는 경우 적고
차용·증여 가릴 증거 제시 쉽지 않아
로맨스 스캠 사기까지 기승 피해 늘어
법원은 송금 메모 등 정황 통해 판단
금품 오고간 기록 남기는 성숙함 필요
필자가 맡았던 사건이 떠오른다. 남자는 여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선물과 용돈을 줬고, 어느 날 남자는 돈을 불려 결혼 자금으로 사용하자며 여자에게 투자를 권했다. 여자는 남자를 믿고 대출까지 받아 돈을 건넸지만, 수익금을 주겠다는 남자는 소식이 깜깜했고, 알고 보니 투자금은 도박 자금으로 사용되어 결국 그 관계는 파탄이 났다. 여자는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남자는 그동안 줬던 용돈으로 퉁치자고 응수하면서 법정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돈 액수는 비슷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남자가 준 돈은 증여였고, 여자가 준 돈은 투자금이었다. 게다가 도박 자금으로 사용된 그 투자금은 사기 편취금이 되어 형사사건에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법원은 문자, 송금 메모, 통화 녹취 등 주변 정황을 통해 실제 의사를 판단한다. “나중에 꼭 갚아줘”, “이건 빌려주는 거야” 같은 표현이 있었다면 반환의 가능성이 더 높게 인정된다. 반대로 기념일, 생일, 이벤트 등 특별한 날에 보내진 금전이나 선물은 증여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교제 기간, 금전의 규모, 경제력 차이 등도 고려 대상이다. 명의신탁 문제도 복잡한 쟁점이다. 차량을 연인 명의로 등록하거나, 공동 창업을 하며 한 사람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해두는 경우, 관계가 틀어진 뒤엔 실소유권을 놓고 법적 다툼이 불가피해진다. 단순히 “돈은 내가 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래 내역, 명의자와의 문자, 사용 권한 등이 모두 입증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연애 감정을 악용하는 ‘로맨스 스캠’ 사기 범죄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순수한 마음을 이용당하는 피해자들이 더욱 늘고 있다. 사랑과 사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씁쓸한 세태다. 법정에서 만난 전 연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땐 서로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법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법은 증거를 요구한다. 그래서 연인 사이에도 ‘기록’이 필요하다. 반드시 차용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자나 이체 메모 같은 작은 흔적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건네면서 메모를 남긴다는 건 다소 삭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뢰를 지키는 방법일 수도 있다. ‘혹시 헤어지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 차용증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혹시 모를 상황에서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는 성숙한 배려의 표현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사랑이 끝나면, 감정은 사라지지만 돈거래는 남는다. 남은 돈을 두고 다시 법정에서 마주하게 되지 않으려면, 감정과 거래는 분리되어야 한다. 감정으로 맺어진 관계라도, 돈이 오간다면 그 순간부터는 기록이 필요하고, 그 끝이 법정에서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법정에선 감정보다 증거가, 믿음보다 문서가 더 큰 힘을 가진다.
2025-06-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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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국민주권이라는 법의 정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기술한 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이 국민주권 국가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주권은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권위를 나타낸다. 이러한 권위를 국민에게 귀속함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주권은 공(公)법에 속하고 주인이라는 것, 혹은 그러한 소유권은 사(私)법에 속하기에 법학에서 둘은 엄밀히 구분된 영역이다. 그러나 ‘배제’하는 권리라는 궁극적 속성에서 둘은 공통점을 가진다. 즉, 주권과 소유권은 권리자 외에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지배권의 행사가 성립한다.
지배란 자신의 의사를 강제하는 행위다. 반대로 지배받는다는 것은 내 의사가 아닌 의사를 강제받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 법치는 법의 의사를 모두에게 강제하고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해지는 강제행위다. 국민뿐만 아니라 국가도 법의 지배를 받는다. 국가의 의사를 강제하는 행위가 법에 근거하지 않을 때 국가의 지배는 불법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강제하는 행위는 합법적일 때에만 정당한 지배라고 인정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대한민국
국가는 국민들의 공동소유 대상
누구도 특권적 국가 소유 안 돼
삼권분립도 국민이 위임했을 뿐
국민주권 대상서 타국민은 배제
따라서 '식민지배=불법' 성립돼
지배는 물건에 대하여 지배관계를 정하는 물권과 연관 지어볼 수 있다. 본 글에서는 물권 중 소유, 점유, 공유라는 개념구분을 살펴보려 한다. 점유권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영미법 체계에 근거하여서 대륙법 체계 구분과 약간 다를 수 있다. 소유는 물건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며 점유는 물건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공유는 2인 이상이 한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다. 예컨대 볼펜이 하나 있다고 하자. 볼펜이 나의 것이고 내가 사용하고 있다면, 볼펜은 나의 소유물이다. 나의 볼펜을 사실상 철수가 사용하고 있다면, 볼펜은 철수의 점유물이다. 나와 철수가 볼펜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면, 볼펜은 나와 철수의 공유물이다.
소유권은 물건을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는 전면적인 지배권리와 함께 소멸시효가 없는 항구적인 권리다. 점유권은 물건, 영역, 지위 등을 실질적으로 차지한 상태로부터 파생된 권리이며 점유기간에 한하여 인정된다. 공유권은 지배권을 공동으로 가지기에 특정한 권리자가 독점할 수 없다. 세 지배형태에서 구분되는 개념적 특징을 참고삼아 국민주권의 의미를 해석해보면 흥미로운 논의가 열린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런데 어떤 국민을 말하는가. 한 국가의 개별적인 국민 한 명도 국민이고 국가의 모든 국민을 묶은 추상집합적 국민도 마찬가지로 국민이다. 개별 국민과 집합 국민, 두 국민의 공통점이 있다면 국가를 소유하지 않는 국민이라는 것이다. 개별 국민과 집합 국민은 모두 국가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점유권자다. (동시에 대륙법 체계상 점유를 정당화하는 법률권리인 본권을 가지기에 제한물권에도 해당한다.) 또한 국가를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누구도 특권을 가지고 독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유권자다. 전면적이고 항구적인 지배형태로 국가를 소유하는 무언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국가를 언제라도 지배하는 오직 법뿐일 것이다.
〈법의 정신〉에서 몽테스키외는 법을 ‘사물들의 본성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관계’라고 정의한다. 헌법이 국가의 본성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관계라면 민주공화국의 본성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으며 항상 점유되고 공유된다는 점이다. 특정 주체가 국가에 대한 소유를 말할 때 이는 법의 정신에 어긋난다. 예컨대 선출권력이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지배를 주장할 때 이는 오히려 불법이 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인 삼권분립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구성된 권력이 동등하게 국가권력을 공유하고 있는 제도로서 공동의 지배권을 가지기에 상호 견제할 수 있다. 권력의 선출과 임명 역시 국민이 위임한 점유권력이다.
민주정의 지배관계는 국가에 대한 소유권을 지우고 국민에게 점유권과 공유권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국민을 주인으로 만든다. 〈통치론〉에서 로크가 국가를 시민사회의 ‘수탁자’로 구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탁계약의 세 주체인 위탁자, 수탁자, 수익자를 떠올려보면, 최초의 건국자(사회계약 설정자)를 위탁자로, 국가를 수탁자로, 건국 이래 모든 국민을 수익자로 고안한 것이다. 신탁에서 법적 소유권을 갖는 수탁자는 국가 자체로 하고 수익자인 국민에게 실질적 소유권인 점유권과 공유권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하면 누구도 독점하지 않기에 모두가 주인이 된다.
한편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것은 자국민과 타국민을 구분하고 권리자 외에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지배권 행사를 자국민으로만 한정한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타국민의 지배를 주권침해로 판단하고 식민지배가 불법이 된다는 점에서도 국민주권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명시한다.
2025-06-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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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글로벌허브 도시와 문화적 접근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제는 소란과 정쟁을 멈추고,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한 여러 정책을 차분히 추진할 때다. 오늘은 지난해 1월 21대 국회에서 최초 발의되고 올 5월에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재발의된 ‘부산 글로벌허브 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의 앞날과 그 접근법을 걱정해보고 싶다. 특별법은 국회의 비협조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계속하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법은 민주당의 ‘부울경 메가시티 조성계획’안이나 대통령 선거 과정에 불쑥 불거진 ‘북극항로 개척 추진’안에 밀려 법안 자체가 아예 ‘휴지 조각’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지금까지의 여야 대치 국면을 고려해볼 때 크게 기대를 걸 바는 아니지만, 혹여나 특별법안의 큰 틀 안에서 메가시티와 북극항로가 대승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상생 국면이 조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법은 우선 물류, 금융, 첨단산업 3개 분야에서 각종 특례 제도를 적용하고 특구와 투자 진흥지구를 지정함으로써 부산에 글로벌허브 도시 조성을 위한 거점 기반을 확충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교육 환경, 생활 환경, 글로벌 문화관광 환경 등 도시의 정주 환경을 싱가포르, 두바이, 뉴욕, 로테르담, 도쿄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저출생, 고령화, 청년 인구의 유출로 야기된 부산의 구조적 위기도 어느 정도 개선되고, 남부권 거점도시의 발전에 따른 지역 균형발전도 같이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특별법 통과에 공을 들이고 있는 ‘글로벌허브 도시 범 여성 추진위원회’의 부산포럼에 초대되어 ‘글로벌허브 도시 부산과 문화 간 소통능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왔다. 많은 분이 도시와 문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지만, 포럼이 열린 부산진구 양정의 부산 시민운동 지원센터를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여기서도 경제적 관점이 압도적으로 대세구나!”라는 느낌이었다. 상공회의소와 부산시 관광협회, 한국 국제물류협회와 어느 정당 주최로 지난 4월 부산광역시 의회 대회의실에서 ‘글로벌허브 부산 특별법’ 대토론회가 있었다.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발제나 토론이나 부산의 국제금융, 국제물류, 디지털 첨단산업의 육성을 위한 특례 얘기만 가득했다. 관광산업 육성을 제외하곤 특별법에서 담고 있는 교육과 생활환경 선진화 이야기마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경제적 관점과 접근법에 압도적으로 밀려 문화적 관점, 문화적 담론은 특별법 논의에서 거의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게 필자의 시각이다.
문화는 그 도시의 얼굴이며, 품격이다. 문화가 바다라면, 경제는 그 바다에서 노니는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겠다. “경제적 관점과 논의만으로 우리가 바라는 수준 있는 부산, 글로벌허브 도시로서의 부산을 이룰 수 있을까?”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도시 발전이 경제만으로 담보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이 어디를 가나 항상 머릿속을 맴돈다. 글로벌허브 도시 부산은 21세기의 시대 과제에 맞추어 이질적인 문화 간의 소통능력이 고도화되고, 자기중심성과 우월성이 자취를 감추며, 세계인과 편견 없이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다중문화 공동체로서의 부산이었으면 한다. 부산일보 논설실장을 역임한 임성원 박사(예술학)는 저서 〈미학, 부산을 거닐다〉에서 부산의 미적 특성으로 혼종성, 역동성, 저항성 등을 꼽는다. 대한민국의 다른 도시는 몰라도 부산은 방향만 잘 잡고 시민 합의와 정책 지원이 이를 잘 뒷받침하면 국제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다른 것을 하나로 섞을 줄 아는 힘, 그리고 새로움을 향한 강한 열정과 저항 정신으로 새로운 다중문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생산 관계와 생산력의 모순이 세계의 토대이며, 법이나 종교 혹은 계급 문화 등은 그 토대가 만들어낸 상부 구조다”라고 했다. 필자는 거시경제와 사회문화의 상호 관계에 관한 한, 거꾸로라고 본다. 도시 문화가 토대이며, 물류, 첨단산업, 금융 등은 그 공동체 문화 위의 상부 구조라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어 ‘부산 글로벌허브 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 앞으로 어떠한 운명을 맞을진 알 수 없다. 그러나 얼마 전 이 특별법 통과에 시민 100여만 명이 순식간에 서명한 이상, 그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때 기존의 이야기와 함께 문화 이야기도 무성했으면 좋겠다. 자리만 폈다 하면 물류, 금융, 첨단산업 얘기뿐이다. 이젠 더 시야를 넓혀 도시의 열림, 다양성 추구, 시민 국제의식의 선진화 방안, 비판적 저항적 다중문화 사회의 구현, 제3의 도시문화창조를 통한 경제 활성화 이런 이야기도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졌으면 한다. 문화적 안목과 수준이 부산 경제를 더욱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받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2025-06-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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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신정부의 외교·안보 정책과 선결 과제
지난 6월 4일, 내란 종식과 민생 회복을 내걸고 대선에서 승리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4번째 대통령이며, 1987년 민주화 이후 4번째 진보 진영 출신 대통령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흔들렸던 헌정 질서를 복원하고, 이번 조기 대선에서는 8.27%포인트에 달하는 확실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진보 진영의 정당성을 재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기득권과 거리가 먼 소년공 출신이라는 입지전적 배경은 한국 사회에 새로운 지도자상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대통령의 책무는 정치 혼란과 사회 갈등을 해결해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을 구현하는 데 있다.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행한 취임사에서 이 대통령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국민 중심의 실용 정부”를 내걸고 ‘모두의 대통령’으로 민생과 경제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외교·안보 정책과 관련해서는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통해 글로벌 경제·안보 환경의 대전환이라는 위기를 오히려 국익 극대화의 기회로 만들고, 굳건한 한미동맹을 토대로 한미일 협력을 다지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도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고 언급했다. 즉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일본과는 경제·안보 분야에서는 협력하되 과거사 문제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중국과는 경제와 안보를 분리하면서 전략적 소통을 확대하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에는 참여하되 동시에 러시아와의 실무 대화도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가장 확실한 안보’라는 인식에 입각해 세계 5위의 군사력과 굳건한 한미군사동맹을 기반으로 북핵과 군사도발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대화의 문도 열어두겠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 기조는 한미동맹을 우선시하면서도 한국 외교의 자율성을 넓히고자 애써 온 역대 민주당 대통령들의 외교·안보 정책 계보를 이으면서도 악화일로에 있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의 국익을 최대화하려는 유연하고도 전략적인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 후 직면한 첫 번째이자 최대 외교 현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촉발한 관세 협상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하자, 백악관은 축하에 앞서 대선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졌다고 평가하면서 중국의 민주주의 간섭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이어 미 국무부는 한미일 3자 협력을 한층 심화시키겠다고 표명했다. 대통령 후보자 시절의 “셰셰(謝謝)” 발언으로 형성된 이 대통령의 대중 친화적 이미지에 견제구를 넣은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 6일 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과 첫 통화를 하고 관세 협상의 조기 재개와 관세 유예 조치 마지막 날인 7월 8일까지의 협상 타결 그리고 견고한 한미동맹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유세 당시의 피습 경험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최애 취미인 골프 라운딩을 제안하고 방미를 초청했다. 트럼프식 정치·전략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중요한 점은 ‘7월 패키지’로 불리는 한미 관세 협상이 단순한 관세 조정을 넘어 경제와 안보를 연계한 복합 패키지 협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는 국익 실현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위해서도 단기적 관세 완화는 물론, 미국과의 신뢰를 강화하면서 글로벌 경제 변화에 대응하는 포괄적 성과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한다.
이어 한국의 평화 안보와 직접 관련된 북한과의 관계 설정이다. 이미 김정은 정권은 남북 관계를 국가 간 관계로 설정하고 교류를 단절하겠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리고 이 대통령에 대해서도 당선과 취임 소식을 조선중앙통신 등 국영 매체를 통해 짧게 보도하는 신중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군사력에 의한 억제와 대화의 병행에 입각해 단계적 비핵화와 실무 채널의 우선적 복원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북한과 대화를 개시하고 또 북미정상회담이 재개될 경우 한국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 관계를 심도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미 70%의 국민은 남북한 국가 간 관계를 선호하고 있다.
이처럼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재명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역시 미국을 전략적 고정축으로 북한을 안보와 평화의 보조축으로 해 전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안보와 번영을 동시에 확보하는 실용 외교”가 단순한 수사로 끝나지 않고 현실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미국은 물론 북한과의 안정적인 관계 구축을 선결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다.
2025-06-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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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자산, 정책 변화 기대한다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막을 내렸다. 이번 대선은 정치적 의미를 넘어 블록체인 기술이 꽃피우는 디지털 자산 분야에 대한 대선 주요 후보들의 긍정적 태도가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요 후보들이 모두 디지털 자산 관련 공약을 핵심 어젠다로 제시한 것은 가상자산이 더 이상 일부 투자자들의 투기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경제의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디지털 자산이 금융, 산업, 기술, 국제무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제도권에 편입될 수 있는 전환점임을 의미하며, 향후 수년간 한국이 글로벌 가상자산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 트럼프 정부 시기의 정책 변화와도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동안 디지털 자산 시장은 법적 불확실성과 정책 공백 속에서 과세, 투자자 보호, 거래소 규제 등의 문제로 혼란을 겪어왔다. 특히 중앙정부 차원의 통일된 정책 부재는 지역 단위의 실험과 성과 확산을 제약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여야 후보들이 앞다퉈 디지털 자산 기본법 제정, STO(증권형 토큰) 합법화, 투자자 보호 체계 강화, 커스터디(수탁 서비스)와 같은 인프라 구축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향후 디지털 자산 산업이 기존 금융과 병행 가능한 제도권 산업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는 지난 정부까지의 투자자 보호와 투기 억제 중심의 수동적 관리 정책을 넘어, 정치권이 Web3, 탈중앙화, 디지털 주권 등 차세대 산업구조 전환에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산은 기존에 블록체인 특구로 지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산업 유치나 제도적 실험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원인은 실증사업 중심의 국지적 시범 운영, 중앙정부와의 협력 부족, 글로벌 플레이어 유치의 한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여야 모두가 디지털 자산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부산이 다시 한번 제도 실험지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기회가 마련됐다.
부산이 이러한 정치적 전환점을 실질적 이점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단기적 규제 유예에 그치는 규제 샌드박스를 넘어 ‘디지털 자산 특구법’과 같은 과감한 입법 조치를 통해 보다 상시적이고 안정적인 제도 환경이 구축되도록 중앙정부와 협력해야 한다. 둘째, 단순한 블록체인 기술 테스트가 아닌, 커스터디, OTC(장외거래), 토큰화 자산 유통 등 실제 산업 수요가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셋째, 글로벌 수준의 파트너십을 통해 해외 디지털 자산 기업 및 금융사 유치를 적극 유도해야 한다. 특히 중동, 동남아, 유럽 지역과의 투자 유치 및 협업은 부산의 국제적 위상 제고와 동시에 국내 산업의 경쟁력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
아울러 부산은 제도적 인프라 구축뿐 아니라 민간 중심의 저변 확대를 위한 실질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디지털 자산에 관한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연례 콘퍼런스, 글로벌 해커톤, 대학 및 스타트업 대상의 창업 경진대회 등 다양한 공개 행사를 적극 유치하거나 자체적으로 기획할 필요가 있다. 이는 디지털 자산 산업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고, 신진 인재와 기업의 참여를 촉진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중동의 두바이를 들 수 있다. 아랍에미리트 연방을 구성하는 일곱 개 토호국 중 하나인 두바이는 2022년 가상자산규제청(VARA)을 설립하고, 디지털 자산 전담 규제 체계를 마련해 글로벌 디지털 자산 기업들의 본사 및 운영 거점 유치를 적극 추진해 왔다. 이를 통해 바이낸스, 크라켄, OKX 등 주요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두바이에 진출했고, 다양한 디지털 자산 라이선스를 기반으로 제도화된 생태계를 빠르게 조성하고 있다. 또한 두바이는 디지털 자산 콘퍼런스와 전시회, 기업 유치를 위한 인센티브 제도를 운영하며, 국제적 허브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두바이의 접근은 규제 명확성, 정책 일관성, 민간과의 파트너십을 결합한 전략으로 평가 받는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선을 계기로 디지털 자산이 정치적, 제도적 공론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은 환영할 만한 변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약이 단순한 선거 전략에 그치지 않고, 실제 법제화와 행정적 실천으로 이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부산은 그 변화의 최전선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 선거는 끝났지만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2025-06-0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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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진정한 청년 정치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한다. 불과 6개월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조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있을 줄 몰랐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다. 국민의 뜻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치의 본질을 설명하는 말이다. 결국 정치권력도 영원하지 않다. 국민의 뜻이 모일 때, 그 어떤 권력도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시대와 국민의 변화를 반영해야 하는 정치에, 여전히 갈등을 부추기는 후보가 있다. 바로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다.
이준석 후보는 청년 정치를 내세우며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언어와 태도가 청년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준석은 오래전부터 여성할당제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때부터 이준석은 20대 남성들을 겨냥한다는 이미지를 굳혀왔다. 실제로 이준석 후보는 많은 20대 남성의 지지를 받았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20대 남성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준석이 정말 20대 남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있는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는 정책을 통해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공약을 발표하기보다는 ‘이대남’의 불만을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취해왔다고 생각한다. 지지율은 점점 높아지는데 구체적인 미래는 없는 정치, 그것이 이준석의 현주소다.
이준석 후보 공약집 '청년' 많이 언급
청년 창업 지원·공공 주택 확대 공약
재원 현실성 부족·실질적 혜택 의문
미래가 있고 모두를 위한 정치는
세대·성별 초월하는 통합적 정치
정치 성향 떠나 혐오·갈등 해소를
이번 대선을 앞두고 이준석 후보는 공약집에 ‘청년’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가령 청년들을 위해 공정한 경쟁 사회를 구축하겠다거나, 청년 창업 지원 등 청년을 위한 경제 정책을 확대하겠다거나, 청년 공공 주택을 확대하겠다는 등의 공약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및 성비 공정 역시 이준석 후보의 대표적 공약 중 하나다. 게다가 청년 창업가를 지원하고 청년 정치인을 많이 발굴하겠다는 정책까지. 이준석의 공약집은 온통 ‘청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실현 가능성이 매우 부족하다.
공정한 경쟁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이준석 후보의 대표 공약은 다소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부족하다. 이준석은 공정성을 주장하며 주로 남성 차별 문제를 제시했지만, 구체적인 법적·제도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과연 여성가족부를 폐지한다고 해서 남성 인권이 실제로 신장될 수 있을까? 이준석의 정책에는 두 성별 간의 갈등을 부추기기만 할 뿐, ‘인권’이라는 파이 자체를 늘리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또 청년 창업 지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은 채 청년 창업을 독려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이준석 후보는 유튜브 채널 ‘공부왕 찐천재’에 출연해 취업 준비를 하는 청년의 고민 상담을 진행했는데, 시의원으로 출마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생뚱맞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것이 이준석의 ‘청년 정치인 발굴’ 공약의 일환이라면 매우 곤란하다. 또한 이준석은 청년 주택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했지만, 주택 가격 상승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해 토지 공급 확대나 주택 시장의 실질적 규제 강화와 같은 대책은 부족하다. 청년들에게 제공되는 주택 혜택이나 대출 지원 등이 실제로 청년들이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혜택이 될 수 있을지 또한 의문이다. 특히 저소득층 청년들이나 중소도시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결론적으로 이준석의 공약들은 청년들의 모든 문제를 나열한 목록에 불과하며 그 어떤 속 시원한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이런 미비한 공약을 앞세운 그가 오로지 이대남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고 ‘청년 정치’ 꼬리표를 달고 있다고 생각하면, 여성과 남성을 떠나 대한민국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다. 얼마 전 대선 토론 당시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이준석 후보의 여성 혐오적 발언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준석은 지속적으로 갈등을 부추기는 발언을 일삼아왔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려는 국민들의 마음을 오히려 낙담케 하는 정치인의 출현이 매우 안타깝다.
이준석 후보에게 앞으로의 정치 인생에서는 ‘청년 정치’의 꼬리표를 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다. 이준석 후보가 내세운 혐오와 갈등의 프레임은 청년들이 원하는 미래지향적 변화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분노만 집약하는 정치는 한계가 뚜렷하다. 진정한 청년 정치는 이준석이 보여준 방식이 아니라, 혐오와 갈등을 해소하고 세대와 성별을 초월하는 통합적 정치다. 성별이나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대부분의 청년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이준석 후보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미래가 있는 정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정치. 그것이 진정한 청년 정치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2025-06-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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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대선에서 사라진 관광
조기대선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각 후보들의 선거공약과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날씨만큼이나 뜨거워지고 있다. 탄핵 정국 이후 급속히 치러지는 선거전 속에서, 각 후보들은 경제와 민생을 중심으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후보들의 공약을 보노라면 경제를 중심으로 한 일자리 창출이 현 대한민국의 최우선 현안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꼼꼼히 경제와 관련한 공약을 들여다 보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조업을 필두로 하는 전통적 2차 산업에 방점을 둔 점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3차 산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관광 분야의 정책과 공약은 어느 후보에게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워서였다. 후보들의 캠프에는 관광 분야에 관심을 두는 전문가가 아예 없다는 말인가. 선거 인력을 구하는 것도 후보들의 관심사가 반영된다고 봤을 때 후보들의 관심이 없거나 부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관광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다.
얼마 전 부산 관광산업 관련 단체에서는 관광 실무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정책을 모아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한 바 있다. 또 다른 당은 관광 관련 대학교수들을 모아 지역 정책위원 간담회를 가진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관련 정책 마련을 위한 움직임을 하고도 정작 대선 후보가 발표한 관광 관련 공약은 전혀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혹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팩트가 있을지 몰라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니, 후보들이 관광산업을 ‘언급’은 했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하지만 역시나 세부적으로는 눈에 띄는 전략도, 실행력 있는 구체안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문화나 콘텐츠 분야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광과 연결되는 공약이 있을 뿐이다. 디지털 전환(DX)이나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한 관광 정책은 전무하다. 미래 먹거리로 관광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언급’만 반복된다.
부산을 예로 들면 더욱 걱정스럽다. 가덕신공항과 GTX 연결, 초광역 관광권 구축 같은 메가 인프라에 대한 후보들의 ‘언급’만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인프라와 함께 어떤 콘텐츠로 지역 관광의 승부수를 던질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예 없다. 이번 대선 과정만 놓고 본다면 부산 관광산업의 미래는 점점 깜깜이가 되어가는 듯해 심히 걱정스럽다.
2000년대 초반 태국과 싱가포르는 ‘의료관광’을 내세워 관광의 새 지평을 열었다. 기존 관광자원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로 공항, 컨벤션센터 등 기반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한 결과다. 콘텐츠와 인프라가 함께 가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번 대선이 끝나면 곧바로 지방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지방선거에서 나올 정책이나 공약들의 방향이 구체화할 것이다. 부산은 과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관광은 부산의 10대 전략산업에 항상 포함돼 있으면서도 관련 연구실도 관광 전문 연구원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부산의 관광은 2030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뚜렷한 비전이 없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고 하지만 실행력 있는 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전환에 대한 논의는 있어도 현장 실무자나 자영업자가 체감할 수 있는 실행 방법론은 부재하다. 데이터 활용과 관련해서도 ‘가능성’만 이야기할 뿐, 어떻게 수익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구체성은 없다. 그렇기에 이번 대선에서 이와 관련한 정책이나 공약이 전무한 점이 더더욱 안타깝다.
관광은 단순한 서비스산업이 아니다. 교육, 외식, 숙박, 교통, MICE, 콘텐츠, 부동산까지 복합적으로 융합된 미래 전략산업이다. 이 산업이 살아야 상인들은 장사가 되고, 기업은 활기를 띠며, 청년은 돌아온다. 부산이 관광도시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연구기관과 산업 지원센터 설립, 관광DX 예산 확대, 지역형 콘텐츠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
이번 대선에서는 관광이 실종됐다. 그렇다면 이제 다가올 지방선거에라도 기대를 걸어야 한다. 관광산업에서 생산되는 데이터와 이를 활용한 지역경제 자생력 강화 전략이 정책과 공약으로 등장하기를 바란다. 산업 전반에 걸친 디지털 전환의 기로에서 관광산업이 뒤처질 수는 없을 것이다. 제조업 기반이 빠진 자리에 관광산업이 앞장서서 경제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이 만들어져야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을 만들 수 있다.
관광 산업은 교육, 외식, 숙박, 교통, MICE, 부동산, 콘텐츠 등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융합되어 있기에 미래 전략산업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디지털 전환(DX)의 시대에 걸맞은 산업으로 재창조 되기 위해 부디 다음 선거에서는 관련 공약과 정책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 본다.
2025-05-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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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대통령이라는 시대정신
대통령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계엄과 탄핵의 결과로 이어진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 경기 침체와 불황의 돌파구로서 더욱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선거의 핵심 키워드로 사회통합과 갈등해소를 꼽았고, 개헌 논의까지 굵직한 정치 과제들이 많은 만큼 변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도 크다. 그러나 역대 선거 중 가장 늦은 공약집 제출, 통합이라는 키워드가 무색할 정도의 네거티브 공방전으로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역대급 ‘노잼’ 선거라는 일각의 평가와 달리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어 마지막까지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 없다.
우선 시대착오적 발언들이 오갔다. 첫 신호탄은 김문수 후보가 쏘아 올렸다. 동료 여성 정치인을 ‘미스 가락시장’ 운운하며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후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은 아니지만 판사의 룸살롱 접대 의혹을 두고 벌어진 공방에서 개혁신당의 함익병 공동선대위원장은 “내 나이 또래면 룸살롱 안 가본 사람이 없다”고 공개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04년 성매매 방지법이 시행될 당시 한 정치인이 성구매자 처벌에 반대하며 “(그렇게 되면) 남자들이 대부분 감옥에 갈 것”이라고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번 대선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전반적인 ‘보수화’와 ‘여성정책의 실종’을 꼽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광장의 주역이 2030세대 여성들이라는 평가와 별개로 각 후보 캠프에서 발표한 10대 공약에 ‘여성공약’이라고 할 만한 정책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정책의 실종은 적어도 이번 선거에서의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역대급 불황이라는 경제적 위기 속에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라는 것을 공감하는 보통의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2030세대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이 당면한 문제는 똑같이 주거와 일자리와 같은 공통의 문제이며, 여성들의 경우 거기에 더해 안전의 문제까지 정책적 고민이 더 필요한 상황일 뿐이다.
사실 여성정책은 애초 진보나 보수의 의제로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에서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대응 정책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보수적 성격의 정부에서 더 적극적인 여성정책을 내어놓는 경우도 있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이 보다 성평등한 사회를 앞당겨줄 것이 자명하다면 여성의제는 진보 프레임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나 평등 의제를 적극 주장하는 여성운동 역시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여성정책을 고민하고 생산하는 정치 주체들의 가치관 실종이다. 성별은 표 계산을 위한 정치공학적 수단으로만 등장하는 것 같다. 보수든 진보든 각자의 가치 속에서 어떻게 여성과 돌봄, 안전과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정책화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을 때 그 결과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드러난다. 더불어민주당은 비공식적으로 ‘출산가산점제’ 공약을 언급하여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국민의힘은 위헌적인 ‘군가산점제’를 다시 띄우며 채용갈등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새로운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젊은 대통령 후보로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이준석 후보는 굳이 1호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우며 여전히 반여성주의와 성별 갈등을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 같다.
지난달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23년 국가성평등지수’는 65.4점으로 2022년(66.2점) 대비 0.8점 줄었다. 윤석열 정부 집권 1년 만인 2023년에 사실상 처음으로 하락했다. 지난 3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선진국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각자의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지만,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어떤 방향이 더 나은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같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더라도 성평등 정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정부 부처 개편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쪽도 있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추진해 온 정책들의 더 나은 방향 모색을 위하여 새로운 그릇에 담아보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라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는 건강한 토론과 정책 생산이 시작될 것이다.
비상계엄과 탄핵의 결과로 이어진 대선인 만큼 민주주의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 국민의 염원이자 의지일 것이다. 시대의 열망에 부응하는 방법은 어떤 사회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후보들의 가치관과 사상이다. 대통령 후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유권자로서 투표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다시 만난 세계’ 가사 중)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도 함께 가져본다.
2025-05-2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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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떨어져 갈라진 종이 울릴 때
지난달의 산불은 도처에서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엄청난 산림을 태우고 민가와 축사를 덮쳤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주변부 주민의 안위가 소멸하는 극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산사나 암자도 불길을 피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수목과 동물 등의 뭇 생명체와 집과 가게와 사찰이 한꺼번에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비참의 국면에서 내게 유독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뇌리를 맴도는 이미지가 있었다. 바로 잔해 위에 덩그렇게 내려앉은 고운사의 범종이다. 고운사는 경북 의성에 있으며 681년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주지하듯이 의상은 멀고 먼 서역으로부터 전해져 당나라의 장안에서 번역돼 들어온 〈화엄경〉을 요약해 〈법성게〉를 만들어 전파한 고승이다. 불교학에 어두운 만큼 그 세세한 내력을 알 길이 없으나, 온갖 꽃들이 만발할 화엄의 도량이 상당 부분 폐허가 되고 종루가 불타면서 추락한 종의 모습이 가슴을 때렸다.
새로운 생태적 재앙 ‘메가파이어’
그 잿더미 속 떨어져 갈라진 종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얼굴 봐
인간의 욕망과 자본 중심의 문명
자연의 질서 배반하며 파국 초래
은총의 빛 회복 사회로 나아가야
사월 초파일에 여러 불자가 떨어져 갈라진 범종을 둘러싸고 두 손을 모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한시바삐 복원돼 심금을 울릴 종소리를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표정이다. 따져 생각하면 붓다의 은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이는 결국 대중이다. 실수로 저질러진 산불이라고 하지만 이토록 무섭게 타오른 연유도 인간이 기후를 붕괴한 데서 찾아야 한다. 이제 산불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거나 자연의 순환하는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양상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크다. 기후 위기와 함께 이전과 다르게 그 규모에서 본질 자체가 심각하게 변화한 양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태철학자 조엘 자스크는 그의 책 〈숲이 불탈 때〉에서 이 새로운 생태적 재앙을 ‘메가파이어’로 지칭한다. 이미 그린란드, 미국 캘리포니아, 그리스, 호주, 캐나다, 스페인 등 세계 도처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인 메가파이어는 매우 극단적인 현상이며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인간의 ‘나쁜 삶의 기술’이라는 중력이 파국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유독 떨어져 갈라진 종에 더욱 눈길을 둔 까닭은 자연과 신의 은총을 배반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중력 때문이다. 제국 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가 공포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가 쓴 〈성탄절에 종소리를 들었네〉라는 시편을 또한 상기하게 된다. 그도 남북전쟁으로 불에 타 쓰러진 교회의 잔해 위에 떨어진 종을 보면서 참혹한 인간의 비극을 외면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집이 불타면서 아내가 죽자, 그의 비애와 우울은 더욱 깊어지는데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생환한 장남이 치유되는 과정과 더불어 서서히 그는 영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우연히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나는 종소리를 들었네〉를 볼 수 있었다. 전쟁과 재앙을 겪으면서 사람은 시몬 베유가 말한 ‘중력의 비극’에 그만 쉽게 사로잡히고 만다. 우리 또한 이처럼 은총의 빛을 외면하고 난파하는 맹목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잔해 위에 떨어져 갈라진 고운사의 범종에서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다. 어쩌다 은총을 잃고 무례하고 품위 없으며 저급하게 되었을까? 말의 바른 의미를 왜곡하고 다른 이에게 거짓을 씌우며 배척하고 공격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을까? 물론 권력은 오랜 역사 속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폭력을 행사해 왔다. 근대 독일에서 히틀러의 등장으로 1920년대의 10년 안에 사회가 급작스럽게 변화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공격을 당하거나 서로 미워해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태를 직면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편을 가르고 다른 한편에 낙인을 찍거나 악마화하는 현실이 되었다. 물론 우리 사회를 이와 같은 최악의 예외에 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를 감추느라 우울한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닌 형국이 되었는데 지난 6개월의 사태가 이를 더욱 심화했다.
마치 떨어지거나 갈라져 소리를 낼 수 없는 종처럼 우리 사회는 서로를 잇고 만나고 대화하는 장소를 상실한 듯하다. 절차적 정당성을 잃은 권력이 폭력으로 변질되면서 붕괴했다. 다시 근본을 살려 종탑을 재건하고 삼천리강산에 종을 울려야 한다. 자유,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의 말이 왜곡되거나 잘못 구축된 시스템과 엘리트주의 체제의 민낯이 드러난 모순된 현실을 개조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분노와 우울, 증오와 혐오에서 놓여나 평화와 희망의 주권을 추구하는 과정이 요긴하다. 드론으로 내려다본 산불 현장은 너무 참혹해 바로 보기 힘들 지경이다. 그렇지만 긴 겨울을 지나고 더딘 봄을 겪으면서 매화 피고 벚꽃 지며 철쭉에 이어 장미가 만발하는 자연을 통해 은총의 종소리를 듣는다. 정치권력이 바뀌는 일이 곧 미래를 보장하는 일은 아니다. 장미 대선을 지나서 화엄의 연꽃이 제대로 우리 사회의 광명이 되기를 기원한다.
2025-05-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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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앞뒤가 안 맞는 대선 공약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 책사’로 불리는 스티븐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얼마 전 큰 곤욕을 치렀다. 블랙록, 시타델 등 주요 자산운용사 및 헤지펀드 대표 15명과의 회의에서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미국 채권시장이 크게 흔들렸던 사실을 해명하려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자리는 미란의 역량에 대한 참석자들의 의문만 커지게 했다. 그가 추구하는 정책 방향이 앞뒤가 안 맞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무역·통화 정책은 스티븐 미란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인 ‘세계 무역 시스템 재편을 위한 가이드(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를 토대로 한다. 이른바 ‘미란 보고서’로도 불리는 이 보고서에는 미국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제조업을 부흥하기 위한 그의 아이디어가 담겼다. 그는 자국 제조업을 무너뜨리고 무역적자를 심화시킨 주범으로 ‘강(强)달러’를 지목했다. 달러가 강하면 미국의 수출품 가격은 상대적으로 오른다. 반면 미국에서 수입하는 제품 가격은 내려간다. 수입품의 매력이 커지니 무역적자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란은 달러를 약세로 만들어 자국 수출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관세를 인상해 수입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트럼프의 목표는 만성적인 무역·재정 적자를 줄이고 제조업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물가도 안정시켜야 한다. 그의 핵심 지지층인 블루칼라 노동자, 서민층을 위해서다.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세계화로 제조업이 쇠퇴하며 일자리를 잃었고, 팬데믹 당시 가파르게 치솟은 물가로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트럼프가 주어진 과제를 온전히 달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목표들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관세를 인상하면 자국 제조업은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수입품 가격이 올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1인당 GDP가 8만 달러가 넘는 미국에서 대체품을 생산하는 것도 무리다. 약(弱)달러도 마찬가지다. 달러가 약해지면 수출 경쟁력은 높아지겠으나 수입 물가가 오르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제조업 기업과 소비자, 어느 한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흔히 정치를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자원은 한정적이기에 정책 결정권자들은 우선순위를 짜고 중요한 걸 먼저 선택한다. 그 과정은 거센 반발을 동반한다. 욕먹는 게 두렵다고 이것저것 다 약속하다 보면 트럼프와 미란처럼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수도권 표심도 잡아야 하고, 비수도권 표심도 잡아야 하는 대선 후보들이 지금 그 상황에 놓였다.
후보들은 하나 같이 균형 발전을 외친다. 동시에 수도권 확장 정책을 꺼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서울 재개발 조건 완화 및 용적률 상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GTX 노선 연장·확대는 이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모두 약속한 사안이다. 수도권의 극심한 주거·교통난을 해소하자는 측면이 있지만 이들 정책은 균형 발전이라는 과제와 배치된다. 용적률을 높여 주택이 늘어나면 더 많은 사람이 ‘똘똘한 한 채’를 찾아 서울로 몰릴 것이고, GTX 노선이 연장되는 만큼 서울 일자리가 갖는 매력도도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팽창을 도모하는 정책과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가치는 양립하기 어렵다. 결국 중앙에 집중된 자원을 나눠야만 하는데, 정치인들은 전체 50%를 넘는 수도권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여 이런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여기저기 남발되는 선심성 공약이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공약들이 반복되는 건 차라리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게 반대에 부딪히는 것보단 득표에 도움이 되어서다. 하지만 정책 결정권자들이 표 떨어지는 불편한 선택을 하기 싫다고 서로 충돌하는 목표를 동시에 내걸면, 세상은 흘러온 대로 흘러갈 뿐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그 폐해는 양쪽 국민 모두에게 돌아간다. 반발이 두렵다고 ‘구조적 배분’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의 미필적 고의를 방관해선 안 되는 이유다.
요즘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형용모순이라는 의미다. 현실에서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없다. 우리는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뜨거운 걸로 마실지 차가운 걸로 마실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둘 다 마시고 싶다고 양쪽을 섞었다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될 뿐이다. 지역 균형 발전이 그렇다. 수도권 팽창을 보조하면서 지역의 발전도 도모할 순 없다.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공공기관을 지역으로 이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2025-05-1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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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해수부 부산 이전, 해양 전략 대전환 출발점
지금 세계는 ‘바다의 미래’를 놓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북극항로의 열림, 자율운항선박의 등장, 해양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국가의 생존과 번영이 걸린 전략적 패권 다툼의 최전선에 있다. 주요 해양 강국들은 이미 행정, 산업, 연구개발(R&D) 역량을 해양수도에 집결시킨 강력한 ‘클러스터’를 구축하며 미래를 선점하려 질주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해양 정책 중추인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는 현재 행정 중심 도시인 세종시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급변하는 해양 환경과 산업 현장의 역동성을 정책에 즉각적으로 반영하고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데 구조적인 한계를 낳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이어진다.
최근 조기 대선 국면과 맞물려 해수부의 부산 이전 논의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정부 청사 하나를 옮기는 지역적 사안으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다가올 거대한 기회를 놓치고 국가적 위기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해수부 이전은 지역 이기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해양 백년대계를 바로 세우고 글로벌 해양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국가 전략의 재배치’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명령이다.
해수부 이전의 최적지로서 부산이 가지는 당위성은 여러 지표를 통해 이미 충분히 확인된다. 따라서 이제 논의의 초점은 ‘왜 부산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부산이라는 지리적 강점을 활용하여 어떻게 국가 해양 경쟁력을 극대화할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부산은 환적 물동량 기준 세계 2위를 자랑하는 항만이며, 연간 2천만 TEU 이상을 처리하는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으로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제1의 항만도시다. 단순한 물류 거점을 넘어, 국립부경대학교와 한국해양대학교 등 해양 인재 양성 요람과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한국해양진흥공사(KOBC), 국립해양조사원 등 핵심 연구·공공기관이 밀집한, 국내 유일의 ‘해양 지식·산업 융합 벨트’다. 정책 수립과 집행, 연구개발, 인력 양성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생태계가 이미 부산에 갖춰져 있는 것이다. 해수부가 이곳에서 현장과 함께 호흡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 해양 정책은 현장성과 역동성을 갖추며 세계와 경쟁할 동력을 얻게 된다.
일각의 ‘지역 균형 발전 저해’ 우려는 해양산업의 본질과 미래를 제대로 보지 못한 단견이다. 해수부는 서류상의 정책 기획을 넘어, 해운·항만·수산·조선·해양과학기술 등 광범위한 실물 경제 현장을 지휘하고 지원하는 야전 사령부와 같다. 사령부가 최전선이자 심장부인 부산에 위치해야만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녹여내고, 변화하는 조류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 진정한 국가 균형 발전은 핵심 거점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서 시작된다. 인천, 평택·당진, 광양, 목포, 울산 등 전국의 주요 항만과 지방해양수산청의 기능과 역할을 오히려 강화하고, 부산의 중앙 본부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허브 앤드 스포크(Hub-and-Spoke)’ 방식의 국가 해양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국가 전체의 공동 이익을 확대하는 상생의 길이다.
해수부 이전은 시작일 뿐, 단순히 청사 하나를 옮기는 것을 넘어, 부산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해양수도’로 만들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가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해양 관련 금융·보험·법률 서비스를 집적하고, 국제적인 해운거래소를 설립하여 투명하고 효율적인 시장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해양 분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해사법원을 신설하여 국제적 신뢰도를 높이고 고부가가치 해양 서비스 산업 생태계를 완성해야 한다. 나아가, 해양 신산업 R&D 허브 구축, 해양 스타트업 육성, 관련 국제기구 유치 등을 통해 정책·산업·금융·법률·연구가 융합된 ‘글로벌 수준의 해양 혁신 클러스터’를 완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산에서 그려야 할 국가 미래 청사진이다.
산업은행 본사 이전 추진, 가덕도 신공항 건설, 북항 재개발 등 부산의 미래 비전과 맞물려 해수부 이전은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닌, 대한민국 해양력 강화의 ‘퀀텀 점프’를 이루어낼 결정적 촉매제가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내륙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해양 지향적인 국가 전략으로 대전환을 이루어야 할 때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한 대한민국에게 해양 경쟁력 강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해수부의 부산 이전은 특정 지역을 위한 시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적 투자이다. 이제 결단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해양 시계는 지금, 부산을 향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행정 효율화를 넘어, 미래 세대에게 풍요로운 바다를 물려주기 위한 책임 있는 선택이다.
2025-05-1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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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STO로 금융혁신의 길 열자
부산이 처한 현실은 냉혹하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으며, 한때 지역경제를 견인했던 조선업과 신발산업은 이미 오랜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후 변화와 외국 어선의 불법 조업, 지속되는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수산업마저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은 대부분 일회성 보조금이나 단기 프로젝트에 머물러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부산은 기존의 전통적인 지원 방식을 넘어 근본적인 경제 혁신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 혁신의 열쇠는 바로 STO(증권형 토큰 발행, Security Token Offering)이다. STO는 부동산, 관광시설, 수산자원과 같은 실물자산의 소유권을 블록체인 기술로 디지털화하여 토큰 형태로 발행하는 새로운 금융 모델이다. 이를 통해 일반 시민들도 소액으로 손쉽게 투자할 수 있고, 관련 업체들은 기존 자본시장법을 준수하면서도 보다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다.
부동산·관광시설·수산자원 등
실물자산 소유권 토큰으로 발행
소액 투자·업체 자금 조달 용이
글로벌 투자 유치에도 효과적
시, STO 법안 통과에 노력해야
금융기관 참여·행정 지원 필요
부산은 국내에서 STO 금융혁신을 실현할 최고의 조건을 가진 도시다. 연간 20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대한민국 대표 관광도시로서 해운대 해수욕장, 광안리 해변, 용두산공원 등 우수한 관광 인프라와 다양한 호텔, 리조트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또 부산국제영화제, 부산불꽃축제와 같은 글로벌 문화 콘텐츠도 풍부해 이러한 자산을 토큰화하면 국내외 투자자들로부터 새롭게 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운대의 주요 리조트나 호텔을 STO 방식으로 토큰화하면, 일반 투자자들도 적은 금액으로 부산의 관광 인프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투자자들은 호텔 운영 수익의 일부를 배당받게 되고, 관광 시설은 유입된 자금을 활용하여 시설 개선과 서비스 품질을 높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관광객 증가와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영화제, 웹툰, 드라마 등 지역 콘텐츠 제작에도 STO를 도입하면 콘텐츠 제작자에게는 안정적인 자금 확보를, 투자자에게는 새로운 투자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STO를 활용한 자산의 토큰화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투자 유치에도 효과적이다.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 주변 국가 투자자들이 부산의 매력적인 관광·문화 자산에 보다 투명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 글로벌 투자 유입 통로가 새롭게 열리게 된다. 특히 부산의 수산자원을 STO로 활용하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부산 지역 어민들은 최근 기후 변화와 외국 어선의 불법 조업, 장기화된 지역 경제 침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식 어류를 기반으로 한 STO를 추진하면, 초기 시설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장군의 광어 양식장에서 1억 원 규모의 STO를 발행할 경우, 일반 시민들은 1만 원 단위의 소액으로도 투자할 수 있다. 어민들은 이 자금으로 스마트 양식 시설을 구축하거나 생산량을 늘릴 수 있고, 투자자들은 어류 판매로 발생하는 수익 일부를 배당받는다. 이는 어민들에게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경영 환경을 제공하며, 투자자들에게는 명확한 수익 구조를 보장한다.
물론 성공적인 STO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다. 첫째, STO 법제화가 시급하다. 관련 법안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이지만,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부산시는 중앙정부와 협력해 STO 법안이 신속히 통과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둘째, 금융기관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금융위원회와의 협력을 통해 STO에 대한 명확한 규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BDAN)를 중심으로 금융기관들이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부산은행과 같은 지역 금융기관과의 긴밀한 협력은 시장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 셋째, 부산시의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행정 지원이 요구된다. 공무원과 관련 기관들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투자 유치와 홍보 전략을 계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공공 주도로 성공 사례를 만들어 민간 시장의 참여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산이 STO를 성공적으로 도입하고 운영한다면, 이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전통 산업과 자산을 혁신적으로 가치화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새로운 금융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부산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지금이 바로 부산이 금융혁신의 선두 주자로 나설 최적의 시기다.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디지털 혁신이 부산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으로 확산되는 미래를 기대하며, 부산시의 과감한 결단과 적극적인 실행을 촉구한다.
2025-05-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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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5월 장미보다 더 붉은
1592년 5월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처음 상륙한 곳도 부산이었고, 첫 전투가 벌어진 곳도 부산이었다. 5월 25일에는 충렬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진 첨사 윤흥신에 대하여 제향을 올린다. 그러나 전쟁 직후에는 그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우선 정발 장군의 경우는, 〈선조실록〉에서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고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으며, 미처 진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어지러이 교전하는 중에 전사했다”고 기록하였다. 〈기재잡기〉라는 책에서도 “왜선이 차차 가까이 오면서 총을 연달아 쏘자, 정발이 비로소 당황하여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적은 벌써 해안에 상륙하여 포위하고 있었다. 정발은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죽고 성안 사람은 노소 없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일본군이 침입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식이다.
부산진 전투의 실상이 밝혀지게 된 것은, 부인 임씨가 정발 장군의 공적을 밝혀 달라고 청원하였기 때문이다. 부산진 전투가 끝난 후에 시신 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가은산이라는 병사가 정발 장군의 행적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영도에서 일본군 선박을 목격하고 성으로 돌아온 정발 장군은 성 밖의 백성들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다음날 새벽에 일본군이 쳐들어왔으며, 마지막에는 서쪽 성문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당시에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에서도 “(부산진성의) 조선군들은 매우 용감하게 저항하였으며, 전투는 3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해자에는 마름쇠가 뿌려져 있거나, 사람 키 높이로 물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들은 마름쇠에 찔리지 않도록 해자 위에 널판을 놓고 건너갔다. 조선군은 거의 모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고, 단지 소수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송상현·정발 등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종종 당시 경상좌수사였던 박홍이 거론된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1592년 6월 28일자로 올린 치계에서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고, 좌병사 이각은 뒤이어 동래로 도망쳤다”고 하였다. 이각보다 먼저 성을 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박홍은 이각·박진과 함께 소산역에 있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언양으로 퇴각하였고,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이각이 울산으로 돌아가자, 박홍도 군사들을 해산시키고 일본군이 통과할 것으로 예상한 죽령 쪽으로 이동하였다. 예상과 달리 조령이 뚫리자, 선조가 있는 행재소로 가던 도중, 원수(元帥) 김명원을 만나 좌위대장에 임명되었고 임진강 방어전에 참전하였다.
박홍은 일본군의 임진강 진출을 막기 위하여 파주 지역에서 싸웠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패하여 전사하였으나, 박홍만은 병력을 유지하여 돌아왔다. 박홍은 다시 김명원을 따라 북상하여 대동강 방어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세자 광해군을 따라 종군하는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병들어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때까지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국조인물고〉에 임진왜란 당시 적을 물리친 인물 28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렇지만 당시 사헌부에서는 “수사 박홍은 적이 나타난 관할 구역에서 한 차례도 싸우지 않고 천리 밖으로 물러나니, 남쪽 지방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살점을 씹고자 합니다. 형벌의 집행이 이러하니 어찌 나라 꼴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박홍이 전에 지은 죄를 소급하여 법률에 의하여 처단하십시오”라고 지독한 말로 탄핵하였다. 거듭되는 탄핵 때문에 박홍은 세 차례나 자신이 맡았던 직책에서 쫓겨나 백의종군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적이 쳐들어오면 맞서 싸워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순국사관을 선호한다. 그러나 당시 지휘관으로서는 자신이 농성(籠城)을 결정하는 순간 백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라면 모르겠지만,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동래성전투에서는 어린아이도 머리에 총을 맞았고, 여성도 앉은 채로 머리가 잘렸다. 박홍처럼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게 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후일을 기약한 선택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부산은 이처럼 참혹한 전란이 시작된 곳이었고, 7년 동안 일본군의 억압 아래에 있었다. 선조들이 흘린 피는 여전히 5월의 장미보다 더 붉다.
2025-05-0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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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선택적 신속함
2025년 5월 1일, 대법원 선고를 받았다. 2021년에 맡은 사건이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렸고, 3년 전 상고한 민사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마침내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같은 날, 전국의 이목을 끈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함께 선고되었다. 상고장 제출 후 약 35일, 전원 합의체 회부 후 단 9일 만에 나온 이례적인 속도의 선고였다.
언론은 수십 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분석하며 정치적 의미를 해석하느라 분주했지만, 내 의뢰인이 3년을 기다려 받은 것은 두 장 남짓한 판결문뿐이었다. 같은 법정에서, 같은 날, 다른 속도로 정의가 도착한 것이다.
의뢰인은 상고심이 진행되는 동안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미루며 긴 기다림을 견뎌야 했다. 나는 매달 재판 경과를 묻는 질문에 뭐라 답하지 못하고 무력한 변호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기다림은 단순한 인내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의 생계와 권리, 인생 계획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간이었다. 반면, 정치인이 연루된 형사사건은 ‘공공의 이익’과 ‘정국의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신속하게 처리된다. 이재명 후보의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법원까지 이례적으로 빠르게 회부되었고, 정치 일정을 고려한 듯 절묘한 시점에 판결이 선고되었다.
물론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해 신속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법부가 특정 사건에만 ‘선택적 신속함’을 보일 때, 정치와 사법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이번 판결 역시 그 결과보다 ‘그 시기’와 ‘그 방식’이 더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아무리 법리가 정교하더라도, 이례적인 절차와 속도로 진행된 정치적 사건에서 법원이 오롯이 법리에 따라 판단했다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는 쉽지 않다. 비슷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윤미향 전 의원은 검찰 기소 4년 만에 대법원 유죄 판결이 확정되어 임기를 마친 후에야 의원직을 상실했고, 조국 전 장관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유독 정치적 사건에서 재판의 ‘속도’가 논란이 되는 것은 사법부의 신뢰를 저해한다. 대법원 판결이 정치적 해석과 연결될 때마다, 사법의 중립성은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2024년 대법원에 접수된 민사사건의 72.3%는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었다. 같은 해 사법연감에 따르면, 민사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대법원이 새로운 판단을 한 비율은 3.4%에 불과했다. 즉, 상고심에서 실질적인 판단을 받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긴 시간을 기다려도 결과가 바뀔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한국의 사법제도는 실질적으로 ‘2.1심제’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상고심은 법률심으로 실체적 다툼이 제한되고, 대법원이 심리 개시 여부에 재량권을 갖고 있어 일반 국민이 실질적 판단을 받기는 더욱 어렵다. 결국 민생 사건은 오랜 기간 계류되고, 절박한 권리 구제는 늦어진다. 심지어 판결이 내려졌을 즈음에는 손해를 복구할 방법조차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상고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은 변호사 입장에선 죄송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상고심 제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생존권과 직결된 사안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듯, 민사소송에서도 국민의 재산권은 생계와 직결된 중대한 권리다. 그러나 현재의 시스템은 이 권리를 수년간 유보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늦어진 정의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니다.
물론 대법원이 모든 사건을 동등한 우선순위로 다룰 수 없다는 현실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불투명할수록 국민의 불신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법부에 필요한 것은 모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공정한 신속함’이다. 특정 계층에게만 예외적으로 빠른 재판을 제공하고, 나머지 국민에게는 ‘사건 적체’를 이유로 수년을 기다리게 하는 이중적 태도는 사법 불신을 심화시킬 뿐이다.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원을 일관된 기준으로 배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택적 정의’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법은 공정해야 한다. 그 공정은 속도의 형평, 관심의 균형, 정치적 중립성에서 비롯된다. 이제 대법원은 명확히 답해야 한다. 상고심 처리 기준의 투명한 공개, 우선순위 결정의 객관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무너진 사법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정의는 단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속도’로 도달하느냐도 중요하다. 법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단, 그 평등은 ‘속도’에서도 증명되어야 한다. 3년을 기다려 받은 두 장의 판결문과, 한 달여 만에 선고된 수십 장의 정치 판결문 사이에는 우리 사법부가 직면한 깊은 모순이 숨어 있다. ‘법 앞의 평등’이 더는 헌법 조문의 한 문장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2025-05-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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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트럼프 대통령이 미치지 않았다면
예측불허의 연속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에 혹시 그가 제정신인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관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시민이 출자한 주식회사다. 정확하게는 국가와 기업은 모두 이론적으로 영속가능한 법인격을 지닌 자본기계라고 주장하며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겠지만 본 글에서는 일단 트럼프식 사고를 파악하기 위해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국가와 기업은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본을 투입해야 굴러간다. 주식회사의 자금조달은 회사채와 주식을 기본으로 하며 채권자와 주주가 관계한다. 국가의 자금조달은 국채와 세금을 기본으로 하며 채권자와 납세자가 관계한다. 여기서 납세자는 법인을 포함하며 국가 입장에서 기업은 법인세를 납부하는 시민이 된다.
미국은 작년말 기준 연방부채 규모가 약 35조 달러(약 5경 원)이며 국채 이자로만 1조 1330억 달러(1657조 원)를 지불했다. 이러한 빚잔치 배경에는 기축통화로 역할하는 달러의 책임도 있다. 기축통화국은 국제교역에서 전 세계에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무역적자를 피할 수 없다는 ‘트리핀 딜레마’에 빠진다. 트럼프 정권은 재정적자를 완화하여 국가부채를 줄이고 국내 제조업을 회복하려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세일까? 국가 재정 측면에서만 보자면 관세로 세수가 늘어나면 재정에 도움이 된다. 관세를 피해 외국기업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면 미국에도 법인세를 내므로 재정에 도움이 된다. 제조업이 창출한 일자리로 근로자가 늘어나면 그들은 납세자가 되므로 재정에 도움이 된다. 미국은 직장에서 건강보험을 부담하기 때문에 저소득층에서 공장근로자로 전환된 사람들에 대하여 정부가 부담해온 저소득층 건강보험(메디케이드) 비용을 줄여 재정에 도움이 된다. 현재 연방빈곤수준에 준하는 19%의 인구가 메디케이드 대상자로 심각한 빈부격차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트럼프는 사업가로서 미국의 기업지배구조인 주주우선주의를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상법 개정을 두고 논의된 주주우선주의는 경영학에서 한물간 이론으로 취급되곤 한다. 지금은 주주 대신 이해관계자모델이 공감받고 있다. 이해관계자는 주주뿐만 아니라 근로자, 채권자, 협력사, 고객, 지역사회를 포괄한다. 국가에게 주주가 납세자라면 이해관계자는 공무원, 채권자, 협정국, 내외국민, 국제사회 등으로 매칭할 수 있다. 트럼프식 ‘납세자우선주의’의 결과물은 공무원 대량해고, 동맹국 압박, 골든비자 판매와 강제추방, 파리협정 탈퇴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트럼프는 오너 경영자였기에 경영인의 권한 범위를 넓게 두는 듯하다. 주주가 반대해도 경영자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밀어붙이는 것이다.
트럼프의 약점이자 미국의 진짜 문제가 채권자에서 드러난다. 기업의 주인이 주주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경영학자들이 많다. 주주는 유한책임의 특혜를 고려하면 기업을 온전히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대개 주가차익을 노리지만 이론적으로 배당수익을 기대하는 행위자다. 채권자는 기업청산 시 주주보다 우선변제권을 가지며 채권을 담보로 기업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고 채권자의 말을 들어야 했던 것과 같다. 관세 정책의 충격과 저항으로 국채금리가 올랐을 때 트럼프 정부가 화들짝 놀란 것은 당연하다. 금리 상승으로 향후 지불할 이자가 늘어나면 재정은 오히려 악화되며 채무불이행에 빠지거나 경기침체가 오면 정당성을 잃는다. 아킬레스건은 과도한 부채로 공짜 점심은 없었다.
재무경제학에서 투자 판단의 중요 지표는 이익 여부, 성장 가능성과 규모, 지속 가능성이다. 국가가 주식회사라면 기준은 다르지 않다. 한국의 미래가 암담한 것은 이 모든 지표가 나날이 악화되고 있으며 좋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주는 기업에서 부정적인 신호를 감지하면 출구전략을 짠다. 투자자는 매도하면 그만이지만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출구전략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지역에 대한 출구전략은 상대적으로 용이할지 모른다. 이는 부산에게 시사점을 준다. 지자체도 지방채와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라고 보면 기업이 빠져나간 부산시는 법인세수 감소로 시 재정이 약화되고 일자리가 사라져 시민이 감소하고 청년층은 수도권으로 이탈했다.
세상은 이론만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합리적선택이론을 참고하면 트럼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에 따르면 그는 경제학이 전제하는 고도로 전략적이고 이기적인 인간형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의 정권에서 제기되는 사익 추구 논란과 시민사회 탄압, 이민자 혐오, 약육강식의 강탈 외교 등은 정치란 무엇인가 질문을 남긴다.
2025-04-30 [1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