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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1000. 사랑한다면…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시집 제목인데, 강조하려고 ‘당신’을 겹쳐 썼는지 모르겠지만, 마뜩지는 않다.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나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혼자가 아닙니다〉로도 충분했으니…. 혹시 한 번 숨을 죽이고 싶었다면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였으면 될 일.
예전에 ‘전설의 레전드’나 ‘운명의 데스티니’, ‘혼돈의 카오스’라는 말을 쓰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스개였다. 언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겹쳐 쓰면 어색하거나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네 입, 그러니까 사람들의 언어 습관은 집요하기도 해서 ‘고목나무, 그물망, 낙숫물, 모래사장, 빈껍데기, 생일날, 족발, 초가집, 깡통’은 결국 사전에까지 올랐고, ‘신음소리’나 ‘홀컵, 황토흙’도 사전 등재 접수대 앞에 줄을 서 있는 상황. 거리에는 ‘수제손만두’를 넘어서서 ‘수제로 만든 프랭크버거’까지 보이는 판이다.
일반 언중만 그러는 게 아니다. 언론마저 말을 겹쳐 쓰는 일이 예사다. 언론이 쓰는 겹말은 다른 정보를 더 전달할 기회를 없애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독자와 시청자에 대한 배신인 것.
‘존슨 총리 사임 의견이 과반수를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장 흔한 게 바로 이런 ‘과반수를 넘었다’라는 표현. 하지만 이건 중복인 건 물론이거니와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100의 과반수는 51부터 100까지인데, 51~99는 넘을 수 있겠지만, 100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표현은 ‘최소 과반수를 넘어섰다’ 정도가 정답일 터. ‘반수를 초과했다’도 대안이 되겠다.
또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상호 호혜적 협력 관계 구축’은 ‘호혜적 협력 관계 구축’, ‘전화 통화’는 ‘통화’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복 표현이나 겹말 외에도, 기사를 쓸 땐 마른 걸레를 짜듯이 짜야 한다. 독자를 사랑한다면….
*서로 간에 → 서로
*두 번째 유형의 경우에는 → 두 번째 유형은
*우리나라도 현재 트랙 기반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트랙 기반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점프력은 그때와 비교해 비슷한 수준 → 점프력은 그때와 비슷한 수준
*소수의 사람만 의견을 내놨다 → 소수만 의견을 내놨다
다들 아시다시피, 행동 없이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니까.
※오늘 자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3-03-0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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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9. 손에 쥐여 줘라
‘…주워 담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꼼짝없이 코가 꿰어 여기까지 왔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인데, ‘꿰어’가 어색하다. ‘코가 꿰다’라는 우리말은 없기 때문이다. ‘코가 꿰이다’가 바른 쓰임이므로 ‘코가 꿰여’라야 했다.
‘길림에서 이들을 격려한 신익희는 살을 에이는 듯한 대륙의 추위를 견디며 남경을 거쳐 상하이에 이르렀다.’
반면, 이 문장에 나온 ‘살을 에이는’은 ‘살을 에는’이라야 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에이다: 칼 따위로 도려내듯 베이다. ‘에다’의 피동사.(어찌나 추운지 살이 에이는 듯하다.)
*에다: 칼 따위로 도려내듯 베다.(가뜩이나 빈속은 칼로 에는 것처럼 쓰렸다….)
‘에이다’가 피동사여서 목적어가 어색했던 것. 피동사를 살리려면 목적어 ‘살’을 주어로 만들어 ‘살이 에이는’으로 써야 했다.
‘강시영은 뭔지 모를 사연에 눈물을 글썽이고, 차요한은 강시영의 손에 자신의 우산을 쥐어준다.’
어느 드라마를 설명하는 기산데, ‘쥐어준다’가 잘못. ‘쥐어 주다’는 ‘쥐다+주다’인데, 여기서 ‘주다’는 보조동사. 그러니 ‘쥐어 준다’고 하면 내가 쥐어서 상대방에게 준다는 말일 뿐이다. 저 자리에는 ‘쥐여 준다’가 와야 했다. ‘쥐여 주다’는 ‘쥐이다+주다’인데, ‘쥐이다’는 ‘쥐다’의 사동사. 표준사전을 보자.
*쥐이다: 어떤 물건을 잡게 하다. ‘쥐다’의 사동사.(나는 그의 손에 쪽지를 쥐여 주었다./그녀는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쥐이고 달래 보았다.)
그러니 상대방의 손에 우산을 잡게 해 주는 건 ‘쥐여 준다’라야 했던 것.
이처럼, 몇몇 동사에 붙는 사동접미사, 혹은 피동접미사 ‘-이-’를 쓸데없는 데 붙여 버릇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나가는 이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자동차 탄 이의 얼굴을 보고, 사람들 발길에 채일 듯 아슬아슬 종종걸음 치는 비둘기를 본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인데, 여기 나온 ‘채일’이 바로 그런 예. 발에 내어 질리거나 받아 올려진다는 뜻인 ‘차이다’의 준말이 ‘채다’이니 ‘챌’로 활용해야 했다.
‘…빗소리는 비가 내는 것이 아니라/창문이 내는 아픈 소리/그러니까 내 방에 기대인 창문은/내 곁의 먼 곳이었네.’
심재휘의 시 ‘창문의 발견-런던’의 한 구절인데, 그러므로, 여기에 나온 ‘기대인’도 ‘기댄’이 옳았다.
2023-02-2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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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8. 하지 않을 수 없다?
‘반기문은 이번 방한에서 JP를 만나 충청대망론을 환기시키고 안동에서 류성룡 선생을 부각시키는 언행을 하면서 영남 민심을 자극했다. 만약 이 같은 행보가 대선을 지역연합 구도로 치러 보겠다는 내심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면 그 사고의 폭과 수준에 심히 우려할 만한 대목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속담이 잘 어울리는 문장이다. ‘우려할 만한 대목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표현 때문이다. 딱 4글자 ‘걱정된다’면 충분했을 것을 장장 18자로 늘렸으니…. 이렇게 글을 질질 늘어지게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글에 자신이 없기 때문일 터. 그러니, 자신 있는 글을 쓰려면 아래처럼 쓰지 않는 게 좋겠다.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수백 년이 지난 만큼 19세기 영국처럼 성탄절을 새롭게 조명할 때가 아닌가 한다.→…새롭게 조명할 때다.
*피천득은 ‘수필’에서 수필을 논하며 파격이라는 단어를 다음 같이 썼는데 그 파격이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예술을 만든다.
*추세를 역행하여 거래하는 것은 큰 노력을 필요로 한다.→…더 노력해야 한다.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을 사면복권시키기 위해 구색맞추기 식으로 김경수 전 지사의 사면을 끼워 넣은 것에 다름 아니다.→…끼워 넣은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짧아지면 글은 오히려 힘이 더 세진다. 이 밖에도, 글을 짧게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10여 명의 사람들이→사람 10여 명이
‘사과 100개, 감 50개’처럼, 명사 다음에 숫자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리말법이다. 토씨 ‘의’도 일본어 냄새가 많이 나므로 될 수 있으면 쓰지 않는 게 좋다. 또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3년 만에 대면 행사로 진행되는 만큼 이날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예상된다.
요즘 우리말에는 ‘~고 있다’라는 진행형이 쓸데없이 넘쳐 난다. ‘먹고 있다/가고 있다’처럼,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면 진행형 ‘~고 있다’는 피해야 한다.
*대형차에 1600cc 엔진을 장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모자란 느낌은 전혀 없었다./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입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팔리지 않고 남아있는 주택을 이야기합니다.
이 문장들에선 ‘했음에도 불구하고’가 결점이다. ‘했음에도’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굳이 습관처럼 ‘불구하고’를 붙여 글을 질질 늘이는지 모를 일이다.
2023-02-1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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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광] <997>꿈일런지? 꿈일른지?
‘그 속에서 진짜로 봉쇄되어 질식당하고 있는 것은 거꾸로 우리 모두의 미래와 안전 그 자체는 아닐런지.’
‘하나씩 무차별이 자리하도록 차근차근 무언가를 시도해 보는 데서, 인류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또 태평천국이 가능한 것은 아닐른지.’
정치인들이 SNS에 올린 글인데, 공통적으로 틀린 게 있다. ‘아닐런지/아닐른지’를 나란히 잘못 쓴 것. 우리말에 ‘-ㄹ런지’나 ‘-ㄹ른지’라는 종결어미는 없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종결어미는 ‘-ㄹ는지’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ㄹ는지: ①(‘이다’의 어간, 받침 없는 용언의 어간, ‘ㄹ’ 받침인 용언의 어간 또는 어미 ‘-으시-’ 뒤에 붙어) 하게할 자리나 해할 자리에 두루 쓰여, 어떤 불확실한 사실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그 사람이 과연 올는지….) ②(‘이다’의 어간, 받침 없는 용언의 어간, ‘ㄹ’ 받침인 용언의 어간 또는 어미 ‘-으시-’ 뒤에 붙어) 하게할 자리나 해할 자리에 두루 쓰여, 앎이나 판단·추측 등의 대상이 되는 명사절에서 어떤 불확실한 사실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를 누가 알겠니?)
이러니, ‘아닐런지/아닐른지’는 둘 다 ‘아닐는지’라야 했던 것.
같은 맥락에서, ‘만약 자신이 결혼을 하고 있고, 배용준 씨와 같이 멋진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련지?’에 나온 ‘할련지’도 ‘할는지’라야 했다.
‘그런 행동이 시민들에게 어떻게 비춰질런지 걱정도 되지 않는가?’
윗글에 나온 ‘비춰질런지’에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먼저, 이젠 아시다시피 ‘~ㄹ런지’는 ‘~ㄹ는지’라야 했다. 또 ‘무엇으로 보이거나 인식되다’라는 뜻으로는 ‘비치다’면 충분하므로 굳이 저렇게 피동꼴로 쓸 필요도 없다. 결국 ‘비춰질런지’는 ‘비칠는지’라야 했던 것.
〈극락세계련가…절경에 취해 잊어버린 108번뇌〉
‘통도사 13암자 순례길’을 다룬 어느 신문의 제목인데, ‘극락세계련가’가 잘못이다. 우리말에 ‘-련가’라는 종결어미도 없기 때문이다. 표준사전을 보자.
*-런가: (‘이다’, ‘아니다’의 어간이나 어미 ‘-으시-’, ‘-더-’, ‘-으리-’ 뒤에 붙어)하게할 자리에 쓰여, ‘-던가’의 뜻으로 예스럽게 사용하는 종결 어미. 주로 옛 말투의 시문(詩文)에 쓰인다.(저곳이 내 고향이런가?/저기 고개를 넘어오는 흰옷의 여인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런가.)
이러니,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누구의 주제런가~’로 시작하는 것처럼, 저 제목 역시 ‘극락세계런가’라야 했던 것.
2023-02-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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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6>금도가 너무 크다
이 글 제목 때문에 미리 말하지만, ‘금도’는 지켜야 할 선, 뭐 그런 게 아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금도(襟度):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병사들은 장군의 장수다운 배포와 금도에 감격하였다.)
바꿔 말하면 포용력이나 도량이라는 뜻. 그러면, 대체 누가 이 글 제목처럼 금도가 너무 크냐고. 바로 국립국어원이다. 다시 표준사전을 보자.
*미싱(mishin): 바느질을 하는 기계. =재봉틀.
괄호 안에, 원어가 마치 영어인 것처럼 ‘mishin’이라고 달아 놓았지만, 사실은 영어가 아니라 일본어다. 일본에선 ‘sewing machine(재봉틀)’에서 machine만을 가져와 미싱(ミシン)이라고 부른다.
어쨌거나, 재봉틀이라는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저렇게 일본말을 사전에 올려야 했나, 싶다. 금도도 정도가 있는 법.
*나이롱환자(←nylon患者): 환자가 아니면서 환자인 척하는 사람을 익살스럽게 이르는 말.
표준사전 올림말(표제어)에는 이런 것도 있는데, 여기 나온 ‘나이롱(ナイロン)’ 역시 ‘나일론’의 일본말. ‘가짜환자, 엉터리환자’가 ‘나이롱환자’에 밀릴 만큼 이상한 말인가. 국립국어원과 표준사전은 일본어식 외래어에 왜 이렇게나 관대할까.
*파마(←permanent): 머리를 전열기나 화학 약품을 이용하여 구불구불하게 하거나 곧게 펴 그런 모양으로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만드는 일. 또는 그렇게 한 머리.
이 말 역시 영어 ‘permanent wave’에서 permanent만 가져와 파마(パ-マ)로 쓰는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인정한 것.(놀랍게도, ‘퍼머’로 쓰면 틀린다.)
아래 말 역시 일본말 영향을 받았다.
*샤쓰(←shirt): 서양식 윗옷. 양복저고리 안에 받쳐 입거나 겉옷으로 입기도 한다. =셔츠.
이러니 당연히 와이셔츠 외에 ‘와이샤쓰’도 표준사전에 올라 있는 것. 자, 여기까지만 해도 ‘이래도 되나’ 싶은데, 표준사전에는 이런 말까지 올라 있다.
*고데(kote[만]): 불에 달구어 머리 모양을 다듬는, 집게처럼 생긴 기구. 또는 그 기구로 머리를 다듬는 일.(고데로 머리를 손질하다….)
이래 놓고 국립국어원 누리집의 ‘온라인가나다’에는 또 아래처럼 답변을 달아 놓았으니,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알고 계신 것처럼 ‘고데기’의 ‘고데’는 일본어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일본어 투 순화 용어 자료집에 따르면 ‘불고데’는 ‘(머리)인두’로 순화된 바 있으니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2022. 6. 4.)’
2023-02-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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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5. 검게 그은 피부
평균적인 한국말 사용자라면 자신이 말을 엉터리로 쓴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내가 국어만 몇 년 배웠는데…’ 하는 생각도 자신감을 거들었을 터.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정확하지 않은 말을 쓰는 일이 드물지 않다.
〈[국감] 방통위 통신사 보조금 실태조사 요식행위 그쳐〉
〈“진료심사평가위 교육, 요식행위 그쳐”〉
〈與 ‘원팀’ 퍼포먼스, 요식행위 그치나〉
‘요식행위’로 검색하면 뜨는 기사 제목들이다. 하지만, 여기에 쓰인 요식행위는 모두 잘못이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요식행위(要式行爲): 『법률』일정한 방식을 필요로 하는 법률 행위. 어음의 발행이나 정관 작성, 증여, 혼인, 입양, 유언 따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언이나 입양처럼 ‘일정한 방식에 따라 해야만 효력이 인정되는 법률행위’가 바로 요식행위인 것. 반드시 해야만 하는 행위라는 얘기다. 그러니, 저 제목들에 나온 ‘요식행위 그쳐’는 ‘형식에 그쳐’쯤으로 고쳐야 옳다.
‘참가자들은 위령비 앞에서 묵념하며 원혼들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보냈다.’
이 문장에 나온 ‘기리는’도 잘못. 표준사전을 보자.
*기리다: 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따위를 칭찬하고 기억하다.(선열의 뜻을 기리다./스승의 은덕을 기리다./그들은 고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기린다는 건 칭찬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하지만 원혼들의 넋은 기릴 게 아니라 ‘달래고, 풀어 주고, 어루만져야’ 할 터.
“16명의 환자를 모두 대피시키고 마지막으로 탈출한 간병보호사는 온 몸이 검게 그을은 상태였습니다.”
이 기사에 나온 ‘그을은’도 자칫 잘못인 줄 모르고 쓰기 쉬운 말이다. ‘그을다’에 ‘-은’이 연결되면 ‘ㄹ’이 탈락되어 ‘그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온몸이 검게 그은 상태였습니다’라야 했던 것. ‘아니, ‘그을은 상태’가 아니라 ‘그은 상태’로 써야 한다고?’ 싶다면, 다른 보기를 보자.
‘시들은 장미/크게 썰은 떡/땀에 찌들은 옷.’
여기 나온 ‘시들은/썰은/찌들은’이 모두 어미 ‘-은’이 연결되면서 어간 받침 ‘ㄹ’이 탈락시켜야 하는데 잘못 쓴 예. 아시다시피, ‘시든/썬/찌든’이라야 했다.
그러니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라고 외치는 나훈아의 절창 ‘녹슬은 기찻길’도 ‘녹슨 기찻길’의 잘못이었던 것.
2023-01-2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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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4. 낮춰보지 마라
‘이씨는 “‘성적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말라’는 학생들조차도 지방대를 가기 싫어하고 지방대 출신을 낮춰보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나온 ‘낮춰보는’은 잘못이다. ‘낮춰보다’라는 우리말은 없기 때문이다. 표준사전을 보자.
*낮추보다: 남을 업신여기어 자기보다 낮게 보다.(아무리 차림새가 허술하다 해도 외모만으로 사람을 낮추보는 태도는 잘못이다.)
이러니 ‘낮춰보는’은 ‘낮추보는’이라야 했다.(꼭 ‘낮춰보다’를 쓰고 싶다면, ‘낮춰 보다’로 띄어 쓸 것.)
비슷한 말 속에서 옳은 말을 가려 쓰는 건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가능한 일이다. 언어 능력이라는 건 잠깐씩 사전을 찾아보는 일이 쌓이고 쌓여서 커지는 법.
‘교과서는 해당 작품에 대해 “불굴의 의지와 세속에 때 묻지 않는 매화의 정신성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힘찬 필치로 쓴 ‘매’라는 글자와 번짐 효과가 잘 나타나는 파란 점들은 매화나무 가지와 꽃잎을 연상시킨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사에선 ‘필치’가 어울리지 않는 말. 비슷하게 생긴 ‘필체’와 혼동을 한 듯하다. 표준사전을 보자.
*필치(筆致): 글에 나타나는 맛이나 개성.(날카로운 필치./이 작품은 두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섬세한 필치로 그렸다./좀 차분한 필치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이동하, 우울한 귀향〉)
*필체(筆體): 글씨를 써 놓은 모양. =서체.(필체가 뛰어나다./알맹이가 빠져나가 버린 빈 봉투였다.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학운의 필체가 거기 있었다.〈이동하, 우울한 귀향〉)
그러고 보면 〈‘정교한 필치·섬세한 문양’ 국보·보물 괘불도 47점 고화질 공개〉라는 기사 제목에 나온 ‘필치’ 역시 그림을 묘사하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배상(賠償): 남의 권리를 침해한 사람이 그 손해를 물어 주는 일.
*보상(補償): 국가 또는 단체가 적법한 행위에 의하여 국민이나 주민에게 가한 재산상의 손실을 갚아 주기 위하여 제공하는 대상(代償).
표준사전에 실린 ‘배상/보상’ 뜻풀이다. 한데,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 설명이어서 성에 차지 않는다. 다행히 표준사전에는 이런 말도 올라 있다.
*국가보상(國家補償): 국가나 공공 단체가 국민에게 준 손해나 손실을 배상하거나 보상하는 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위법에 의한 배상과 적법에 의한 보상이 있다.
한마디로 적법행위는 ‘보상’, 위법행위는 ‘배상’해 준다고 생각하면 깔끔하다. 그러니 ‘배상’ 뜻풀이에 ‘위법’이 들어갔더라면 좋았을 듯.
2023-01-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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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3. ‘소나무 한그루’는 없다
〈“첫눈에 반한 물범 지키려 백령도 눌러 앉았어요”〉
이 어느 신문 제목을 보자면 띄어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바로 ‘눌러 앉다’ 이야기다. 이렇게 ‘누르다’ ‘앉다’가 긴밀히 결합해 한 단어가 되면 뜻이 달라지는 것.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 뜻풀이다.
*눌러앉다: ①같은 장소에 계속 머무르다. ②같은 직위나 직무에 계속 머무르다.
그러니 저 제목에서 ‘백령도 눌러 앉았어요’는 ‘백령도 눌러앉았어요’라야 했다. 아래 제목에서도 비슷한 게 있다.
〈찬바람 쌩쌩, 내일 아침 초겨울 추위…내륙 한파특보〉
여기서 ‘찬바람’은 붙여 쓸 게 아니라 ‘찬 바람’으로 띄어 써야 하기 때문이다. 표준사전을 보자.
*찬바람: 냉랭하고 싸늘한 기운이나 느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찬바람이 나다./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찬바람이 돈다./물론 아내의 말은 부질없는 노파심에서이지만, 그 이름을 듣자 나는 아무 죄가 없는데도 공연히 등골로 찬바람이 훑고 갔다.〈김원일, 노을〉)
이러니 비유적인 표현이면 몰라도, 실제로 차가운 바람은 ‘찬 바람’으로 써야 하는 것.
〈“자율에 맡겨도 충분” “저위험군부터 벗어야” “재유행하는데 큰 코 다쳐”〉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기사 제목인데, 이 가운데 ‘큰 코 다쳐’ 역시 띄어쓰기 잘못으로 뜻이 어색해졌다. 표준사전을 보자.
*큰코다치다: 크게 봉변을 당하거나 무안을 당하다.(…아직 미혼이라고 남의 일처럼 듣다가는 큰코다치지, 큰코다쳐요.〈황순원, 신들의 주사위〉)
이처럼 비유적 용법으로 쓸 땐 한 단어이므로 모두 붙여서 ‘큰코다쳐’라야 했다. 저렇게 띄어서 쓰면 말 그대로 ‘커다란 코를 다친다’는 뜻.
이처럼, 띄어쓰기를 조심해야 할 말은 생각보다 많다.
‘귀신 같다/귀신같다’가 뜻이 달라지는 건, 한 단어 ‘귀신같다’가 ‘동작이나 추측이 정확하고 재주가 기막히게 뛰어나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꽃 피다/꽃피다’ 역시 한 단어 ‘꽃피다’가 ‘어떤 현상이 한창 일어나거나 벌어지다./어떤 일이 발전하거나 번영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구별해야 한다. 그래도 와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덕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외로이 서 있다.’
여기 나온 ‘한그루’가 ‘한 해에 그 땅에서 농사를 한 번 짓는 일/한 농경지에 한 종류의 농작물만을 심어 가꾸는 일’이라는 걸 아신다면, 띄어쓰기에 좀 더 신경을 쓰시려나.
2023-01-1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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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2>놀래키지는 말자
‘언어 능력’이라 하면 대개 어휘력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말을 구별하는 것도 중요한 언어 능력이라 할 만하다.
“엄한 사람 잡지 마!”
흔히 듣는 말이다. 엉뚱한 사람이나 억울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지 말라는 말. 하지만, ‘엄한 사람’은 잡힐 사람이 아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엄하다(嚴하다): ①규율이나 규칙을 적용하거나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매우 철저하고 바르다.(군대는 계급의 상하 구별이 엄하다….) ②어떤 일이나 행동이 잘못되지 아니하도록 주의가 철저하다.(다시는 싸움을 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엄하게 일러두어라….) ③성격이나 행동이 철저하고 까다롭다.(학생에게 엄한 선생님….)
이러니 ‘엄한 사람’은 잡힐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잡을 사람에 속한다. ‘엄한 사람’은 ‘애먼 사람’이라야 했다. 표준사전을 보자.
*애먼: 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억울하게 느껴지는.(애먼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다./애먼 징역을 살다….)
즉, 억울한 사람은 ‘애먼 사람’이었던 것.
“혼자 사는 연예인들 중에 재혼을 꺼려하는 이유가 괜히 엄한 사람이 내 돈 쓸까 봐 그러는 건데 얼마나 좋냐!”
어느 연예인이 한 말이라는데, 여기서 ‘엄한 사람’ 역시 잘못. 그냥 ‘엉뚱한 사람’이었다면….
〈[시승]사람 놀래킨 기아 니로 하이브리드 실연비〉
〈세계 놀래킨 김주혜 작가 “호랑이 닮은 독립군 덕분”〉
이런 기사 제목 때문에 매우 놀랐다. 언론이 이런 말을 쓰다니…. 놀라게 한 것은 ‘놀래킨’이라는 말. ‘놀래키다’라는 우리말은 없기 때문이다. 놀라지 말고, 표준사전을 보자.
*놀라다: ①뜻밖의 일이나 무서움에 가슴이 두근거리다.(고함 소리에 화들짝 놀라다….) ②뛰어나거나 신기한 것을 보고 매우 감동하다.(엄청난 규모에 놀라다….) ③어처구니가 없거나 기가 막히다.(…영어 한마디 못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④(신체 부위를 나타내는 말과 함께 쓰여)평소와 다르게 심한 반응을 보이다.(…실컷 먹었더니 창자가 놀랐는지 배가 아프다.)
자, 뭐, 이런 뜻이야 다들 아실 테고, 이 ‘놀라다’의 사동사는 ‘놀래다’다. 즉, 이 ‘놀래다’만으로 놀라게 한다는 사동의 뜻이 다 표현되므로 ‘놀래키다’가 설 자리가 없는 것. 그러니 ‘사람 놀래킨/세계 놀래킨’은 ‘사람 놀랜/세계 놀랜’이라야 했다. ‘놀래킨’에 놀란 이유를 이제 아실 터. 언론의 언어 능력이 이 정도라면….
2023-01-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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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1. 시·도지사 17개?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시도협의회)가 개헌론에 불을 지피고 나섰다. 전국 17개 시·도지사를 중심으로 지방시대를 이끌어 나갈 이철우 경북지사가 시도협의회장 취임과 동시에 ‘지방분권형 개헌’을 역설하면서다.’
현대 한국인 대부분은 이런 기사 문장을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17개 시·도지사’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어순을 바꿔 ‘시·도지사 17개’로 써 보면 알 수 있듯이 ‘시·도지사’를 17명이 아니라 ‘17개’라고 표현한, 아찔한 문장인 것. 그렇다면 ‘17개 시·도 지사’로 띄어 써야 할까. 이것 역시 ‘17개 시·도청’의 우두머리를 ‘지사’라고 했으니 잘못이다. 지사에 시장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지사(知事): 한 도(道)의 행정 사무를 총괄하는 광역 자치 단체장. =도지사.
그러니, 정확하게는 ‘17개 시·도 시장·도지사’라야 한다.(‘17개 시·도 단체장’도 해법이겠다.)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와 달리 ‘시도지사협의회’로 쓴 것 역시, 앞서 얘기했듯이 지나친 축약이어서 어색하다. ‘시장도지사협의회’라고 한 글자만 더 넣었더라면….(일본은 도·도·부·현(都·道·府·縣) 지방정부의 우두머리를 모두 ‘지사’라 부른다.)
사실 우리 말글살이에서는 언어의 경제성 때문에 축약이 활발히 일어난다. 하지만, 줄여선 안 되는 것까지 심하게 줄여 문제가 된다. 아래 기사를 보자.
‘해당 노선은 티웨이항공이 2012년 4월 취항한 뒤 출도착 공항의 편리한 도심 접근성 덕분에 꾸준히 인기를 끌었던 노선이다.’
여기에 나온 ‘출도착’이 바로 너무 심하게 줄인 예. ‘입항·출항→입출항/수출·수입→수출입’처럼, 줄이기 위해선 겹치는 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출발·도착’에는 중복하는 말이 없으니, 이렇게 줄여선 안 될 일. ‘출발·도착’이 길다고 ‘출도착’으로 줄일 요량이면 ‘출착’으로는 왜 못 줄였을까. 게다가,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발착(發着): 출발과 도착을 아울러 이르는 말.(철로를 다 고쳐서 이제는 열차 발착에 지장이 없다….)
이렇게 출발과 도착을 함께 이르는 말이, 더군다나 ‘출도착’보다 글자 수가 더 적은 말이 엄연히 있으니….
한데, 기어코 사전에까지 오른 엉뚱한 말도 있다. 표준사전을 보자.
*장사병(將士兵): 장교와 사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줄일 수 없는 ‘장교+사병’을 ‘장사병’으로 억지로 줄여서 쓰다 보니 이렇게 사전에까지 올라 버려, 쓰지 말라고도 못 하게 된 것. 아, ‘시도지사’도 〈우리말샘〉에는 올라 버려 찜찜한 건 마찬가지가 됐다.
2022-12-2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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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90. 닭갈비 재료가 닭갈비?
지난주에 했던 통닭 이야기에 이어, 실제와 거리가 있는 음식 이름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불고기: 쇠고기 따위의 살코기를 저며 양념하여 재었다가 불에 구운 음식. 또는 그 고기.
뭐,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엔 이렇게 나오지만, 다들 이렇게 음식을 하지는 않는다. 즉, 언양식 불고기나 광양식 불고기는 석쇠를 쓰니 굽는 방식이지만, 육수에 각종 면 사리를 넣어 먹는 서울식 불고기는 거의 전골에 가까워서 ‘불에 구웠다’고 표현하기가 어색한 것. ‘불’고기라기보다는 차라리 ‘물’고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가가 다락같은 요즘엔 칼국수도 1만 원을 넘나드는 시대가 됐다. 한데, 전국 어느 지역에 가도 한둘은 있는 이름난 칼국숫집에 가 보면, 대개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표준사전을 보자.
*칼국수: 밀가루 반죽을 방망이로 얇게 밀어서 칼로 가늘게 썰어 만든 국수. 또는 그것을 익힌 음식. =도면.
여기서 핵심은 ‘칼’이다. 칼로 썰어야 칼국수인 것. 이와 대척점에 있는 국수는 ‘틀국수’다. 말 그대로 ‘틀에 넣어 뺀 국수’인 것. 한데, 유명 칼국숫집에서 파는 칼국수는 대개 기계로 뽑아낸 틀국수 면을 쓴다. 이 기계면이 너무나 당당하게 칼국수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진짜 ‘칼’국수는 ‘손국수’나 ‘손칼국수’라는 이름을 달아 차별화하는 형편이다. 마치 인조 수세미가 워낙 많이 쓰이니 수세미 열매로 만든 수세미가 ‘진짜 수세미’로 불리는 것과 비슷하달까.
‘중국 음식점에서 항상 서비스로 나오던 군만두가 음식물 쓰레기를 늘리는 주범으로 몰리면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어느 기사 첫 문장인데, 중국집에서는 이처럼 으레 ‘군만두’가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나오는 만두는 군만두가 아니다. 열에 아홉은 ‘튀긴 만두’인 것. 만두의 양면이나 한쪽만 노릇노릇한 게 아니라 만두피 전체가 같은 색깔이라는 게 굽지 않고 튀겼다는 증거가 된다.
한데, 실제와 거리가 먼 음식이름으로 으뜸은 ‘닭갈비’가 아닐까 싶다. 닭갈비는 한자어로 계륵(鷄肋). <삼국지연의>에서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먹을 것 없는’ 한중 땅을 가리켜 조조가 비유한 바로 그 계륵이다. 당연히, 실제 닭갈비는 빈약한 살이 조금 붙어 있을 뿐이어서 먹을 것이 없는 것. 하지만 우리가 즐기는 음식 닭갈비의 주재료는 닭의 갈비가 아니라 가슴살이나 다리 살이다. 이러니 아래에 나오는 표준사전 뜻풀이는 거짓말이거나, 실제로 쓰이는 언어를 따라가지 못한 사례가 된다.
*닭갈비: 닭의 갈비. 또는 닭의 갈비로 만든 음식.
2022-12-2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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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89>토막 난 통닭이라니!
알고 보면 ‘수육’은 ‘한국말 쓰는 사람들(말무리·언중)의 승리’라고 할 만한 말이다. 일단, 예전 국어사전에는 어떻게 실렸는지 보자.
*수육(-肉): 삶아 익힌 쇠고기.
그랬다. ‘숙육(熟肉)’에서 변한 말인 수육은 ‘쇠고기’에만 썼던 것. 하지만 사람들이 ‘돼지수육, 오리수육, 닭수육, 염소수육’처럼 익힌 고기는 죄다 수육이라고 불러 버릇하자 국립국어원이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 뜻풀이를 이렇게 바꾼 것.
*수육(수肉): 삶아 내어 물기를 뺀 고기.
하긴, 돼지고기만 해도 ‘삼겹살수육, 목살수육, 오겹살수육’으로 세분해서까지 부르는 판에 ‘아니, 저기…. 수육은 쇠고기만 가리킨다니까!’ 하고 막아서 봤자 말이 먹힐 리가 없는 판이라 한 선택이었다.
비슷하게 ‘승리’한 말로는 ‘소면’도 있다. 예전 국어사전에 실린 소면 뜻풀이를 보자.
* 소면(素麵): 고기붙이를 넣지 않은 국수.
‘고기붙이’는 ‘식용할 수 있는 각종 동물의 고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육류’와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소면은 ‘국수이기는 하되, 육류가 들어가지 않은 국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 국수의 굵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는 얘기다.(정작 ‘면발이 가는 국수’는 세면(細麵)이다.) 한데, 하도 많은 사람이 가는 국수를 소면이라고들 불러 대니 그만 국립국어원이 표준사전 뜻풀이를 이렇게 바꾸고 말았다.
* 소면(素麵): ①고기붙이를 넣지 않은 국수. ②밀가루로 만든 가늘고 긴 국수. 또는 그것을 삶은 음식.(소면 한 봉지./매콤한 낙지볶음에 소면을 곁들였다.)
사전이 사람들의 입에 굴복한 모양새이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게 바로 말이 바뀌기도 한다는 걸 고스란히 보여 주는 풍경이다. 한창 바뀌는 말로는 이런 것도 있다.
*양념통닭: 튀긴 닭고기에 고추장, 마늘, 설탕 따위를 넣어 버무린 요리.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 실린 뜻풀이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념통닭’이 아니라 ‘통닭’이 바로 바뀌고 있는 말이다. 왜 그런지 잘 모르시겠다면, 다시 표준사전을 보자.
*통닭: 털을 뜯고 내장만 뺀 채 토막을 내지 아니하고 통째로 익힌 닭고기.
이처럼, 토막을 내지 않고 통째로 익힌 고기가 ‘통닭’이지만, 양념통닭은 대체로 토막을 내어 튀긴 뒤 양념에 버무린 것을 가리킨다. ‘통닭’이 의미 확장을 하는 중인 것.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통닭이 ‘통’닭임을 기억은 하실 것.
2022-12-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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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88. 아쉬워라 표준사전(22)
손님이 줄을 서는 식당과 그러지 않는 식당의 차이는 따지고 보면 그리 크지 않다. 음식이나 접객 태도, 홍보 방법이 아주 약간 다를 뿐이지만 줄을 세우고 세우지 못하는 차이가 나는 것. 요즘은 흔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던데, 어쨌거나 조금만 신경을 쓰면 결과에서 큰 차이를 낼 수 있는 분야가 많다. 국어사전으로 좁혀 보자면,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은 어떤 집일까. 과연 줄을 세우는 맛집일까. 먼저, 아래 올림말(표제어)을 보자.
*초사하다(焦思하다): 애를 태우며 생각하다.(숨 거두고 나면 그뿐이라. 그저 흙덩이 부수어지듯 먼지로 흩어지고 마는 것을. 그래도 살았다고 노심하고 초사하며….〈최명희, 혼불〉)
보기글에 나온 ‘부수어지듯’이 바로 맛집 걸림돌이라 할 만하다. ‘부수어지다’라는 우리말은 없기 때문이다. 아래는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국어생활종합상담실 ‘온라인가나다’에 올라 있는 문답.
[질문]‘부서지다’는 ‘부수다’에서 나온 건가요? 왜 ‘부숴지다(부수어지다)’가 아닌가요?
[답변]‘부서지다’는 ‘부수다’의 고어형 ‘브즈다’의 어간에 ‘-어지다’가 결합해 오래전부터 자동사로 굳어진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어 ‘부수다’의 어간에 ‘-어지다’를 붙여 줄여 쓴 말 ‘부숴지다’는 표준어가 아닙니다.(2019. 12. 6.)
즉, 같은 뜻으로 쓰는 ‘부서지다’가 이미 있으니 굳이 ‘부숴지다’를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래 놓고는 ‘초사하다’ 보기글에는 저렇게 ‘부수어지듯’이라고 쓴 것. 사실 이 ‘부수어지듯’은, 국립국어원이 꼼꼼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표준사전 올림말 ‘파괴되다’의 뜻풀이 ‘부수어지거나 깨뜨려져 헐리다’를 국립국어원이 ‘부서지거나 깨뜨려져 헐리다’로 고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저걸 고치면서 이 ‘부수어지듯’은 빠뜨렸던 것.
*스리피트라인(three-feet line): 야구에서, 본루와 일루 사이의 베이스라인에서 3피트 바깥쪽에 그은 선. 타자가 일루로 갈 때 이 선을 넘으면 아웃이 된다.
이 뜻풀이에서는 타자가 아웃이 되는 전제가 빠졌다. 스리피트라인을 벗어난다고 모든 타자가 아웃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태그를 피해서 스리피트라인을 벗어나는 상황에서만 아웃이 되므로 ‘태그당하지 않으려고’라는 설명이 더 있어야 했다.
*묵나물: 뜯어 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먹는 산나물.(아주까리나 취의 이파리는 묵나물로 먹는다.)
‘산나물’만을 묵나물이라 한 건 잘못. ‘나물’이면 된다. 당장 보기글에 나온 아주까리도 집에서 키운다.
자, 표준사전은, 줄을 세우는 맛집인가.
2022-12-0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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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87. 아쉬워라 표준사전(21)
〈국힘 “김정은, 협박으로 안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
이 제목에 나온 ‘안위’는 잘못이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안위(安危): 편안함과 위태함을 아울러 이르는 말.(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다./가족의 안위를 돌보다….)
즉, 안위는 편안함(안전함)과 위태함을 한꺼번에 이르는 말. 그러니 저 제목에서는 ‘안위’가 아니라 ‘안전’이라야 했다. 위태함이야 지킬 일이 아니므로….
한데, 표준사전의 ‘안위’ 뜻풀이가 이러한 데 반해, 보기글은 이상하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다./가족의 안위를 돌보다’는 결국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함을 걱정하다/가족의 안전함과 위태함을 돌보다’라는 뜻이 되기 때문인 것. 결국, 이 보기글들에 나오는 ‘안위’도 ‘위태함/편안’이라야 했다.
*워홀(Warhol, Andy): 미국의 화가·영화 제작자(1928~1987). 팝 아트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작품으로 〈메릴린 먼로〉 따위가 있다.
표준사전의 이 뜻풀이에선 ‘대표적인 존재’보다는 ‘대표적인 인물’이 더 좋았겠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메릴린 먼로’다. 국립국어원 누리집(홈페이지) ‘외래어 표기법’ 항목에서 검색해 보면 ‘매릴린 먼로(Marilyn Monroe)’로 나오기 때문이다. 같은 항목에는 미국 여성 경영인인 매릴린 휴슨(Marillyn A. Hewson)이라는 인명도 나오는데, ‘실무소위(151106), 제154차 외래어 심의회(2021. 3. 8.) 한글 표기 수정(메릴린 → 매릴린)’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걸 보면, 최근에 외래어 표기를 수정하면서, 표준사전의 ‘워홀’ 뜻풀이는 그대로 둬서 생긴 일인 듯하다.
'그는 열 일곱에 집을 나와 독립했다.'
올림말(표제어) '집'에 나오는 보기글인데, '열 일곱'은 '열일곱'이라야 했다. 한글맞춤법 제44항에 따르면, 수를 적을 때는 만(萬) 단위로 띄어 써야 한다.
'그 애는 어찌나 고집이 센지 내가 그 애에게 지고 말았다.'
올림말 '지다'에 나오는 보기글인데, 겹치는 말이 있어 어색하다. '그 애는 어찌나 고집이 센지 내가 지고 말았다'나 '어찌나 고집이 센지 내가 그 애에게 지고 말았다'면 충분했다.
'회담의 재개 여부가 불투명하다.'
올림말 '재개' 보기글인데, 불투명한 건 '재개 여부'가 아니라 '재개'다.
‘버너를 꺼내고 코펠에 굴비국을 끓이면서 비교적 조용한 산을 즐기려 한 것이다.’
올림말 ‘코펠’ 보기글인데, ‘갈빗국 고빗국 도깨빗국’에 견줘 보면 ‘굴비국’은 ‘굴빗국’이라야 했다.
2022-11-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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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광] <986>소설 보면서 이런 걱정
요즘 출판계에선 정지아의 자전적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화제다. 화자가 빨치산 부모의 딸인 데다 아버지 장례식이라는 다소 무거운 상황임에도 술술 읽히는 유머러스한 문장의 힘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유시민 작가의 추천도 판매에 한몫했겠다.
한데, 어문교열기자로서는 잘 팔린다는 소식에 걱정이 앞선다. 띄어쓰기 잘못은 논외로 하더라도, 소설에서 오자나 부정확한 말이 꽤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눈치 빠른 동식씨가 오빠를 자기 테이블로 이끌었다. 변죽 좋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 귀찮기만 한 것은 아니다.→‘변죽’은 그릇이나 세간, 과녁 따위의 가장자리를 가리킨다. 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빙빙 돌려 이야기하는 것을 일러 ‘변죽을 울리다’라 하는 것. 이 자리에는 ‘반죽’이 와야 했다. ‘뻔뻔스럽거나 비위가 좋아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는 성미’라는 뜻이다. ‘반죽이 좋다’고 하면 ‘노여움이나 부끄러움을 타지 아니하다’라는 뜻.
*하얀 이불에 쌓인 두 사람이 어릴 때 본 하얀 누에고치 같았다.→‘쌓다’는 겹겹이 포개어 얹는다는 뜻. 이불로는 싸야 하니 두 사람은 하얀 이불에 ‘싸인’ 상태.
*“너도 할배 유골 뿌려볼래?” “그거이 뭔디요?” “할배 태우고 나온 뼛가루.”→‘뼛가루’는 유골이 아니라 ‘골분(骨粉)’이다. ‘유골(遺骨)’은 말 그대로 ‘주검을 태우고 남은 뼈. 또는 무덤 속에서 나온 뼈’. 유해나 해골과 비슷한 말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유골을 조금씩 흩뿌렸다’나 ‘차창을 열고 유골을 한줌 흩뿌렸다’라는 표현도 잘못.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연산홍’이라는 나무는 없다. 대신 ‘영산홍(映山紅)’이 있는데, ‘왜철쭉’이라고도 한다.
*어머니 예상대로 동네 사람들은 네모반듯하지 않아 비뚤비뚤한 다락논의 네 귀퉁이에는….→‘다락논’은 ‘다랑논’의 북한말.
*치매가 더 진행되어 나름 고결했던 지난 삶에 똥칠을 할까봐….→‘나름’은 의존명사여서, ‘그 나름/하기 나름’처럼 선행 수식어가 와야 한다.
*작은 동네가 난생처음 사람들로 북적북적….→‘난생처음’은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라는 뜻. 한데, ‘태어나다’가 ‘사람이나 동물이 형태를 갖추어 어미의 태(胎)로부터 세상에 나오다’이니 결국 ‘난생처음’은 사람이나 동물에게만 쓸 수 있는 말. 물론 ‘동네가 태어났다’를 비유적 용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설득력은 좀 약하다.
어쨌거나, 개정판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바로잡혔으면 싶다.
2022-11-23 [1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