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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젠 소화기를 넘어…
과거 1990년대 반상회가 있었던 시절부터 최근까지 ‘한 가정 한 소화기 갖기 운동’을 비롯하여 명절 귀성길 ‘고향 부모님 댁에 소화기 드리기’ 등 주택 화재 초기 진화에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전 국민 소화기 비치 운동으로, 주택 뿐 아니라 모든 화재의 영역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2012년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8조(주택에 설치하는 소방시설)로 열매를 맺어서 법적 지위까지 인정받았고. 2022년도에 법명이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었다.
주택(아파트 제외)에서는 ‘주택용 소방시설’(단독경보형 감지지 및 소화기)의 설치를 법적으로 강제하고 있어 대형마트의 한 코너에서는 판매 부스를 만들어 놓을 정도로 우리 생활 사이에 자리 잡았다고 본다면 눈을 조금 들어 주택 외 아파트의 경우는 어떠할까?
전 국민의 2명 중 1명이 아파트에 살고 있어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2024년도 1월부터 12월 말까지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 통계를 통한 전국의 아파트 화재 건수를 살펴보면 총 3193건에 28명이 사망하고 33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08억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냈다. 아파트 화재로 인한 대피 방법의 경우 2023년 12월 25일 서울 방학동 아파트 화재 이후 라디오의 재난 방송이나 소방청의 홈페이지에도 ‘아파트 화재 피난 안전 매뉴얼’을 통해 화재 발생 시 무조건 피난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피난을 고려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파트 화재 발생 시 젖은 수건 등으로 입을 막고 계단을 이용해 지상층, 옥상 등으로 대피하거나 집안에서 대피가 불가능한 경우 화염·연기로부터 멀리 이동해 문을 닫고 젖은 수건 등으로 틈새를 꼭 막아야 한다.
각종 재난 현장과 소방행정 업무로 32년의 세월을 보내고 정년퇴직한 소방공무원의 한 사람으로서 아파트 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도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소방공무원 현직에 있을 때 아파트 소방교육에 나가보면 낮 시간대라 그런지 주로 어르신들과 경비원 몇 분들만 참여하고 실제 화재진압훈련을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교육의 효과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파트 화재 시 옥내소화전을 아파트 주민들이 직접 사용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아파트에는 소화기는 물론, 옥내소화전이라는 훌륭한 소방시설이 있다. 불이 나서 연기가 나오는 순간에도 옥내소화전을 사용하여 직접 진화하기보다 소방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옥내소화전은 소방관들만 사용하는 소방시설이 아니다. 소화기보다 진화 능력이 뛰어난 옥내소화전을 바로 옆에 두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바로 옆에 있는 구명부환을 던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옥내소화전을 사용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관창(노즐 nozzle)에 관한 부분이다. 관창에 관한 사용 설명은 옥내소화전 사용 설명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요즘 옥내소화전에 설치된 대부분의 관창은 개폐가 가능한 관창이다. 따라서 옥내소화전 함을 열고, 호스를 편 후 밸브를 열어 물을 뿌린다고 가정했을 때 관창이 열려 있을 때와 잠겨 있을 때의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수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혼자 호스를 펴고 물을 개방했을 때 관창이 열려 있다면 그 호스는 소위 ‘뱀춤’을 추게 된다. 이리저리 날뛰는 호스를 잡기도 쉽지 않다. 이렇듯 옥내소화전을 사용할 땐 반드시 관창을 왼쪽으로 돌려 잠근 상태에서 밸브를 열어야 한다. 관창을 잡을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수압에 따른 흔들림에 유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만약의 사고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재 초기 진화의 파수꾼 소화기를 넘어 이젠 옥내소화전의 올바른 사용법을 익힘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줄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25-06-1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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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글로벌허브도시의 ‘스톡피시’ 전략
중세 유럽에서 북해의 대구를 말려 만든 스톡피시(Stockfish)는 단순한 수산물이 아니었다. 소금 없이도 수년간 보관 가능한 이 혁신적 기술은 노르웨이를 북유럽 무역의 패권국으로 만들었고, 한자동맹은 스톡피시 유통망을 장악해 유럽 경제를 좌우했다. 당시 '스톡피시'라는 말은 곧 기술력과 경제력의 상징이었다.
미래 부산에도 '스톡피시'가 필요하다. 미중 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격변의 시대, 부산은 단순한 항만도시를 넘어 동북아 핵심 거점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열쇠가 바로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제정, KDB산업은행 본사의 부산 이전, 그리고 가덕도신공항의 성공적 건설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의 글로벌허브도시들은 각자의 '스톡피시'로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섰다. 싱가포르를 보라.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싱가포르는 전략적 항만 위치와 창이공항이라는 교통 인프라를 바탕으로, 과감한 금융특구정책과 규제완화를 통해 아시아의 금융·물류 중심지로 도약했다. 글로벌 금융기관 유치, 인재 확보, 기업 친화적 세제 도입 등 통합적 접근으로 단 한 세대 만에 세계적 도시로 부상했다.
두바이는 더욱 극적인 변신을 이뤄냈다. 사막 위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이곳은 세계 최고 수준의 두바이 국제공항과 제벨 알리 자유무역지대를 핵심 인프라로 삼아 중동의 비즈니스·관광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외국인 기업에 100% 소유권을 허용하고, 법인세와 소득세를 면제하는 파격적 조치로 글로벌 기업들을 끌어들였다.
스톡피시가 중세 국가의 생존을 좌우했듯,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산업은행 이전, 가덕도신공항은 대한민국과 부산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인프라다. 특별법은 부산에 규제혁파, 세제혜택, 특구지정 등의 권한을 부여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게 할 견고한 토대가 될 것이며, 산업은행 이전은 동북아 금융허브로의 도약을 가능케 할 촉매제가 될 것이다. 또 가덕도신공항은 부산을 세계와 연결하는 날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 가지 핵심 과제 모두 난항을 겪고 있다. 특별법 제정과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정치권의 지역 이기주의로 지지부진한 형국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덕도신공항 건설마저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최근 부지조성 공사를 맡은 현대건설 컨소시엄이 당초 7년으로 계약된 공기보다 2년 연장된 9년의 공사 기간을 요구하면서, 2029년 개항 일정에 빨간불이 켜졌다. 국토교통부가 이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정부와 건설사 간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고난도 해상매립 공사의 기술적 난제, 수의계약으로 진행된 사업자 선정 과정, 그리고 접근 교통망 구축 사업의 무응찰 등 복합적 문제가 얽혀 있다.
총체적인 난국을 맞이한 상황에서 부산은 싱가포르와 두바이의 스톡피시 전략에 주목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이민사회를 통합하여 도시국가를 건설하는 장기적 비전을 추진했다. 리콴유 정부는 정원도시 계획부터 공공주택 정책, 영어 공용화, 산업육성까지 철저히 계획된 도시국가 발전 전략을 시행했다.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모하메드 역시 석유 자원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다각화를 일관되게 추진했다. 금융, 관광, 물류, 부동산 등 다양한 산업을 육성하며 중동의 비즈니스 중심지로 변모했다. 두 도시 모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혁신적 '스톡피시' 전략이 있었기에 글로벌 무대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배울 점은 명확하다. 가덕도신공항은 단순한 토목 공사가 아니라 부산의 글로벌 경쟁력을 좌우할 전략적 자산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항을 갖추고 있는 싱가포르, 두바이, 인천이 모두 글로벌 허브로 도약했음을 상기해야 한다. 가덕도신공항은 단군 이래 최대 토목 공사로 불리는 10조 원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이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선다. 동북아 관문이자 부산의 새로운 '스톡피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산에 스톡피시가 없다면, 대한민국은 심각한 불균형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KDB산업은행 본사 이전, 가덕도신공항 건설은 단순한 지역 현안이 아니다. 국가균형발전의 초석이자, 동북아시아 경제지도를 재편할 국가 전략의 일환인 것이다. 공항 건설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은 단기적 편의나 정치적 고려가 아닌, 장기적 국가 비전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특히 부산은 싱가포르나 두바이와 달리 강력한 제조업 배후단지와 세계적 수준의 항만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금융과 첨단산업, 관광이 결합된다면 기존 글로벌허브도시들과 차별화된 부산만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가덕도신공항까지 더해진다면, 해운·항만·공항을 아우르는 종합 물류 플랫폼으로서 독보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와 국회도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 중세 스톡피시가 유럽의 판도를 바꾼 것처럼, 글로벌허브도시로의 전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특별법 제정과 산업은행 완전 이전에 정치권이 초당적으로 나서야 하며, 가덕도신공항 건설 문제 역시 정부와 건설사가 국가 백년대계의 관점에서 지혜롭게 해결해야 한다. 현재의 공기 연장 요구를 단순한 계약 분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안전하고 완벽한 공항을 건설하면서도 국가 발전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균형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결단하는 자에게 기회를 준다.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 제정되고, KDB산업은행 본사가 부산으로 이전되고, 가덕도신공항이 성공적으로 건설되는 날, 우리는 오늘의 결단을 대한민국과 부산의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2025-06-1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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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북극항로시대’와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최근 북극항로 개척과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에 대한 이슈가 뜨겁다.
기후위기라는 전 지구적 도전 앞에서 세계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인류는 오랜 시간 닫혀 있었던 북극항로라는 새로운 길을 마주하게 됐으며, 단순한 항로의 개척을 넘어 글로벌 해운물류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북극항로는 기존 수에즈운하 경로보다 훨씬 짧은 거리로, 운항 일수와 연료 소비,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과 글로벌 공급망의 회복력 강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해양경제의 패러다임이다.
북극항로의 전략적 가치가 주목받는 지금, 이 변화는 단순한 경로 다변화를 넘어 국제정세와 무역 흐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기존 해상운송의 병목지점으로 작용하던 수에즈운하와 말라카해협을 우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운업계는 물론 관련 산업 전반에 중대한 기회와 도전 과제를 동시에 던지고 있다. 이제 북극항로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은 단순한 항로를 넘어, 국가 경제력과 기술력, 외교 전략이 집약된 총체적인 경쟁의 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지리적 이점과 산업 인프라를 두루 갖춘 지역에 새로운 기회를 안겨주고 있다. 이 중심에는 동북아시아의 핵심 거점, 부산과 경남이 있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은 동북아 해양경제의 관문으로, 북극항로의 도래와 함께 세계 물류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 부산항 신항, 김해국제공항, 진해신항(예정), 가덕도신공항(예정)을 아우르는 입체적 교통망, 첨단 제조와 물류가 융합된 산업단지, 그리고 외국인 투자기업의 거점으로 성장 중인 복합지구들이 북극항로를 활용한 글로벌 공급망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우리는 단지 이 새로운 항로를 ‘지나가는 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은 북극항로를 통해 유입될 에너지·자원 물류, 극지 특화 해운산업, 쇄빙선 등 특화선박, 친환경 선박정비 및 기술기업 등 다양한 고부가가치 산업군을 유치할 수 있는 준비된 플랫폼이다.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북극권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지금, 국내에서도 이러한 미래 산업 기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배후공간의 확보와 더불어, 보다 유연하고 적극적인 제도 운영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경제자유구역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물리적 범위를 확장해야 할 시점이다.
글로벌 기업의 입지 수요는 점점 더 복합화되고 고도화되고 있다. 단순한 물류 이점만으로는 기업을 끌어올 수 없다. R&D, 생산, 물류, 정주환경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종합 비즈니스 생태계가 필수적이다. 이에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은 외국인 투자기업 유치뿐만 아니라, 국내외 물류·제조·에너지 기업 간의 협업과 융합을 통해 진정한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로 도약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해양산업을 총괄하는 정부 부처의 전략적 재배치 또한 필연적인 과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신속한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주문했다. 단순한 행정조직의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미래 해양경제 중심축을 실질적인 현장으로 옮기는 중요한 국정 과제다. 북극항로 개척이라는 국가적 어젠다가 현실화되는 이 시점에, 해양정책의 심장부가 그 변화를 가장 가까이 체감할 수 있는 부산에 자리잡는 것은 정책 실행력과 효율성 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이 실현될 때,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은 그 핵심 파트너로서 대한민국 해양경제의 재도약을 견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항로의 출발선에 서 있다. 북극항로의 개척은 물류의 판도를 바꾸는 것에서 나아가, 글로벌 경제 질서의 흐름을 새롭게 쓰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은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서, 세계를 잇는 해양경제의 중심지로 도약하고자 한다. 글로벌 투자기업이 신뢰하고 선택할 수 있는 품격 있는 공간, 첨단 물류와 제조가 공존하는 미래형 산업 플랫폼, 그리고 지속가능한 해양경제의 전진기지로서, 우리는 앞으로도 쉼 없이 나아갈 것이다.
2025-06-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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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싱크홀 언제 또 발생할까 우려된다
지난 4월 13일 새벽, 부산 사상구 학장동 도심 한복판에서 깊이 4.5m의 땅꺼짐(싱크홀)이 또 발생했다. 2024년 8월의 도시철도 사상-하단선 공사 현장 지반 침하 붕괴로 트럭 2대가 8m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에 이어, 같은 도시철도 공사 구간에서 벌써 두 번째다. 시민은 불안에 떨고, 부산교통공사는 복구에 나섰고, 언론은 ‘또’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예측가능한 재난이었다는 점이다.
부산은 단순한 연약지반 도시가 아니다. 매립지, 하천 충적지, 해수면 영향권, 지하터널, 지하철 공사, 심부 지하주차장 건설이 한 도시에 동시다발로 존재하는, 말 그대로 복합지반도시다. 이러한 도시에서 더 깊이, 더 넓게 땅을 파는 개발이 매일 벌어지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방식으로 시공하고 감시하고 있다.
이번 사고에서 확인된 지반침하의 원인은 이미 명확하다.
집중 호우에서 지하수 유입, 차수 공법 미비, 토류판 유실, 공동 형성, 세굴 발생, 구조물 붕괴 순으로. 이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수리동역학적 연쇄 반응이다. 이제는 ‘강우’나 ‘노후측구’ 같은 단일 원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지하수의 흐름, 지반 내부의 간극수압, 수압차에 따른 구조 응력 변화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예측하는 과학적 감시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해법은 명확하다. ‘실시간 수리동역학 기반 통합감시 시스템’의 구축이다. 이는 단순한 계측기 설치가 아니다. 지하수위계, 변위계, GPR탐사, IoT통신망, 그리고 FEFLOW·PLAXIS와 같은 지하수-지반 상호작용 모델링 프로그램을 연계해, 단일 구간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지반을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감지하고 예측하는 시스템이다.
더불어 우리는 이제 지반 보강에 있어 친환경성과 구조적 안전성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환경표지인증을 받은 무기계 재료 등은 수밀성과 내구성이 탁월할 뿐 아니라, 지하수 추가 오염 방지, 침투수 유입 차단, 세굴 저항성 강화, 지속가능한 유지 관리 비용 절감이라는 측면에서 지반침하 방지용 핵심 재료가 될 수 있다. “이 공사에는 환경표지 인증을 받은 안전재료가 사용됩니다.” 이제 시민들에게 그런 설명이 가능한 도시공사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시민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위험지도를 공개하고, 재건축·재개발 사업계획에 지반 안전 해석 보고서와 실시간 감시 계획을 필수 첨부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소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부산은 땅이 꺼지는 것을 ‘복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안전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시민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공사를 외치고, 전문가들은 더 과학적인 시스템과 친환경 재료의 도입을 요구한다. 도시의 안전은 우연히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제도로 지켜지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부산은 ‘깊게 파기 전에 깊이 예측하는 도시’로 전환해야 한다. 부디 지난 4월 사고를 마지막으로, 우리가 ‘또’라는 단어를 쓰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2025-06-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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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차에서 BuTX까지: 도시가 움직이는 힘
기술의 진화는 불가피한 변화의 물결이며, 교통 혁신은 그 물결의 선두에 있다. 1894년 런던, 하루 5만 마리의 말이 도심을 달리며 쏟아내는 분뇨로 인해 ‘50년 안에 런던 거리가 말똥에 잠길 것’이라고 타임스는 예측했고, 사람들은 도시가 말의 배설물로 질식할 것이라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 위기는 예기치 않게 등장한 기술 혁신, 바로 ‘자동차의 보급’으로 해결되었다. 포드의 대량 생산 체제는 마차를 빠르게 대체했고, 런던과 뉴욕의 거리는 마차의 분뇨 대신 내연기관의 엔진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기술 발전의 수혜는 당대에는 오히려 저항과 오판을 불러왔다.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마차 업자들과 마부들이 자동차가 일자리를 빼앗을까 우려해 의회에 자동차 규제를 요청했고, 결국 ‘적기조례(Red Flag Act)’라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 속도 제한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 법은 자동차 앞에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걸어가야만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했으며, 결과적으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다른 나라에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더 나아가, 20세기 초에는 자동차 산업의 잠재력을 두고 많은 오판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03년 미국의 한 은행가였던 저명인사는 “전 세계 자동차 수요는 5000대를 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운전할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일화가 있는데 이는 기술과 일자리에 대한 대표적 오류로 세상사에 종종 회자된다. 그로부터 불과 수십 년 만에 자동차는 수백만 대가 넘게 생산되며 전 세계 대중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는데 말이다.
이렇듯 기술의 발전은 단기적 관성에 갇힌 시선으로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 변화를 동반한다. 교통의 혁신은 분뇨를 없앴을 뿐 아니라, 도시 구조와 시민의 삶의 질, 나아가 고용 구조마저 새롭게 재편했다. 마부가 사라졌지만 운전기사, 정비공, 도로 설계자, 주유소 운영자 등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났듯, 기술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부산도 교통 인프라의 변화와 함께 성장해 왔다. 개항기 이후 철도와 도로망 중심의 교통 체계는 도시 산업화의 초석이 되었고, 1985년 국내 최초의 지방 도시철도인 부산지하철 1호선 개통은 대중교통 중심 도시로서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최근 부산시는 제2차 도시철도망 구축계획 발표로 교통 인프라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수소기반 부산형 급행철도(BuTX) 도입 등 14개 노선(후보 4곳 포함)이 계획되어 있으며, 이는 도시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시민 이동권을 대폭 향상시킬 것이다. 이 계획은 친환경성과 스마트 기술을 결합한 미래형 교통 도시를 지향한다.
이러한 전략은 세계 주요 도시의 교통 혁신 사례와도 맞닿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일찍이 지능형 교통 시스템(ITS)과 MRT 중심의 통합 대중교통망을 통해 도시 혼잡도를 낮추고, 교통 데이터를 활용한 정책 수립으로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였다. 부산도 이와 같은 스마트 인프라를 바탕으로 교통에서 과학기술 기반 도시혁신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교통 인프라의 혁신은 시민의 삶뿐 아니라 일자리 구조도 바꾼다. 과거 마차 시대에서 자동차 시대로의 전환이 그랬듯, 교통수단의 진화는 데이터 분석, 에너지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직무를 만들어낸다. 마부는 사라졌지만, 그보다 더 다양한 일자리와 산업이 탄생했다. 부산의 교통 혁신도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산업 구조 개편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시민의 삶의 질은 보다 편리하고 다양해질 것이며, 교통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도시 혁신의 핵심 플랫폼이 될 것이다. 언제나 기술의 진보는 새로운 일자리를 낳고, 도시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이제 부산은 기술의 진보와 함께 다시 한번 교통 혁신을 도약하려 한다. 그 출발점은 시민의 삶이며, 미래를 여는 힘이다.
2025-06-0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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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2의 다보석가탑, 부산이 품기를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이 살아갈 터전의 중심지에 하나의 구조물을 세웠다. 수직적 상승의 상징물인 탑은 때로 건물의 높이를 넘어선다. 탑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바벨탑, 상아탑, 에펠탑 등이라고 하겠는데, 이 중에서 현존하는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탑이다. 대부분의 탑이 하늘과 신을 향한 솟아오름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지만, 불교의 탑인 ‘스투파’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안치하는 데서 비롯했다. 우리말 ‘탑’은 ‘스’가 떨어져나간 ‘투파’의 한국적 변형이며, 또 이는 영어의 ‘타워’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말이기도 하다. 우리 옛 탑의 심미적인 완성도는 정평이 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1975년에 신축, 개관할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세월의 힘에 의해 변형될지 모를 다보석가탑의 복제품을 만들어 마당의 중심에 건립했다. 어느덧 반세기가 지난 일이다. 그런데 뭐가 문젠가?
나는 그 동안 사사롭게 국립경주박물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실내에 들어서기 전에 실외의 구석진 곳에 서 있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고선사 삼층석탑의 주위를 배회하곤 했다. 원효가 주지로 있던 유서 깊은 절의 이 탑이 덕동댐 건설로 인해 물에 잠기게 되자 옛 절터에서 반세기 전인 1975년에 이미 옮겨졌고, 최근에 곧 박물관 마당의 중심으로 옮겨질 계획이란다. 국보인 이 탑의 가치는 진짜 다보석가탑에 버금간다. 반면에 박물관 마당 중심에 놓여 있는 복제 다보석가탑은 문화재(국가유산)가 아니다. 우리가 반세기에 걸쳐 고선사 삼층석탑을 너무 푸대접했나?
연쇄 이동은 보통 일이 아니다. 보도에 의하면 시간적으로도 5년 이상이 소요된다. 복제 다보석가탑이 옮겨질 자리를 먼저 정해야 한다. 옮겨질 이것도 복제니 복원이니 재현이니 하는 말에서 벗어나 제2의 다보석가탑이란 의미를 적극 부여해야 한다. 이제 반세기가 되었으니, 역사성도 갖췄다. 그러면 제2의 다보석가탑을 어디로 옮겨야 하나?
경주는 아니다. 중복은 피해야 한다. 둘 다 경주에 있다는 게 활용도가 낮아서다.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서울이 우선적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차고 넘치는 서울에 제2의 다보석가탑을 세운다는 것은 생뚱맞다.
그 다음의 대안으로 생각되는 장소가 부산이다.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며, 외국인들도 많이 모이는 곳이다. 만약에 부산이 이것을 품는다면, 국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외국인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감탄하면 감탄할수록, 매료되면 매료될수록, 우리의 문화적 국격은 높아만 갈 것이다.
구체적인 장소를 염두에 두자면, 이렇다. 제1안은 해변로와 구남로가 만나는 장소로 정하는 것이다. 제2안은 해운대역 옛 역사를 허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한 후에 터를 잡는 것이다. 해운대는 진성여왕과 최치원의 인연이 전승되는 곳이기도 하다. 제3안은 앞으로 개관될 오페라하우스의 마당에 건립하는 것이다. 제1안은 외국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점에서 유리하고, 제3안은 탑이 큰 건물 앞에서는 왜소하게 보일 수 있어서 불리해 보인다.
2025-06-0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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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집착’이 아니라 ‘애착’입니다!
발달이 느린 아이들, 특히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들은 특정 물건을 항상 손에 쥐고 있거나, 특정 음악이나 영상을 반복해서 보는 등 특정한 대상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보통 이를 바라보며 '집착'이라는 단어를 많이 떠올리며, 걱정하며 바라보거나 없애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것을 ‘집착’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한 ‘애착’ 과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이가 특정 블록을 항상 손에 쥐고 있다면, 그 물건은 그 아이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중요한 도구일 수 있고, 특정한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다면, 그것은 자기 표현의 방식일 수 있다. 나아가 아이가 관심을 갖는 물건은 발달과 학습을 촉진하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아이의 관심사를 억제하려 하기보다,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를 이해하고, 함께 즐기고 좋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자폐 아동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갖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누군가와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단순한 놀이 이상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은 자폐 아동과 소통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선은 문제로 여기며 아이의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을 멈추고, 아이가 관심 갖고 좋아하는 특정 물건이나 활동을 가치롭게 여기며, 그 활동으로 함께 하면, 아이는 자신이 소중히 여겨진다고 느끼게 되고, 관계에서의 편안함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관계의 경험은 자폐 아동이 세상과 소통하려는 동기,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실례로, 눈만 뜨면 숟가락을 찾고, 길을 가다가도 숟가락이 보이면 (더러운 건 개의치 않고) 주워 담고, 식당에 가면 수저통에 있는 숟가락은 모두 꺼내 일렬로 늘어놓는 아이가 있었다. 부모님은 아이가 숟가락에 보이는 관심을 줄여보고자 숟가락을 숨기거나,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싫어서 집 밖을 나설 때 아이가 손에 쥔 숟가락을 뺏기에 급급했다. 그러던 중 부모 교육(발달장애 자녀의 마음 읽기)을 통해 숟가락을 좋아하는 아이의 행동을 가치롭게 바라보기로 마음먹고, 마트에 가서 숟가락을 한가득 사서, 아이에게 선물했다. 더 이상 아이 손에 있는 숟가락을 빼앗거나 걱정스럽게 바라보지 않고, 숟가락을 탐구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랬더니 아이는 숟가락 하나를 꺼내 엄마와 동생에게 건넸다. 아이가 주도하는 능동적인 상호작용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을 거부한 변기에 앉아 용변 보기를 시도하는 일까지 생겼다고 한다. 숟가락을 손에 꼭 쥔 채로.
물론 자녀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에 관심 가질 때, 이를 가치롭게 여기고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반응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와 발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실제적인 적용을 돕는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동일한 장애 범주라도 증상과 정도의 차이가 다양하므로, 우리 아이의 특성에 적합한 반응을 찾는 과정이 일회성 특강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여러 가지 정보들로 뒤섞인 혼란스러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다. 이 부모님이 "왜 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까", “숟가락은 제발 그만 갖고 놀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떨치고, "우리 아이는 특별하게 세상을 경험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이해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장애인복지관에서 마련한 10주간의 부모 교육 덕분이었다.
부모의 눈과 말은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모의 걱정 가득한 시선은 아이의 자존감 형성에 방해가 되고, 우울과 불안감만 키우게 된다. 대신 부모가 자녀를 있는 그대로 기뻐하며, 아이의 관심사와 행동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면, 발달이 느린 아이들도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고 보다 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6-0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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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제는 항만이 답할 차례
지난 5월 31일은 서른 번째를 맞는 ‘바다의날’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대륙과 연결이 끊긴 대한민국은 바다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국가다.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바다를 통해 처리하는 명실상부한 ‘해양국가’다. 그 바다를 통해 우리는 전 세계가 놀라워하는 산업화를 이뤘고,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해운·항만산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든든한 뒷받침이 돼 왔다.
지금 세계 해운산업이 거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탈탄소와 디지털화다.
지난 4월 국제해사기구(IMO) 해양환경보호위원회(MEPC)는 2027년부터 국제항로를 오가는 선박에 대한 강력한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그동안 자발적 감축노력에 머물던 온실가스 저감 노력이 본격적인 규제체제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글로벌 선사들은 친환경 선박 발주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국내 조선소들도 LNG, 메탄올, 수소, 암모니아 추진선 개발과 건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운과 조선업계는 이미 ‘탈탄소 시대’를 향한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항만은 어떠한가? 정작 항만은 이 논의에서 살짝 비껴가 있는 듯하다. IMO 규제도, 업계 대응도 온통 ‘선박’중심이다. 하지만, 탄소중립 선박이 제대로 운항하려면 친환경 연료를 공급할 인프라가 항만에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항만은, 부산항은 준비 되어 있는가?
대한민국 최대이자 세계 2위 환적 컨테이너 항만인 부산항이 동북아 친환경 해운의 중심지가 되어야 함에도 수소나 암모니아는 고사하고 LNG 벙커링 인프라조차 아직 없다. 지금까지 글로벌 해운시장에서 선박 연료 공급 허브 역할은 싱가포르, 로테르담 등이 독점해 왔고 막대한 부가가치는 그들에게 돌아갔다. 새롭게 열리는 친환경 연료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놓친다면 바다가 주는 기회를 또 다시 경쟁 항만에 내어주게 된다.
필자는 지난주 유럽 주요 항만을 살펴보고 항만 당국, 친환경 에너지 기업 수장들을 만났다. 그들의 준비는 한마디로 ‘놀라웠다’. 로테르담항과 함부르크항은 항만도 ‘해운 탈탄소’체계의 중요한 한 축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미 탈탄소 항만 전환을 위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로테르담항은 지난 4월 액화 암모니아의 선박 대 선박(STS) 벙커링 테스트에 성공했고, 내년부터 암모니아 벙커링을 시행할 계획임을 밝혔다. 또 유럽 수소 생산·저장·공급 허브 위상을 구축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야심찬 조치를 하나 하나 실행하고 있었다. 함부르크항은 암모니아 터미널 건설계획을 수립하는 등 사업 구체화에 나섰다. 나아가 이들은 LNG, 암모니아 외에도 다양한 대체 연료 가능성도 열어 놓고 친환경 연료 패러다임의 가변성에 대응하고 있었다.
부산항이 지속 가능한 글로벌 해운의 중심지가 되기 위해 ‘탈탄소’를 첫째로 논의해야 할 이유다. 우리는 지금 세계 해운 변혁기의 중심에 서 있다. 늦지 않았다. 하지만 더 늦으면 기회를 놓친다.
이런 대전환의 시기에 우리 정부는 지난해 말 ‘글로벌 거점항만 구축전략’을 발표하며 LNG, 수소, 암모니아 등 대체연료 수급체계 구축을 예고했다. 부산항은 연간 약 1만 4000척 이상의 컨테이너선이 드나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북아 중심 항만이다. 인프라만 제대로 적기에 갖춘다면 해상 연료 공급 허브, ‘바다 위 주유소’가 될 최적지다.
앞선 세대들이 해운으로 바다를 개척하고, 부산항을 세계적인 항만으로 일궈낸 덕분에 우리는 해양강국의 이점을 누리고 있다. 다음 세대도 바다가 주는 기회와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지금,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 지구를, 우리 바다를 살리자는 인류 공동의 요구에 국제기구와 해운·조선업계는 이미 답했다. 이제는 항만이, 우리 부산항이 답할 차례다.
2025-06-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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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K-푸드
세상 많은 음식 중 3대 음식으로는 중국, 프랑스, 튀르키예의 것을 들고 있다. 중국은 땅 위에 다리 달린 책상과, 하늘과 바다의 비행기와 잠수함 빼고는 다 먹는다는 나라로, 그 중 청나라식 베이징 음식과, 맵고 짜고 기름진 쓰촨 음식, 그리고 서양에 많이 알려진 광동 음식이 유명하다.
프랑스는 넓은 국토에서 나는 풍부한 식재료를 기반으로, 미쉐린 등급을 매길 정도로 음식에 진정성이 있는 나라이고, 튀르키예는 세 대륙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의 음식에다, 같은 음식을 금하는 황제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당초 이 세 나라의 음식이 평가받고 있을 때, 세계인의 안중에도 없었던 나라였지만, 국력의 신장과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
미 워싱턴 DC, 국무부 청사 구내식당에는 한식을 맛보려는 이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하고, 뉴욕에서는 ‘한식당을 예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권력이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라 한다. 당연히 우리 음식의 우수성 때문이다.
우리나라 음식은 우선 식재료가 다양하다. 비록 국토는 그만하지만 식재료의 다양성에서는 최고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삼면의 바다에서는, 각종 생선과 해산물이 나오고, 서남해안의 갯벌에서는 낙지와 조개류가 지천이고, 강이 흐르는 평야에는 다양한 곡식이 자라고, 높낮은 산에서는 버섯과 나물이 지천이다. 또 4계절에 따라 산물이 다르니 우리의 식재료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서해안의 갯벌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간만의 차이가 커야 생기는 갯벌은 해양생물의 보고이다. 우리의 갯벌은, 황하가 가져다준 선물로, 이곳의 검은 유기질 갯벌은 노르망디의 누런 사질 갯벌과 다르다. 다양한 해산물이 나는 이런 생태계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호남 음식의 특색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장류와 젓갈류 두 가지 발효식품을 다양하게 쓰는 나라로도 유명하다. 우리 음식의 모든 맛이 이 두 가지 발효식품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장, 된장, 막장, 고추장, 집장, 청국장 등 다양한 장류가 우리의 음식이 된 이유는 콩의 원산지가 우리나라였기 때문이다. 두만강(豆滿江)이란 이름이 이를 말해주는데, 만주(滿州)는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온돌은 콩의 발효를 돕는 장치 역할도 하였다. 지금 브라질 등에서 콩을 수입하는 1위 국가는 중국이지만, 주로 돼지 사료용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가, 해양생물 대부분을 젓갈로 만들어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명란젓, 창란젓, 어리굴젓, 꼴두기젓, 새우젓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새우젓은 잡히는 달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리아스식 서남해안의 영양 염류 속에 자라는 어패류 환경이 좋은 탓이다.
이들 발효식품에는 천일염이 쓰이는데, 세계에서 유명한 천일염은 프랑스의 게랑드 소금으로 알려져 있지만, 분석에 의하면 우리나라 천일염의 성분이 더 좋다고 한다. 서남해안의 우수한 생태환경이 만들어 낸 우리의 천일염이 그동안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천일염도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한두 해씩 숙성해 사용하고 있으니 그 음식의 묵은 맛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밥상 위 반찬이 수십 가지이고, 리필을 해도 무료인 우리나라 손님 접대의 철학도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생수는 물론, 다양한 차와 후식까지도 무료인 우리의 음식에 대한 인문철학적 수준도 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초인종으로 종업원을 콜하고, 수저와 휴지가 식탁 아래 항상 준비되어 있고, 음식용 가위의 편리함에 세계인이 놀라고 있다. 관습의 처음은 항상 새로운 것이었다. 새로움을 개척해 나가는 K-푸드의 번창을 기대해 본다.
2025-06-0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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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만 건강보험제도 30년, 전 국민 건강 증진 실현
건강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할 기본 인권이자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다. 건강 증진은 국민의 복지 향상을 넘어 세계 각국의 생존과 발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77차 세계보건총회에서 회원국들은 세계보건기구(WHO)의 2025~2028년 제14차 일반작업프로그램(GPW14)을 채택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각 회원국은 보건 서비스의 보장 범위 확대와 재정적 지원 강화 등의 전략적 목표를 제시하며 각국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국제 보건 거버넌스를 강화했다.
대만은 일찍이 1995년 전 국민건강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기존의 직업별 보험제도를 통합해 출범한 이 제도로 전 인구의 99.9%가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대만의 건강보험제도는 형평성과 성접근성, 성효율성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왔고, 이는 대만 사회의 안정과 국민 건강 안전을 지탱하는 핵심 기반이 됐다.
더 나아가 대만은 세계적인 보건의료의 모범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데이터분석업체 ‘넘베오’(Numbeo)가 발표하는 건강관리지수 항목에서 7년 연속 1위를 지켜나가고 있다.
대만의 국민건강보험은 현재 보험료를 내는 세대가 현재 의료비를 직접 부담하는 방식의 자급자족형 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아울러 보험료 제도 개편과 담배 건강복지세 등 보조 재원을 통해 고령화와 의료비 상승이라는 재정적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건강보험 제도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지속적인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대만의 라이칭더 총통은 2024년 ‘건강한 대만’이라는 국정 비전을 제시했다. 대만 정부는 ‘사람 중심, 가족 중심, 지역사회 기반’의 원칙 아래 건강 증진과 예방 의료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으며, ‘가정주치의 통합의료계획’ 및 ‘전인적 지역사회 통합돌봄계획’을 통해 만성질환자에게 포괄적이고 연속적인 통합의료를 제공하고, 원격의료를 통해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의 서비스 제공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장기요양과 완화의료의 통합 서비스 제공을 통해 지역사회 중심의 노후 돌봄을 추진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전 생애에 걸친 전인적이고 존엄한 돌봄을 보장하며 건강 형평성을 실현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1년 ‘2020~2025 글로벌 디지털 건강 전략 문서’를 발표하고, 사람 중심의 디지털 헬스 설루션 개발과 활용을 가속화할 것을 제안했다.
대만은 자국의 우수한 정보통신 기술 역량을 활용하여 효율적이고 투자 대비 높은 효과를 갖춘 보건의료 시스템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 클라우드 시스템은 병원 간 진료기록 공유 효율을 높였고, 보건 의료 상호운용성 차세대 기술표준을 기반으로 국제 의료 정보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AI 기반 보조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의료 발전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이 밖에 모바일 건강보험카드와 건강수첩 앱 도입으로 실시간 건강 정보 관리가 가능해졌으며, 이는 국민이 보다 건강에 유익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대만은 정치적 도전에 직면해 있음에도 줄곧 글로벌 보건 현안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세계 보건 시스템 강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에는 방역 물자 지원, 기술 협력, 경험 공유 등을 통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전 세계 국가들이 신뢰할 수 있는 협력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대만은 국제사회와 함께 국경 없는 건강한 미래를 만들어 가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WHO 헌장에 명시된 ‘건강은 기본적 인권’이라는 정신과 유엔의 ‘지속가능 발전목표’가 내세우는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한다’는 비전을 국제사회가 함께 실현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2025-05-2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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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계속되는 산불을 걱정한다
올해 들어 발생한 대형 산불에 속이 타들어 간다. 피해 지역의 주민들을 생각하면 정말 그 참담함을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가슴이 먹먹하다. 날이 갈수록 기상 이변이 극심해지고 사람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의 다발적 발생 등 산불 발생의 빈도와 피해 상황이 점점 커지고 산불이 나면 엄청나게 대형화되니 발생 지역은 거의 초토화가 된다. 산과 인접한 지역이 당연히 피해가 클 수밖에 없으며 주로 농가, 어촌, 임업 등에 종사하는 고령층과 서민들이 피해를 입는다.
전 국토의 70%가 산지인 대한민국의 산림 정책이 그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정권에 따라 바뀌는 국토개발계획이 난개발의 원인이며 산, 강, 바다 등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치산치수가 되어야 자연을 최대한 유지하는 기조가 가능하다. 개발을 제한하는 그린벨트 지정, 군사상 목적으로 제한구역 설정은 실제 국토 활용의 효율성 면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 많은 임야에 대한 개발 계획과 유사시 대응 매뉴얼, 활용 방안에 대해 국가는 과연 무슨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지 이번 산불 장기화를 보면서 불안한 마음이 든다. 가뭄과 홍수, 불규칙한 기온 변화 등 예견할 수 없이 돌발적인 기후 변화가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나무를 심으면 이후에도 관리가 수반되어야 숲이 제대로 형성되기에 식목과 육림이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병충해 구제, 천재지변 대처, 간벌 등 체계적인 산림관리를 위해 산림청이 적극 나서야 하며 임업 국가들의 정책과 사업을 벤치마킹하는 것도 건의한다.
나무의 종류는 재목이 되는 것, 우리나라 환경에 적응하는지, 생태계 교란종은 아닌지, 병충해에 강한지 등등을 고려해서 나무를 심어야 한다. 간벌 작업, 재선충 제거용으로 잘려진 나무를 그대로 쌓아 두어 산불 발생 시 불쏘시개 역할을 하여 산불이 대형화되는 원인이 된다.
임업을 수익사업으로 활성화하는 방안의 모색도 절실하다. 유실수나 약초, 특용작물, 버섯류 등의 재배지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임야와 민가가 근접거리에 위치해 언제든지 산불의 위험에 노출되는 구조이다. 산지 지형이 험준하지 않아 언제든지 입산이 가능한 점, 입산 허가제가 없어 국립공원을 제외한 산은 취사, 야영을 통제할 수 없는 제도적 허점도 문제이다.
산지의 임도와 관련해 안이한 행정과 산림정책도 개선돼야 한다. 임도 개설과 개간을 할 때 난개발이 되지 않도록 치밀하게 계획하고, 조금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자연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후손에게 물려줄 1번은 자연환경의 보존과 출산이어야 한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물려줄 수 있어야 국가가 유지할 가치를 지닌다. 덧붙여 인구 감소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정책으로 국가의 존립이 가능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제대로 된 임업정책으로 자연 생태계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과학적 접근도 필요하다. 수천 년,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산림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는 산불의 진화를 위한 장비나 전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산불이 날 때마다 확인한다. 고랭지를 이용한 특용작물, 약초, 버섯류, 유실수 등의 계획적인 임업을 정책적으로 접근하려면 선결과제는 임도 건설이다. 소방시설의 현대화, 소방 인력의 전문화도 매우 시급한 과제이며 임도는 소방 업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요건이다.
타버린 잿더미, 홍수가 쓸고 간 자리, 지진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와 상처는 치유하는 데 더할 수 없는 고통과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재난의 위험 요소들은 중앙 정부와 지자체가 협력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보완해 주기를 바란다. 또 내가 태어난 나라의 자연을 애써 보존하고 발전시켜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학교에서도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다.
2025-05-2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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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트럼프 관세 전쟁 2.0, 한국은 응답자 아닌 제안자 돼야
1980년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으로 인한 긴장, 이란 인질 사태로 인한 경제침체 등 대내외적인 불안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대선에 나선 레이건은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구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트럼프는 2016년과 2024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다시 이 구호를 사용하였다. 다른 점은 레이건의 구호에서 Let’s를 빼고 보다 직접적이고 명령형 느낌을 살렸으며, 기업가답게 상표로 등록까지 했다는 것이다.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와 함께 시작된 2기 행정부의 무역정책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America First!’ 미국 우선주의다.
지난 1월 20일, 그는 취임 연설에서 “외국을 세금으로 부유하게 하지 않겠다”며 전면적인 관세 전쟁을 예고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사이, 우리는 실체 없는 숫자의 압박을 실감하고 있다. 협상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앵커링(Anchoring)' 전략이다. 그것도 세기적 선점효과를 위한 빅 앵커링이다. 말 그대로 근거 없는 과도한 숫자(허수)를 제시해 협상의 출발점을 지배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전략에 수동적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 한국은 이제 반응형 협상가인 ‘응답자’에서 설계형 협상가인 ‘제안자’로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문제를 재정의하고, 협상의 의제를 새롭게 설정하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미국이 요구하는 조건이 아닌 비전을 중심에 두고 미국의 불안이나 트럼프의 자존심과 욕구, 미국민의 가치 등을 파악해서 자극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대비해야 할 첫 번째 전략은 '리프레이밍(Reframing)'이다.
미국은 한국의 무역흑자를 문제 삼고 있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무역수지라기보다는 미국의 기술안보 불안이다. 반도체, 배터리, 방산부품 등 미국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공급망의 핵심을 우리가 쥐고 있다. 무역문제를 경제안보로 리프레임하고, 협상 의제를 전환해야 한다.
두 번째 전략은 '리패키징(Repackaging)'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 수리·해군 정비 기술을 갖고 있다. 미국은 자국 내에서 단 한 척의 항모도 수리하지 못하는 구조다. 이를 단순한 산업 부문이 아니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유지시키는 핵심 공공재로 포장할 수 있다. ‘한국의 기술이 없다면, 태평양을 지킬 수 없다’는 논리로, ‘전통 우방 한국의 기술력이 전통 우방 미국의 군사력과 함께 한다면, 인도 태평양은 우리의 활동 무대가 된다’라는 재포장이 가능하다. 아니 ‘미국의 도움으로 이만큼 기술력을 가진 한국이 되었으니, 이젠 미국의 인도 태평양 전선에 도움을 줘 보답할 기회를 주기 바란다’라고 과대포장도 가능하다.
세 번째 전략은 '리포지셔닝(Repositioning)'이다.
이제는 미국이 제시하는 조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새로운 판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다. 예를 들어 한미 해군 공동 정비 센터 구축, 미국산 LNG 도입 확대와 한국산 에너지 시스템 연계 등을 포함한 협상안을 선제적으로 제시해 이익의 교환 구조를 우리가 설계해야 한다.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마샬 군도를 보자.
이 나라는 미국과 자유연합협정(COFA)을 체결해 군사적 전략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활용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 국토는 작지만, 전략은 크다. 마샬 군도의 협상력은 국력의 함수가 아니다. 이는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트럼프2.0의 관세 전략은 단순한 보호무역이 아닌 전략적 협상의 포석이다. 우리가 이 게임에 응답자로 참여하면 손해는 필연이다. 이제는 게임의 규칙을 재설정하는 ‘제안자’가 되어야 한다. 협상은 숫자 싸움이 아니라 프레임 싸움이다. 우리가 먼저 문제를 재설정하고, 이익의 구조를 새롭게 짜고, 제안의 방향을 주도할 때 비로소 진짜 협상이 시작된다.
2025-05-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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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콜렉티브 임펙트로 청년과 함께 여는 산림 르네상스
대한민국 산림은 세계적인 치산녹화 성공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산은 여전히 등산로나 휴식 공간으로 익숙할 뿐, 그 무한한 잠재력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낡은 관념을 넘어, 산림자원의 경제적 가치와 더불어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창출하는 ‘사회적 산림’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보존을 넘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산림을 활용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혁신적인 접근이다.
최근 잇따른 산불 사태는 이러한 산림의 소중함과 체계적인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으며, 그 변화는 지역 사회에서도 감지된다. 특히, 부산의 사회혁신 분야에서는 미래 산림산업을 이끌어갈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기 위해 의미있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역의 사회혁신 기관들이 산림청과 한국임업진흥원의 협업으로 ‘청년 산림인재 육성을 위한 지원사업’을 운영하게 되며, 마침 5월에는 한국산림행정학회(회장 허용훈, 부경대교수)도 부산에서 개최된다.
세계적으로는 탄소중립, ESG, 생물다양성 등이 이미 글로벌 아젠더가 돼 산림의 가치가 증대되고 있다. 정부도 6차 산림기본계획을 통해 산림산업을 연평균 3%이상 성장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히, 부산은 풍부한 산림자원을 자랑하는 기장군을 비롯하여 인접한 울산, 경남 지역과 산림 생태계 및 산업적 측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광역적인 협력을 통해 더욱 큰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산림경영은 다양한 형태로 적용될 수 있으며 그 파급효과도 크다. 이와 같이 지역의 산림은 사회적 산림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치유, 복지, 관광, 교육, 헬스케어 등 다양한 분야로 융합될 수 있는 산림 컨텐츠의 개발 가능성이 무한하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의 먹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전문가나 소프트웨어를 운영할 수 있는 인재는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이제 대학, 기업, 비영리재단, 사회혁신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산림에 대한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협력하여 지속적인 사회변화를 만들어가는 전략적 접근 방식인 ‘콜렉티브 임펙트(Collective Impact)가 필요하다. 인재양성이라는 먼 길을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토의 63%를 차지하는 산림은 단순한 자연공간이 아닌, 부산과 동남권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자산이다. 산림을 활용한 새로운 가치창출로 지역 경제 활성화는 물론 지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산림 르네상스를 위해서는 청년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혁신적인 기술이 필수적이다. 스마트 임업 기술을 활용한 효율적인 산림 관리,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한 새로운 산림 서비스 개발 등 청년들의 참신한 시각은 부산 및 인접 지역 산림산업의 미래를 밝혀줄 것으로 확신한다.
잠재력은 깨우지 않으면 사장된다. 지역의 산림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당 10.2㎥에 불과했던 임목축적은 이제 170㎥을 넘어 20배가량 성장했다. 아직도 응답자의 75% 이상이 산림을 ’휴양과 레저 활동공간‘으로 인식하는 관념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올해의 산불과 같은 대재앙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산림은 혁신적으로 경영해야 할 우리의 소중한 자원이다. 이제 일상으로 마주하는 산림자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때다.
2025-05-1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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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전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러시아의 대표적 문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상징적인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이다’를 의역하면 행복한 가정은 부, 명예, 건강, 사랑, 배려 등 공통적인 특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비슷해 보이고, 불행한 각 가정은 서로 다른 부족한 요소로 인해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놀랍게도 이는 사회적 구성물인 가족이든 자연의 물리적 체계이든 시스템의 안정성과 취약성에 대한 보편적 진실과 유사하여 안전하려면 안전을 달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일반인에게 무질서도(無秩序度)로 알려져 있는 엔트로피(Entropy)는 우리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투입하지 않는 한 시스템은 무질서로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화재 감지기, 스프링클러, 방화문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능이 저하되어 정기적으로 유지 관리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시스템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소방시설의 정기적인 점검, 유지 관리 및 교육을 통해 시스템에 에너지를 주입하여 안전성이 저하되는 것을 방지해야 하는 이유이다. 전기공학에서 시상수(Timeconstant)는 시스템이 변화에 얼마나 빨리 반응하는지를 결정한다. 느린 반응은 중요한 순간에 실패를 의미한다. 화재감지기와 스프링클러가 화재를 감지하여 작동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면 이미 화재는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른다. 빠른 응답 속도와 높은 신뢰성을 가진 화재 감지 및 진압 시스템을 설치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엔트로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스템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처럼, 화재 안전은 그것을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투자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감소한다. 건물을 지을 당시 화재 감지기, 스프링클러 설비, 방화문과 같은 화재 안전 성능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장기적인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스템은 저하되거나 오작동할 수 있다. 정기적인 유지 관리, 점검, 시스템 업데이트는 물론 근무자·입주자 등에 대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교육훈련으로 화재 안전 성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것만이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화재 상황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능력이 약해져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지속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시상수가 감소하여 우리 눈으로는 그 옛날 일상이었던 형광등의 깜박임을 지금은 볼 수 없듯이, 화재 안전 또한 일회성 설정이 아닌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엔트로피에 대항하든, 시상수를 줄이든 화재 발생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지속적인 헌신이 요구된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예방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돈 문제로 넘어가면 우리는 종종 이 말을 망각하고 구실을 잡아 관성에 따른다.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안전한 부산’을 만들기 위해 당신은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2025-05-1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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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관광도시 부산의 보석, 황령산을 빚자
관광도시 70년, 부산은 글로벌 관광 거점도시가 되고 있을까? 정부가 지정한 첫 번째 ‘국제 관광도시’가 된 후 5년이 지난 지금, 부산시는 핵심 정책으로 글로벌 관광 거점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는 마치 쓰나미가 밀려오듯 여기저기 불편한 소리가 들려온다.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 자영업 위기, 청년 유출, 지역 불균형, 관광산업의 편중, 제조업 의존이 높은 산업 구조의 정체 등 어느 하나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의 딜레마처럼 어쩌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그 중 관광산업은 부산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한 축이다.
부산은 한국전쟁 이후 대표 피서지가 되며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전통적 관광도시가 되었다. 당연히 많은 관광객 덕에 자영업도 성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부산은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다시 관광을 세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수십 년의 대표 관광도시 명성을 위한 관광 특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쉽게도 여전히 천혜의 자연경관에 기댄 계절형 관광산업이 중심이 되고 있다. 부산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8월을 중심으로 약 4개월 정도에 집중적으로 몰리고 있다. 여름 한 철 특수에 가까운 관광객 방문은 글로벌 관광 거점도시 정책에 따른 관광 특화의 결과라 하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글로벌의 다른 관광 도시들은 이미 사계절 관광산업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천혜의 자연경관과 또 다른 관광자원들을 융합하고 있다.
주야간 관광객이 즐기는 사계절 관광산업이 되기 위해서는 천혜의 자연경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시를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즐거움, 추억, 경험 등의 오감을 자극하는 체험형 관광 콘텐츠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람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문화형 콘텐츠도 제공할 필요가 있다. 탈것, 만들 것, 경험 등이 중심인 체험형과 들을 것, 볼 것, 느낄 것 등이 중심인 문화형이 어우러져 복합적으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면 관광객이 밤과 낮 구분 없이 사계절 부산을 찾아 즐길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부산은 천혜의 자연경관에 의존하는 계절형 관광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은 그대로 보존할 때 빛나는 것이 있고 개발을 통해 그 가치가 더 높아지는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해상 케이블카, 해변열차, 광안대교 등은 자연경관을 활용하여 그 가치를 높인 관광자원을 개발한 좋은 사례일 것이다. 아쉬운 점은 부산의 대표적인 체험형·문화형 관광 콘텐츠가 이처럼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것이다.
최근 유명 미술관을 부산에 유치하고자 하는 것과 황령산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등의 노력이 한창이다. 특히 천혜의 자연경관을 잘 활용하여 그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한 황령산 개발은 체험형과 문화형 관광 콘텐츠를 동시에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시가 10년도 넘는 시간을 공들여 엄중히 검토하였다 한다. 세계적인 도시 어디에나 있는 ‘타워’ 하나가 제대로 없는 글로벌 관광 거점도시는 없다. 이참에 세계적인 친환경 ‘부산타워’를 부산도 자랑스럽게 가질 필요가 있겠다.
좋은 관광자원의 개발은 세계 곳곳으로부터 관광객을 불러들여 파생되는 경제효과도 크다. 부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300만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는 글로벌 관광 거점도시의 명성에 맞게 손님을 맞을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부산이 가지고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에 체험형과 문화형 관광 콘텐츠를 많이 개발해 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황령산이 부산의 중심에서 많은 것을 지켜왔듯이 이제는 황령산이 글로벌 관광도시 부산의 친환경 관광자원의 중심이 될 필요가 있겠다. 대한민국 대표 관광도시 부산의 보석인 황령산을 더욱 아름답게 빚을 때가 된 것이다.
2025-05-11 [1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