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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클래식 공짜 티켓
2016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처음 시행될 때 공연업계가 바짝 긴장했다. 그때만 해도 기업은 클래식, 오페라 등의 공연을 섭외하고 관람 수요까지 책임지는 일등 후원자였다. 기업이 공연 제작사나 기획사에 협찬금을 내면 그 대가로 초대권을 제공받았고, 이를 마케팅 및 영업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김영란법 대상자들(공무원, 사립학교 교원, 공공기관 임직원, 언론인 등)이 기업으로부터 일정 금액 이상의 초대권을 받으면 사실상 ‘뇌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서로가 조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기업들은 공연을 후원할 이유가 없어졌고, 공짜 표로 공연을 즐기는 수요가 줄었다.
긍정적인 효과도 없지 않았다. 초대권이 넘쳐날 땐 공연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는 공짜 티켓 고객들이 많았다. 이들이 공연장을 찾지 않으면 좋은 좌석이 빈 채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김영란법으로 ‘초대권 노쇼(No-Show)’가 원천 차단된 것이다.
요즘은 공연의 퀄리티만 보장되면 돈 아끼지 않고 지갑을 여는 열성 팬들이 크게 늘었다. 지명도 있는 아티스트의 공연은 티켓 예매 사이트를 오픈하면 수십 초 만에 매진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부산 최초의 클래식 전용 공연장인 ‘부산콘서트홀’의 내달 개관 공연도 인기 절정이다. 특히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나오는 공연은 일반 예매 20초 만에 완판됐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예매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부산콘서트홀의 운영기관은 부산시 산하 사업소인 ‘클래식부산’이다. 운영기관의 최고 책임자도 공연을 보지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클래식부산 측은 클래식 공연에 대한 일반인들의 접근 기회를 높이고, 공정한 공연문화 정착을 위해 개관 이후 열리는 모든 공연에 대해 초대권을 배부하지 않고, 온라인을 통해서만 티켓 예약을 진행하고 있다.
부산콘서트홀 운영주체인 부산시장 조차 공연을 못 보게 되자 ‘너무 원칙만 내세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총책임자인 부산시장이 현장에 와서 공연시설도 평가하고 시민들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권 없는 공정한 공연 문화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 압도적이다. 이제 누구라도 보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직접 예매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2025-05-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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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슬픈 캐시미어
5월 한낮이 한여름처럼 느껴진다. 서늘한 냉기가 몸속을 파고드는 겨울, 비단만큼 부드러우면서도, 거위털만큼이나 가볍고 따뜻한 캐시미어 머플러나 코트는 멋쟁이들의 필수 아이템이다.
인도 북부 고원인 카슈미르를 비롯해 티베트, 몽골, 이란 등의 고산지대에 사는 산양들은 추워지기 시작하면 거친 털 사이에 가늘고 보드라운 털이 자라고, 봄이 되면 빠진다. 이 털을 모아 직조한 것이 캐시미어라고 한다. 생산량에 한계가 있어 ‘섬유의 보석’으로도 불린다. 캐시미어의 고향이 카슈미르라는 사실이 최근 새삼 주목받는다.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세계의 지붕, 설산과 호수 주변을 노닐던 산양들의 평화로운 모습과는 정반대로 이슬람과 힌두라는 다른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이해가 맞물리면서 테러에 이은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한 이후 양국은 카슈미르도 6:4로 분할해 서로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최근까지도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22일(현지시간)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무장 테러 단체의 총기 난사로 인도 여행객 등 28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이번 사태가 빚어졌다. 확전을 거듭하며 양국 전투기 125대가 뜨고 미사일, 무인 폭격기까지 동원된 국지전이 벌어졌다. 공중 전투 규모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라는 평가도 있다.
사상자 수백 명이 나오고, 양국이 보유한 무기의 실제 전투 능력이 드러나고 있다. 파키스탄이 보유한 F16급 전투기인 중국산 J-10C가 인도의 프랑스산 최신예 라팔 전투기를 격추했다는 뉴스에 세계 방산업계와 군사 전문가들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중국 방위·항공 산업 능력에 놀라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의 중재로 휴전 합의가 있었지만 총성이 완전히 그치지 않았고, 언제 다시 불붙을지 알 수가 없다.
이념이든 종교든, 지향이 다른 사람들과 별 문제 없이 공존하던 사회가 어떤 때는 갈가리 찢긴다. 분열과 갈등의 씨앗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제국주의 패권 국가든, 공동체 내부의 모순을 외부의 적을 통해 눈가림하려는 부패한 지도자든, 불씨를 댕기는 세력들로 인해 지금도 혐오와 전쟁은 그칠 줄 모른다. 우리도 분단과 동족 상잔의 비극을 80년 가까이 안고 있다. 산양이 여유롭게 풀 뜯는 카슈미르,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는 비무장지대, 그날은 언제쯤 가능할까.
이호진 선임기자 jiny@busan.com
2025-05-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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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뽀빠이' 그를 보내며
주걱턱에 닻 모양 문신을 한 우람한 팔뚝, 입에 문 파이프, 세일러복 차림의 그는 시금치만 먹으면 힘이 솟고 근육이 불끈불끈 커졌다. 만화 속에 살았지만 아이들에게는 누구보다 현실감 있는 영웅이었다. 미국 만화 캐릭터 ‘뽀빠이’(Popeye) 이야기다.
뽀빠이는 1929년 1월 미국의 한 신문에 연재된 한 줄짜리 만화 ‘팀블극장’을 통해 비중 없는 조연으로 처음 등장했다. “도와줘요, 뽀빠이!” 위기에 처한 올리브의 외침에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나타나 악당 브루터스를 물리쳤다. 이렇게 시금치만 먹으면 엄청난 힘이 솟아 악당을 물리치는 뽀빠이는 등장 2년 만에 주인공으로 승격한다. 만화 속에서 그는 연인 올리브를 지켜내며 인기를 끌었고, 자주 내뱉던 “나는 나야, 그게 나의 전부야”라는 대사는 당시 참는 데 익숙했던 전 세계 소시민들의 억눌린 감정을 대변했다.
1933년에는 뽀빠이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만화영화 ‘뱃사람 뽀빠이’가 제작돼 세계 각국의 TV를 통해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980년에는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뽀빠이를 연기한 뮤지컬 영화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는 뽀빠이 하면 추억의 과자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 1972년 2월 첫선을 보인 삼양식품의 ‘별뽀빠이’다. 당시로서는 꽤 낯선 형태의 과자로 라면은 끓여 먹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달콤하고 고소한 과자로 재탄생했으며, 별사탕이 함께 들어 있어 골라 먹는 재미도 더했다.
이 만화 속 영웅은 시간이 흐른 뒤 한국에서 또 하나의 이름을 얻는다. 바로 뽀빠이 이상용이다. 그는 1975년부터 9년간 KBS 어린이 노래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의 진행을 맡으며, 당시 만화 캐릭터 뽀빠이의 인기에 힘입어 뽀빠이 아저씨라는 별칭을 얻는다. 단신임에도 굵은 팔뚝과 당당한 체격으로 아이들 앞에 선 그는 세일러복에 수병 모자를 쓰고 한 팔로 아이 몇 명을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으로 TV 앞의 어린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됐다. 그의 별명처럼 그는 진짜 뽀빠이였다. 특히 1980년대부터는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 수백 명에게 수술비를 지원하며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도 했다. 그 시절 뽀빠이 이상용은 아이들을 지켜주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어른이자 든든한 수호자였다. 그가 최근 세상을 떠났다.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어릴 적 과자봉지 속에서 골라 먹던 별사탕처럼, 그의 존재는 소중한 추억이 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5-05-11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