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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AG, 쎄쎄쎄, 추석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AG)에서 재미난 장면이 포착됐다. 26일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맞붙은 세팍타크로 경기. 선취점을 따낸 남자 선수들이 둥글게 모여 양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영판 우리 아이들 놀이 ‘쎄쎄쎄’가 아닌가. 한국 팀만 그런 게 아니고 이 종목에 출전한 다른 나라 선수들도 그랬다. 점수를 따거나 결의를 다질 때마다 유사한 세리모니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공중 발차기 기술은 마치 소림무술처럼 화려하지만, 이 제스처만큼은 귀여운 구석이 있다.
문득 어린 시절의 놀이 ‘쎄쎄쎄’를 떠올려 본다. 주로 여자아이들이 즐겼던 듯한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손바닥과 손등을 부딪치며 구호와 장단을 맞춘다. ‘아침 바람 찬 바람에’로 시작해 ‘가위바위보’로 끝나는 노래와 함께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이긴 사람은 그 뒷덜미에 손끝 하나를 짚었다. 그러곤 “어느 손가락인지 맞혀 봐” 하고 깔깔거렸던 기억. 한국인 귀에 익숙한 이 노래가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2020년 한국민속학회는 ‘쎄쎄쎄’ 놀이가 일본의 손뼉치기 놀이에서 부르는 노래와 선율적 공통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쎄쎄쎄’가 각종 노래나 놀이를 시작할 때 장단을 맞추려는 자연발생적 언어가 아닐까 하는 반론도 있다. 많은 나라에서 비슷한 소리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유사한 놀이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앞부분이 일본말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쎄쎄쎄’는 물론 고무줄놀이와 비석치기는 아프리카·남미에서도 발견된다. 문화의 전파가 쉽지 않은 대륙 사이에서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올까. 문화는 상호침투를 기본 속성으로 한다. 아주 옛날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문화는 서로 섞이고 얽혔을 것이다.
여하튼 내일은 추석이다. 우리 조상들은 윷놀이, 제기차기, 강강술래, 줄다리기 등을 하며 명절을 즐겼다. 전통 놀이가 현대에도 능히 통할 국제적 콘텐츠라는 건 이미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증명된 바 있다. 때마침 부산 곳곳에서 윷놀이, 투호, 제기차기, 딱지치기 같은 다양한 민속놀이 체험 행사가 열린다. 부산과학관, 부산종합버스터미널, 정관박물관, 송도해상케이블카 스카이파크 광장, 기장 롯데월드 등등. 모처럼의 황금연휴를 맞아 온 가족이 함께 즐길 기회다. 아참, 항저우 AG에서 선전 중인 한국 대표팀 경기도 연휴 내내 펼쳐진다. 〈부산일보〉 독자님들, 복된 한가위 맞으시길.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09-2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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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K-9비행장과 추모
부산 해운대 재송동~우동 일대 센텀시티 땅의 역사는 기구하다. 전시컨벤션센터인 벡스코와 부산영화의전당, 신세계백화점 등과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수영강 주변은 조선시대에는 경남좌수군절도사영의 수군 군함이 정박했던 곳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기업인들이 9홀 규모의 골프장을 조성했다. 1940년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골프장은 대륙 침략을 위한 일본육군48항공지구사령부 예하 병참기지 비행장으로 바뀐다. 일본 육군은 학생과 노약자까지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해 소나무를 벌채하고, 활주로를 닦았다. 비행장 인근에는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 대원들이 주둔하면서 주민들에게 패악질이 대단했다고 한다.
비행장은 1950년 6·25전쟁 직후 국군 방어선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낙동강 교두보가 구축됐을 때 미 제5공군18전투폭격비행단 소속 B-26 인베이더(Invader) 경폭격기의 발진기지로 사용돼 북한군 폭격 임무를 수행했다. 유엔 공군들이 F-51 무스탕, F-86 세이버 전투기 등 100여 대가 지상공격임무도 담당했다. 또한, 탄약 등 전쟁 보급품이 군 수송기로 수영비행장에 도착한 뒤 열차편으로 전방의 탄약 보급소로 운송되는 병참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군은 수영 비행장에 대해 ‘K-9 동부산 공군기지’(East Busan Base RKPP) 코드명을 부여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의 군사 공항, 비행장에 K로 시작하는 코드명을 붙였다. 대구국제공항을 K-2, 성남비행장을 K-16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종전 70년이 지난 지금 K-9 비행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53년 1월 K-9 비행장에서 임무 수행을 위해 이륙 직후 해상으로 추락한 미 제5공군 소속 B-26 폭격기 1대와 조종사 3명의 유해를 찾는 작전이 한미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미군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수중조사팀은 해운대 앞바다 수심 5~25m를 샅샅이 훑고 있다고 한다. ‘한 명의 병사도 버려두지 않는다’라면서 조국을 위해 희생한 군인의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느끼게 한다.
70년 전 고향을 떠나, 해운대 차가운 바다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명복을 빈다.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꼭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싶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남쪽 끝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2023-09-2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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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연명의료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경우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자신의 임종에 대비해 연명의료와 호스피스에 대한 의향을 미리 작성해 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적힌 주요 내용이다. 임종 과정이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연명의료 중단에 서명하면 임종 과정에 놓였을 때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중단할 수 있다.
임종 과정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이 곧 200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존엄사법’, ‘웰다잉법’으로 불리는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2018년 2월 4일 처음 시행된 지 5년 만이다.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환자가 임종 전까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는다. 2018∼2020년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만성 중증질환으로 사망한 222명의 임종 전 치료를 분석한 결과, 말기 환자 10명 중 4명이 임종 24시간 내에도 중증 치료를 받았다. 임종 직전까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 투석에 의지했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연명치료를 했던 경험이 있다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런 서약을 했는지 바로 이해할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에 따라 실제로 연명의료가 중단된 건수는 8월 말까지 30만 3350건으로 5년 만에 30만 건을 넘겼다고 한다. 19세 이상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누리집(www.lst.go.kr)에 나온 전국 656개 지정 등록기관을 찾아 충분한 설명을 들은 후 서명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추계에 약간 의외의 조사 결과가 눈에 띈다. 지난 8월 말 기준 등록 건수 194만 1231건 가운데 여성이 131만 9812명으로 68%를 차지하고, 남성은 62만 1419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성별에 따라 크게 다를 리가 없는데 이 차이는 대체 어떻게 발생했는지 궁금해진다. 주변에 물어보니 “여성들은 돌봄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 정작 자신이 병에 걸렸을 때 적절한 돌봄을 받으리란 기대가 없어서 그렇다” 혹은 “딸과 며느리가 간병하면서 맞닥트린 현실은 아들과 사위보다 더욱 힘들다”라고 답을 했다. 돌봄 대상이 생기면 여성은 나의 일로 여기지만, 남성은 간병인의 일로 생각한다는 대답도 가슴에 와닿았다. 남자의 계절이라는 가을이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된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9-2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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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디지털 교육의 역설
요즘 아이들 컴퓨터 자판 치는 모습이 가관이다. 양손의 검지만으로 띄엄띄엄 겨우 쳐 낸다. 이른바 독수리 타법이다. 과제를 이메일로 제출하라고 하면 당혹스러워하는 아이가 한둘이 아니다. 문서를 쓸 줄도, 쓴 문서를 이메일로 보낼 줄도 모르는 게다. “요즘 같은 스마트한 세상에 무슨 소리!”라고 하겠지만,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자주 보는 모습이라고 한다. 개인용 컴퓨터(PC) 대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같은 모바일 기기가 디지털 환경의 대세로 자리 잡은 탓이다. 일일이 자판을 두드려야 하는 PC와는 달리 모바일 기기는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다 해결된다. 안 그래도 연필 잡을 일 없는데 이제는 자판 칠 일마저 사라진 세상이 됐으니, 아이들의 독수리 타법을 두고 뭐라 할 일은 아니다.
일선 학교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한 게 1990년대 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 교육 환경은 그때와는 천양지차다. 이제는 모바일과 음성인식을 넘어 챗GPT 같은 인공지능(AI)에까지 나아갔다. 변화 속도로 치면 우리나라가 단연 으뜸이다. 교육부가 2025년부터 초·중·고에 디지털 교과서를 본격 도입키로 한 게 그 예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디지털 교과서 도입을 밀어붙이는 건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교육부가 말하는 디지털 교과서의 장점은 많다. 학생별 맞춤형 학습은 물론, AI에게 보조 교사 역할을 맡기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스웨덴이 우리의 그런 모습과는 180도 다른 조치를 취했다. 유치원 등에서의 디지털 기기 활용을 전면 중단하고 일선 학교에서도 종이책을 읽고 직접 글을 쓰는 교육을 강화하는 방책을 발표한 것이다. 스웨덴 정부는 특히 학교 도서 구입을 위해 해마다 700억~800억 원의 예산을 별도로 투입키로 했다. 스웨덴만이 아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핀란드 등도 수업 중 디지털 기기 사용을 제한하는 조치에 돌입했다.
우리의 선택이 옳은가 저들의 조치가 바람직한가. 혼란스러운데, 미국의 인지과학자 매리언 울프의 주장이 신경 쓰인다. 디지털 세대에 진입하면서 현대인들의 뇌가 변했다는 주장이다. 매 순간 달라지는 정보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환경에 적응하려다 보니 뇌는 항상 긴장해 있고, 그런 정보를 빠르게 핵심만 파악해 활용해야 하니 깊고 긴 호흡으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게다. 요즘 아이들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을 겪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디지털 교육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
2023-09-2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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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짝퉁 카페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이르는 ‘짝퉁’은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와 있을 만큼 일상에 깊이 스며든 용어다. 태생적으로 은밀하고 값싼 싸구려의 느낌을 지닌 짝퉁은 우아하고 값비싼 명품인 정품의 존재를 자신의 근거로 삼는다. 정품이 있어야 짝퉁도 있는 셈이다. 짝퉁 하나 없는 정품은 진정한 명품이 아니라는 우스갯소리마저 있는 것을 보면 둘 사이의 묘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짝퉁을 만들어 파는 일은 엄연한 불법 행위다. 많은 정력과 시간을 들인 정품의 명성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정품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면서 그 시장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짝퉁은 기생성으로 인해 ‘박멸’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은밀히 자신의 내성을 키워간다. 명품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짝퉁의 내성 강화에 언제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준다. 짝퉁과 인간 욕망의 공생 관계가 파탄으로 끝나지 않는 한, 짝퉁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이래서 나온다.
이 때문인지 짝퉁의 성행이 기업에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준다는 논문도 나온 적이 있다. 미국 콜로라도대학 리드경영대학원의 데이비드 발킨 교수 등이 발표한 논문인데, 짝퉁 사용자의 증가가 정품의 가치를 높여 나중에 정품의 구매 증가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정말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정품 소유의 열망이 짝퉁을 있게 하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끈질긴 짝퉁의 존재에 맞서 이를 없애려는 제도권의 칼날도 갈수록 더 번득인다. 최근 부산 기장군의 유명 카페를 모방해 만든 울산의 한 카페에 대해 법원이 내린 전면 철거 명령이 화제다. 이 판결은 건축 저작권 관련 소송에서 철거 명령이 내려진 국내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이미 많은 돈이 투입돼 완공된 건물을 법원이 설마 어찌하랴 싶었지만, 법원은 5000만 원의 배상금과 함께 철거 명령을 내렸다. 다소 안이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울산 건축주에겐 날벼락이다. 약 4년간이나 이어진 긴 소송 기간을 보건대, 재판부도 많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 판결로 해당 짝퉁 건물은 철퇴를 맞았지만, 현실에선 짝퉁의 출현이 유·무형의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이제는 뉴스나 정치와 같은 분야에도 짝퉁의 그림자가 설쳐 댄다. 문제는 가공할 짝퉁을 오직 법적 제재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게 우리의 딜레마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
2023-09-2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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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말뿐인 국제평화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9월 19일 남북이 맺은 군사합의 폐기 문제를 둘러싼 여야 간 논란이 뜨겁다. 9·19군사합의는 당시 남북 정상이 비핵화와 경제협력을 목적으로 발표한 평양공동선언을 계기로 체결된 부속 합의서다. 접경지대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려는 다양한 군축 조치가 담겨 있다.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은 군사합의가 남북 무력 충돌을 방지하는 안전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지난 19일 서울에서 열린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 전 대통령 역시 군사합의의 효과를 강조했다. 2010~2017년 북한의 대남 국지 도발이 무려 237회였으나 군사합의 체결 이후 5년간 17회로 줄어든 까닭이다. 하지만 국방부와 국민의힘은 군사합의로 우리 국방력에 제약이 생긴 반면 북한은 여전히 합의를 위반한 도발을 일삼고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에 주력해 합의를 빈껍데기로 만들었다며 합의 효력을 정지하자는 입장이다.
북핵 위협이 고조되는 건 핵무장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 제재가 먹혀들지 않아서다. 이는 국제평화 최고 의결기구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감싸고도는 영향이 크다. 중국이 같은 상임이사국인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사사건건 마찰을 빚는 데다 러시아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유엔 안보리가 유명무실해진 탓도 있다. 초강대국들이 평화라는 허울 좋은 말을 앞세우면서도 속으론 자국 이익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려는 의도가 안보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특히 러시아는 최근 북러 정상회담을 갖고 장기화한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요한 무기 도입을 위해 군사협력을 논의했다. 이에 따른 무기 거래나 핵·미사일 기술의 북한 이전은 그동안 10차례 이뤄진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에 위배된다. 19일에는 영토 분쟁이 있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중재자 역할을 하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골몰하는 새 또다시 무력 충돌해 확전이 우려된다. 유엔이 1982년부터 매년 9월 21일 기념하고 있는 ‘국제평화의 날’을 제정한 취지가 무색할 지경이다.
우리나라는 내년부터 2년 임기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한다.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올라선 게다. 안보리가 제 기능을 잃은 상황에서 국제평화를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한국에 요구된다. 이와 함께 북핵에 단호한 원칙으로 대응하면서도 중국·러시아와의 외교 관계에는 보다 유연한 대처가 필요해 보인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09-2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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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스마트 변기
조선시대 임금님은 똥을 누는 것이 아니라 매화꽃을 피웠다. 임금님의 대변을 매화라고 미화한 까닭이다. 왕의 대소변을 ‘매화 열매와 비’, 즉 매우(梅雨)로도 불렀다. 그래서 임금님 변기는 ‘매화틀’이 됐다. 궁중에 매화틀을 담당하는 나인(지밀나인)까지 있을 정도였다. 임금님이 변을 보면 어의가 직접 색깔 등 상태를 관찰했다. 왕의 변을 통해 건강을 살피고 식단 조절까지 했던 것이다.
프랑스 절대 왕정의 상징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하지만 정작 화장실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화장실을 불결한 공간으로 여겨 만들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신 자신은 전용 변기를 갖고 다녔는데 그 수가 26개에 달했다. 전용 변기를 준비하지 못한 귀족들은 정원에서 볼일을 해결했다. 귀족 여성들의 드레스가 레이스로 겹겹이 둘러싸인 것도 용변을 위한 디자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향수 산업이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대적 의미의 수세식 변기는 1596년 영국의 존 해링턴이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발명했다. 그 이름이 ‘Water closet’이었는데 W.C의 유래다.
변을 보는 일은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 영역이다. 2005년 개봉한 영화 ‘아일랜드’에는 복제 인간이 볼일을 보면 ‘나트륨 과다 섭취’ 같은 분석 결과가 뜨고 이에 따라 건강 상태를 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공개적 개인 용변 정보 수집이 여러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대목이다. 2018년 6월 북미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이 묵었던 싱가포르 호텔에 북한 당국이 전용 이동식 변기까지 가져간 것으로 알려진다. 최고 지도자 동지의 건강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는 이야기다.
한국인 과학자가 ‘스마트 변기’ 개발로 올해의 ‘이그노벨상’을 수상했다.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박승민 박사는 대소변 색깔과 양 등을 분석해 개인의 건강 상태나 코로나19 등 감염병 여부까지 파악할 수 있는 변기로 공중보건 분야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지문처럼 사람마다 다른 항문 모양으로 신원 파악도 가능하다. 가장 개인적 공간으로 여겨지는 화장실은 우리 건강의 조용한 수호자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박 박사의 설명이다. 국내 비데 업체와 상품화도 진행 중이라고 하니 머지않아 일상 속 현실이 될 전망이다. 건강검진을 위해 채변 봉투에 변을 담는 일도 이젠 추억 속으로 사라질 듯하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
2023-09-1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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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칼럼] ‘동백’은 지속 가능할까
독일에서 시작된 ‘9유로 티켓’이 한국의 대중교통 요금 정책에 ‘나비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9유로 티켓(1만 2000원)으로 한 달간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하는 이 정책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올 5월부터는 한 달 49유로(7만 원)에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으로 바뀌었는데, 재정 부담을 줄여 장기적인 제도로 안착시키기 위해서였다. 티켓 판매 첫날 독일 철도 서버가 다운될 정도였다니 대중교통 이용 확대는 물론 기후 보호 효과로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알고 보니 지난해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자동차 유류세 인하 요구가 터져 나오자, 중도우파인 자민당 소속 교통장관이 9유로 티켓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것을 연정 파트너인 집권당 사민당과 중도좌파인 녹색당이 받아들여 탄생한 것이다. 정쟁만 넘치고 협치는 사라진 우리의 시선으로 볼 때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부산시장 선거에서 정의당 김영진 시장 후보가 처음으로 ‘월 1만 원으로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을 1호 공약으로 내걸어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정의당은 내년 총선에서도 마을버스 등 ‘대중교통 요금 무료화’를 대표 공약으로 내걸고 뛰고 있다. 부산시가 전국 최초로 대중교통 통합할인제인 ‘동백패스’를 내놓은 것도 독일의 성공 사례를 따르려는 움직임에서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부산보다 뒤늦게 내놓은 ‘기후동행카드’에 더 쏠리고 있는 것 같다. 내년부터 한 달에 6만 5000원으로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다. 서울시민들의 호응이 상당히 좋고, 같은 교통생활권인 경기와 인천이 동참할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9유로 티켓의 취지를 그대로 가져온 카드 이름이나 49유로 티켓과 거의 비슷한 요금까지 짝퉁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많은 이들이 반기니 잘하는 일이다.
반면에 부산시가 전국 최초로 시도한 동백패스는 시민단체·언론·야당으로부터 연일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일단 동백패스는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대한 따가운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꼼수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부산의 시내버스·도시철도 요금이 다음 달 6일부터 인상되어 전국 7대 특별·광역시 가운데 가장 비싸진다니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발이 거셀 것 같으니 월 4만 5000원 이상 대중교통 요금을 사용하면 매달 최대 4만 5000원을 돌려주는 제도를 급하게 들이민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볼 근거가 있다. 동백전 카드는 금융기관 3곳에서 발급하지만, 동백패스는 현재 부산은행 동백전 카드로만 환급할 수 있다. 동백패스는 동백전 후불교통카드로만 사용할 수 있어 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는 신용 약자와 청소년은 아예 혜택을 볼 수 없다. 보건복지부가 부산시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라는 권고를 했지만 부산시는 뭐가 급했는지 무시하고 바로 시행에 나선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부산의 대중교통 이용자 중에서 53%는 월 4만 5000원 이하를 사용해 절반 이상이 사실상 동백패스의 혜택을 전혀 못 받는 셈이다.
두 번째는 ‘동백’에 믿음이 잘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역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2020년에 도입된 동백전은 예산 소진으로 캐시백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고, 캐시백 요율도 수시로 바뀌었다. 동백패스 안내문을 꼼꼼하게 보면 ‘본 사업은 부산시 정책에 의거 시행 시기나 혜택 등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또 동백패스 환급 기준에는 ‘매월 부산시 정책에 따라 환급 구간이 변경될 수 있다’라고 나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예산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고, 동백전처럼 환급액을 축소하다 나중에는 없애 버리려고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특히 정부가 내년 7월부터 도입하는 ‘K패스’가 큰 변수다. K패스는 선·후불식 카드에 모두 적용되고, 청년 30%·저소득층 53% 적립으로 더 많은 혜택이 있다. 부산시는 동백패스와 K패스를 합쳐 활용도를 높혀 보겠다면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 정부정책과 거의 유사한 교통비 환급 제도를 위해 부산시가 1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써야 할까.
올해 세수 펑크가 60조 원에 가깝고 이에 따라 지방교부세는 23조 원이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지방교부세를 받지 않는 부자 지자체인 서울과 경기도 일원은 상관이 없지만 가난한 지자체들은 직격탄을 맞게 생겼다. 독일 함부르크 주정부는 기초생활 대상자에 한해 49유로 티켓에서 24.8유로를 할인해 준다고 한다. K패스와 겨루기보다 부산시가 K패스조차 부담스러운 취약계층이나 청년층에 지원금을 더 지급하는 방식 등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싶다. 아직 시행 초기인 동백패스가 예산 낭비는 없으면서도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을 높일 수 있도록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감시가 필요한 때이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
2023-09-1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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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담배 성분 공개
니코틴 없는 전자담배는 ‘담배’일까 아닐까. 담배사업법상 ‘담배 유사 제품’으로 분류되므로 담배는 아니라는 게 답이다. 따라서 실내 흡연의 규제 대상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아이돌 그룹인 엑소의 멤버 디오가 대기실에서 무니코틴 전자담배를 피워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무니코틴 제품은 금연구역 흡연 때 ‘무니코틴’을 소명해야 한다. 하지만 니코틴 없는 전자담배를 사용했다는 소속사 측의 소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당 제품의 성분 설명이나 안내서를 통해 무니코틴을 입증할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담배에는 잘 알려진 니코틴이나 타르 말고도 독성 물질이 많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연초 담배의 연기는 70여 종의 발암 물질, 7000여 종의 화학 물질을 내뿜는다. 니켈, 벤젠, 포름알데히드, 다환방향족 탄화수소, 니트로사민, 염화비닐, 비소, 카드뮴 등이 그런 발암 물질의 대표적인 이름들이다. 전자담배는 어떨까. 2022년 식품의약품안전처 조사 결과, 국내 온라인 쇼핑몰에 유통되는 유사 담배 21개 종 가운데 20개 제품에서 발암 물질 등 유해 성분이 검출됐다. 전자담배는 일반 담배보다 덜 해롭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지만 최근 국내외 연구 결과는 그 불안전성과 부작용을 끊임없이 경고하는 형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담배의 유해 성분을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 제조사가 담뱃갑에 표시하는 니코틴과 타르의 함량, 그리고 6가지 발암 물질의 이름이 전부다. 일반 담배가 아닌 전자담배엔 이런 표시 의무마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 캐나다 등 해외 주요국이 담배 성분 정보를 철저하게 공개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보건당국 홈페이지는 유해 성분이 사람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소상히 알린다. 화장품과 의약품도 전부 다 하는 성분 공개가 담배 영역에서만큼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게 바로 한국이다. 관련 법안들이 10년 전부터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이런 와중에 최근 정부의 관련 부처들이 규제 방안에 대한 큰 틀의 합의를 이뤄 법안 처리가 급물살을 타게 됐다는 소식이다. 담배 회사가 유해 성분 검사를 의뢰하고 그 결과를 식약처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담배의 유해 성분 공개는 국민의 건강, 알 권리와 직결된 문제라는 점에서 국가의 의무요 도리다. 이제 입법이 성공할 수 있도록 국회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09-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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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재난지원금 환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했다. 모든 게 한가위 때만큼 풍성해서 편안하면 좋겠다는 말이다. 추석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물가는 오르고 소비심리는 위축되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있다. 이럴 때 정부가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지급한 재난지원금까지 환수하려고 한다니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 재난지원금은 7차례 제공되어 혹독한 시기를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상공인·자영업자에게 지급한 일부 재난지원금에 대해서만 환수 계획을 추진한다니 형평성에도 맞는지 모르겠다.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국회에서 “코로나 유행 시기 소상공인·자영업자에게 지급한 새희망자금과 버팀목자금은 지급 당시 공고문에 사후 환수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며 일부 재난지원금에 대한 환수 계획을 밝혔다. 이 장관은 “코로나 기간이 길고 경기 상황이 좋지 않아 그동안 환수를 미룬 면도 있다. 구체적으로 대상자와 금액에 대해 산정하고 법률에 근거해 절차를 준비 중이다. 빠른 시간 내에 구체적 환수 계획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지급된 새희망자금은 251만 명에 2조 8000억 원, 버팀목자금은 301만 명에 4조 3000억 원이다.
이들 두 자금은 코로나 확산으로 매출이 감소한 소상공인과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에게 지급됐다. 음식점, 뷔페, 제과점, 카페, 노래연습장, 단란주점, 감성주점, 헌팅포차, 학원, 독서실, PC방, 실내체육시설 등이 혜택을 받았다. 무엇이든 줬다가 다시 뺏아 가면 기분이 나쁜 법이다. 재난지원금 환수도 마찬가지다. 이정식 중소상인살리기협회 회장은 “3년 4개월간의 코로나로 소상공인들은 폐업조차 어려울 정도의 위기에 내몰렸고, 지금도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 와중에 재난지원금을 환수하겠다고 나섰으니 정부의 빈 곳간을 소상공인의 빚으로 채우려는 것이다”라고 반대했다.
재난지원금 환수는 역대급 세수 부족 사태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내년에 정부가 감면하는 세금 규모가 역대 최대 수준이고, 그것도 대기업에 집중되었다는 소식은 또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소비 위축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이들이 소상공인이다. 실질소득 감소에 따른 소비 위축이 나타나고 있는 시기에 재난지원금 환수를 한다면 경제에 역행하는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재난지원금을 환수할 때 하더라도 지금은 기간을 연장하는 게 옳다.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
2023-09-1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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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인공증식 산호 방류
수많은 생명체가 공존하며 살고 있는 지구의 생태계가 기후변화 등으로 위협에 처한 상황은 바닷속이라고 다르지 않다. 급속한 해수 온도 상승과 인간에 의한 오염 등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기는 오히려 지상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바다 생태계의 밑바닥에서 해양 생물의 서식지 역할을 하는 산호초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한다. 해수 온도 상승 등으로 산호초가 하얗게 말라 죽는 ‘바다의 사막화 현상(백화 현상)’이 태평양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추세라면 2050년까지 세계 산호초 군락의 최대 90%가 사라질 수 있다고 유엔은 경고한다. 해양 생물의 약 32%가 서식해 생물 다양성의 보고로 불리는 산호초가 만약 사멸된다면 어떻게 될까. 많은 해양 생물도 덩달아 사라지면서 바다 생태계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것은 자명하다.
이처럼 사라져가는 산호초 보호를 위해서는 인간이 유발한 해수 온도의 상승을 막는 게 근본적인 방안이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이 방안의 실현을 기다리기엔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근본적인 방안의 실현과 병행해 산호초의 인공적인 보호·보존, 복원을 위한 조처를 당장 서둘러야 할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닷속 산호초의 보존과 복원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 14일 우리나라 제주도 해역에서 진행됐다. 해양수산부가 세계 최초로 유성생식 기술을 적용해 지난해 인공증식에 성공한 산호인 ‘밤수지맨드라미’ 약 300개체를 서귀포시 문섬 주변 해역에 방류한 것이다. 제주도 문섬 해역은 밤수지맨드라미를 비롯한 다양한 산호류가 군락을 이루는 서식처였지만, 최근 갈수록 줄면서 정부가 2002년부터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잘 익은 밤송이를 닮았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진 밤수지맨드라미 산호의 방류는 문섬 주변 해역의 산호류 복원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특히 유성생식 기술을 이용한 복원 기법은 산호가 바닷속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하고 유전적 다양성까지 훼손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하니, 앞으로 다른 산호류 복원에 거는 기대도 크다.
‘바다의 꽃’, ‘물꽃’으로 불리는 산호가 바다 생태계를 통해 인간의 삶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산호의 보호와 보존은 결국 인간 스스로 미래 생존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
2023-09-1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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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거북이열차 태양호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건설된 북한 철도의 가장 큰 특징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중국, 러시아와 국제 철도 운영이다. 신의주-단둥, 남양-도문, 만포-집안, 두만강-하산 등 4개 국제 노선이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와 무기 거래를 위해 중무장한 방탄 열차인 태양호를 타고 간 총 781km의 북한 내 최장 노선인 평라선은 평양을 기점으로 북부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나진을 거쳐 러시아 하산을 통해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연결된다.
김정은 일가의 열차 사랑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모양새다. 김일성 주석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선물했던 1호 열차로 평양~모스크바, 평양~중국~베트남을 방문한 데 이어, 김정일 위원장도 2001년 7·8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모스크바를 24일에 걸쳐 오가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당시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밟았던 길을 따라 러시아 땅을 밟아야 한다”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3대째인 김정은 위원장도 이번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위해서 평양~나진~두만강~러시아 하산~스보보드니까지 2300km를 열차로 이동했다. 할아버지와 비슷한 행보로 정통성과 존재감을 과시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김 씨 일가의 열차 사랑에 비해 북한 철도망은 해방 이후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지지 못해 노후화가 심각하다고 한다. 2018년 남북 공동조사단에 의하면 열차 운행 속도가 시속 30km 내외로 밝혀졌다. 한국의 KTX가 아닌 무궁화호 속도가 70~85km인 점과 비교하면 거북이 수준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13일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두 번째 북러정상회담을 벌였다. 이번 회담에서 러시아는 북한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침공에 사용할 탄약 등을 대량으로 제공받고, 북한은 정찰위성, 핵탄두 및 핵추진 잠수함과 관련한 군사 기술과 부품을 대가로 받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생전에 “철도는 인체에서 혈액 순환”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정상국가라면 시속 30km 동맥경화와 같은 거북이 열차로 러시아를 찾아가 협상할 것이 핵무기 기술뿐일까. 북한~중국~한국~러시아를 경유하는 대륙연결화물수송망 등 민생과 경제 도약을 위한 개혁·개방은 왜 안중에도 없을까. 세계 최빈국인 북한에 무기를 구걸하는 초강대국 러시아의 처지도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옛말에 ‘가재는 게 편이고, 검둥개는 돼지 편’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09-1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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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랩그로운 다이아몬드
사람을 웃고 울리는 데 다이아몬드를 따라올 보석이 없다. 그 자체로는 순수 탄소 덩어리일 뿐인데도 찬란한 광채를 발하며 영혼을 홀린다. 귀해서 비싸고 그래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탓에 부와 명예, 권력을 대변한다. 남녀 간에는 변치 않는 사랑의 증표이면서도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처럼 배신의 아이콘 역할도 한다.
‘블러드(blood·피) 다이아몬드’라는 말도 있다. 지금 유통되는 천연 다이아몬드는 지구촌 어느 곳의 힘없는 누군가가 피눈물로 캐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수년 전 매스컴을 통해 알려져 충격을 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참상이 그 예다. 10여 년째 내전 중인 이곳에선 수많은 노동자들이 다이아몬드 채굴 현장에 내몰려 혹독한 고통을 겪는다. 또 그렇게 생산된 다이아몬드는 살육의 전쟁을 치르기 위한 비용으로 쓰인다. 다이아몬드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을 불러오는 사악한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보석의 황제’라는 다이아몬드의 위상 때문인데,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지구에 엄청난 규모의 다이아몬드가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게 그 하나다. MIT 등이 참여한 연구진에 따르면, 매장량이 무려 1000조 톤이다. 흔해빠진 광물은 더 이상 보석이 아니다.
거기에 치명적인 결정타까지 나왔다. 바로 랩그로운(lab grown) 다이아몬드다. 연구실(lab)에서 자란(grown) 다이아몬드! 고온·고압의 특수한 환경을 통해 다이아몬드 씨앗을 만든 뒤 이를 키워 나가는 원리다. 기존 모조 다이아몬드와는 차원을 달리 한다. 전문 감정사들이 현미경으로 봐도 차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천연 다이아몬드와 물리적·화학적·광학적 특성이 똑같다. 무엇보다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천연 다이아몬드가 1캐럿 크기가 되려면 수억 년이 걸리지만 랩그로운 다이아몬드는 2~3주면 충분하다. 당연히 가격도 엄청 싸서, 천연 다이아몬드의 10분의 1에서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랩그로운 다이아몬드가 유통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전문 브랜드가 속속 생겨나고, 관련 상품은 출시되자마자 순식간에 동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다이아몬드의 종말”이라고 칭하는 이도 있다. ‘보석의 황제’가 아니라 그냥 ‘예쁜 돌’이 됐다는 게다. 여하튼, 다이아몬드로 인해 배신의 아픔을 곱씹거나 극한의 노동에 내몰려 피눈물 흘리는 일이 없어진다면, 그 또한 괜찮은 종말이지 싶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
2023-09-1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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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연금 부촌 울산
국민연금 개혁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연금 고갈 시계는 빨라지는데 ‘재정 안정’과 ‘소득 보장’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으로 개혁은 한 발짝도 떼기 힘든 게 현실이다. 보건복지부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가 최근 더 내고 늦게 받는 개혁안을 내놓으며 논란에 불을 댕겼다. 현행 9%인 보험료율을 12~18%로 올리고 수급 개시 연령도 66~68세로 늦추되 소득대체율은 현행 40%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노후 소득 보장이라는 목표를 잃은 ‘연금 개악’이라는 반발이 터져 나온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런 와중에 국민연금공단이 10일 전국 시군구별 1인당 월평균 연금 수령액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전국 1위는 울산 동구로 1인당 88만 4532원이었다. 전국 평균(56만 3679원)보다 32만 원(57%) 이상 많은 수치다. 2위도 울산 북구(81만 9960원)였다. 부촌의 상징 서울 강남 3구를 4(강남구), 5(서초구), 8위(송파구)로 밀어냈다. 울산 남구와 중구도 6위와 9위를 기록해 상위 10위 지자체 중 울산이 4곳을 휩쓸었다. 17개 시도별 통계에서도 울산은 74만 5936원으로 1위였다. 세종, 서울, 경기, 인천이 뒤를 이었는데 부산은 55만 4107원으로 8위였다.
울산이 연금 부촌에 등극한 것은 월 37만 원에서 590만 원까지의 근로소득에 대해서만 보험료가 부과되고 가입 기간이 길수록 보장 수준이 높아지는 국민연금의 제도적 특성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국민연금은 가입자가 40년간 보험료를 납부했을 때 소득대체율 40%를 보장한다. 제조 대기업이 몰려 있는 울산에는 500만 원 이상의 월급을 받고 근속 기간이 긴 임금 근로자가 많다. 울산 동구에는 HD현대중공업, 북구에는 현대자동차가 있다. 이들 대부분이 20대 초반에 취업해 60세 정년을 채운다. 국민연금 수령액은 ‘중위 소득 장기 가입자’에게 유리한 구조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연금 부촌이라 한들 아직 한 달 수령액이 100만 원이 안 된다. 전국 평균 56만 원은 공무원연금 268만 원의 5분의 1 수준이다. 아직은 국민연금의 평균 가입 기간이 18.6년이고 소득대체율도 24.2%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데 노후 보장과는 거리가 멀다. 보건복지부는 재정계산위 개혁안을 토대로 국민연금 종합운용계획안을 10월 말까지 국회에 제출해야 하는데 소득대체율 상향 여부를 놓고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재정 안정과 소득 보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묘안은 없는 걸까.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2023-09-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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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창설 70년 해양경찰
우리나라 동·남·서해의 치안을 담당한 해양경찰. 부산에서 탄생한 해경이 올해 창설 70주년을 맞았다. 1953년 12월 23일 중구 중앙동에서 모태인 해양경찰대가 발족했다. 발대식 장소는 지금의 부산본부세관과 부산항만공사 사이 물양장이다. 해경은 내무부 치안국 소속으로, 해군이 넘겨준 낡은 181t 경비정 6척과 658명의 인력으로 출발했다. 당초 목적은 외국 어선 단속과 어자원 보호였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혼란기에 우리 해역을 침범한 일본 어선의 불법 어로가 성행해 어업자원보호법이 제정된 데 대한 후속 조치다.
해경은 1955년 상공부 아래에 각종 해양 업무를 위해 신설된 해무청에 편입돼 해양경비대로 명칭이 바뀐다. 1962년 해무청 폐지로 내무부에 복귀하며 해양경찰대 이름을 되찾았다. 1979년 10월엔 청사를 인천으로 옮겨 26년간의 부산 시대를 마감했다. 해경은 1991년 경찰법이 제정되면서 경찰청 소속 해양경찰청으로 격상한다. 이어 1996년 여러 부처에 흩어진 해양 업무를 통합한 해양수산부가 출범하자 해수부 산하 독립 외청으로 승격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해경은 5개 지방청, 20개 경찰서에다 인력 1만 4000명, 함정 363척, 헬기 등 항공기 25대를 보유한 거대 기관으로 성장했다. 2005년 수장인 해양경찰청장 직급이 차관급인 치안총감으로 올라 위상도 높아졌다. 업무는 해양 주권과 어자원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해양 수색·구조 등 안전관리, 선박 교통관제와 해상질서 유지, 바다 관련 범죄 예방·수사, 해양 오염 예방과 방제 등으로 광범위해졌다. 해경은 독도 경비처럼 해군이 군사적 충돌을 우려해 전면에 나서기 힘든 일까지 맡아 해양강국을 위한 역할과 기대가 날로 커지고 있다.
마침 9월 10일이 ‘해양경찰의 날’이라 해경 70년 역사의 의미를 더한다. 이날은 영해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거친 바다와 싸우는 해경의 노고를 격려하고 해양의 중요성을 알리려는 법정 기념일이다. 해경은 본래 경찰에서 독립한 1998년부터 해양경찰대가 생긴 12월 23일에 기념행사를 치렀다. 그러다가 2011년 실질적 해양 영토인 EEZ(배타적경제수역)가 발효된 9월 10일(1996년)로 바꿔 기념하고 있다. 국제 해양 문제와 바다의 가치에 대한 관심을 높여 국민과 함께하는 기념일로 만들 취지에서다. 그런 만큼 해경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게 있다. 그것은 해양경찰청이 2014년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의 부실 대응으로 해체된 뒤 2017년 부활한 뼈아픈 교훈이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
2023-09-10 [18:20]